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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의 거지 (15) 제왕(帝王)과 거지 (5)

주원장이 3년 동안 구걸하며 지냈던 거지 생활이 그의 사상에 미친 영향은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주원장은 근신 송렴(宋濂, 1310~1381)에게 말한바 있다.

 

“진시황(秦始皇), 한무제(漢武帝)는 신선을 좋아하고 방사를 좋아했다. 장생을 헛되이 바라다가 끝내 허사가 되었다. 그들이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면 나라가 어찌 다스리지 못할 바가 있겠는가? 내가 보기에 인군(人君)은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욕심을 줄여 백성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먹을 밥이 있고 입을 옷이 있어 백성이 행복하게 나날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신선이다.”

 

주원장은 빈한한 농민 출신일 뿐만 아니라 3년 동안이나 걸식으로 삶을 엮은 경험이 있어 자연스레 하층민 백성의 마음을 잘 이해하였다. 그래서 황제 보좌에 앉은 후에 여전히 ‘비교적 소박한 생활을 하였고 절약을 강구했으며 술을 즐기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본래 구걸하는 행각승이었던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에 같은 거지 출신인, 미친 도사 주전(周顚)을 중용하기도 했다. 주원장 본인이 편찬한 『주전소선전(周顚小仙傳)』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주전은 14세 때에 간질을 얻어 남창(南昌)에서 구걸하면서 살았다. 30여 세 때, 원 왕조 말기에 새로운 관리가 부임하면 면회를 신청하여 ‘태평을 아뢴다’(告太平)라는 말만 하였다. 주원장이 남창을 접수하자 주전은 또 실성한 듯 찾아가 ‘태평을 아뢴다’라고 하였다.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자 주원장이 화를 참지 못했다.

 

소주를 입에 부어도 취하지 않았다. 항아리에 담아 땔감으로 태운 후 죽었겠거니 하고 뚜껑을 열어 확인하여도 땀 몇 방울만 흘릴 뿐 멀쩡했다.

 

나중에 주전을 장산묘(蔣山廟)로 보내어 기식하도록 했다. 스님이 찾아와 주전이 사미승과 먹을 것을 다투다 화가나 보름 가까이 밥을 먹지 않고 있다고 일러바쳤다. 주원장이 직접 찾아가 연회를 베풀고 주전에게 식사하도록 했다. 그러고서는 빈방에 가두어 한 달 동안 먹을 것을 넣어주지 않았는데도 주전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멀쩡했다.

 

그 이야기가 전해지자 여러 장병이 앞 다퉈 주전을 초대하여 식사를 제공했는데 주전은 먹지 않았다. 억지로 먹이면 그대로 뱉어버릴 뿐이었다. 그저 주원장이 주는 밥만 먹었다. 주원장과 함께 있을 때에만 단정하고 예의를 차렸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주전이 진짜 신선이라 받아들였다.

 

주전이 주원장을 만나서는 “산동에는 어쩔 수 없이 성 하나를 세워야한다”라고 노래 불렀다.

 

손으로 땅에 지도를 그리고서는 주원장을 가리키며 “당신이 통〔桶, 통(統)과 해음(諧音)〕을 깼으니 통을 하나 만들어야 하오”라고 말했다.

 

주원장이 서쪽으로 구강(九江)을 정벌하러 떠나기 전에 주전에게 물었다.

 

“이번 출정은 가능한가?”

 

대답하였다.

 

“가능합니다!”

 

또 물었다.

 

“우량(友諒)1)이 이미 칭제했는데 그를 소멸시키기는 그리 쉽지 않겠지?”

 

주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위에는 그가 없습니다.”

 

안경에서 해군이 출발하려 했으나 바람이 일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얼마든지 행할 수 있고 얼마든지 바람을 부를 수 있습니다. 담력이 없어서 행하지 못하고 바람을 부르지 못할 따름입니다.”

 

과연 얼마 없어 큰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이니 곧바로 소고산(小孤山)까지 항해하였다.

 

10여 년 후에 주원장이 열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적각승(赤脚僧) 각현(覺顯)이 약을 보내오면서 천안존자(天眼尊者)와 주전 선인(仙人)이 보냈다고 말했다. 주원장이 그 약을 복용하니 당일에 완쾌하였다.

 

오함(吳唅)은 말했다.

 

“이상의 영험한 기적은 모두 주원장 자신이 말했고 서술하였다. 모든 말이 다 허튼 소리다. 한 마디도 들을 것이 없다.”

 

어쩌면 주원장이 자신과 같은 거지 출신의 주전이라는 미친 도사를 편해한 것은, 동병상련의 내재된 의식과 정감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한 명은 불문에 들어섰다가 거지가 되었던 인물이고 한 명은 구걸하는 미친 도사다. 한 명은 천하의 주인이 되었고 한 명은 빌붙어 존귀할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세상에는 기연이 존재한다. 천지는 크면서도 작지 않던가. 거지가 불교, 그리고 도교와 인연을 맺고 있지 않는가.

 

히틀러, 거지에서 나치의 우두머리가 되다

 

동방문명사상 주원장과 같은 거지 출신 황제가 출현했다면 서양에는 그런 유사한 경우가 없는가라고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존재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 나치의 원수, 전쟁광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그이다.

 

젊었을 때 히틀러는 모습이 고상하고 우아했지만 온갖 방법을 동원해 예술대학의 나체 모델을 훔쳐보기도 하였다. 그런 불량배 같은 악습은 젊었을 때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여 거지로 전락한 경험과 직접 관련이 있다.

 

현대 서양의 거지사회는 중국 근대 이후의 거지 집단과 마찬가지로 불량배 집단으로 변질되어 범죄의 근원이 되었다.

 

주원장은 집권 후 유랑하며 걸식하였던 거지 경험과 관련이 있는, 질투심이 강하고 잔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난 때문에 어려움에 처하여 방랑하는 과정에서 민심을 깊이 통찰하게 되면서 중국역사상 농민혁명의 우두머리에서 천자의 보좌에 앉아 명 왕조를 개국한 황제가 되었다.

 

역사상 여러 봉건 제왕과 비교하면 주원장은 탁월한 인물에 속한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어떤가? 독일의 원수라는 보좌에 앉은 후 나치 독재 통치를 실행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향하여 전쟁이란 구정물을 뿌린 살인광이 되었다.

 

둘을 비교해보면 장단점이 명확해진다. 교차문화비교를 통하여 거지 역사를 고찰해보면 분명 과학적 가치가 존재할 것이다.

 

1909년, 20세의 히틀러는 비엔나에서 국가예술대학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불합격하여 실업자, 거지로 전락하였다. 어쩔 수 없이 기차역에서 짐을 날라주거나 양탄자를 빨거나 쌓인 눈을 쓰는 등의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할 일을 찾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길거리에서 구걸하거나 무료급식소에서 구제 식품을 얻어와 배를 채웠다. 길에서 술에 취한 신사에게 구걸하다가 뺨을 맞은 적도 있었다. 저녁이 되면 공원이나 인가의 대문 옆에서 밤을 보냈다.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유태인이 만든 수용소에서 기숙하였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슬프고 애절한 시기’였다. 히틀러는 ‘자신과 맞서는’ 환경을 저주하였다. 자신을 그렇게 불행하게 만든 것에 책임을 져야하는 죄인을 찾아 나섰다. 나중에 ‘하늘을 날아오르는’ 날을 갈망하였다.

 

히틀러는 자서전 성격의 저작에서 그 경험을 회피하여 공사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 거짓말은 역사 사실을 덮어 감출 수 없다. 구걸하고 유랑하면서 실의에 빠진 나날을 보냈던 경험은 나중의 히틀러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자술하였다.

 

“나는 일마치고 남은 시간을 일분일초도 소홀이 하지 않고 모두 학습에 투입하였다. 그렇게 나는 짧은 몇 년 사이에 지식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계속해 나에게 이익을 주고 있다. 그 시기 나는 세상을 보는 인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세계관을 수립하였다. 지금 내 행동의 튼튼한 기초가 되었다. 젊었을 때 이룬 그 견실한 기초는, 사소한 보충 학습을 더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말해서 어떤 커다란 변동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시 거지의 삶이 히틀러 일생의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진우량(陳友諒, 1320~1363), 원명은 진구사(陳九四), 호북(湖北) 면양(沔陽) 사람으로 원(元) 왕조 말기 군웅 중 한 사람이다. 농민봉기의 수령으로 진한(陳漢)의 개국황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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