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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의 거지 (23) 아사(雅士, 바르고 깨끗한 선비)와 거지 (4)

관중(管仲), 배고파 구걸하니 밥을 무릎 꿇고 먹이다

 

춘추시대에 유명한 정치가, 『관자(管子)』의 작가라 알려진 관중(管仲)은 관경중(管敬仲)이라고도 불린다. 이름은 이오(夷吾)요, 영상(潁上) 사람이다. 포숙아(鮑叔牙)가 추천하자 제(齊) 환공(桓公)에게 경(卿)에 임용되어 ‘중부(仲父)’라 존칭되었다.

 

제나라에 관리로 있을 동안 관중은 정치, 군사, 경제 등 일련의 개혁정책을 펼쳤다. 국력을 크게 떨쳐 당시에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다. 제환공도 패주가 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혁혁한 공을 세운 사인도 일찍이 노(魯)나라에서 제나라에 의탁하러 가던 중에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기오(綺烏)의 관리에게 구걸하였다. 그 관리는 무릎을 꿇고 관중에게 밥을 건넸다. 기오의 관리는 눈치 보면서 조용히 물었다.

 

“만약 당신이 다행히 죽음을 면하여 제나라에서 중용된다면 내게 어떤 보답을 하려 하시오?”

 

관중이 답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현인을 뽑고 능력자를 임용할 것이오. 어떻게 당신에게 보답하여야 되겠소?”

 

기오의 관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 시대의 명사는 곤궁에 빠져 구걸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하여도 지조는 잃지 않았다. 그러니 나중에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고!

 

거지의 시조 오자서(伍子胥), 퉁소를 불며 구걸하러 다니다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가난 때문에 걸식하며 유랑하다 나중에 동산재기 한 사인이 있다. 여태껏 거지들이 조사(祖師)로 받드는 오자서(伍子胥)가 그이다.

 

『초사·구장·섭강(涉江)』에 “오자(伍子)가 재앙을 당했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왕일(王逸)이 주를 달았다.

 

“오자는 오자서(伍子胥)이다. 오왕 부차(夫差)의 신하가 되어 월(越)나라 정벌을 명하라 간언했으나 부차가 듣지 않자 끝내 왕이 선물한 칼로 자살하였다.”

 

이에 대하여 오대(五代) 때에 촉(蜀)나라 사람 두광정(杜光庭)은 『녹이기(錄異記)』 7권에서 더 기묘하게 기술하였다.

 

“오자서가 여러 차례 오왕에게 간언하였다. 왕의 명령을 거역하니 촉루검(屬鏤劍)을 내려 죽도록 하였다. 임종 전에 아들에게 절대 잊지 말라며 말했다. ‘내 머리를 남문에 걸어둬서 오나라를 정벌하러 오는 월나라 군대를 보게 하라. 물고기 껍질로 내 시체를 싸서 강에 던져두라. 나는 지금의 왕조가 저물어갈 때 파도를 타고 올라와 오나라가 패배하는 것을 보겠노라.’ 이로부터 해문산(海門山) 조수의 파구가 용솟음쳤다. 전단(錢塘)을 넘고 어장을 넘어서야 점차 줄어들었다. 온종일 계속되었다. 큰 소리를 내며 줄달음치고 번개가 번쩍이니 백여 리까지 들렸다. 오자서의 장례식에 썼던 마차가 보이자 조수의 파구에 표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이 전설은 민속신앙이 되었다. 오월(吳越) 지역을 넘어 양주(揚州), 안휘(安徽), 민광(閩廣, 복건과 광동, 광서 일대) 등지까지 퍼져나갔다. 당송(唐宋) 이래로 제왕들은 종종 오자서를 제후에 봉하거나 왕에 봉했다.

 

이 전설과 민속신앙은 오자서가 오나라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처참하게 생을 마감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거지들은 오자서를 조사(祖師)로 받들었다.

 

오자서는 성은 오(伍), 이름은 원(員)이요, 자서(子胥)는 호이다. 부친 오사(伍奢)는 초(楚)나라의 대부였다. 초평왕(平王) 7년(BC522)에 평왕은 오서와 가족 대부분을 죽여 버렸다. 다행히 횡액을 피한 오자서는 홀로 도망쳐 송(宋), 정(鄭) 등을 거쳐 오나라에 의탁하였다. 오나라의 힘을 빌려 복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소관(昭關)을 지날 때 초나라 병사의 단속이 심했다. 방도를 마련하고자 수심에 잠겼다가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 모습이 백발로 바뀌고서야 출관할 수 있었다. 도피 중에 산도 넘고 강도 건너며 온갖 고생을 하였다. 구걸하면서 배를 채웠다.

 

오나라 수도(소주)에 도착했을 때에는 무일푼이었다. 머리털이 헝클어졌으며 얼굴이 꾀죄죄하여 거지꼴이었다. 어쩔 수 없이 길거리에서 퉁소를 불며 구걸하였다.

 

퉁소를 불면서 걸식하다가 3일 만에 관상을 보는 피리(被離)에게 발견되었다. 퉁소 소리가 지극히 슬펐다. 관상도 비범하지 않았다. 공자 희광〔姬光 : 합려(闔閭)〕에게 추천하였다.

 

전하는 바는 이렇다 :

 

오왕이 오자서를 소견할 때에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본래 일반인이 아닌데 곤궁하다하여도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는가?”

 

오자서는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려 울며 하소연했다.

 

“우리 부친은 아무 죄도 없는데 평왕에게 형과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저는 대왕께서 이 복수를 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왕은 그러겠노라 대답하였다. 궁궐에 머물게 하여 3일 밤낮을 시국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오왕은 오자서가 비범한 지혜와 용기를 지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명령을 내렸다 : 오늘 이후로 상하 귀천과 노소를 막론하고 오자서에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왕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사형으로 죄를 묻겠다.

 

이렇게 힘을 얻은 오자서는 오나라에 충성을 다했고 부모형제를 죽인 초평왕에게 복수할 수 있었다.

 

민간에는 위와는 다른 전설도 전해져온다. 나중에 희광이 오왕이 되자 사람이 냉혹하고 이기적이며 각박하게 변했다. 가렴주구 하니 백성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희광이 오자서에게 고소성〔姑蘇城, 소주(蘇州)〕을 개축하라고 명했다. 오자서는 아무도 몰래 묘수를 남겨두었다. 성곽이 완성된 후 오자서는 조용히 부하에게 말했다.

 

“내가 죽고 국가가 기황에 시달리거든 성곽을 허물어라. 그러면 백성을 구할 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자서는 간신에게 모함당하여 죽임을 당했다. 월(越)나라는 그 틈을 이용해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얼마 없어 홍수에 가뭄이 겹쳐 백성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었다. 초근모피도 구할 수 없게 되자 굶어죽은 시체가 들을 덮었다. 그때 오자서의 부하가 오자서가 남긴 말을 떠올리고는 성곽을 허물었다. 땅을 3척 정도 파자 성곽 아래에 찹쌀로 만든 벽돌이 쌓여있었다. 사람들은 ‘벽돌’ 몇 개씩을 들고 가서 밥을 지어 허기를 달랬다. 그렇게 현지 백성들은 흉년을 견딜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예전에 소주에서 구걸하며 지냈던 오자서가 소주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 하였다.

 

나중에 소주 일대의 거지들이 오자서의 상을 세우고 공양하면서 조사(祖師)로 모셨다. 그렇게 오자서는 죽은 후 민간신앙으로 재탄생하여 한 몸에 두 가지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하나는 조신(潮神)이요 다른 하나는 거지 조사다.

 

강에도 머물고 육지에도 머무니 얼마나 일이 많을까. 중국민간신앙 중 이런 현상은 그리 많지 않다. 중국 백성이 오자서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하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오자서가 퉁소를 불며 길거리에서 구걸했다는 이야기는 역사서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다. 필기, 전기, 돈황 변문, 소설, 평서, 희곡에도 선별된 제재로 수록돼 있다. 널리 퍼져있고 영향력도 심대하다. 민간신앙 중에 물의 신도 되고 땅의 신도 됐다는 오자서의 현상이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닐 정도로 넓고도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

 

민속심리 중 사람들은 결국은, 자신이 좋아하고 존중하는 현상이 완벽하면서도 보통을 초월할 만능의 힘을 가지고 있기를, 바라지 않던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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