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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고병수의 '영화와 만난 의학'(33) 치유를 위해 증상을 드러내고 겨뤄야 ... '데몰리션'

지난번에 본 ‘남편이 우울증에 걸렸어요’가 전형적인 우울증 이야기라면 이번에 소개하는 영화는 우을증의 좀 독특한 증상을 다룬다.

 

부인을 잃은 상실감으로 우울증에 빠지고 괴이한 행동을 보여주는 ‘데몰리션(Demolition, 2015)’은 또 다른 느낌이다.

 

투자 분석가로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데이비스 C. 미첼(제이크 질렌할)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자신은 무사했지만 부인 줄리아(헤더 린드)는 사망하고 만다. 부인이 죽었다는 통보를 받은 병원에서 자동판매기가 고장으로 돈만 먹고 초콜릿이 안 나오자 항의를 해야 한다고 다짐을 한다. 부인의 장례식 날에는 차분해지든지, 부인을 회상하든지 해야 하는데, 자동판매기 회사에 항의 편지를 써서 부친다. 이러는 자기도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왜 슬프지 않지?

 

해체하고 분해하려는 주인공의 심리

 

장례식 다음 날에는 휴식도 갖지 않고 여느 때와 같이 5시 30분에 일어나 기차를 타고 출근해서 직원들이 놀란다. 사무실 컴퓨터도 분해해서 부품별로 가지런히 놔두는 것도 모자라 회사 화장실의 칸막이들을 전부 해체해버린다. 집에서는 고장난 냉장고는 도대체 뭐가 문제가 있는지 알아내겠다고 분해해버리고, 카푸치노 기계도 분해하고..... 길을 가다가 보게 된 철거업체를 보고는 자기가 집을 해체하게 해달라고 돈까지 주며 부탁하고는 해머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 열심히 부순다. 수년 동안 출퇴근 기차에서 만났으나 한 번도 얘기해보지 않은 남성에게 “난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아내가 죽었지만 괴롭거나 속상하지도 않아요.” 소리 지르며 엉뚱하게 갑자기 기차를 급정거시키는 레버를 당긴다. 이상한 행동은 계속 일어난다. 사람들의 가방 안이 궁금해지기도 하고, 군인의 총을 빼앗아서 나라를 지키는 영웅이 되는 상상도 하고.....

 

데이비스는 장인이 설립한 투자회사의 직원이고, 설립자의 딸이 죽은 부인 줄리아이다. 10년 넘게 아침 일찍 출근하고, 일에만 몰두해서 회사에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부인과는 그다지 살갑게 지내지 못했다. 아침에 버릇처럼 일어나서도, 퇴근해서 집에 돌아와서도 집은 텅 비어있고, 곳곳에서 죽은 줄리아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조금씩 부인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럴 때마다 살면서 줄리아에게 냉랭했던 자신이 싫어서 미칠 지경이다.

 

그러다가 자동판매기 회사 고객센터에서 일하는 캐런(나오미 왓츠)과 그의 아들 크리스(쥬다 루이스)를 알게 된다. 크리스가 준 음악 테이프를 들으며 거리를 가면서도, 전철을 타서도 흥얼거리고 춤을 추고 다닌다. 심지어는 장비를 가지고 와서 자기 집을 부수면서 완전히 해체해버린다. 그러다가 부인의 서랍에서 1년 전 임신했을 때 진료 기록과 초음파 사진을 발견하는데.....

 

상실감이 만들어낸 방어기제

 

‘데몰리션’은 갑자기 부인을 잃은 상실감을 다루면서 그것이 어떻게 해결되는가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정신의학에서 ‘상실(Loss)’은 ‘갈등(Conflict)’과 함께 여러 정신장애를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다. 일에 몰두해서 지냈던 데이비스는 줄리아가 사고로 죽자 계속해서 괴이한 행동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급작스런 배우자의 상실로 인한 일시 정신분열 현상인지, 아니면 우울증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가면 우울을 보이는 건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앞에서 본 ‘남편이 우울증에 걸렸어요’와 다르게 이 영화는 상당히 어려운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래, 데이비스는 부인이 갑자기 죽어서 상실감이 크겠지, 그래서 뭔가 부수고 싶고 해체하고 싶겠지, 이렇게 단순하게 보면 어렵지 않으나 그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것과 아주 다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렵지만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정신분석 방법을 조금 이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그의 증상부터 아무 선입견 없이 나열해봐야 한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울적하고, 의욕이 없고, 잠도 못 자면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데이비스는 다른 모양으로 증상이 드러난다. 고장난 자동판매기에 화남, 부인의 장례식 날에 애도의 시간을 가져도 모자랄 판에 그 회사에 장문의 편지를 씀(그것도 자기 부인이 죽었다는 것을 써넣으면서), 집안의 집기며 회사의 컴퓨터며 다 해체함, 결국 자기 집까지 산산이 부숴버림.

 

그렇다면 그의 상황은 어떤가? 열심히 일만 하면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다, 그러기까지 그는 집보다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결혼 10년차였어도 부인과는 점점 소통하는 시간이 없었다. 부인을 잃은 상실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두려움, 잘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그의 무의식(정신분석에서는 이것을 이드[Id]라고 함)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탈출구를 찾는다.

 

평소에 정답게 잘 지냈으면 상실감은 곧 우울감과 무기력 같은 것으로 나타났겠지만, 데이비스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함으로써 파괴성으로 돌출된 것이다. 우울증 상태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울감, 불면 등의 증상들 외에 강박증이나 폭력성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자동판매기가 고장났으면 이유가 있어야 하고, 카푸치노 기계든, 컴퓨터든, 화장실이든 바로 잡아야 한다.

 

더욱이 자기 부인이 죽어버린 이 집은 문제투성이니까 완전히 해체해버려야 해, 이런 방어기제가 작동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사건건 이유를 따지고, 부수고, 해체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랬을 때만 자신은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제목 ‘데몰리션(Demolition)’이 바로 ‘파괴, 해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의식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 문제가 완전히 풀리는 것은 아니다. 파괴적으로 방황하는 처지와 다르게 조금씩 문제 해결의 열쇠도 주어진다. 처음에는 자동판매기 회사에 긴 항의성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처지와 부인의 사망을 언급하고, 그러한 이유로 많이 화가 나기도 했다고 쓴다. 그것은 자기의 문제를 객관화하는 첫 단계로서 자기도 모르게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는 자신을 지지하고 새로운 길로 이끌어 줄 조력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밤중에 데이비스에게 공감한다던 전화를 건 고객센터 직원 캐런과 문제 많은 아들 크리스가 바로 그들이다. 캐런은 소통의 중요성을 알게 해주고, 격이 없는 대화를 나눈다. 크리스와는 데면데면했다가 친해지면서 속 얘기들을 하게 된다. 마지막에는 큰 건물을 폭파로 해체하는 모습을 보라고 문자까지 보낸다. 데이비스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증상의 발현을 드러내고, 문제 해결을 위해 병적인 자아와 건강한 자아가 공존하면서 겨루다가 결국 치유가 되는 이야기. 이 영화는 그래서 완결성이 높고 정신의학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만들어진 느낌이 든다. 모르고 보면 편하지만, 알고 보면 어려워도 깊이 빠지게 된다. 참 잘 만든 영화이다. 영화에서 데이비스는 관계가 나빠진 장인에게 울먹이며 말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어요. 내가 좀 무심했을 뿐.....”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고병수는?
= 제주제일고를 나와 서울로 상경, 돈벌이를 하다 다시 대학진학의 꿈을 키우고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다. 의대를 나와 세브란스병원에서 가정의학 전공의 과정을 마쳤다. 세브란스병원 연구강사를 거쳐 서울 구로동에서 개원, 7년여 진료실을 꾸리며 홀로 사는 노인들을 찾아 다니며 도왔다. 2008년 고향 제주에 안착, 지금껏 탑동365의원 진료실을 지키고 있다. 열린의사회 일원으로 캄보디아와 필리핀, 스리랑카 등 오지를 찾아 의료봉사도 한다. '온국민 주치의제도'와 '주치의제도 바로 알기' 책을 펴냈다. 한국일차보건의료학회(KAPHC) 회장, 한국장애인보건의료협회(KAHCPD) 부회장,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장 등을 맡아 보건의료 선진화 방안과 우리나라의 1차 의료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보건정책 전문가다. 2020년 4.15 총선에 정의당 후보로 나와 제주갑 선거구에서 분루를 삼켰지만 총선 직후 곧바로 코로나19 감염이 창궐하던 대구행 의료자원봉사에 나서 숱한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정의당 제주도당위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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