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초반에 케네디 대통령의 사진이 벽에 걸려있는 것으로 봐서 영화는 베트남 전쟁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저격당하던 시점인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 같다.
이 영화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와 비슷한 시기와 비슷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이야기가 정신병원 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수용되어져 있는 사람들에 대한 몰이해와 반인권.....
여기에서는 ‘하이드로테라피 치료(수치료)’라는 요법도 시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을 발가벗기고, 6~8시간 동안 얼음 욕조에 가두는 무자비한 시술로, 쉽게 말하면 정신 차리게 하는 방법이다. ‘처음 만나는 자유(Girl, Interrupted, 1999)’ 영화의 이야기이다.
붙들려오게 된 정신병원
작가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던 18살 수잔나 케이슨(위노나 라이더)은 학교에서나, 밖에서나 이해 못할 행동들을 해서 어른들을 힘들게 한다. 보드카 한 병에 아스피린 한 통을 탈탈 털어먹고 나서 잠들었는데, 자살을 하려 했다고 클레이무어라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우울증과 자살 시도로 들어왔지만, 의사와 상담하면서는 ‘경계성 인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라는 진단을 받는다.
일상생활에서 개인의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감정이나 행동 경향을 통해 특징지어지는 것을 ‘인격’이라고 한다면, ‘인격장애’란 반대로 불안정하고 예측하기 힘든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이 범주에는 조현병이나 우울증, 강박증 비슷한 상태이면서 그것들보다는 약하게 표현되는 인격장애들과 경계성 인격장애, 반사회적 인격장애, 의존성 인격장애 등이 있다.
그 중 수잔나가에게 내려진 경계성 인격장애는 정서나 행동, 대인 관계가 불안정하고 변동이 심한 상태로, 경계(境界, borderline)에 서 있듯이 위태위태한 인격을 가진다. 수잔나의 돌출 행동, 주위를 의식하지 않는 것, 자주 불안해하고 공허함이나 우울감에 빠지는 등 하는 행동들을 보면 경계성 인격장애인 게 맞아 보인다.
병원 안에는 반복해서 자살을 시도한 친구, 스스로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힌 친구, 신경성 식욕부진증 친구 등 다양하게 있지만 그 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사람은 리사(안젤리나 졸리)이다. 첫 만남부터 상대방의 기분을 긁어놓는 리사는 사고뭉치에, 양극성 장애(조울증)가 심하고, 자주 도망을 쳐서 이 병원에서는 가장 요주의 인물이다. 둘은 친해지게 되지만, 리사가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하고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 주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게 마음에 걸린다.
결국 그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인해 퇴원했던 친구가 자살을 해버리고, 리사는 죽은 친구의 주머니에서 돈을 훔쳐 달아나버린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리사의 모습에서 수잔나는 충격을 받고는 스스로 병원으로 돌아온다. 마음을 차분하게 하면서 보고 듣는 것이나 자신의 생각들을 글로 적어보니 조금씩 뿌옇게 앞을 가리고 있던 게 걷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의사와 상담을 받을 때 이전과는 다르게 마음이 편안하다.
경계에서 회복으로
이 영화는 수잔나 케이슨이 실제 입원하고 투병 생활을 했던 경험을 소재로 쓴 소설이 원작이다. 초창기 어린 얼굴의 안젤리나 졸리, 간호사로 나온 우피 골드버그를 보는 반가움도 컸던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 우리는 제목으로부터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밖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들어와서 만난 친구들로부터 자유로움을 느끼게 돼서 처음 만나는 자유일 수도 있고, 아니면 수잔나가 퇴원을 하면서 이전에 갖지 못했던 맑은 정신으로 세상을 보게 되어 그럴 수도 있다. 퇴원하는 그의 진료기록에는 ‘경계회복’이라고 적혀 있다.
영화에서처럼 많은 정신질환의 치료에는 약물도 있지만, 자기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는 과정이 중요하다. 수잔나처럼 이것저것 글로 적어나가면서 생각을 객관화하는 것, 의사와 상담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자유롭게 얘기하는 것들은 좋은 치료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친구가 죽은 후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방만하게 행동하는 리사에게 던졌던 너는 자유롭지 않아. 넌 이곳이 필요해. 그래야 살아있다는 느낌을 얻을 수 있거든”이라는 말도 현실을 인식했다는 뜻이다.
인류 역사에서 없었던 적이 없는 조현병과 같은 정신질환들은 인간의 영혼을 사이에 두고 신과 악마가 다투고 있는 상태, 혹은 귀신 들린 상태라고 믿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마녀 사냥으로 죽임을 당하거나 죽을 때까지 강금되었다.
1600년대 네덜란드의 요한 와이어(Johann Weyer, 1515~1588) 등은 정신질환자들은 마녀가 아니라 정신병자임을 주장하였다. 그 말은 수 천 년간 희생되어 온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놀랍고도 새로운 시각이었고, 훗날 그들의 업적을 기려 ‘정신의학의 제1차 혁명’이라고 부르게 된다.
프랑스혁명,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많은 정신의학자들은 정신질환자들에게 인도주의적 처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중에서 프랑스의 필리프 피넬(Philippe Pinel, 1745~1826)은 수용되어있는 환자들이 족쇄에 묶여 있는 것을 보고 모두 풀어버린 후 생활환경도 개선하도록 했다. 이러한 노력을 ‘정신의학의 제2차혁명’이라고 한다. 1900년대 들어서면서 신경생리학의 발달과 그에 따른 신약들이 계속 나오면서 ‘정신의학의 제3차혁명’ 시기가 열린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고병수는?
= 제주제일고를 나와 서울로 상경, 돈벌이를 하다 다시 대학진학의 꿈을 키우고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다. 의대를 나와 세브란스병원에서 가정의학 전공의 과정을 마쳤다. 세브란스병원 연구강사를 거쳐 서울 구로동에서 개원, 7년여 진료실을 꾸리며 홀로 사는 노인들을 찾아 다니며 도왔다. 2008년 고향 제주에 안착, 지금껏 탑동365의원 진료실을 지키고 있다. 열린의사회 일원으로 캄보디아와 필리핀, 스리랑카 등 오지를 찾아 의료봉사도 한다. '온국민 주치의제도'와 '주치의제도 바로 알기' 책을 펴냈다. 한국일차보건의료학회(KAPHC) 회장, 한국장애인보건의료협회(KAHCPD) 부회장,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장 등을 맡아 보건의료 선진화 방안과 우리나라의 1차 의료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보건정책 전문가다. 2020년 4.15 총선에 정의당 후보로 나와 제주갑 선거구에서 분루를 삼켰지만 총선 직후 곧바로 코로나19 감염이 창궐하던 대구행 의료자원봉사에 나서 숱한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정의당 제주도당위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