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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고병수의 '영화와 만난 의학'(29) 다른 인격이 각자를 말한다 ... '이브의 세 얼굴'

4, 50대 장년들에게는 어릴적 전설의 만화영화가 있다. 바로 일본 만화영화 ‘마징가 Z’이다. 악전고투 속에서도 악의 무리와 싸워 항상 이기면서 세계평화를 지킨다는, 동심을 감동시켰던 영화.

 

하지만 이런 영화에는 반드시 상대방인 악당이 있어야 하는데 그가 바로 아수라 백작이다. 한 얼굴에 두 모습을 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를 내고 성격도 다르다. 실제하지 않는 인격이지만 1970년대 당시에 이런 설정을 했다는 게 놀랍다.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1957년 제작한 이브의 세 얼굴(The Three Faces of Eve)이다. 관련 영화로 아직까지 여기에 견줄 작품이 없을 정도로 내용을 잘 살렸고, 1인 다역을 해낸 주인공의 연기 또한 훌륭했다. 영화는 미국 남동부 조지아주에 사는 한 가정주부 이야기를 각색했다.

 

평소와 다른 인격의 아내

 

1951년 어느 날, 정신의학과 외래 진료실에 한 부부가 찾아온다. 남편 말에 의하면 부인이 요즘 부쩍 사치가 늘고, 비싼 구두나 의상을 사지만 정작 본인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뗀다는 것이다. 이브 화이트(조앤 우드워드)라는 이름의 부인은 차분하고 순종적인 전업주부이다. 의사가 몇 가지 질문을 할 때 화이트 부인은 평소에는 괜찮다가 두통이 심하면서 갑자기 발작(기억상실을 발작이라고 말함)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억이 돌아왔을 때는 변한 상황을 전혀 기억할 수가 없다고 한다.

 

진료를 담당한 커티스 루터 박사(리 J. 콥)는 처음에는 거짓말을 한다고 짐작했지만 몇 번 상담하면서 그의 상태가 정말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그가 있는 상태에서 원래 얌전했던 부인에서 갑자기 새로운 인격으로 바뀌며 쾌활하고 은근히 유혹하려 하는 여인이 되어 버렸다. 이름을 물으니 이브 블랙이라고 한다. 그 이름은 화이트 부인의 결혼 전 이름이다. 이브 블랙은 원래의 이브 화이트를 경멸하였고, 바보 같은 남편과 빨리 헤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루터 박사는 당황하면서 옆 진료실 동료 의사를 불러서 함께 지켜보지만 방법이 따로 없었다.

 

그 당시나 요즘에도 아주 드문 사례여서 루터 박사는 책으로만 보았고, 직접 진료하며 치료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어린아이로 바뀌면서 4살난 자신의 딸과 어울리면서 놀기도 한다. 한 사람에게 세 명의 인격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루터 박사는 정신의학과 학회에 사례 보고도 하며 부인을 성심껏 상담을 진행하였고, 약간의 약물 치료로 좋아지는 듯해서 퇴원을 시킨다.

 

세 명의 인격이 들어있는 여인

 

일시적인 건망증과 달리 아예 어떤 부분의 기억이 없는 현상을 ‘해리장애(Dissociative disorders)’라고 부른다. 정신장애의 하나로서 어떤 기억이나 자기 정체성, 환경 등에서 혼란이 오는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을 하면서 치료가 잘 되는 것부터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여 치료가 안 되는 부분까지 몇 가지 분류로 나뉜다. 이브 화이트 부인이 겪는 상황은 해리장애 중에서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에 해당하며, ‘다중인격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라고도 한다.

 

한 사람 안에 동시에 둘 이상의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있고, 그 사람들은 성 정체성이나 이름, 경험들이 각기 다르고, 서로 경쟁하기도 하면서 갈등 관계에 있을 때도 있다. 이브 화이트란 원래의 인격체에 이브 블랙이라는 인격과 아이와 같은 인격이 공존하는 것처럼. 다른 인격체로의 변화는 급격히 이루어지고, 그들은 다른 인격체일 때를 기억하기도 한다. 루터 박사는 원래의 이브 화이트 부인에서 이브 블랙으로 번갈아 불러내면서 그들의 생각을 묻기도 한다.

 

화이트 부인은 집으로 돌아가서 잘 지내는가 싶었지만, 이듬해쯤 다시 증상이 심해졌다. 딸의 목을 졸라서 죽이려고 한다든지, 야한 옷을 입고 근처 클럽에서 술 마시며 밤새 즐기다가 집으로 돌아온다든지 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남편의 폭력도 늘어난다. 결국 남편은 의사도 못 믿어서 치료를 중단하고 부인과 이혼하고는 딸을 데리고 다른 데로 가버린다. 망연자실해서 화이트 부인은 다시 루터 박사를 찾아가지만, 이번에는 우아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제인이라는 여인이 들어서 있다.

 

루터 박사는 다시 화이트 부인의 인격체일 때 여러 질문을 하고, 부인은 어려서 살던 집으로 갔던 이야기를 꺼낸다. 그는 어릴 때 놀던 옛집 마루 밑 공간에서 주변에 꽃이 없는데 어디에선가 익숙한 꽃향기를 맡게 되었다고 했다. 박사는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하며 최면요법으로 부인을 재워 어린 시절을 하나하나 더듬기 시작한다. 부인은 6살 때로 돌아가서 안 좋은 기억 하나를 되살리며 힘들어하는데, 어머니가 마루 밑에서 놀던 자기를 데려가서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억지로 작별 키스를 시킨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키스한다는 게 너무 무서웠던 어린 이브.

 

영화는 이브 화이트에게서 다른 인격들이 떠나고, 이해심 많고 멋진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이브의 세 얼굴’은 그 부인이 실제 조지아 의과대학에 입원하고 치료했던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서인지 병에 대한 상황 묘사가 잘 되어 있다. 이브 블랙은 화이트 부인이 어려서부터 살고 싶었던 억압된 기억일 수도 있고, 현재 삶이 힘들고 남편이 폭력에서 방어기제로 나타난 모습일 수도 있다. 아니면 어렸을 적 죽은 할머니에게 키스했던 무서운 기억으로 인해 억압이라는 기제로 나타난 인격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처럼 해리성 정체감 장애 환자의 특징을 알면 치료자는 한 사람을 두고 그 안에 있는 여러 인격들과 집단 치료를 시행하기도 한다. 그 안에 있는 다양한 인격들을 하나하나 나오게 하여 그들 사이의 갈등과 힘의 기울기를 파악하면서 문제 해결을 시도해본다. 또 영화에서는 오늘날에도 중요하게 사용하는 최면요법이나 자유연상, 지지요법 등이 등장한다. 결국 이브 블랙이 지배 인격으로 다른 인격들을 조종하려고 하지만 루터 박사는 그를 살살 달래면서 빠져나가게 도왔던 것이다.

 

이브의 세 얼굴처럼 몇몇의 인격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아주 드물게 아주 많은 인격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 ‘23 아이덴티티(Split, 2016)’은 스릴러 영화이면서 반전을 기가 막히게 만들어내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만들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으로는 ‘식스 센스(The Sixth Sense, 1999)에서부터 최근의 ‘올드(Old, 2021)’까지 예상할 수 없는 작품들을 연이어 내놓았다. 이 영화는 ‘이브의 세 얼굴’처럼 전혀 다른 인격이 한 사람 속에 있어서 전개되는 영화이다. 문제는 한, 두 명이 아니라 무려 23명이라는 거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대게 우월한 위치에 있으면서 조종하려는 누군가 있기 마련이다. 두 영화에서도 다른 인격체들은 모두 이를 두려워한다. ‘23 아이덴티티’는 실제로 있었던 미국의 흉악범을 소재로 만들었다는데, 정신감정과 뇌파검사 등으로 24개의 존재를 모두 확인하고 결국 무죄로 풀려났다는 사건이다. 영화에서는 23개의 인격만 플래처 박사와 상담을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24번째가 있다고 한다. 그가 깨어나면 무시무시한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고병수는?
= 제주제일고를 나와 서울로 상경, 돈벌이를 하다 다시 대학진학의 꿈을 키우고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다. 의대를 나와 세브란스병원에서 가정의학 전공의 과정을 마쳤다. 세브란스병원 연구강사를 거쳐 서울 구로동에서 개원, 7년여 진료실을 꾸리며 홀로 사는 노인들을 찾아 다니며 도왔다. 2008년 고향 제주에 안착, 지금껏 탑동365의원 진료실을 지키고 있다. 열린의사회 일원으로 캄보디아와 필리핀, 스리랑카 등 오지를 찾아 의료봉사도 한다. '온국민 주치의제도'와 '주치의제도 바로 알기' 책을 펴냈다. 한국일차보건의료학회(KAPHC) 회장, 한국장애인보건의료협회(KAHCPD) 부회장,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장 등을 맡아 보건의료 선진화 방안과 우리나라의 1차 의료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보건정책 전문가다. 2020년 4.15 총선에 정의당 후보로 나와 제주갑 선거구에서 분루를 삼켰지만 총선 직후 곧바로 코로나19 감염이 창궐하던 대구행 의료자원봉사에 나서 숱한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정의당 제주도당위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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