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 2일 구좌읍 중산간에 있는 ‘다랑쉬굴’ 4‧3 희생자 유해 11구 발견 사실이 언론에 의해 발표되었다. 44년 전 참혹하게 몰살당한 모습 그대로라는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큰 충격을 주었다. 정밀조사 결과 이들은 초토화의 광풍이 몰아치던 1948년 12월 18일 당시 9연대에 의해 학살된 희생자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4‧3 학살의 잔혹성을 온 몸으로 보여준 이 유해들은 햇빛 속으로 나오자마자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에 의해 허겁지겁 화장이 된 후 바다에 뿌려졌다. 당시 공안당국은 그것을 ‘흔적 지우는 일’이라고 쾌재를 불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유해 처리가 오히려 이 사건의 생명력을 더욱 북돋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랑쉬굴 참상은 지워진 것이 아니고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 지난 역사가 그걸 말해주고 있다.
다랑쉬굴 사건은 결과적으로 4‧3의 총체적 모순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고 말았다. 피난 입산 →
참혹한 죽음 → 은폐된 시신 → 발굴 후의 논란 → 수장과 봉쇄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4‧3이 안고 있는 발굴 당시의 모순을 응축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번 회부터 2회에 걸쳐 다랑쉬굴 참상 취재기를 엮는다. 40여 년 동안 캄캄한 동굴에 갇혔던 그들은 과연 누구였으며, 왜 거기에 누워 있었는지, 어떻게 발견되고, 왜 또 다시 화장되어 수장됐는지, 그리고 어떻게 부활됐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4‧3연구소가 발견, 4‧3취재반과 합동조사
1992년 3월 말 제주4‧3연구소 고창훈 소장(제주대 교수)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고 교수는 “일주일 전 연구소 조사팀이 현장조사를 벌이던 중에 자연동굴 안에서 4‧3 희생자로 보이는 유해 11구를 발견했다.”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즉각 연구소와 제민일보 4‧3취재반이 합동 조사해 진상을 확인해보자고 제의했다.
나중에 알려진 이야기지만, 다랑쉬굴의 참상 현장은 그로부터 100여 일 전인 1991년 12월 22일 김기삼‧김동만‧김은희 등 다섯 명으로 구성된 연구소 증언조사팀이 처음 찾아냈다고 한다. 1992년 3월 22일 연구소 차원에서 현장을 재확인하고 대책을 논의하던 끝에 제민일보 4‧3취재반과의 공조문제가 거론됐다는 것이다.
그 때만 해도 사회분위기는 녹록지 않았다. 노태우 정권은 1990년 1월 전격적으로 단행된 민정‧통일민주‧신민주공화당 3당의 합당으로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221석을 차지하는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킨 후, 공안정국으로 회귀했다.
4‧3 쪽에도 칼바람이 불었다. 1988년 3월에 4‧3자료집 『제주민중항쟁』이 출판됐는데도, 그 책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김명식 시인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이적표현물 제작)로 뒤늦게 구속한 것은 1990년 7월의 일이었다.
1991년 4월 3일 경찰은 관덕정에서 4‧3추모제를 지내겠다는 시민과 대학생들에게조차 최루탄을 쏘고 강력하게 진압했다. 강제 연행된 시민‧대학생만 400명에 이르렀다.
당시 4‧3유족회가 있었지만 ‘공산폭동론’을 주장하는 반공 유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 시국이었기에 4‧3연구소 쪽에서도 사후 대책을 논의하다가 4‧3취재반과의 공조방안이 나왔던 것 같다.
3월 29일 다랑쉬굴에 대한 연구소와 취재반의 합동조사가 실시되었다. 연구소 측에서는 고창훈‧김기삼‧김동만 등 3명이, 4‧3취재반 측에서는 취재반 소속 기자 6명 전원(양조훈‧서재철‧고홍철‧고대경‧김종민‧강홍균)이 참여했다.
손전등 비추자 눈앞에 백골들이 나타나다
한편, 나는 이때 종달리 채정옥 선생을 모셔오도록 했다. 국민학교 교사 출신인 그가 4‧3 당시 무장대에게 납치되어서 다랑쉬오름 주변에서 생활했다는 취재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취재반 김종민 기자가 4년 여 전인 1988년 채정옥 선생의 증언을 채록‧정리한 노트에는 다랑쉬오름 주변 굴에서 토벌 당했던 사건의 발생날짜와 희생자들에 대한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만일 채정옥 선생이 증언했던 ‘그 굴’이 연구소가 발견한 ‘다랑쉬굴’과 동일한 굴로 밝혀진다면, 그는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데 결정적 인물이기에 흥분과 긴장감이 교차했다.
다랑쉬오름 동쪽 해발 170m 지점에 위치한 다랑쉬굴은 잡초들이 무성한 들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굴의 입구는 수직형으로 직경이 60㎝ 안팎이어서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았다. 풀숲에 묻혀 있어 눈여겨보지 않으면 쉽게 찾을 수 없는 굴이었다.
합동조사반은 한 사람씩 조심스럽게 굴속으로 내려갔다. 좁은 입구를 3m 가량 내려가자 굴은 금방 넓어졌다. 손전등을 비추자 바로 눈앞에 백골들이 나타났다. 숨이 턱 막혀왔다. 10평 남짓한 천연동굴 바닥에 10구의 시신들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어떤 시신은 허리띠를 걸친 채 그대로 살이 썩어서 백골로 남아 있었다. 어떤 시신 발 밑에는 여자 고무신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 비녀가 꽂혀 있는 시신도 있었다. 여자 희생자도 여럿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시신 주변에서 플라스틱제 둥근 안경, 흰색 단추, 버클, 썩다 남은 옷가지 등이 발견되었다.
시신이 있는 쪽에서 북쪽으로 다시 좁은 통로가 보였다. 폭이 좁고 높이가 1.2m 정도여서 기어갈 수밖에 없었다. 8m 가량 기어가다보니 다시 넓은 방모양의 공간이 나타났다. 일행은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생활용품이 한 눈에 들어왔다.
부엌인 듯 무쇠솥 2개가 받침돌 위에 가지런히 올려 있었고, 그 주변에 된장 같은 물질이 담긴 항아리를 비롯해 질그릇, 놋그릇, 놋수저, 물허벅, 접시, 가위, 석쇠 등이 보였다. 요강도 있었다. 이곳에서 시신 1구가 더 발견되었다. 그 주변에 대검과 철창이 하나씩 있었지만 총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어떻게 이 굴을? 내가 정리한 시신들이 맞네요”
놀라운 현장이 속속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동행한 채정옥 선생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 현장을 확인한 채 선생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이 굴을 발견했나요? 이 굴이 맞습니다. 그리고 저 시신들은 내가 정리한 시신들이 맞네요.”
합동조사반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현장 증언자가 바로 옆에 있다니. 채정옥 선생은 4년 전 취재반에게 알려줬던 내용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증언했다.
“사건이 나던 날은 1948년 12월 18일로 생생히 기억나요. 나도 희생자들과 함께 다랑쉬굴에서 같이 살았지요. 토벌대가 덮쳤을 때 나는 마침 다른 굴에 가 있었기에 참변을 모면했고요.
사건 발생 다음날 일행 2명과 함께 다랑쉬굴에 와보니 입구에 불을 피웠던 흔적들이 있었고, 굴속에는 그때까지 연기가 가득했어요. 연기에 질식된 희생자들은 고통을 참지 못한 듯 돌 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숨져 있었고 눈, 코, 귀에서 피가 나있는 등 참혹한 모습이었지요.”
그는 일행들과 함께 시신들을 나란히 눕혔다고 한다. 희생자들은 구좌면 종달리와 하도리 사람들이었다. 눕힌 순서대로 이름을 적었는데, 그 쪽지를 피신 다니다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하산하여 당국의 조사를 받은 후 선무공작대에서 일을 했고, 6‧25가 터지자 육군으로 출정했다.
“유족들에게 알렸어야 했던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당시 상황이 시신을 수습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6‧25 참전 등으로 경황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몇 년이 지난 후 혼자서 굴을 찾아 나섰지만 이번에는 굴 입구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40여 년 동안 유족들에게 말도 못하고 가슴에 묻어왔다고 했다. 우리는 희생자와 유족에게 미안해하는 그를 달래며 희생자의 신원을 정확히 파악해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 언론에만 알렸다가 역풍 맞기도
합동조사 결과, 우리는 이 다랑쉬굴이 4‧3의 참혹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현장임을 인식하게 되었고,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신문인 제민일보의 보도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중앙지와 방송에까지 알려 함께 보도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 때 굴 이름을 어떻게 부를 것이냐는 내부 논의가 있었다. 지역 주민들은 이 지역을 속칭 ‘선수머세’라고 불렀다. 그러니 ‘선수머세굴’이라고 지칭해야 하지만, 인근에 ‘다랑쉬오름’과 4‧3 때 폐촌된 ‘다랑쉬마을’이 있다기에 ‘다랑쉬굴’로 부르기로 정리했다.
그래서 사흘 뒤인 4월 1일 동아일보, 한겨레신문, 제주MBC 취재진까지 참여한 2차 합동조사가 실시됐다. 나는 아직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이 있다. 언론사를 특정하지 말고 모든 언론에 공개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미련 때문이다. 이 때 언론사를 특정함으로써 제외된 언론으로부터의 역풍이 거셌다.
2차 합동조사에는 취재진 이외에 최병모 변호사, 이청규 제주대 박물관장, 전신권 정형외과 전문의 등이 함께 참여했다. 사후 처리를 보다 정확하게 하기 위하여 법률‧사학‧의학 전문가를 참여시킨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4월 2일 신문과 방송 보도로 다랑쉬굴 유해 발굴사실이 전국에 알려졌다. 각 언론사마다 이 충격적인 사실을 비중있게 다루었다.
『제민일보』는 4월 2일자 3개 면을 할애해 유해 발굴사실을 자세히 보도하는 것을 시발로 연일 다랑쉬굴 참상의 진실을 파헤쳐갔다. 시신을 수습한 채정옥 이외에 직접 토벌현장에 참여했던 민보단 간부 오지봉을 찾아낸 것도 큰 수확이었다.
“입구에 불 피워 질식사시킨 것”
그의 입을 통해 12월 18일 9연대가 주도한 대대적인 군‧경‧민 합동 토벌작전이 있었고, 다랑쉬굴을 발견하게 되자 “토벌대가 처음엔 입구에 수류탄을 던졌고 그래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굴 입구 쪽에 불을 피운 후 구멍을 막아 질식사시켰다.”는 결정적인 증언을 얻어냈다.
이런 충격적인 사실이 알려지자 경찰도 즉각 현장조사 등을 통해 진상조사에 나섰다. 당국은 다랑쉬굴 희생자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예의 색안경을 쓰고 왜곡하는데 급급했다.
첫 발표가 어이없게도 “다랑쉬굴 희생자들은 토벌대에 발각되자 집단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발표는 다랑쉬굴 토벌 참여자의 증언 등 4‧3취재반의 취재를 통해 금방 거짓임이 탄로 났다.
그러자 경찰은 토벌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사하더니 곧 다랑쉬굴이 남로당 아지트로 추정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 한 지방지는 톱기사 제목을 “다랑쉬동굴 남로당 유격대 아지트였다”고 단정적으로 달아서 보도했다. 첫 보도에서 제외됐던 언론사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1948년 12월 3일 구좌면 세화리가 무장대의 습격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마을은 큰 피해를 입었고, 주민 40여 명이 피살되었다. 토벌대는 그 뒷날인 12월 4일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벌였다. 다랑쉬굴이 발견되었을 때 세화리 일부 주민은 그 굴이 그날 토벌된 굴이라고 주장했다.
경찰은 이런 진술을 근거로 세화 피습사건과 다랑쉬굴 은거자들이 연관있는 것처럼 소문을 퍼뜨렸다. 피해를 입은 세화리 쪽의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9살 난 어린이와 부녀자 3명도 피살”
그러나 다랑쉬굴이 토벌된 날은 ‘12월 4일’이 아니라 ‘12월 18일’이었다. 그것도 제주도 동부지역에서 대대적으로 실시된 9연대 초토화작전의 일환이었다. 특히 육지부로 부대 이동을 앞둔 9연대는 ‘그들과 교체하게 될 부대에게 압도할 만한 업적을 남기기 위하여 마지막 박차를 가하였다’(존 메릴의 표현).
주한미군사령부 정보보고서(1948년 12월 24일자)는 “제9연대 2대대는 12월 18일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군사작전에서 민간인과 경찰의 도움을 받아 130명을 사살하고 50명을 체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건현장에 있었던 체험자들의 증언도 이 기록과 일치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은 이런 사실을 보도하는 한편 다각적인 취재를 통하여 다랑쉬굴 희생자 11명의 신원을 모두 파악해 발표했다. 그 희생자 속에는 아홉 살 난 어린이와 여자 3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11명 모두는 나중에 4‧3특별법에 의한 ‘4‧3희생자’로 결정되었다.
다랑쉬굴 희생자 명단
사망자
| 나이
| 성별
| 출신지
|
강태용
| 33
| 남자
| 종달리
|
고두만
| 20
| 〃
| 〃
|
고순경
| 20
| 〃
| 〃
|
고순환
| 26
| 〃
| 〃
|
고태원
| 25
| 〃
| 〃
|
박봉관
| 31
| 〃
| 〃
|
함명립
| 19
| 〃
| 〃
|
김진생
| 51
| 여자
| 하도리
|
부성만
| 21
| 〃
| 〃
|
이성란
| 19
| 〃
| 〃
|
이재수
| 9
| 남자
| 〃
|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분위기는 차츰 누그러졌다. 다랑쉬굴 희생자 유족 가운데는 시신을 찾지 못하자 혼만 불러 들여 헛묘(虛墓)를 만들어 벌초해온 사실도 밝혀졌다. 그날 토벌작전에서 다랑쉬굴 주변에 희생자가 더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경찰 측은 다랑쉬굴에 대한 토벌 실상과 유해 신원이 속속 밝혀지자 특이사항이 없는 것으로 판단, 그 사후처리를 행정기관에 이관했다. 북제주군은 이에 따라 4월 25일부터 5월 1일까지 연고자 신고기간을 설정해 유족들의 신고를 받는 절차에 들어갔다.
특이한 빙의 현상 나타나기도
다랑쉬굴 시신을 수습했던 채정옥 선생이 그 무렵 나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고 싶다고 했다. 종달리 채 선생 집에 갔더니 간밤에 있었던 일을 털어놨다. 집에서 혼자 TV를 보던 중 다랑쉬굴 관련 뉴스가 나오는데, 순간적으로 희생자 아무개의 얼굴이 보였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몸이 뒤틀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전화를 걸어 제삿집에 가 있던 가족에게 연락했다. 급히 달려온 부인은 “○○아방 얼굴이 보였다.”는 채 선생의 말을 듣고 금방 ‘들렸음’을 알아차렸다.
채 선생 부인은 소주병을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그리고 “○○아방 억울함을 잘 알고 있고, 곧 양지 바른 곳에 묻게 될 터니 걱정 말고 소주나 드시고 가시라.”고 말하면서 소주를 뿌렸다고 한다. 얼마 없어서 채 선생의 몸이 풀렸다.
그는 나에게 “그 분은 원체 힘이 세서 제대로 힘을 썼더라면 내가 혼났을 건데, 혼령도 세월이 흐르다보면 힘이 떨어지는 것 같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특이한 빙의 현상이었다.
유해처리 맡은 행정기관, 슬슬 뒷걸음질
당시 사회 분위기는 40여 년 동안 음습한 동굴에 갇혔던 유해들을 양지 바른 곳에 매장하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다. 한 법조인은 “그렇게 오랜 세월 시신마저 팽개쳐야할 죄는 있을 수 없거니와 하물며 어린이와 여인들도 포함된 이 죽음을 누가 단죄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제주도의회 의장(장정언)과 이 지역 국회의원 당선자(양정규) 같은 지도층 인사들도 “예의를 갖춰 영혼들을 안장시킬 수 있는 진혼의 절차를 밟아야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의견을 피력했다.
종교계와 시민단체 등이 참여한 ‘다랑쉬굴 4‧3희생자 대책위원회’가 4월 21일 발족되어 범도민적인 장례절차를 촉구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다랑쉬굴 유해들을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 흔적을 없앤다는 것이다. 그것이 ‘유족들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행정기관이 슬슬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