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방영한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는 방송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선풍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최고 시청률 58.4%, 평균 시청률 46.7%란 수치가 말해주듯 대한민국 국민들을 안방극장으로 몰입하게 한 드라마다.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시대부터 6‧25전쟁 발발까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재조명한 총 36부작 드라마. 그런데 한국 드라마 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된 이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제주4‧3이 소재로 다뤄졌다. 모두 6편 분량이었는데, 그 때까지 4‧3의 실상을 모르던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물론 일부 연구자들은 이 드라마가 ‘4‧3항쟁의 정당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당시 시대적인 상황에서 공중파 방송을 통해 안방극장에 4‧3의 실체와 토벌대 진압의 잔혹성, 미군정의 실책을 드러낸 그 자체만으로도 4‧3의 진실을 알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여명의 눈동자> 작가 송지나
그에 앞서 1년 전쯤 <여명의 눈동자> 시나리오 작가인 송지나가 제민일보 4‧3취재반을 찾아왔다. 그녀는 대하드라마 속에 4‧3을 담고 싶다고 했다. 가녀린 얼굴인데도 당찬 모습을 보였다.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반대의사를 피력했다. 첫째, 원작(김성종의 대하소설)이 매우 반공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는 점, 둘째, 드라마 주인공들을 외부에서 들어오게 설정함으로써 4·3이 ‘외부의 사주’에 의한 봉기로 오해될 수 있다는 점, 셋째, 4‧3이 삽화처럼 단편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대해 송 작가는 “원작과는 거의 다른 작품으로, 최근의 현대사 연구 성과를 최대한 녹여내서 4‧3을 쓰고 싶다.”면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리고 자신이 세화고등학교를 나와서 제주사람들의 정서도 잘 알고 있다고 소개했다.
서울 태생인 송지나는 그녀의 아버지(대령으로 예편)가 퇴역 후 여행을 다니다가 세화 앞바다가 너무 좋다면서 정착하는 바람에 제주에서 세화중과 세화고를 졸업한 후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로 진학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이 느껴지자, 나는 4‧3의 기존 자료들이 너무 이념적인 문제로만 부각됐다는 점을 우선 지적했다. 덧붙여서 나는 “그 당시의 제주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고, 휴머니즘적인 접근이어야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면서 우리 취재반의 자료들을 제공했다.
“살아있는 인간 그리고 싶었다”
나중에 TV에서 본 <여명의 눈동자>는 이 점에 많은 신경을 썼구나하는 느낌이 왔다. 특히 이 작품을 연출한 김종학 PD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념보다는 살아있는 인간을 그리고 싶었다”고 표현한 것을 보고 공감대가 이뤄졌음을 새삼 느꼈다.
드라마는 극 중의 주인공인 최대치(최재성 분)와 윤여옥(채시라 분)이 제주에 내려와 서청과 경찰의 횡포를 목격하고 봉기에 가담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또한 장하림(박상원 분)은 진압군의 일원인 미군정 정보장교로 제주에 내려오게 되는데,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이 세 사람의 눈을 통해 4‧3을 재조명한 작품이었다.
“우리는 아직 독립되지 않아수다! 우리 할아버지를 죽인 일제 경찰이 그대로 물러나지 않았는데….”라는 어느 소녀의 절규, “양민들은 나오지 맙서! 민족을 나누는 5‧10 단독선거는 막아사주.”라는 청년의 외침 등을 통해 4‧3이 왜 일어났는지 그 배경을 설명해 주고 있다.
또한 「김익렬 유고록」 등에서 나타난 미군정의 이중성, 초토화작전을 계획하는 미군 장교와 군경 토벌대의 혹독함을 보여주는 장면도 나왔다. 특히 그 시절에 쉽게 다룰 수 없었던 미군의 실책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4‧3의 진실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여주었다는 평가도 받았다.
나는 이 드라마가 방영된 후 서울 친지로부터 몇 통의 전화를 받았다. “네가 하고 있는 취재가 <여명의 눈동자>에 나오는 4‧3사건이냐?”는 식이었다. 그만큼 그들에게 4‧3은 생소한 것이었다.
이 드라마는 4‧3이 무엇인지 잘 모르던 수많은 대중들에게 4‧3의 실상을 부분적이나마 처음으로 가장 가깝게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지금도 <여명의 눈동자>는 4·3 진상규명에 관한 영상의 대중성과 중요성을 함께 느끼게 한 작품이었다고 확신한다.
<여명의 눈동자>를 쓴 송지나 작가는 김종학 감독과 함께 SBS <모래시계>(1995년), MBC <태왕사신기>(2007년) 같은 명작도 남겼다. 그녀의 다음과 같은 인터뷰 내용은 4‧3 연재의 힘든 여정에 기분 좋은 격려가 되었다.
“<여명의 눈동자> 시나리오를 쓰면서 1990년 초부터 이것저것 책자를 보았는데 기존 자료들이 너무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되어 있어서 참 애를 먹었어요. 그러다가 제민일보 4‧3취재반의 연재물을 보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제민일보 취재반과 토론을 하다 보니 복잡하기만 했던 4‧3의 길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4‧3 역사화’로 세상 놀라게 한 강요배
다랑쉬굴 유해 발견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던 1992년 4월, 서울과 제주에서 기념비적인 전시회가 열렸다. 강요배 화백의 ‘제주민중항쟁사 역사그림전시회’였다. 4‧3이 웅혼한 대 서사시적인 그림으로 재현된 이 전시회는 서울전(4월 3~11일, 학고재화랑)에 이어 제주 전시회가 제민일보 주최로 4월 21일부터 세종미술관에서 열렸다.
이 전시회에는 제주도내 전시사상 최대 관람인파로 기록될 정도로 연일 사람들이 몰렸다. 4월 27일까지 계획했던 전시 일정도 연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시회에는 4‧3 역사를 시대별로 다룬 크고 작은 화면의 펜화, 연필화, 유화 등 연작그림 50점이 선보였는데, 그 장대한 스케일의 역사화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림 앞에 선 여고생들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에서 그 감동이 또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미술에 문외한인 나도 전율을 느낄 정도로 강한 충격을 받은 전시회였다.
강요배는 1952년 제주 삼양에서 태어나 서울대와 같은 대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한 후 한 때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활동했다. 나는 ‘강요배’란 이름에도 4‧3의 아픔이 배어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2012년에 출판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4‧3사건의 양민학살 당시 지금 제주공항인 정뜨르에 토벌대가 수백 명의 주민들을 호명할 때 ‘김철수’라고 불러 동명을 가진 세 명이 나오면 누군지 가려내지 않고 모두 처형했다는 것이다.
그때 요배 아버지는 내 아들 이름은 절대로 동명이 나오지 않는 독특한 이름으로 지을 것이라고 마음먹어 요배의 형은 강거배, 요배는 강요배가 된 것이다. 제주인에게 4‧3의 상처는 그렇게 깊고 오래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강요배는 때어날 때부터 4‧3과의 인연을 맺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본격적으로 4‧3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기념으로 연재된 현기영의 소설 「바람타는 섬」 삽화를 그리면서 시작되었다.
해녀항쟁 삽화 그리다 4‧3 공부
이 연재소설은 일제시대 제주해녀항쟁을 다뤘다. 1932년 3개월 동안 연인원 1만 7천명이나 참가한 해녀항쟁은 국내 최대의 항일 투쟁임에도 그동안 묻혀 있었다. 현기영 선생의 소설로 부활된 것이다.
그것은 또한 4‧3의 뿌리깊은 전사(前史)이기도 했다. 나는 뒤늦게 4‧3을 공부하면서 4‧3은 1948년 4월 3일에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고, 그 이전 원근(遠近)의 역사를 제대로 체득해야 비로소 그 실체를 볼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멀리는 조선 말 중앙정부 벼슬아치의 수탈에 맞서 일어난 민란(조선말에만 6건)과 일제의 식민지 수탈에 맞선 항일투쟁의 경험에서부터 시작된다. 또한 일제의 필요에 의해 일본 노동시장에 유출되었던 제주인들이 어떻게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지,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가까이는 분단과 미군정의 실정, 1947년 3‧1 발포사건과 이에 맞선 3‧10 총파업, 그리고 탄압 상황과 제주인의 저항, 남로당의 행로 등을 함께 분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념 한쪽에만 치우쳐 4‧3을 재단하려 한다면 그것은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이나 다름없다.
어쨌든 강요배 화백은 매일매일 「바람타는 섬」 삽화를 그리면서, 이후 잦아진 현기영 선생과의 술자리에서 4‧3을 비롯한 제주 역사를 깊이 있게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무렵 그가 직장으로 다니던 출판사가 문을 닫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는 위궤양 수술까지 받았다. 심신이 힘들던 시절이지만 그는 ‘의미있는 일’을 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서 본격적인 4‧3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3년동안 피나는 노력 끝에 대작 만들어
4‧3을 그리기로 결심한 그는 1989년 경기도의 한 쇠락한 농가를 빌려 작업실을 만들었다. 그 속에서 3년간의 피나는 노력 끝에 흑백과 컬러를 섞은 50점의 4‧3 역사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작업과정에서 4‧3 영령들을 만나는 느낌이 있었는데, 영령들은 무언의 압력을 주기도 하고 힘도 되었다고 술회했다.
강요배의 4‧3 역사화는 많은 화제를 불렀다. 난해한 역사를 민중의 눈높이에서 일반 대중에게 쉽게 접근시킨 4‧3역사화는 미술의 장점을 최대한 살렸다는 찬사에서부터 일반 기념관이나 박물관의 역사기록화와도 차별성이 있다는 평가가 있었다. 사실적인 인물 묘사도 압권이었다.
이런 일화도 있다. 서울대 미대 단짝 동창인 박재동 화백은 강요배의 그림전을 관람하던 중 숨이 턱 막혀왔다고 한다. 피로 물든 표선백사장을 형상화한 그림 ‘붉은 바다’ 앞에서였다.
박 화백은 그 순간 “내가 무얼 하고 있지?”라는 자각과 충격이 왔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한겨레 그림판’을 그리던 유명한 시사만화가였다. 박재동은 그 길로 한겨레신문사를 그만 두고, 4‧3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오돌또기’ 제작 작업에 들어간다.
강요배의 4‧3 역사화는 한 점 한 점 모두 역사적 의미를 안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서사적으로 구성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한라산 자락 백성’, ‘천명’, ‘붉은 바다’, ‘광풍’ 등은 대작이다.
마지막 쪽에 나오는 그림 ‘동백꽃 지다’도 의미심장하다. ‘통꽃으로 떨어지는 한라산 동백’이라는 설명문이 있는 이 그림은 동백꽃이 떨어지는 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그 뒤쪽에 ‘숨은 그림’이 있다. 자세히 보면 토벌대가 눈밭에서 작두로 목을 자르는 모습이 그려진 것이다. 실제 있었던 일이다.
강요배의 역사화는 1992년 대구에서도 전시되었다. 그리고 1998년에는 제주4‧3 50주년 기념으로 서울‧제주‧광주‧부산‧대구를 돌며 전시회를 가졌다. 그만큼 전국적 화제를 불러 모은 4‧3의 역사화다.
“반드시 분단 거부운동으로 재조명될 것”
한편, 강요배의 역사화는 화집 『동백꽃 지다』로 모두 세 차례 출간되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1992년과 1998년 학고재에서 나왔는데, ‘제주4‧3민중항쟁의 전개과정’(양한권), ‘4‧3은 무엇인가’(양조훈)란 글이 각각 실렸다.
세 번째는 2008년 도서출판 보리에서 출판됐는데, 김종민이 취사 정리한 34명의 증언과 ‘제주4‧3항쟁의 역사적 의미’(서중석)란 글이 실려 4‧3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4‧3 역사그림 작업을 마친 1992년, 마흔 살의 나이에 귀향한 강요배는 현재 한림읍 귀덕1리에 정착해 20년이 넘도록 제주 자연과 문화, 역사 등을 소재로 한 독특하고도 개성 있는 그림으로 대중들과 호흡하고 있다.
“4‧3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는 강요배. 그는 아직도 4‧3에 대한 기대가 원대하다.
“우리 민족사 전체가 바로 잡히려면 평화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우리 민족의 과제에서 봤을 때 60여 년 전 제주도민들이 분단 반대의 슬로건을 내걸었던 것은 분명히 의미있는 역사이었지요.
언젠가 한반도 분단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제주4‧3도 분단 거부 운동으로서 반드시 재조명될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4‧3의 완전한 조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