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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14) … 공적 영역에선 진상조사보고서 준용해야

4‧3의 진실을 추적하면서 절감한 사실은 4‧3의 진실규명은 중앙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중앙의 정치지형이 진보적인 판세냐, 아니면 보수적인 흐름을 타느냐에 따라서 4‧3 진실규명의 역사도 명암을 달리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민주화 바람, 1988년부터 시작된 국회 광주 청문회 등은 4‧3 진실찾기를 촉구하는 강력한 촉매가 되었다. 1988년 대선에서 승리한 노태우 정권도 이듬해 4월 총선 결과 ‘여소 야대’ 국회로 바뀌자 동력을 잃고 이런 흐름에 제동을 걸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판도를 일순간에 바꿔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1990년 1월 전격적으로 단행된 민정‧민주‧공화 3당의 합당이었다. 새로 탄생된 여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은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221석을 차지하는 ‘공룡’으로 변했다.

 

국민들이 투표로 정해준 정치 구도를 인위적으로 뒤엎은 것이다. 이로 인해 4‧3 진실찾기도 시련을 맞게 됐다. 공안정국이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경찰, 4‧3추모제 봉쇄하고 400명 연행

 

공안정국은 1991년에 들어서면서 더 강화되는 듯했다. 4‧3 추모행사를 둘러싸고 최루탄이 난무하는 속에 시민‧대학생 400명 가까이가 연행되는 초유의 사태도 발생했다.

 

그해 4월 3일 4‧3 의례는 반공유족회 성격을 띠고 있는 4‧3유족회가 주최하는 제주시 신산공원 ‘위령제’와 진보진영의 결성체인 사월제공준위가 여는 관덕정 광장 ‘추모제’로 양분되었다.

 

추모행사는 1989년부터 사월제공준위에서 개최해 왔는데, 유족회가 1991년부터 자신들의 주도 아래 위령제를 봉행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더구나 공안당국은 유족회의 위령제는 허용하고, 사월제공준위의 추모제는 원천 봉쇄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1991년 4월 3일, 경찰은 관덕정 광장에서 열린 추모제를 철저히 막았다. 이에 항의하는 시민,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발사하고 강제로 연행했다. 그날 하루에 연행된 시민과 대학생이 222명이었다.

 

다음날인 4일 경찰은 이에 항의해서 제주경찰서 앞에서 연좌 농성을 벌이던 제주대 학생 1000여 명의 머리 위쪽으로 최루탄을 쏘며 시위 학생을 해산시키고 다시 160여 명을 연행했다. 이같은 경찰의 강경 대응으로 연행자 수는 400명에 육박했다.

 

유족회장 “남로당 지령 받은 광란배 일으킨 공산폭동”

 

한편 유족회가 주최한 위령제는 기관장과 국회의원, 지역 유지 등이 참석한 가운데 3일 오전 11시부터 신산공원에서 열렸다. 그 당시만 해도 4‧3유족회는 무장대로부터 피해를 입은 유족들이 주도해서 반공 성향이 강했다.

 

경찰관 출신인 유족회장은 “남로당 지령을 받은 붉은 광란배들이 제주도를 공산기지로 만들려고 피비린내 나는 공산폭동을 일으켰다”면서 “엄연한 공산폭동을 민중봉기라 왜곡하고 있는 현실을 보다 못해 분연히 힘을 모았다”고 역설했다.

 

이렇게 숨막히게 조여 오는 상황에서 기획물 연재를 책임진 나는, 우리를 옥죄는 ‘4‧3 공산폭동론’의 실체를 정확히 밝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4‧3의 진정한 명예회복이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4‧3취재반이 4‧3체험자들을 대상으로 증언을 채록하면서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었다. 특히 토벌대에게 피해를 입은 유족들은 ‘폭도 가족’, ‘빨갱이 가족’이란 누명을 벗겨달라고 간절히 호소해왔다.

 

황상익 교수(서울대 의과대학)가 이와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논문을 발표했다. 「의학사(醫學史)적 측면에서 본 4‧3」이란 제목의 논문인데, 나는 이 논문에서 ‘빨갱이’와 ‘문둥이’의 어의를 비교한 대목을 주목했다.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빨갱이’라는 단어를 대할 때마다 나병환자란 뜻인 ‘문둥이’라는 말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인간을 완전히 소외시키고 그 존재를 아예 부정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문둥이는 ‘나병’이라는 실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빨갱이’는 실체조차 없는 말이다. 그리고 ‘빨갱이’는 애당초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문둥이보다도 훨씬 파괴적이다.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라’는 협박 앞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과거 정권, 공산폭동으로 규정 사실은폐

 

그러면 4‧3과 ‘빨갱이’ 논리의 근원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미군정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승만 정권과 군사정권이 4‧3은 북한 정권 또는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 아래 발생한 공산폭동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이 규정 하나가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반세기 가까이 4‧3에 대해 침묵하도록 강제한 금기의 벽도 바로 여기에 터 잡고 있다. 지독한 ‘레드 콤플렉스’는 4‧3 체험자들의 증언 기피현상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 문제는 제주도민만이 겪은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학계에서 오랫동안 ‘현대사 연구 기피증’이 있었던 것도, 언론에서 이 문제를 비겁하게 외면해 온 것도 바로 그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4‧3취재반은 이렇게 우리를 옥죄는 ‘4‧3 공산폭동론’의 실체를 정확히 규명해보기로 했다.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단단히 마음먹고 조사해 봤더니 4‧3 발발 초기 공산폭동론을 처음 주창한 사람은 토벌대의 총수 격인 군정장관 딘 소장과 조병옥 경무부장이었다.

 

딘 장군은 앞에서도 밝혔지만, 1948년 ‘5‧5 최고수뇌 회의’ 직후에 “제주도 외에서 들어온 공산주의자들의 선동과 모략과 위협에 잘못 인도된 청년들이 살해하고 방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병옥은 그해 6월 한술 더 떠 제주사태를 “조선의 소련연방화 내지 위성국화를 기도하는 공산당의 남조선 파괴공작에 가담한 자들의 총선거 방해공작”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대지 못했다.

 

대신 당시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이 유고록에서 남긴 “미군정은 소련의 선전을 봉쇄하기 위해서 제주도 사태를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짓기로 했다”는 증언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었다.

 

미군 뒤늦게야 “북한 지원 증거 없다”

 

초토화작전 감행 직전인 1948년 10월에는 ‘괴선박 출현설’로 전국이 들썩였다. 10월 8일자 미군 정보보고서는 “제주 근해에 붉은 바탕에 별 하나가 그려진 깃발을 단 잠수함이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며칠 후 중앙지들은 이를 근거로 북한 선박이 출현한 것처럼 보도했다. 이런 정보는 강경 진압의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제주도 사태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1949년 4월 1일자의 주한미군사령부 정보보고서는 “일부에서는 게릴라들이 본토로부터 또는 북한으로부터 병참 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도 있으나 이러한 보고를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결론은 앞의 정보들을 근간으로 제주도를 초토작전으로 싹쓸이 해놓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입을 씻어버린 격이다.

 

이렇게 심층취재를 통해 ‘공산폭동론’의 진원지를 하나하나 파헤쳐 들어 가보니 허구 그 자체였다. 이런 내용을 보도하며 ‘공산폭동론’의 벽을 하나씩 허물어가자 위기를 느낀 보수 논객들은 ‘박갑동의 기록’을 들이대며 반격의 기회로 삼았다.

 

그러나 지난 회에서 밝혔듯이, 이에 대해 4‧3취재반이 추적하자 남로당 지하총책이란 박갑동은 “중앙지령설은 내 글이 아니고, 1973년 신문 연재할 때 정보기관에서 고쳐 쓴 것”이라는 충격적인 고백을 하지 않았던가.

 

4‧3 연구로 최초로 석사학위를 받은 존 메릴 박사가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을 부인한데 이어서 김점곤 장군, 백선엽 장군 등도 4‧3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돌출적인 독자적 행동이란 글을 남겼다.

 

특히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백선엽 장군은 1948년 4월 3일 그날 국방경비대 제3여단 참모장으로 예하부대인 제9연대를 방문한 뒤 제주읍내에 머물다 사태를 만났고, 곧이어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맡아 4‧3 사태를 진압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런 위치에 있었던 그의 증언은 4‧3 성격 규명에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공산폭동론’ 교과서 집필자 “4‧3연구 못했다”

 

‘공산폭동론’의 허상이 하나씩 드러나자 더욱 궁금해진 것이 교과서 기술내용의 진위여부였다. 1989년까지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제주4‧3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었다.

 

“제주도 폭동사건은 북한공산당의 사주 아래 제주도에서 공산무장폭도가 봉기하여,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렸던 남한 교란작전 중의 하나였다.”

 

이 교과서는 1990년 일부 수정되었다. ‘북산공산당의 사주 아래’란 문구는 삭제됐지만, 공산폭동론에는 변함이 없었다.

 

“제주도 4‧3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해 일으킨 무장 폭동이었다. 그들은 한라산을 근거로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약탈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군경의 진압작전과 주민들의 협조로 평온과 질서를 되찾았다.”

 

대한민국 기성세대 상당수는 이런 교과서로 교육을 받았다. ‘4‧3’ 하면 ‘공산폭동’으로 각인되었고, 무고한 죽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진압작전은 정당한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었다.

 

나는 2000년부터 국무총리 소속 4‧3위원회 진상조사팀장으로 재직하면서 이런 교육을 받은 청와대, 국무총리실, 행정자치부, 국방부 등 중앙부처 관료들을 만나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했다.

 

국사편찬위원회(국편)는 과연 무슨 근거로 이런 글을 썼을까? 김종민 기자에게 교과서 필진들을 상대로 그 경위를 취재하도록 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너무 어처구니없고 한심한 것이었다.

 

‘북한공산당 사주’ 관련 글을 썼던 서울 모 대학 이현희 교수는 “내가 글을 쓸 때에는 새로운 자료가 없어서 예전 자료를 인용하는 수밖에 없었다”면서 “의식이 잘못된 원인이 뭐냐면, 그때는 모두들 이데올로기 문제 때문에…”라고 말끝을 흐렸다.

 

수정 교과서를 집필한 국편 신재홍 편사부장은 “내 전공은 일제시대사이고, 어쩌다보니 현대사 부분까지 담당하게 된 것인데 그 쪽에 대해선 공부를 많이 못해서 다른 분들의 글을 참조하는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학자들이 현대사 관련 글쓰기를 기피하는 바람에 현대사 집필자를 구하지 못해 국편 관계자가 4‧3 관련 글도 쓰게 됐다는 것은 나중에 들은 이야기다.

 

취재 결과를 듣고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예민한 사항을 그렇게 허술하게 접근할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중차대한 2세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 당국의 안이한 역사인식이 개탄스러웠다.

 

『제민일보』는 1991년 4월 3일자 1면 톱기사로 이 문제를 대서특필했다. 제목 자체도 “국사 교과서 속의 4‧3 왜곡 편파 오류투성이 / ‘북한공산당의 교란작전’ 곡필 / 필자들 본지의 해명요청에 ‘4‧3연구 못해봤다’ 실토”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3면에는 교과서 집필자와의 인터뷰 내용을 실었다. 다음날에는 사설을 통해 국사편찬위원회의 각성을 촉구했다.

 

국편 팀과 격론, 지령설 사라진 교과서

 

보도가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편 위원장 박영석 박사 일행이 제주에 내려왔다. 4‧3취재반과의 토론은 박 위원장 숙소인 호텔 객실에서 장장 4시간 동안 벌어졌다. 토론이라기보다는 ‘격론’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나는 “국편이란 책임있는 기관에서 발행한 교과서 내용에 오류 왜곡이 말이 되느냐? ‘북한공산당의 사주’란 표현을 썼으면 최소한 그에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 증거를 대라”고 몰아붙였다.

 

국편 관계자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로 변명했지만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가 들이대는 조사 자료에 반박하지 못한 채 쩔쩔매는 형국이 되었다.

 

일제사 전공인 박영석 위원장은 “나도 항일운동사를 조사하기 위해 만주 등을 누벼 다녔지만, 4‧3취재반이 이렇게 ‘필드’(현장조사라는 뜻)에 강한 줄 몰랐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 후 교과서는 점진적으로 개선되었다. 2005년 개정된 고등학교 국정교과서에는 “제주도에서 벌어진 단독선거 반대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만 명의 인명피해가 일어난 사건”이란 표현도 추가되었다.

 

4‧3 무장투쟁이 남로당 제주도당 차원에서 결정됐다는 사실은 이밖에도 수많은 근거가 있다. 당대의 남로당 연구가 김남식 선생, 무장투쟁 방침을 결정한 ‘신촌회의’에 직접 참석했던 이삼룡 등의 증언이 있다.

 

또한 좌익 쪽 자료도 있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 기록된, 9연대 내 남로당 중앙당 프락치에게 무장투쟁의 참여를 요청했으나 그가 “중앙 지시가 없으니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심지어, 그해 8월 해주대회에 참석한 김달삼도 그 대회에서 “제주도 인민들은 자연발생적으로 총궐기하였다”고 보고했다. 제주에서 일을 벌여놓고 해주로 탈출한 김달삼의 행보에 대한 역사적 비판은 당연하나, 그의 보고 어디에도 중앙당 지시가 있었다는 내용은 없었다.

 

아직도 빈약한 근거로 지령설 주장하다니

 

그럼에도 최근까지도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박약하다.

 

1) 엄격한 규율이 있는 남로당이 상급당의 지령 없이 무장투쟁을 결정할 턱이 없다는 주장을 편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그 이전에도 중앙당의 노선과 달리 독자적으로 결행한 사례들이 있다.

 

2) 1948년 3월 중순 전남도당 올구가 와서 “무장반격에 관한 지시와 아울러 국방경비대를 최대한 동원하여야 한다”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앙 지시가 없었다”면서 출동을 거절한 9연대 프락치의 행동을 어떻게 해명할건가?

 

3) 1948년 2월 말 신촌회의에서 무장투쟁을 결정했다는 남로당 제주도당 정치위원 이삼룡도 올구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럼에도 그는 “제주도당이 독자적으로 결정했다”고 강조한다. 공안당국에서 지령 도표 그리듯 그런 것이 아님을 역설한 것이다.

 

4) 한편에선 미군 정보보고서에 “1948년 1월 22일 경찰이 남로당 조천지부를 급습하여 노획한 문서에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폭동을 일으키라’는 기록이 있다”면서 중요한 증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그 자료는 한마디로 ‘용도폐기’된 것이나 다름없다.

 

5) 그 이유인즉, 미군 보고서에는 ‘지령의 주체’도 없다. 그게 중앙당인지, 전남도당인지, 제주도당인지, 그리고 정보 신뢰도가 낮은 ‘C-3'으로 분류되고 있다. 좌파 쪽에선 “남로당 세력을 압살하기 위해 꾸며낸 유언비어”이라고 반박했다. 더욱이 미군정 당국도 사람들을 대거 연행했다가 대부분 석방할 정도로 이 문서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6) 마지막으로 보수진영에서는 제주도당 독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민중항쟁론자나 4‧3주동자 또는 좌파나 북한이 주장하는 궤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미 국무부 고위관리인 존 메릴 박사나 백선엽 장군, 김점곤 장군 등도 ‘북한이 주장하는 궤변’에 동조하는 사람들인가?

 

4‧3 법정보고서 ‘중앙당 직접 지시 근거 없다’

 

2003년 국무총리가 주재한 4‧3위원회에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확정할 때 이런 자료를 모두 검토한 후, 내린 결론은 이랬다.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4‧3사건은 제주도의 특수한 여건과 3‧1절 발포사건 이후 비롯된 경찰 및 서청과 제주도민과의 갈등, 그로 인하여 빚어진 긴장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일으킨 사건으로 판단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국가이기에 이렇다 저렇다 개인적인 소견을 발표할 수 있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는 다르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법정보고서이기 때문에 공적 영역에서는 이 보고서가 수정되지 않은 한, 그 내용을 준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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