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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수종 전 한국일보 주필 ... 킬링필드의 땅이었던 제주

지난 4월 3일 제주도 한라산 중턱에 있는 4·3평화공원에서는 국무총리와 여야 수뇌부가 참석한 가운데 두 번째 국가 공식 4·3추념식이 열렸습니다. 제주 도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참석 여부에 관심을 가졌지만, 대통령은 작년 국가 기념일 지정 결정만 내린 후 참석하지는 않았습니다.

 

4·3은 해방 공간, 즉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기 전 이념 논쟁으로 촉발된 민족적 비극입니다. 좌익 계열 무장대의 관공서 습격과 이에 대응한 군경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 과정에서 대량학살(Genocide)이 자행되었습니다. 1999년 여야가 합의해 만든 4·3특별법에 의해 큰 틀에서 진상이 규명되고 국가 차원의 명예회복, 기념사업 및 공동체에 대한 보상 절차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월이 되면 제주도민들은 잔인한 추억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하고, 정치 무대에서는 이념의 휴화산이 연기를 뿜어냅니다.

 

정부의 4·3위원회가 확인한 사망자 숫자만 1만4,000명이 넘습니다.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가 86%이고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가 14%입니다. 어린이, 여성, 노약자가 전체 희생자의 33%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4·3의 잔인성과 반인권성을 알 수 있습니다. 희생의 대부분은 군경의 제주도초토화 작전을 벌인 1948년 11월 이후 몇달 동안에 발생했습니다. 가족이 모두 죽거나 아직도 유가족이 신고하기를 기피하는 희생자까지 고려하면 2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당시 제주도민 10명 중 1명이 희생됐다고 합니다. 희생자에 버금하는 숫자가 어선에 몸을 숨겨 일본으로 탈출했습니다. 좁은 섬에서 단기간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그 참혹함은 상상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4·3의 참혹한 희생은 50년 이상 일반 국민, 즉 육지(제주인이 본토를 가리키는 말)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국가 권력의 반공이데올로기와 연좌제로 인해 제주도민은 물론 언론이 레드 컴플렉스(Red Complex)에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6촌 이내 친척 중 희생자가 없는 가정이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트라우마가 심해서 기억에 떠올리기조차 싫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4·3을 가장 천착해 취재했던 제주의 언론인 양조훈 씨는 “눈물도 죄가 되는 50년의 세월”이라고 집약했습니다.

 

4·3의 진실규명과 희생자의 명예회복이 부각된 원인은 시대의 흐름일 것입니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여론의 압박에 의해 국회가 특별법을 제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4·3 진실규명의 커다란 단초를 제공한 인물을 꼽으라면 언론인 양조훈 씨를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양씨는 4·3진실 규명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1948년 초겨울, 그러니까 토벌대의 활동이 절정에 이르러 제주도가 킬링필드(Killing Field)가 되었던 때 제주시 한복판에서 태어났습니다. 기이하게도 그의 가족은 물론 가까운 친척 중에 한 사람의 희생자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장하면서 4·3 사건이 무엇인지 피부로 느낄 수 없었고 관심도 전혀 없었습니다.

 

양씨는 제주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당시 도내 유일의 신문인 제주신문에 기자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사회부장을 하던 1988년 민주화 바람을 타고 사내 젊은 기자를 중심으로 4·3진상을 취재하여 보도하자는 논의가 일었고, 신문사 편집국은 급기야 4·3취재반을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취재반장의 직책은 양조훈 씨에게 떨어졌습니다. 이슈 파악 능력과 취재 능력이 뛰어나다는 정평을 듣는 데다 사회부장이었기에 적임자로 발탁된 것입니다.

 

그러나 양씨는 취재반장을 맡으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영광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천근만근의 짐으로 느꼈다고 합니다. 4·3에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는 데다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제주도 사회는 ‘레드 컴플렉스’속에 여전히 갇혀 있었기 때문에 사안이 너무 민감했던 것입니다. 겁이 덜컥 났지만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라 예배당에 가서 새벽 기도를 드리면서 진실만을 캐겠다고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정말 다행인 것은 가족 중에 희생자가 없다는 사실, 즉 레드 컴플렉스가 없었다는 점이었다고 합니다.

 

취재반을 이끌면서 양씨는 피가 끓어오르는 두 가지 분노를 느꼈다고 합니다. 하나는 공권력에 대한 분노로 어떻게 사람을 빈대 잡듯 죽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자신에 대한 분노로 신문기자가 이런 일도 몰랐다는 자괴감이었습니다. 소문으로 전파되던 4·3비극의 현장을 마을별로 하나하나 취재해 나갔습니다. 토벌대가 부녀자와 아이들을 죽이는 장면을 증언하는 주민들의 말을 들으며 임신 중인 여기자는 구토를 참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양씨는 모든 증언도 철저히 검증하도록 했습니다. 4·3이라는 민감한 사안을 기사로 다루는 데는 철저한 검증밖에 파장을 최소화하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양씨에게 4·3 취재 보도는 그야말로 우여곡절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안의 성격상 격려도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압력이 언제나 등 뒤에서 서성거렸습니다.

 

1년의 취재와 준비를 거쳐 1989년 4월 3일 첫 연재를 시작한 제주신문의 ‘4·3증언’ 은 그해 12월 5일 57회로 중단되었습니다. 신군부의 지원을 받은 경영주와 언론 민주화를 갈구하던 사원들 사이에 경영 문제를 놓고 갈등이 벌어져 신문사 측이 폐업을 결정했고 140여 명의 기자와 사원이 신문사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들 해직 언론인들은 도민주 공모 형식을 통해 ‘제민일보’를 1990년 6월 창간했고, 이 신문은 창간호부터 ‘4·3은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계속했습니다. 새 신문사의 정경부장이 된 양조훈 씨는 다시 4·3 취재반장의 짐을 짊어졌습니다.

 

취재를 깊게 할수록 4·3 비극의 원인이 지역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취재반은 결국 미국에 기자를 보내 30년마다 공개되는 미국 정부의 비밀문서에 접근하여 한국이 몰랐던 진실을 캐기에 이르렀습니다. 미국의 비밀문서는 미국이 겉으로 말해온 4·3에 대한 입장이 왜곡되었다는 것을 입증해주었습니다. 토벌과 양민학살에 미군정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토벌작전에 투입됐던 군 관계자의 증언을 통해 사건의 진상이 얼마나 왜곡되고 있었는지도 취재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중앙언론과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침묵을 강요당했던 4·3이 제주 섬 밖으로 외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양조훈 씨는 4·3 연재로 경영주의 눈 밖에 나게 되었습니다. 1996년 제민일보를 인수한 재일동포 사업가는 ‘레드 컴플렉스’를 갖고 있어서 조그만 압력에도 못 이겨 연재 중단을 종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버티며 연재를 계속했던 양씨는 결국 경영주에 의해 1999년 해직되어 언론계를 떠나야 했습니다. 물론 4·3연재도 중단되었습니다.

 

양 씨가 주도한 4·3연재는 10년 동안 제주신문에 57회, 제민일보에 456회 연재되어 한국 신문 사상 기록을 세웠습니다. 채록한 증언자만 6,000명이 넘으며 입수한 관련 자료만도 2,000건이 넘습니다. 제민일보의 ‘4·3은 말한다’ 연재는 1993년 한국기자상을 받았습니다. 민주화 이후 언론사마다 탐사 보도가 넘쳐났지만 이 연재는 탐사 보도의 압권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취재반장을 맡은 후 그는 밤에 자다가 누군가 자신의 목을 죄는 가위눌림에 몸부림치며 침대에서 굴러떨어졌고, 그때 “제대로 해야지!” 하는 자각이 생겼다고 합니다. 당시 4·3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자료는 ‘반란’과 ‘공산폭동’이었고, 대학가나 재야의 입장은 ‘민중항쟁’이었습니다. 흑백밖에 없었습니다. 양씨는 취재반원들에게 자나 깨나 다짐했습니다. “우리는 선입견을 갖지 말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진실을 찾아 나서자. 그러다 보면 4·3의 본모습은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양씨가 이끌었던 4·3취재반의 연재는 시민 운동권과 학생을 일깨웠고, 중앙언론과 지식인을 자각케 했으며 끝내는 정치권을 움직여 4·3특별법을 제정하게 했습니다.

 

양조훈 씨는 신문사를 떠난 후에도 운명처럼 4·3과의 인연을 이어 나갔습니다. 1999년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활동하다가 2000년 국무총리가 위원장이 된 4·3위원회의 수석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위원회 활동의 길라잡이 노릇을 했습니다. 그가 한때 제주도 환경부지사로 근무한 것도, 4·3평화재단 상임이사가 된 것도 그리고 현재 제주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는 것도 아마 저널리스트로 4·3 진실 찾기에 천착했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양씨는 취재의 뒷얘기를 모아 500여 쪽에 달하는 ‘4·3, 그 진실을 찾아서’라는 책을 내고 지난 3월 말 제주도 상공회의소 강당에서 출판 기념회를 가졌습니다. 하객 500여명이 가득 자리를 메웠고 거의 50대 이상의 사람들인 것을 보며 4·3의 관심층과 관심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엊그제 신문의 날이 지났습니다만 그날을 기념하는 것도, 신문에 대한 관심도 푹 떨어질 정도로 신문 산업은 쇠퇴하고 있습니다. 사회 이슈를 이끌어 내고 검증을 하며 뉴스나 논평을 보도하는 데 신문은 참 좋은 미디어라는 생각을 신문사를 떠난 후 많이 합니다. 좋은 기자가 많이 나와 신문이 역할을 다하기를 바라던 차에, 평소 안면이 있는 양조훈 씨의 책을 읽으면서 신문기자로서 그가 참 위대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양씨는 현재 교직에서 퇴직한 부인과 함께 제주시에서 조그만 한식집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합니다. 그는 “아내는 조리사이고, 나는 식당 보이‘라고 말합니다. 그 식당 보이가 지금도 4·3과 관련된 일이면 강연이든 행사장이든 달려 나갑니다.

 

김수종은? = 제주출생. 1974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30여년 기자로 활동했다. 2005년 주필을 마지막으로 신문사 생활을 끝내고 프리랜서로 글을 쓰고 있다. 신문사 재직 중 신문방송편집인협회 이사와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환경책 '0.6도'와 '지구온난화의 부메랑(공저)'을 냈다.

 

<이 글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자유칼럼그룹은 중앙언론사에서 30년 이상 근무 경력이 있는 중견언론인들의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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