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4월을 맞는다. 무섭고 시렸고 한스러웠던 통한의 역사다. 목소리는 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4·3은 지금으로부터 27년여 전 제주의 한 언론사 취재진들의 용기로 세상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무도였고 통곡이었다. 그 시절부터 20여년에 걸쳐 이뤄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중심부에 있었던 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의 육필 비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을 때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하여 경찰력과 서북청년회(서청) 단원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1948년 4월 5일 설치된 ‘제주비상경비사령부’도 경찰 조직이다.
그해 2월 남한만의 단독선거 윤곽이 드러나자 전국적으로 요동쳤다. 2월 26일 좌파세력에 의해 전라북도 경찰지서 26개소가 일시에 습격을 당했다. 쌍방 사망자는 25명에 이르렀다. 3월 1일에는 전라남도 경찰지서 10개소가 피습됐고, 16명이 사망했다. 이런 경찰관서 습격사건은 경상도에도 번졌다.
따라서 4월 3일 제주도에서 무장대 350명에 의해 경찰지서 12개소가 피습(쌍방 14명 사망)당한 사건이 매우 ‘유별난 사건’으로만 볼 수 없었던 혼란기였다. 미군 정보보고서에 의하더라도, 그해 1월에는 한 건도 없었던 경찰관서 습격이 2월에 125건, 3월에 114건이 발생했다. 4‧3 이전에 본토에서 두 달 새 사망자만 225명에 이른 것이다. 미군정이 제주사태를 처음에 치안상황으로 간주한 것도 바로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초기 상황을 놓고 볼 때 특이한 것이 국방경비대의 태도다. 1946년 모슬포에서 창설된 경비대 제9연대 장병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경비대 측에서는 이 사태를 경찰과 서청의 횡포에 누적된 도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9연대가 제주 출신 중심으로 편성된 점도 있지만 경비대와 경찰 간의 미묘한 반목이 깔려 있었다.
경비대 쪽에서는 일제총독부에서 근무했던 친일 경찰들이 해방 후에도 동포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한다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경찰 쪽에서는 경비대를 사상적으로 문제 있는 청년들을 입대시킨 ‘불온집단’으로 보려는 시각이 있었다. 또한 두 집단 사이에는 건국 후 창설될 국군의 모체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신경전도 있었다.
딘 장군, 제주 진압에 군부대 출동 명령
제9연대는 4‧3 발발 초기 제주 경찰로부터 몇 차례 지원요청을 받았으나 이를 묵살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4월 17일 제9연대에게 제주사태에 대한 진압작전에 나서도록 명령함으로써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미군정은 제주도 사태가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경찰 병력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경비대 9연대에게 진압작전에 참여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아울러 부산 제5연대 1개 대대를 4월 20일부로 제주도에 파견하도록 명령했다.
군정장관 딘 소장은 4월 18일 제주도 군정관 맨스필드 중령에게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시달했다. “제주도의 폭도들을 진압하고 법과 질서를 회복하는데 군부대를 이용하라”고 지시하고, 기존의 9연대 이외에 바로 도착하게 될 국방경비대 추가병력(5연대 1개 대대)도 “귀관의 작전통제 하에 놓일 것”이라고 밝혔다.
딘 장군은 또 L-5 정찰기 2대를 배치한다는 사실과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하라고 명령한다. 물론 항복을 받아낼 것을 전제로 한 명령이었다.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이 내세웠던 전략, 즉 ‘선 선무 후 토벌’이란 단계적 해결방안도 여기에 근거한다.
4월 22일 9연대 김익렬 연대장은 맨스필드 중령의 지원 아래 L-5 경비행기를 직접 타고 나가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뿌렸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전단문을 보면 상대방을 자극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심지어 “제위의 불타는 조국애와 완전 자주통일 독립에의 불퇴전의 의욕을, 그리고 생사를 초월한 형제 제위의 적나라한 진의를 잘 알았다”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상대, 즉 무장대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동족상잔은 이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형제 제위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만반의 용의를 갖추고 있다”면서 회담을 제의했다. 그래서 성사된 것이 바로 ‘4‧28 평화협상’이다.
지금은 이 평화협상의 전체적인 모습이 상당히 드러나 있지만, 1989년 4‧3취재반의 취재 초기에는 안개 속처럼 흐릿했다. 과연 연대장과 무장대 대표와의 협상은 이뤄진 것인가? 협상의 참석자와 진행 상황은? 협상의 결과는? 이 협상을 미군정은 어떻게 본 것인가? 왜 성공했다는 협상이 파기된 것인가? 그리고 연대장은 왜 해임된 것인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4‧3취재반은 4‧28 평화협상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일어난 ‘5‧1 오라리 방화사건’에도 주목했다. 방화 행위자가 모호하다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9연대 초대 연대장을 지낸 장창국이 쓴 <육사졸업생>에는 이 방화사건이 ‘폭도들의 보복행위’란 시각과 ‘경찰이 서청을 시켜서 한 행위’라는 상반된 주장이 있다고 언급돼 있다.
4‧3취재반은 또 이 예민한 사건이 존 메릴의 논문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군 촬영반이 방화 현장을 지상과 상공에서 입체적으로 촬영해 기록영화를 만든 점, 『동아일보』 특파원이 ‘종군르포’라면서 현장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데, 한결같이 ‘폭도들의 소행’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윤락 중위를 찾아라”
이들 사건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평화협상에 참석했다는 9연대 김익렬 연대장과 정보주임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 대표 김달삼 등을 만나보아야 했다. 그러나 김달삼은 사살됐다는 소문과 함께 행방이 묘연한 상태고, 김익렬은 1988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그러면 기대를 걸 만한 사람은 이윤락 중위가 유일했다.
그를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고민하던 차에 <육사졸업생>에 나오는 “이 중위는 이후락 씨의 사촌동생으로, 부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를 근거로 부산에서 동아대학교를 나온 고홍철 기자(당시 정경부 차장, 현 <제주의 소리> 공동대표)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윤락 중위를 찾아내라”는 특별한 과제를 부여했다.
며칠 만에 고홍철 기자가 흥분된 어조로 “찾았다”는 보고를 해왔다. “부산에서 새마을금고 이사장도 하고, 목욕탕도 운영하는 것 같다.”는 근황을 전했다. 1989년 6월께였다. 나는 즉시 고 기자를 부산으로 급파했다. 이윤락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의 사촌 형으로 평통 자문위원을 맡고 있었다. 9연대 정보주임으로서 김달삼과의 평화협상을 추진했다가 파면당한 그는 41년 만에 평화협상에 관해 말문을 열었다.
그는 평화협상이 좌익세력의 농간으로 진행됐다는 등의 기존 관변자료에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고 그는 “협상 이후 서울로 호송된 후 육사 3기 동기인 김창룡 특무대장이 ‘좌익과 내통했다는 사실만 시인하면 신분을 보장하겠다’는 회유책을 쓰기에 ‘동기까지 잡아먹으려고 하느냐’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도 털어놨다.
부산에 파견된 고 기자로부터 이 중위가 당시 상황을 거침없이 증언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제주 초빙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2박3일의 제주 초청 제의를 흔쾌히 수락했다. 도착 첫날은 호텔 방에서 장시간 증언 채록을 했다. 다음날부터 모슬포 9연대 병영과 오라리 방화 현장 등을 둘러보며 보충적인 증언을 들었다.
그는 4‧28 평화협상은 김 연대장의 지시를 받고 자기가 직접 추진했다고 말했다. 1948년 4월 28일 정오께 모슬포 부대를 떠난 지프에는 김 연대장과 자신, 그리고 초대 제주도지사를 지낸 박경훈도 같이 탑승했다. 그러나 무장대 진영에 이르러 박경훈의 입장은 거절당했다고 한다.
김 연대장과 이 중위 두 명이 안내된 곳은 다다미방이었다. 구억국민학교 교장 관사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 방에는 김달삼과 참모 1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4명은 탁자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앉았다. 주로 김익렬 연대장과 김달삼 사이에 이야기가 오갔다.
회의는 장장 4시간 동안 진행됐다. 그 속에서 고성이 오가고, 회담이 결렬 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3가지 사항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 냈다. 협상 내용은 ①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② 무장해제는 점진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협상의 주인공 김익렬 연대장은 경남 하동 출신으로 당시 나이 27세였다. 무장대 총책 김달삼은 대정면 영락리 출신으로 당시 23세의 새파란 청년이었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李承晋). 일본 도쿄중앙대학 전문부 법학과를 나와 대정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남로당 대정면당 조직부장을 맡고 있다가 1947년 3‧1사건 이후 도당 조직부장을 거쳐 군사부 총책으로 급부상한 인물이다.
협상이 끝난 후 총성이 멈추었다. 그러나 곧이어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시간을 벌기 위한 폭도들의 술책에 연대장이 기만당했다.” “연대장이 폭도 두목과 내통했다.” “연대장이 기만전술로 귀순자들을 한데 모아 몰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5월 1일 제주읍 오라리에서 방화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모슬포 연대 본부에서 보고를 받은 김익렬 연대장은 대경실색했다. 무장대가 불을 질렀다면 그것은 평화협상을 파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김 연대장은 직접 사건 현장으로 달려갔다. 지프에 동승했던 이윤락 중위는 이렇게 건의했다고 한다.
“연대장님! 사실조사 결과 그놈들이 의도적으로 저지른 것으로 판명되면 우리도 본격적으로 토벌에 나섭시다.”
미 장교 “해안선 5km 이상은 적성지역”
1948년 5월 1일 불타는 오라리 마을에 김익렬 연대장과 이윤락 중위 일행이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30분께였다. 연대장 등이 탄 지프와 완전 무장한 경비병들을 태운 쓰리쿼터가 동시에 마을에 들어선 것이다. 그때 마을 안에 있던 경찰 트럭이 황급히 마을을 떠났다.
“그 당시 주변의 여러 상황을 볼 때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위험 부담을 안으면서도 연대장과 저는 어쨌든 더 이상의 유혈을 막아야 한다는 일념에서 평화협상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휴전기간에 저들이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도 대낮에, 제주 읍내와 가까운 마을을 습격한 것은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중대한 배신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9연대 정보주임 이윤락의 말이다. 9연대 정보요원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피습경위를 조사했다. 그런데 마을 주민 10여 명으로부터 진술을 받고서야 ‘폭도들이 한 행위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방화는 경찰의 지원을 받은 우익단체원들이 저질렀다는 것이다.
김익렬 연대장과 이윤락 중위는 조사 자료를 챙겨 바로 제주도 군정관 맨스필드 중령을 찾아갔다고 한다. 맨스필드 중령은 미군정 시절 제주도의 최고 지휘관이었다. 평화협상 결과에 만족해했던 맨스필드는 지난번 태도와는 달리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CIC(방첩대) 요원들이 내려와 있으니 그들을 만나 협의하라.”고 발을 뺐다.
김 연대장 등은 이상한 공기를 느꼈다. 그 길로 미군 장교들이 묵고 있다는 제주시내 서문통 소재 동화여관으로 향했다. 그 여관에는 G-2(정보참모부) 중령과 CIC 소령이 묵고 있었다. 김 연대장이 주민들의 진술서를 꺼내 들고 오라리 방화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그런데 CIC 소령은 “경찰 보고와 다르다. 그것은 폭도들이 한 것이다.”면서 연대장의 주장을 일축했다. 그래서 연대장은 정 못 믿겠으면 합동조사를 하자고 건의했으나 이마저도 묵살 당했다.
미군 장교는 한술 더 떠서 해안선에서 5㎞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적성지역’으로 간주하여 토벌을 강화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그 해 늦가을 제주도에서 감행된 초토화 작전의 개념이 바로 ‘해안선 5㎞ 이상…’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 해결을 시도하던 사람들에게 토벌을 강조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비오는 어느 날 우리가 중산간 지대에 갔을 때 보니까 어린아이가 닭을 안고 숨어 있더라, 그런 아이들도 빨갱이냐고 물었더니 ‘아이들까지도 빨갱이사상으로 물들어 있다’고 하더군요.”
나는 이윤락 중위의 증언을 들으면서 숨이 막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 중위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평화협상의 구도를 미군과 경찰이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유혈을 불러일으킨 초토화의 근간도 미군의 발상에서 시작됐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4‧3의 진로에 매우 중대한 시사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 사령관 “서둘러 사태 진압하라”
바로 이 지점에서 변화된 미군정의 전략을 확인할 수 있다. 1989년 취재 당시는 몰랐지만, 나중에 미군 자료들을 추가 입수하면서 밝혀진 사실들이다. 즉 4월 18일 군정장관 딘 장군의 지시로 제주 군정관 맨스필드 중령의 작전통제 아래 항복을 전제로 한 무장대와의 교섭에 역점을 두었다면, 4월 27일에 이르러는 하지 사령관이 개입하면서 진압에 비중을 두게 됐다는 점이다.
하지 중장은 주한 미군사령관이면서 미 24군단장이다. 이에 비해 딘 소장은 군정장관으로 민사업무를 주로 한다. 물론 군정장관도 민간업무 이외에 지방 차원에서의 군사적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군령권은 엄연히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다. 따라서 하지 사령관의 개입은 전면적인 군사작전의 시행을 의미한다.
4월 27일 제주도에서 광주 주둔 미 20연대장 브라운 대령, 24군단 작전참모부에서 파견한 슈 중령, 제주도 군정관 맨스필드 중령, 제주도 주둔 미 20연대 파견대장 가이스트 소령, 제주도에 파견된 경비대 제5연대 고문관 드루스 대위 등의 회동이 있었다. 미군 고급 장교들이 속속 제주에 들어온 것이다.
이 회합에서 브라운 대령은 하지 사령관의 지시사항을 맨스필드 중령에게 전달했다. 하지 사령관의 지시는 경비대를 동원해 서둘러 사태를 진압하라는 내용이 있을 뿐, 평화협상이나 무장대와의 교섭 건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4월 27일부터 경비대를 동원한 수색작전이 전개되었다. 이 작전은 부산에서 들어온 경비대 5연대 1개 대대 병력이 주로 참여했다. 미군은 정찰기를 띄워 작전 상황을 파악했다. 이 때의 작전은 본격적인 무력충돌이라기 보다는 탐색전 혹은 위세 과시용 작전이었다.
김익렬과 김달삼의 평화협상이 진행된 다음날인 4월 29일, 이번에는 딘 소장과 미 6사단장 워드 소장이 제주를 방문했다.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런데 4‧3취재반이 입수한 미군 및 경찰 자료, 영상기록, 기자의 현지 르포기사들은 한결같이 오라리 방화를 ‘폭도들의 소행’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주한미육군사령부 정보참모부 보고서(1948년 5월 3일자)는 「제주도 폭동/오라리 방화」란 제목아래 “오라리가 5월 1일 낮 12시 30분부터 3시간동안 폭도 50명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경찰이 도착하여 폭도들을 마을에서 축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출처는 ‘경찰 보고’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일부 자료에는 경찰과 우익단체의 소행이란 전혀 다른 주장이 언급되어 있었다.
이 중대한 사건의 진위는 무엇인가? 이 상반된 주장의 진위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물증’이 필요했다. 나는 그 물증을 오라리 현장에서 찾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4‧3취재반 기자들을 대거 투입하여 오라리 마을을 샅샅이 누비기 시작했다. 1989년 7월 한 여름이었다. <7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