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간 수정의견 376건 들어와
제주4‧3위원회는 진상조사보고서를 의결하면서 6개월 이내에 새로운 자료나 증언이 나타나면 추가 심의를 거쳐 보고서를 수정한다는 조건부를 달았기 때문에 수정의견 제출기간을 설정해서 공고했다.
즉 2003년 5월 1일부터 9월 28일까지를 의견 수렴기간으로 정한 것이다. 이에 앞서 4월 말에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5백부를 발간, 관련 기관‧단체 등에 배포했다. 본문만 실었음에도 보고서는 582쪽 분량으로 두툼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4‧3진상조사보고서는 모두 3차례 간행됐다. 2003년 2월말에 초안이 나왔고, 4월말에 조건부 진상보고서가 인쇄됐다. 그리고 수정의견을 반영한 최종본이 그해 12월에 발간된 것이다.
그해 9월 말까지 모두 20개 기관‧단체‧개인으로부터 376건의 수정의견이 접수됐다. 예상했던 대로 새로운 자료나 증언에 의한 수정의견은 별로 없었다. 기획단이나 위원회 회의에서 치열하게 논의됐던 성격 규정이나 용어에 대한 논란이 대부분이었다.
즉 국방부‧경찰청‧참전단체연합회‧제주경우회 등 군경 측은 과잉진압 중심으로 서술한 편향된 보고서라고 문제 삼으면서 ‘공산폭동론’과 남로당 중앙‧북한‧소련과의 관련성을 규명하고, 과장된 희생자 숫자를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유족회와 4‧3관련단체들은 군경 및 미군의 책임문제 서술이 미흡했고, ‘초토화작전’, ‘학살’ 등의 용어 부활, 학살책임자 명단 공개 등을 요구했다.
수정의견을 가장 많이 낸 곳은 보수연합단체인 ‘자유시민연대’였다. 무려 91건의 수정의견을 제출했다. 국방부도 54건의 수정의견을 제출했다. 이 역시 ‘무장봉기’를 ‘무장폭동’으로, ‘초토화’를 ‘폐허화’로 수정하라는 식이었다.
“벽에 튕긴 유탄에 사상” 어이없는 주장도
국방부 수정의견 가운데는 내가 보기엔 너무 어이없는 내용도 있었다.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앞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한 사건과 관련해서 “공포 쏜 것이 건물 벽 맞고 유탄되어 사상됐다”는 내용으로 수정하라는 주문이었다.
나중에 심의할 때 내가 “유탄으로 6명 사망, 6명 중상이란 표현이 국방부의 과학적인 분석인가?”고 따져 물은 적이 있다.
수정의견에 대해서는 1차로 전문위원실에서 분석해 검토 자료를 작성했다. 수정할 부분과 수정할 수 없는 부분으로 구분했다. 그에 합당한 근거를 제시했음은 물론이다. 주로 김종민 전문위원이 검토 자료를 작성했다. 수정의견 376건에 대해 일일이 분석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도표로 만들었다.
검토 자료 작성은 이틀간 꼬박 밤샘작업으로 했다. 그 이유는 첫째, 대부분의 수정의견들이 마감 날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예상 밖으로 총리실에서 추가 심사 일정을 서두르는 바람에 이틀 만에 검토 자료를 작성해야만 했다.
수정의견에 대해 구체적인 반론과 검토 의견을 써야했기에 그 분량이 많아 ‘수정의견 검토보고서’를 두 권으로 나누어 제본했다.
총리실이 심사일정 서두른 까닭은
총리실이 서두르게 된 사연은 이렇다. 그해 3월 4‧3진상조사보고서를 심의할 때 총리실의 태도는 보고서 통과를 부담스러워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6개월 조건부 의결 구상도 그런 분위기를 방증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때 분위기로 봐서는 6개월 후라도 보고서가 최종 확정될 것이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궁리 끝에 그해 10월 말에 제주도에서 열리는 제2회 제주평화포럼과 연계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당시에는 평화포럼을 제주발전연구원에서 주관하고 있었다. 나는 발전연구원 고충석 원장에게 제주평화포럼에 참석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4‧3에 대한 정부 입장을 발표하도록 하는 방안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고 원장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엔 제주평화포럼 업무는 청와대 외교안보실에서, 4‧3관련 업무는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주발전연구원 쪽에서 외교안보실로, 4‧3진영에선 정무수석실로 이 방안을 건의했다. 그러자 유인태 수석-장준영 비서관-기춘 행정관으로 이어지는 정무 라인에서 적극성을 보였다.
그해 9월 청와대 정무수석실은 10월 말 열리는 제주평화포럼에 대통령께서 참석해 가능하면 제주4‧3에 대한 정부 입장을 발표할 예정이니 그 이전에 진상보고서를 최종 확정했으면 좋겠다는 지침을 총리실에 시달했다. 이러한 지침 때문에 총리실의 걸음이 예상보다 훨씬 빨라진 것이다.
총리가 직접 주재하여 33건 수정 확정
2003년 9월 20일쯤, 제주4‧3사건처리지원단이 총리실에 보고한 ‘4‧3보고서 확정을 위한 검토소위원회 운영계획’에는 수정의견에 대한 검토소위를 몇 차례 가진 뒤, 4‧3위원회 전체회의를 ‘10월 20~23일’ 사이에 개최하는 것으로 상정했다.
그런데 고건 국무총리가 이 보고를 받고 “너무 늦다”면서 전체회의를 ‘10월 15일’에 개최하는 것으로 수정 지시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고건 총리는 서둘러 검토소위 제1차 회의를 9월 26일 소집했다. 수정의견 마감 이틀 전이었다. 그해 3월 진상보고서를 조건부 의결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검토소위에는 종전의 멤버 즉, 국방‧법무장관, 법제처장 등 정무직 위원과 신용하(서울대 명예교수)‧김삼웅(전 대한매일 주필)‧유재갑(경기대 교수‧예비역 육군대령) 등 민간인 위원에다 역사학 전공인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위원이 추가됐다.
종전처럼 박원순 기획단장, 강택상 지원단장과 나도 검토소위 회의에 참석했다. 초대 김한욱 지원단장이 정부기록보존소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강택상 단장이 제2대 4‧3지원단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고건 총리는 이날 회의에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를 마무리하는 작업은 역사적인 일이며, 중차대한 일”이라고 강조하고 “민간인 위원들이 수정의견을 잘 검토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어 달라”고 당부했다. 또한 고 총리는 회의 주관위원으로 신용하 위원을 위촉했다. 이날 회의에서 검토소위 운영방향도 협의됐다.
신용하 주관위원 주재로 검토소위 제2차 회의는 10월 1일, 제3차 회의는 10월 4일 잇달아 열렸다. 그리고 제4차 회의는 10월 7일 고건 총리의 주재아래 총리 집무실에서 열렸다. 이때는 정부 측 위원들도 모두 참석했다.
제4차 검토소위에서 수정의견 중 33건을 수정하는 ‘검토소위 수정안’을 확정하고, 이를 4‧3위원회 전체회의에 상정하기로 결정했다. 수정 내용은 표현 수정이나 삭제가 25건, 사실관계 내용 수정 6건, 새로운 자료에 의한 내용 추가 2건 등이었다. 앞에서 밝혔지만 새로운 자료나 증언에 의한 수정사항은 별로 없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이런 수정의견보다 오히려 보고서 서문(序文)에 담길 내용을 둘러싸고 열띤 공방이 있었다.
신용하 위원이 이 보고서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보‧혁 간의 끊임없는 소모적 논쟁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전제하고 “동 보고서는 4‧3사건의 성격 규정과 역사적 평가를 위한 것보다는 4‧3특별법의 목적인 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및 유족의 명예회복을 이행하기 위한 것”이란 내용을 서문에 밝히자고 제안하면서 논란이 일어난 것이다.
어쨌든 수정의견 심의는 이런 선에서 마무리됐다. 나는 회의가 끝난 후 수정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고건 총리가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고 총리가 검토소위 위원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나에게 “그동안 수고했다”면서 와인을 따라줬다.
고 총리는 그 자리에서 지난번 4‧3위령제 때 있었던 파동을 상기시키면서 아쉬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일부 시민단체 회원들이 자신의 행사장 입장을 막았던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나종삼의 “반쪽짜리 보고서” 기고 파문
4‧3진상조사보고서를 최종 확정할 날이 다가왔다. 제8차 4‧3위원회 전체회의는 10월 15일 오후 5시 정부중앙청사 국무총리실 대회의실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일이 터지고 말았다.
나와 같은 사무실에서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던 나종삼 전문위원(예비역 육군중령)의 기고가 『조선일보』에 크게 실렸다. 제목은 “4‧3보고서 반쪽짜리 되나”였다.
기고 내용은 제주출신의 전문위원들이 진상을 규명하는 보고서가 아니라 인권침해에 초점을 맞춘 한풀이식의 인권보고서를 썼고, 자신의 수정의견이 묵살됐으며, 심사소위원회의 졸속 처리로 잘못된 부분을 수정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진상조사보고서가 대단히 문제가 있는 것처럼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4‧3진상조사보고서를 최종 확정해야 하는 날, 이런 내용이 보도됐으니 난리가 났다. 그것도 나와 같이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작업에 참여했던 전문위원이 기고했으니 매우 난감했다. 이 불똥이 잘못 튀어서 보고서 최종 통과를 막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일단 급한 불을 꺼야 한다는 생각에 ‘나종삼 전문위원의 조선일보 기고문에 대한 반박자료’를 만들어 총리실과 행정자치부 기자실에 뿌렸다. 나 위원 기고의 문제점에 대해 9개 항의 도표를 만들어 조목조목 반박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 진상조사보고서 수정안이 최종 확정되면 회의 종료 후 그 결과와 함께 브리핑하겠다고 알렸다.
그래선지 기자실에선 별 다른 파장이 없었다. 만약에 ‘반쪽 보고서’란 나종삼 위원의 주장이 정당하다면 언론이나 정무직 위원들이 가만히 묵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아닌가.
국방부 차관 향해 따져물은 신용하 위원
오후 5시 정부중앙청사 국무총리실 대회의실에서 제8차 4‧3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리기 직전 또 다른 반전이 시작됐다. 상기된 얼굴로 회의장에 들어서던 신용하 위원이 나를 보더니 “오늘 신문에 기고한 전문위원이 누구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수정의견 검토소위원회 주관위원이었던 그는 “소위원회에서 수정의견들을 졸속처리했다”는 기고문 내용에 발끈한 표정이었다.
내가 “군 출신 전문위원”이라고 답하자마자 신용하 위원은 국방장관을 대리해 회의장에 앉아 있었던 유보선 국방차관에게 포문을 열었다. 걸걸한 큰 목소리로 “뭐가 졸속 처리됐느냐?”고 따져 물은 것이다.
유 차관은 검토소위에 두 번이나 참석했다. 갑작스럽게 공격을 받은 유 차관은 “신문 기고문과 나는 무관하다. 왜 그런 질문을 나에게 하느냐?”면서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기고문의 파장은 그걸로 끝나버렸다.
고건 총리, 양측간 격한 논쟁에 종지부
고건 총리가 주재한 전체회의에서 박원순 기획단장이 ‘검토소위 수정안’을 보고했다. 즉 진상조사보고서 수정의견 376건이 접수됐고, 네 차례 검토소위에서 심의한 결과 33건을 수정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수정안에 대해 군경 측 민간인 위원들이 한 목소리로 “수정내용이 미흡하다”면서 재심의를 요구했다. 이에 맞서 다른 민간인 위원들은 “6개월을 끌었는데, 새로운 자료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계속 미룰 수는 없다”면서 의결을 촉구했다.
이번에도 강금실 법무장관이 단호하게 즉각 통과를 주장했다. 그러다보니 위원들 사이에 고성이 오갔다. 이 회의가 비공개로 열렸기 때문에 기자들은 회의장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신문은 나중에 회의장 분위기를 전하면서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서 위원들의 고성이 문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격한 논쟁이 벌어져 진상보고서 채택 여부가 다시 보류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때 고건 총리가 적극성을 보였다. 고 총리는 보고서 서문에 “4‧3특별법의 목적에 따라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중점을 둬 작성됐고 사건의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는 차후 새로운 사료나 증거가 나타나면 보완할 수 있다”고 밝히겠다면서 설득했다.
고 총리는 그래도 군경 측 위원들이 계속 반발하자 “제주도민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면서 위원 다수 의견으로 진상보고서 최종안을 통과시켰다. 그동안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날 회의에는 위원 20명 중 17명이 참석했다. 진상조사보고서 최종안에 대한 의결서에 서명을 받은 결과, 총리 등 12명이 찬성을, 군경 측 민간인 위원 3명이 반대를, 국방부장관 등 2명이 기권 의사를 표시했다.
진상조사보고서 통과 직후 이에 반발해 한광덕 전 국방대학원장과 이황우 동국대 교수 등 군경 측 민간인 위원 2명이 사퇴했다. 아울러 조선일보 기고 등으로 파문을 일으킨 나종삼 전문위원도 사임했다. 이런 반발에도 진상조사보고서 최종 의결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로써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적인 사건임에도 ‘공산폭동’이란 이데올로기적인 평가에 짓눌려 왜곡되고 뒤틀렸던 제주4‧3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이 비로소 확정된 것이다.
그것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제주4‧3에 대한 인식을 ‘공산폭동’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바꾼 것을 의미한다. 드디어 제주도민과 희생자, 유족들은 이념적 누명을 벗게 된 것이다.
나는 2004년 제주도의회 발간 『의회보 제19호』에 기고한 ‘4‧3진상조사보고서 채택과 대통령 사과의 의의’란 제목의 글에서 4‧3진상조사보고서의 특징과 의미를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한 바 있다.
‘이념’ 보다 ‘인권침해 규명’에 역점
1) 제주4‧3 발생 55년 만에 정부 차원에서 조사된 최초의 4‧3종합보고서. 2) 사건의 배경‧전개과정‧피해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다루면서 인권침해 규명에 역점을 둔 보고서. 3) 국가공권력의 인권유린 등 정부 과오를 인정한 보고서. 4) 대규모 인명피해를 유발한 초토화의 책임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미 군사고문단 등에 있다고 규정한 보고서. 5) 한국현대사에서 특별법에 의해 과거 역사를 재조명한 최초의 보고서.
진상조사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이렇다. ‘4‧3사건의 정의’를 “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로 정리했다.
따라서 진상조사보고서는 4‧3의 성격에 대해서 첫째,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이후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연계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가 있었고, 둘째,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는 1954년까지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항쟁’이나 ‘통일정부 지향’이란 성격은 그 속에 조심스럽게 녹여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다만 ‘4‧3항쟁’이란 용어를 쓰는 순간 정부보고서로서의 통과는 요원해지기 때문에 직접적인 표현을 피해 갔다.
발발원인도 복합적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파악했다. 시점은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한 ‘1947년 3‧1발포사건’이었고, 그 이후 육지출신 도지사에 의한 극우적 행위, 응원경찰과 서청에 의한 검거선풍, 테러, 고문 등이 있었다.
이런 긴장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정부선거 반대투쟁에 접목시켜 경찰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 무장봉기의 시발이라고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는 없었다는 것이 조사 결론이다.
특히 대량 인명 피해의 결정적 요인은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에 있음을 분명하게 밝혔고, 그 책임에 대해서 1차적으론 강경진압작전을 주도한 9연대장과 2연대장에게, 최종 책임은 계엄령 선포와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을 지시한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던 미군정과 미 군사고문단에 있다고 지적했다.
진상조사보고서에서 4‧3 희생자 수를 25,000~30,000명으로 추정했고, ‘4·3 군법회의’를 정상적인 법적 절차를 밟지 않은 불법적인 재판으로 규정했다.
진상조사보고서는 결론적으로 1948년 제주 섬에서 이뤄졌던 일들은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 범죄방지 국제협약을 어겼으며, 국제법이 요구하는 문명사회의 기본원칙이 무시되었다고 지적했다.
법을 지켜야 할 국가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재판 절차 없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살상한 점, 특히 어린이와 노인들까지도 살해한 점은 중대한 인권유린이자 역사적 과오임을 밝혔다. 또한 무장대에 의한 민간인 살상행위도 분명한 과오라고 지적했다.
당시 제주도는 세계 냉전체제의 최대 피해 지역이었으며, 바로 이런 이데올로기 문제가 4‧3의 진상규명을 50년 동안 억제해온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법률 절차로 확정된 ‘법정보고서’ 권위획득
결국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4‧3을 인권 중심으로 규명했다는 특징이 있다. 즉 과거 이데올로기 문제로만 치우쳤던 4‧3 문제를 인간의 존엄성, 인권 가치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재조명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용어의 정리인데, 진상조사보고서에서 4‧3의 전체적인 용어는 특별법 상의 ‘제주4‧3사건’을 그대로 인용했다. 그러면서도 4월 3일 상황에 대해서는 종전 관변자료에서 사용했던 ‘폭동’이란 용어가 아닌, ‘무장봉기’로 정리했다.
4‧3진상조사보고서는 법률 절차에 의해 확정된 ‘법정보고서’란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보고서 확정 이후에는 공적 영역에서 4‧3문제를 언급할 때에는 법정보고서의 용어를 준용해야 하는 ‘권위’를 갖게 됐다는 뜻이다.
보고서 확정 직후에 종전처럼 ‘폭동’이란 용어를 썼다가 항의를 받고 수정한 교육인적자원부의 ‘공문 파동’과 국방부의 ‘6‧25전쟁사 파문’이 좋은 사례이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