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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10) … 「4‧3은 말한다」 "배경부터 살폈다"

1989년 4월부터 『제주신문』에 매주 2회씩 「4‧3의 증언」이 연재되고, 덩달아 김익렬 장군의 유고록까지 발표되자 4‧3에 대한 제주사회의 관심이 높아졌다. 발표 내용도 기존 자료의 왜곡사례를 지적하는 수준을 뛰어 넘어 미군정과 경찰의 조작사실까지 들추어내자 놀라움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예의 주시하는 분위기였다.

 

공안당국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제동을 걸고 싶었지만 연재되는 내용들마다 신뢰성 높은 근거가 제시되는 등 빈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고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월간지 『사회와 사상』에 연재물 그대로 게재

 

그 무렵 도서출판 ‘한길사’ 김언호 대표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길사는 오랫동안 금기시돼 왔던 해방 직후의 한국현대사 관련 서적을 잇달아 출간함으로써 출판계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김 대표는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으로 대학가와 지식인 사회에서 잘 읽히는 도서를 만드는 출판사 사장으로 유명했다. 198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전 6권)도 그의 기획 작품이었다.

 

김 대표는 나에게 「4‧3의 증언」 연재내용을 의미 있게 보고 있다면서 자신이 펴내고 있는 월간 『사회와 사상』에 그대로 전재하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뜻밖이었다. 중앙의 유명 출판사 대표가 4‧3에 보여준 관심과 제안은 이제 막 속도를 내기 시작한 취재반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월간 『사회와 사상』은 ‘사상의 대중화’를 내걸고 1988년 9월 창간됐다. 민주화 바람을 타고 진보적 지식인들이 총결집해서 만들어낸 월간지였다. 『사회와 사상』의 편집위원으로 강만길(고려대 교수) 고은(시인) 김진균(서울대 교수) 리영희(한양대 교수) 박현채(조선대 교수) 등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진보학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김언호 대표는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 언론에서는 매우 드물게 신문 연재물 내용 그대로 월간지에 발표하게 되었다. 첫 연재는 1989년 10월호에 발표됐다. ‘한국현대사의 진실을 밝히는 대하기획 집중연재’란 제목이 더 붙여졌다. ‘편집자의 말’을 통해 연재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제주신문의 4‧3특별취재반이 「4‧3의 증언」을 특별연재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오류투성이의 자료들이 계속 인용되는 오류가 잇따라 저질러지고 있음을 밝혀냈고, 미군과 극우권력이 조작해낸 사건의 시말을 밝혀내기도 했다.

 

역사와 역사의식의 대중화를 위하여 「4‧3의 증언」은 널리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지방신문인 제주신문의 배포망은 한정되어 있다. 한국 신문 사상 획기적인 기획으로 평가되는 「4‧3의 증언」을, 민족사의 정당한 복원이라는 차원에서 우리는 흔쾌히 본지에 싣기로 했다.“

 

이렇게  「4‧3의 증언」은 『사회와 사상』 1989년 10월호(통권 14호)부터 1990년 1월호(통권 17호)까지 모두 4차례 발표됐다. ‘김순애 소녀가 겪은 4‧3’을 시작으로 4‧28 평화협상, 5‧1 오라리 사건, 5‧5 최고수뇌회의의 전모와 초토화를 거부한 김익렬 연대장의 시련, 제주도 최고사령관 브라운 대령의 파견 등 1948년 4~5월 상황에 대한 신문 연재내용이 그대로 실린 것이다. 『사회와 사상』 게재는 「4‧3의 증언」이 연재될 때마다 계속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연재는 뜻하지 않게 중단되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제주신문 「4‧3의 증언」 연재 자체가 중단되는 사태를 맞게 된 것이다. 그것은 1989년 말부터 시작된 이른바 ‘제주신문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제주신문 폐업으로 「4‧3의 증언」 중단

 

‘제주신문 사태’는 그해 11월부터 경영권 확보와 언론 민주화를 둘러싼 충돌로 불거지기 시작했다. 전두환 세력의 지원을 받은 경영주와 언론 민주화를 갈구하던 기자들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70여 일 간의 장기농성으로 이어진 이 사태는 1990년 1월 5일 ‘제주신문 폐업’이란 회사 측의 극한 처방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참언론을 부르짖던 110명의 사원이 집단 해고됐다.

 

4‧3취재반 기자들도 대부분 해고 대열에 끼었다. 덩달아 『제주신문』에 1989년 4월 3일부터 매주 2회씩 연재되던 「4‧3의 증언」은 그해 12월 5일자에 실린 제57회를 끝으로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다. 8개월 동안 연재한 내용은 1948년 4월과 5월 상황에 불과했다.

 

해직 언론인들은 새 신문 만들기 작업에 착수했다. 해직된 사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신문 창간이었다. 신문 창간의 기초 자본은 사원들의 출자금과 도민주 공모로 마련했다.

 

그렇게 해서 1990년 6월 2일 ‘제주인의 자존심’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창간된 것이 『제민일보』다. 제민일보사는 처음에 제주시 이도2동 소재 제주감귤협동조합 창고를 빌려 신문을 만들었기 때문에 ‘창고 신문사’란 별칭이 붙기도 했다.

 

 

 

『제민일보』 탄생과 재개된 4‧3연재

 

그동안 중단됐던 4‧3 연재는 『제민일보』 창간호부터 시작됐다. 그때 새로 붙여진 기획물 제목이 바로 「4‧3은 말한다」이다. 이 제목에 대해 의아해 하는 독자들도 있었다. 「4‧3을 말한다」로 해야지 어떻게 「4‧3은 말한다」가 될 수 있냐며 어법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4‧3취재반은 ‘우리가 4‧3을 이야기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4‧3이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하자’는 뜻에서 그런 제목을 붙였다. 이 제목에는 ‘선입견을 갖지 말고 무슨 일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진실을 충실하게 취재하고 알리면 4‧3의 본 모습이 저절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취재반의 의중도 담겨 있었다.

 

이 때도 사건의 성격을 말해주는 꼬리표 없이 ‘4‧3’으로 표기했다. 성격 논쟁에 휘말리지 않고 4‧3 진실을 밝히는 것이 우선이라는 전략이었다. 다만 새 연재를 하면서 획기적으로 방향을 튼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4‧3 연재 시점에 관한 것이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제주신문』에서 「4‧3의 증언」을 연재하면서 첫 연재의 시점을 무장대가 공격한 1948년 4월 3일로 잡음에 따라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한 배경이나 원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없이 상황 전개에만 매달리는 집필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부담을 덜기 위해서 4‧3 이전 2기와 4‧3 이후 8기 등 모두 10기로 시기 구분을 하긴 했지만,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러다보니 1948년 4월과 5월 상황을 다루면서도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전사(前史)라 할 수 있는 1945~47년 상황을 자주 언급하게 된 것이다.

 

가령,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 보고서인 ‘G-2 보고서’를 설명하다보면 1945년 38선 이남에 대한 미군 점령 상황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진압명령을 받은 9연대의 출동 상황을 언급하면서 1946년 11월 발족한 9연대의 창설 과정을 서술하게 되었고, 4‧3의 원인을 다룰 때는 저절로 1947년 ‘3‧1 발포사건’을 단편적이나마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집필하면서 곤혹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주신문』 「4‧3의 증언」에서는 1948년 5월까지의 ‘4‧3 후 제1기’의 상황을 서두에 다룬 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사건의 배경이 되는 해방정국, 즉 ‘4‧3 전 제1‧2기’의 과정을 살필 계획이었다.

 

그런데 『제민일보』에 「4‧3은 말한다」라는 새로운 연재가 시작되면서 이 문제가 저절로 풀리게 되었다. 즉 「4‧3은 말한다」 연재부터는 앞에서 밝힌 시기에 따른 부담감을 털어내고 본격적으로 해방정국 상황부터 다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주신문 사태’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시련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4‧3 연재만 놓고 본다면 앓던 이를 낫게 한 전화위복의 한 과정이 됐다. 드디어 4‧3이 왜 일어났는지, “억압에 못 이겨 민심이 폭발했다”는 주장은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인지 본격적인 취재에 나서게 된 것이다.

 

『제민일보』 4‧3취재반도 재구성했다. 1988년 3월 『제주신문』 4‧3취재반은 외부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16명이란 매머드급으로 구성했지만, 막상 취재반을 운영해보니 이들을 풀가동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제민일보』 4‧3취재반은 6명으로 축소 편성했다. 16명에서 6명으로 줄였기 때문에 단출한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특별취재반 6명이란 숫자도 결코 적은 인원은 아니었다. 새로 편성된 4‧3취재반원은 양조훈(정경부장), 서재철(사진부장), 고홍철(정경부 차장.현 제주의 소리 공동대표), 고대경‧김종민‧강홍균(기자.현 제주도 소통정책관)이다. 나중에 재편할 때 김애자 기자가 합류했다.

 

사건배경 추적, 해방 후 상황부터 집중 연재

 

「4‧3은 말한다」 기획물은 ‘해방 전후의 제주상황’부터 연재하기 시작했다. 특히 해방 직전 일본군 요새로 전락한 제주도 상황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일본 본토가 미군에게 점령 당할 위기에 놓이자 1945년 3월 제주도를 본토 방어의 최후 보루로 삼는 ‘결(決)7호 작전’을 결정한다.

 

그래서 만주 관동군 예하부대인 제111사단, 제121사단과 서울 주둔 제96사단 등 총 7만 명의 대군을 제주로 집결시키고, 이를 통솔할 제58군사령부를 창설한다. 1945년 8월 일본군이 작성한 제주도의 병력 배치도를 보면, 미군이 상륙했을 때 일본군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준비했던 사실도 알 수 있다.

 

 

 

일본군의 전략, 주요부대 배치도 및 병력 숫자 등을 상세히 보도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군 잔무정리부’가 1946년에 작성한 「조선에서의 전쟁 준비」라는 일본군 문건을 입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어로 된 이 귀중한 자료는 당시 도쿄대 대학원에 유학 중인 강창일 현 국회의원이 알려줘 구입하게 된 것이다.

 

4‧3취재반이 해방 공간 상황에서 더욱 주목한 사실은 ‘6만 명에 이르는 귀환인구’였다. 일제는 1920년대 오사카를 중심으로 군수 산업을 일으키면서 노동력을 제주사람들로 채워나갔다. 제주~오사카 사이에는 ‘군대환(君代丸)’ 같은 정기여객선을 띄웠다.

 

1930년대에 일본 노동시장에 유출된 제주인은 5만 명에 이르렀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쟁터와 홋카이도와 사할린 탄광지대 등에 강제로 끌려갔던 청년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제주사회는 귀환한 청년들로 들썩거릴 수밖에 없었다. 해방 직전 22만 명이던 제주도 인구는 줄이은 귀향 행렬로 28만 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이런 인구 변동률은 전국 최고 수준이었다.

 

귀향자들이 고향에서 먼저 한 일은 건국 준비를 위한 자치활동과 마을마다 학교를 세우는 교육 활동이었다. 자치활동은 초기 인민위원회 활동으로 표출되었다. 당시 뜨거웠던 교육 열기는 1945년 8월부터 1947년 12월 사이에 제주도에 중등학교 10개소, 국민학교 44개소가 설립됐다는 통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4‧3을 언급한 기존의 관변자료에는 제주사람들이 뭣도 모르고 사회주의 사상에 휘말렸다는 의미로 “무지몽매(無知蒙昧)해서…”라는 표현을 곧잘 썼다. 섬 주민들을 무식한 사람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부 유족들도 이런 입장에 동조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신들의 부모가 일자무식한 촌부였음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것은 ‘사상을 가질만한 빨갱이’가 아니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레드 콤플렉스’의 피해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해방공간 상황을 취재하면 할수록 “그게 아니었구나” 하는 느낌이 가슴에 깊이 와 닿았다. 1945년 해방정국에서 전국에서 교육 수준이나 열의가 가장 높았던 곳이 바로 제주도였다. 그 뿐만 아니라 비록 일본이란 한정된 무대이지만 국제적인 경험을 많이 쌓았던 사람들도 역시 제주 청년들이었다.

 

“귀환인구 6만 명” 중요한 연구테마

 

4‧3의 근원적 배경을 살피고자 할 때, 1945년 해방 직후 1년 사이에 일본 등지에서 제주도로 돌아온 귀환인구가 6만 명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연구테마다.

 

『제주도세요람』 등에 의하면, 1934년 일본에 체류 중인 제주인은 5만 45명이다. 당시 제주도 인구가 18만 8000여 명으로 집계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젊은 사람 절반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뜻이다. 그들은 일본에서 저임금과 민족차별이란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그래서 더욱 “배워야 한다”는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일본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자 동생, 자녀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여 교육을 시켰다. 인구 비례로 볼 때 제주도가 한반도 전체에서 가장 많은 고학력자를 배출한 배경도 여기에 있었다.

 

미군정은 1947년 2월에 38선 이남의 각 지역 교육수준을 조사한 바 있다. 15개 군지역의 15세 이상 남자들을 대상으로 소학교 이상의 졸업 비율을 조사했는데, 북제주군(지금의 제주시)이 36%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창원(27%), 강릉(26%), 울산(24%), 공주(23%), 충주(23%), 안동(22%), 보성(19%), 영천(17%), 진안(17%), 횡성(12%) 등과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농촌사회였던 제주도는 이들 귀환자들로 인해 변화의 새 바람이 일었다. 그것은 진보적인 바람이었다. 마을마다 야학과 학교 세우는 일에 앞장선 것도 이들이었다. 또한 자주 독립국가를 꿈꾸는 건국 운동에도 매진했다. 그것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 활동과 곧이어 출범한 인민위원회 활동으로 표출됐다.

 

존 메릴 “미군정 중대도 인민위원회 이용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 섬에서 하나밖에 없는 정당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정부행세를 한 유일한 조직체였다.”

 

이 글은 1945년 전남군정청 정보국장으로 근무했던 그랜트 미드 대위가 자신의 저서(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에 기록한 내용이다. 실제로 제주도는 1945~1946년 시기에 인민위원회의 통제 속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것은 미군 자료를 중심으로 4‧3연구 석사논문을 처음 쓴 존 메릴 박사도 인정한 사실이다. 그는 한술 더 떠 “미군정 중대도 인민위원회를 이용했으며, ‘전심전력의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고 서술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학술적인 연구 결과와 대중적인 느낌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 그것은 ‘인민’이란 용어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이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공고해진 반공이데올로기는 ‘인민위원회’ 하면 먼저 ‘인민재판’이란 단어를 연상케 했다.

 

 

이런 주술에 걸려 있던 나도 인민위원회 대목에선 주춤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정면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태동에서부터 조직, 활동내용, 특징, 활동했던 인물까지 취재해서 상세히 보도했다.

 

이 뿐만 아니라 미군정 실시과정, 신탁논쟁과 좌우 정치 갈등, 제주도제 실시의 정치적 의미, 콜레라와 대흉년, 미곡정책의 실패과정, 모리배 비호사건 등 해방정국에서 일어난 상황을 다루다보니, 예상보다 연재가 길어졌다. 제주 상황뿐만 아니라 때로는 한반도 정세, 국제적인 변화 흐름까지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4‧3은 말한다」는 1948년 4월 3일 이후의 상황은 고사하고, 그 촉발 원인이 되는 1947년 3월 1일 발포사건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그 이전, 즉 1945년 해방공간에서 1947년 2월 말까지의 상황을 연재한 분량만 54회에 이른 것이다. 그러다보니 주변에서 “4‧3 연재는 언제 하는 것이냐? 지루하다.”는 볼멘소리를 종종 듣게 되었다.

 

나도 집필하면서 설렁설렁 건너뛸까 하는 유혹에 빠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수면 밑에 가려진 배경 부분을 제대로 규명해야 4‧3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아니냐?”는 자문과 다짐을 하면서 그 유혹을 떨쳐 나갔다. <11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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