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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글래디에이터 (13)

코모두스 황제와 노예검투사 막시무스는 AD 180년 어느날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 한복판에 서서 수만명의 군중 앞에서 칼을 뽑아 들고 최후의 결투를 벌인다. 결국 두 사람은 그곳에서 죽음을 맞는다. ‘어쩌다가’ 두 사람이 그날 그곳에서 그렇게 맞서고 그렇게 죽게 됐을까. 누구 탓일까.
대중예술에서 극작가와 감독의 시선은 주인공 편향적이고 선악善惡 대결구도에 맞춰져야 한다. 영웅은 절대선이어야 하고, 빌런은 절대악이어야 한다. 막시무스는 강직하고 사심 없고 당당하다. 반면 코모두스는 무능하고 욕심 많고 사악하기 짝이 없다. 막시무스뿐만 아니라 관객 모두의 ‘공공의 적’으로 자리매김한다.
 

코모두스를 향한 막시무스의 사무친 원한에 모든 관객이 공감한다. 코모두스를 죽이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는 복수심도 수긍이 간다. 막시무스가 아버지처럼 모셨던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살해하고 자신의 처자식마저 불태워 죽인 원수가 코모두스이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죽은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내 처자식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카메라도 막시무스의 영웅적인 전투와 일편단심 로마와 황제를 향한 충절, 그리고 막시무스의 아내와 아들이 나무에 매달려 불타 죽은 모습에 막시무스가 처절하게 절규하는 모습을 클로즈업한다. 

반면 코모두스는 황제의 자리에 눈이 뒤집혀 자비롭고 인자하고 노쇠한 자기 아버지를 목 졸라 죽이는 최악의 장면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코모두스도 인간이라면 죄책감을 느꼈을 법도 하지만, 카메라는 비껴간다. 그런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극의 긴장감이 떨어진다. 주인공의 비극은 그 원인이 명백해야 하고, 타도해야 할 악당은 100% 순도 높은 절대악이어야 한다.

그럼 아우렐리우스 황제나 막시무스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고, 코모두스는 ‘무고’한 아버지와 막시무스의 가족을 죽여버린 미친놈이거나 악마였을까. 막시무스와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당한 봉변이 온전히 코모두스만의 탓이었을까.
 

본업이 황제라기보단 철학자에 가까웠을 만큼 지혜가 넘쳐났다는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정작 아들 코모두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치명적인 과오를 저지른다. ‘충족되지 못한 기대(expectation)는 사람을 좌절(frustration)하게 하고, 좌절감은 공격성(aggression)으로 나타난다’는 간단한 심리학적 진실을 놓친다. 

역설적이지만 좌절과 분노는 ‘기대’란 자양분을 먹고 자란다. 자신이 황제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코모두스는 갑자기 아버지로부터 ‘너 대신 막시무스를 후계자로 삼겠다’는 통보를 받는다. 그 좌절감이 폭력적인 공격으로 나타날 것은 자명하다.

자신의 후계자 변경이 코모두스를 얼마나 분노하게 할지 몰랐다거나, 알고도 대비를 하지 않았다면 분명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불찰이다. 코모두스를 탓하기보다 어쩌면 자신을 탓해야 할 일이다.

막시무스의 처자식이 불에 타죽은 것은 막시무스 자신이 정치의 회오리바람을 슬기롭게 피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화 속 게르만과의 전투 현장에 아우렐리우스 황제, 황태자 코모두스, 막시무스 장군이 나타나자 병사들이 일제히 환호한다. 

그러나 그 환호는 황제와 황태자를 향한 게 아니라 오롯이 막시무스를 향한 것이다. 막시무스를 내심 후계자로 정하고 있던 아우렐리우스 황제로서는 오히려 마음 홀가분한 일일 수 있겠지만, 코모두스로서는 가슴 철렁할 장면이다.

막시무스가 어떻게든 수습해야 할 장면이었는데, 막시무스는 한술 더 떠서 전선을 시찰하고 말에 오르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진흙투성이 장화를 두 손으로 잡아 말 안장에 끼워주는 충심을 보인다. 

막시무스로서는 아버지 같은 황제를 향한 ‘충심’이었겠지만 코모두스의 눈에는 ‘불륜’의 현장처럼 보일 수 있다. 4성 장군이 대통령에게 할 일은 아니다. 코모두스 눈에는 국정을 농단하는 ‘정치군인’으로 보인다. 예상대로 막시무스는 코모두스의 제거 대상 1호가 된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나 막시무스는 모두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파고 들어간 꼴이다.
 

살기 고달프면 부모 잘못 만난 탓이고, 내 자식이 잘못되면 나쁜 친구 탓이고, 이혼은 항상 상대 탓이다. 취업이 어려우면 정부를 탓하고, 부동산이나 주식ㆍ코인 ‘투기’에 실패해도 정부를 탓한다. 좋은 일은 모두 내가 잘나서이고, 나쁜 일은 모두 남의 탓이다.

어느 ‘교통법규 준수 여론조사’ 결과가 흥미롭다 못해 신비롭다. ‘당신은 교통법규를 준수하냐?’는 질문에 80.0%가 ‘그렇다’고 대답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교통법규를 잘 지킨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80.0%가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모든 잘못은 다른 사람들이 저지르는 것이지 나는 아니다. ‘남 탓’이 혹시 정신건강에는 다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상황 개선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내 탓’이 발전의 원동력이다.

공자님도 사람들이 남의 잘못에만 밝고 자신의 잘못에는 어둡다고 혀를 차고, 맹자님도 불행이 닥치면 그 원인을 먼저 자신에게서 찾기를 권하고, 예수님도 ‘내 눈 안의 들보를 먼저 보고 다른 이들의 눈에 있는 티끌을 보고 빼내어 주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남 탓을 먼저 하는 걸 보니, 나의 허물에 엄격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에 관대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은 모양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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