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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글래디에이터 (2)

황제이자 아버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살해한 코모두스에 의해 처형되기 직전 극적으로 탈출한 막시무스는 황야에서 정신을 잃는다. 노예상인이 막시무스를 ‘주워’ 북아프리카 검투사 에이전시에 넘긴다. 로마 최고의 장군이었던 막시무스에게 시골 검투경기 정도는 ‘껌’이다. 훈련이나 연습경기도 건너뛰고 곧바로 프로 데뷔한다.

 

 

 

 

막시무스는 지금의 모로코나 알제리 어디쯤으로 보이는 사막의 장터에 흙으로 지어진 조악한 원형경기장에서 데뷔한다. 노예상인들이 주워오거나 사오거나 사냥해온 노예 검투사들이 서로를 아무 이유 없이 죽고 죽이는 살육극을 기대하는 관중들의 눈빛이 폭력을 갈망하는 ‘욕정’으로 이글거린다. 경기장에는 이미 살육자들이 기괴한 가면과 복장을 하고 어마무시한 무기를 휘두르며 희생양들을 기다리고 있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통로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줄지어 선 검투사들의 모습은 사형 순서를 기다리는 죄수들 같다. 이제 곧 지옥문이 열릴 것이다. 한 선수는 덜덜 떨며 흙바닥에 오줌을 질질 싸고 있다.

 

인간이 즐거움을 위해서 다른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다. 오줌 싸던 선수는 문이 열리자마자 철퇴에 맞아 죽는다. 차례차례 배가 갈라지고, 목이 잘리고, 머리통이 으깨져 죽어간다. 상대를 번쩍 들어 경기장 담벽에 돌출된 뿔에 꽂아버리기도 한다.

 

폭력의 정도가 너무도 적나라해 ‘외설(猥褻)’스럽다. 외설이라 불리는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는 ‘창녀(포르니•porni)’와 ‘이야기(graphos)’의 합성어다. ‘창녀들이나 하는 짓거리’쯤 되겠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고, 입에 담아선 안 될 난잡한 이야기들을 말한다.

 

폭력도 정도를 넘어서면 포르노가 된다.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막시무스의 검투사 데뷔 경기는 ‘폭력의 포르노’에 가깝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포르노 폭력’에 눈살을 찌푸리거나 외면해야 한다. 그런데 관객들은 검투사들의 포르노에 열광한다. 끔찍한 장면이다.

 

 

 

 

데뷔전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살아남은 막시무스에게는 단독무대가 마련된다. 1대 10의 대결에서도 막시무스는 현란한 칼부림으로 상대들을 남김 없이 도륙하고 가래침을 뱉는다. 칼을 내던지고 관중들에게 소리친다. “이제 만족하는가. 너희들이 원하는 게 이런 거냐!”

 

관중들은 이 거칠고 도발적인 ‘포르노 배우’에게 미친 듯이 열광한다. 아마 카르타고 지방 사람들이라 막시무스의 라틴어를 못 알아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헤라클레스의 재림’이란 명성을 쌓은 막시무스는 마침내 로마 콜로세움 경기장에 설 기회를 잡는다. 새 황제 코모두스의 즉위를 축하하는 대규모 검투경기가 콜로세움에서 열린다. 요즘으로 치면 아프리카에서 혜성과 같이 등장한 UFC 선수가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이나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무대에 서는 격이다. 막시무스의 경기는 그 어마어마한 무대의 메인 이벤트로 기획된다.

 

로마 입성을 앞두고 막시무스의 검투 에이전트 프록시모는 막시무스를 따로 불러 로마 관중들을 열광시킬 수 있는 ‘노하우’를 전한다. “최고의 검투사가 되기 위해서는 관중들의 흥분을 최고조로 끌어올릴 줄 알아야 한다. 드라마틱하게 죽여야 한다.” 전직 선수 출신 감독다운 조언이다. 포르노배우 출신 포르노 감독의 조언 같기도 하다.

 

마침내 막시무스는 로마 콜로세움 경기장에 선다. 수만명의 관중 앞에서 수십명의 검투사들이 패를 나눠 집단학살극을 벌인다.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상대의 얼굴을 으깨기도 하고, 마차 톱니바퀴에 허리가 잘려나가기도 한다. 로마제국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폭력 포르노’극이다.

 

‘포르노극’을 관람하는 세계 최고 로마의 ‘문화시민’ 누구도 얼굴을 가리거나 외면하지 않고 불끈 쥔 주먹을 흔들며 희열에 들떠 열광한다. 아프리카 변방 원형경기장에 모인 ‘야만인’ 관중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콜로세움은 금지된 욕망의 분출로 거대한 용광로처럼 이글거린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고 입에 담지 못할 ‘포르노’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폭력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정치에도 최소한의 금도가 사라진 ‘정치 포르노’가 있다.

 

2022년 대선이 대한민국 콜로세움에서 벌어졌다. 검투사들이 ‘빨갱이’ ‘조폭’ ‘패륜’ ‘깡통’ ‘가족사기단’ ‘무당’ ‘접대부’ 등등 온갖 끔찍한 흉기를 마구잡이로 휘두른다.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휘두른다. 검투사의 옛 정부(情婦)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경기장에 뛰어들어 관중들의 흥분을 최고조로 몰아간다.

 

이들 검투사 뒤에도 혹시 프록시모 같은 노련한 프로모터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를 지켜보는 유권자들이 서로서로 엄지손가락을 땅으로 박으며 죽이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발을 구른다.

 

외설(猥褻)이라는 한자의 뜻풀이가 흥미롭다. ‘마구 더럽히다’도 되고 ‘정말로 더럽다’도 된다. 참으로 눈과 귀를 막아야 할 만큼 ‘외설스러운’ 정치다. 서로 마구 더럽혀서 정말 더러운 정치가 돼버린 듯하다. 외(猥)자에 들어있는 개 견(犬)자가 ‘외설’의 의미를 짐작하게 해준다. 아마도 ‘개판’이라는 뜻인 모양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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