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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글래디에이터 (9)

코모두스는 아버지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목졸라 죽이는 ‘궁중 정변’을 저질러 새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최악의 쿠데타다. 역사적으로 권력을 둘러싼 부자관계는 항상 아슬아슬하다. 부자지간에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 권력이다. 그만큼 권력은 살벌하고 무서운 거다. 

 

아무리 부자지간에 벌어진 일이라 해도 삼엄한 경비가 이뤄지는 황제의 막사에서 황태자가 황제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다는 건 불가능할 듯하다. 권력자의 주변 인물들은 사건의 전말을 눈치채고 있었겠지만 모두 침묵한다.

황태자인 코모두스가 결국 새 황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침묵하기도 하고, 무력감에 침묵하기도 하고, 괜히 입을 놀렸다가 곤욕을 치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눈을 감기도 하고, 새 황제의 시대에 새로운 기회를 기대하고 침묵하기도 한다. 모두 그렇게 침묵하는 가운데 코모두스의 ‘어쩌다 쿠데타’는 정말 성공한다. 불의(不義)한 권력 탄생의 전형적인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 겨우 말에 오를 정도로 연로하며, 전쟁을 부도덕한 것으로 여기면서 진저리를 치는 데다 철학이 본업인 듯한 황제는 전쟁이 자주 일어나야 부와 권력이 커지는 군부에서 환영받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막시무스 장군이 게르만과의 처절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병사들 앞에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보좌하고 등장하자 병사들이 열렬한 만세를 외친다. 황제가 아닌 막시무스 장군을 향한 충성과 환호의 만세 소리다.

로마시민들은 아우렐리우스를 사랑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군부에는 인기 없는 황제다. 그가 석연치 않게 죽었다고 크게 분노하지 않는다. 웃통을 벗어던진 채 병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검투시합을 하곤 하는 코모두스가 고매한 철학자 황제보다 매력 있다. 병사들도 노황제의 죽음에 침묵하고 만다.
 

로마로 귀환하는 코모두스를 보기 위해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도 굳은 표정으로 침묵한다. 감히 코모두스를 향해 살인자라고 외치는 시민도, 하다못해 날달걀을 날리는 시민도 없다. 귓속말로 오가는 작은 웅성거림은 있지만 이들도 모두 침묵한다.

원로원 의원들과의 상견례에서 그라쿠스와 가이우스로 대표되는 의원들도 코모두스를 차갑고 냉소적으로 대하긴 하지만 정면으로 그의 ‘황제직’을 부인하거나 부정하지는 않는다. 소위 ‘비판적 지지’나 ‘소심한 저항’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넓은 의미에서 ‘침묵’하긴 마찬가지다.

조금 가혹하게 말하면 불의를 알고도 침묵하는 자들은 불의의 공범자들과 다름없다. 아버지 황제 암살과 제위 찬탈은 일견 코모두스의 단독범행으로 보이지만 사실상은 수많은 침묵의 공범자들이 함께한 범행이다. 실패한 범행에 단독범행은 있어도 성공한 범행에 단독범행이란 없다. 

1995년 검찰은 전두환 장군의 쿠데타를 향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희대의 법언(法諺)을 남긴다. 수천만명에 달하는 방조자들을 모두 처벌하기 불가능하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코모두스의 범행을 대하는 로마의 이 기이한 ‘침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독일 사회학자 노이만(Neumann)은 ‘침묵의 나선이론(the spiral of silence theory)’을 제시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배척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다수의 편에 서고 대세에 따르는 것이 마음 편하다. 

하나의 사안을 판단하는 자신의 생각이 다수의 생각과 같다고 생각되면 목소리를 높이지만, 자신의 생각이 다수와 다른 것이면 침묵하고 만다. 다수로부터 손가락질받고 허허벌판에 혼자 남는 것이 두렵다.
 

우리가 변화의 기로에 서서 ‘침묵의 나선’ 속에 빠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인류 사회가 지금보다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해왔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의 변화와 진보가 무척이나 더디다고 생각된다면 혹시라도 그 ‘범인’이 다름 아닌 우리들의 ‘침묵’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이 침묵으로 방조하고 있는 수많은 불의와 범죄들이 우리 주변에 활개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둘러봄직도 하다.

사이먼 & 가펑클의 명곡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이 바보들아! 너희들은 침묵이 암세포처럼 자란다는 걸 모른다(Fools said I You do not know silence like a cancer grows…)” 우리의 침묵은 우리 사회의 모든 건강한 세포를 파괴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암세포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족을 달자면, 이제는 거의 클래식의 반열에 오른 ‘침묵의 소리’는 1963년 석연치 않은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의 전모를 덮어버리고 침묵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미국 사회를 향한 가펑클의 개탄을 담은 곡이라고 한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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