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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글래디에이터 (4)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한 ‘글래디에이터’는 재미와 흥미를 위해 역사적 사실에서 상당 부분 일탈해 있다. 하지만 ‘미장센(mise-en-scene)’ 역시 의도적으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왜곡이라기보다는 보정(補正)에 가깝다.

 

 

 

 

‘글래디에이터’를 제작할 때 자문역으로 참여했던 로마사를 전공한 다수의 역사학자는 ‘미장센’ 문제 때문에 중간에 자문역을 내던지거나, ‘엔딩 크레딧’에 본인 이름이 오르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 이유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게 아니었다는 건 흥미롭다.

 

로마사 전공 역사학자들은 코모두스 황제가 아버지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목을 졸라 죽였다는 역사 왜곡은 눈감아줄 순 있어도 장면 구성의 왜곡은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스콧 감독과 역사학자들이 부닥쳤던 ‘미장센’의 문제는 콜로세움에서 벌어지는 검투사 시합의 ‘사실성’이었다고 한다. 

 

검투사들의 무기나 복장은 철저히 고증을 따랐지만 문제가 된 지점은 검투사들이 경기장에 광고판을 들고 입장했다는 역사적 사실의 채택 여부였다. 로마시대 검투시합에서 검투사들이 경기가 시작되기에 앞서 요즘의 ‘샌드위치맨’처럼 몸에 광고판을 메거나 들고 관중석을 돌았던 건 로마시대 기록과 프레스코 벽화들에도 선명히 남아있는 사실이다.

 

황제가 친람(親覽)하는 검투경기는 요즘으로 치면 미국 ‘슈퍼볼’ 경기다. 슈퍼볼 광고료는 1초당 2억원을 지불해야 하는 거대한 광고전쟁판이다. 세계 최대 경제제국 로마의 내로라하는 장사치들이 이 기회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막시무스 정도의 스타 검투사라면 아마도 관중석을 몇바퀴 돌면서 이 광고 저 광고를 바꿔들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막시무스 정도의 스타 검투사를 거느린 프록시모 같은 에이전시는 BTS의 에이전트 못지않게 돈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매우 운 나쁜 검투사는 자기 죽음을 앞두고 상조회사나 사창가 광고판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로마사 전공학자들은 이것을 관객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감독 리들리 스콧은 난색을 표했다. ‘영웅’ 막시무스가 로마 고리대금 업자, 빵집, 술집, 마차 가게의 이름을 몸에 걸치고 등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뭣’하다.

 

영웅답지 못한 모습에 관객들은 그저 ‘깬다.’ 영웅이 영웅다워야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다. 또한 관객들이 마음속에 그리는 콜로세움에서 벌어지는 검투시합은 장엄하고 비장해야 한다.

 

영웅은 영웅다워야 하고 로마는 로마다워야 한다. 적어도 관객들은 각자 마음속에 그리는 ‘영웅다운’ 모습과 우리가 살고 있는 난삽한 시대와는 다른 위대한 ‘로마다운’ 모습이 눈앞에 전개되기를 원한다. 관객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

 

‘글래디에이터’에 앞서 로마의 검투경기를 보여줬던 이전의 많은 영화도 이런 사정 때문에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의 ‘광고모델’ 장면을 의도적으로 삭제해왔다. 리들리 스콧 감독 역시 ‘1호가 될 순 없다’는 각오로 역사학자들의 요구를 묵살해 버린다. 그렇게 우리들 마음속 ‘로마다움’은 지켜진셈이다. 

 

 

 

 

공자는 제(齊)나라의 경공(景公)에게 ‘좋은 정치’에 관한 질문을 받은 후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라는 답을 자못 진지하게 내놨다.

 

질문과 대답이 왠지 ‘봉숭아 학당’ 같은 분위기다. ‘좋은 정치’를 묻는데 더 이상 정치라는 것 자체가 필요 없는 상황을 말한다. 어떻게 해야 병이 낫겠냐는 환자의 물음에 의사라는 사람이 병에 안 걸리면 된다고 알려주는 꼴이다. 

 

어쩌면 ‘좋은 정치’란 영원히 불가능하고 ‘좋은 정치’가 영원히 불가능한 이유는 모두가 완벽히 ‘자기다움’을 지킨다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임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상대방에게 자기 마음속에 그리는 수많은 ‘~다움’을 원한다. 남자답고, 여자답고, 남편답고, 아내답고, 어른답고, 아버지답고, 자식답고, 사장답고, 대통령답고…. 

 

인간의 욕심만큼이나 ‘다움’의 리스트는 끝도 없다. ‘다움’이란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용(龍)과도 같은 듯하다. 용을 상상하는 것은 자유지만 실존하는 용을 찾아 나설 일은 아니다. 남자도 여자 같은 구석이 있고 여자도 남자 같은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어른들에게도 애 같은 구석이 얼마든지 있다. 24시간 365일 대통령다울 수 있는 대통령이란 상상 속의 용이나 마찬가지다. 

 

망원경 현미경을 모두 동원해 들여다보면 모두 ‘~답지’ 못하다. ‘다움’에 대한 공자의 강조는 어쩌면 공자가 줄기차게 주장한 ‘예양(禮讓)’을 달리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의나 양보는 인간의 본성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다움’이라는 것도 이상일 뿐이다. ‘~다움’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고 양보하는 수밖에 없겠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로마의 검투경기에 난잡한 온갖 광고들이 난무했음을 알고도 눈감아 준다. 로마에 예의를 다한다. 그렇게 우리들 마음속 위대한 로마의 ‘로마다움’을 지켜준다. 우리들 마음속에 ‘위대한 로마’ 하나쯤은 남겨둬도 좋지 않겠는가.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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