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민속마을 정낭있는 초가집 [다음 로드뷰 캡처]](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310/art_17411367406316_33eb31.jpg)
1980년대 중반 서울에서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일이다. ‘한국 경제사’ 수업 시간에 난데없이 ‘제주도에는 왜 대문이 없는가?’를 두고서 학생들 간에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제주 출신인 나로서야 당연히 “애초부터 거지와 도둑이 없는 믿고 살던 사회여서 굳이 대문을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라고 확신하며 말했다.
그러자 즉각 반론이 제기됐다. 학과 선배 중 한 명이 “그보다 훔치고 갈 물건이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도둑질만 해서는 굶어 죽기 딱 알맞다. 그래서 대문이 필요 없었다. 심지어 대문을 마련할 형편도 못 됐다”라고 서울 출신 박사과정 선배 형이 매정하게 말했다. 그때 난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평소 친한 저 형이 어찌 저런 말을 할까?'하며 다소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유광호 교수님이 그 상황을 정리해 주지 않으셨다면, 난 제주 섬 놈의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삼무 정신’ 홍보대사 겸 수호천사 역을 다하기 위해 끝까지 논쟁을 끌고 가려 했을 거다.
다들 알다시피 ‘삼무(三無)’란 도둑·거지·대문 등 제주에 없는 세 가지를 말한다. 삼다(三多, 돌·바람·여자가 많다는 의미)와 함께 삼무는 제주의 또 다른 상징이다. ‘삼무’를 제주 정신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이 과거, 있었던 적도 있다. 실제 1990년대 중반까지 학교에서 ‘삼무 정신’을 교육했다. ‘삼무교육헌장’을 만들기도 했으며 신제주 도심에는 ‘삼무공원’이라는 녹색공간도 있다. ‘삼무’를 규범적 차원으로 해석하자면, 서로 믿고 존중하며 다 아는 사회여서 도둑 자체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삼무 문화는 제주 주거문화와도 연결됐다. 대표적인 게 정낭(목책문)과 굴묵(일종의 아궁이)이다. 예전 제주는 저생산 사회였다. 아무리 축적하고 싶어도 그럴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다들 산·오름·바다·산전(山田)·들판 등을 부지런히 누비고 다녔다. 심지어 나이든 어르신도 ‘오몽(움직임)’할 수 없을 때까지 부지런히 일했다.
'펜안이 가난(편안이 가난)'이란 예전 제주 속담이 있다. 일하지 않고 놀며 편안히 지내면 결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만큼 제주에서는 게으름과 불성실로 인한 가난을 죄악시했다.
제주 사람들은 먹을 게 부족하니 산이나 바다로 향했다. “산과 바다, 어디에 간들 본인만 열심히 노력하면 먹을 거야 없을까?” 83세에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다. 그 시절엔 앞바다에 가서 돌 하나만 뒤집어도 칼슘과 단백질, 나트륨을 그럭저럭 섭취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조 밭에서 ‘검질’(김) 매고 ‘솎음질’하다 오셨다. 다들 호상이라 했지만, 제주에선 별 유별하지 않은 일화다.
'친정엘 가더라도 못 얻은 저녁거리를 바다에 가면 얻을 수 있다.'라는 제주 속담이 있다. 생계가 어려워 도움받으러 친정에 갔지만, 친정 역시 도와줄 여유가 없어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다에 가면 저녁 거리 해산물 정도야 쉽게 채취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다들 물질적으로 궁핍했기 때문에 몰래 남의 집에 들어가 봐야 가져갈 재물이 없었다. 나눠주고 보태줄 정도도 식량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둑과 거지가 아예 없었다. 게다가 도둑질하다 들키면 섬이라서 멀리 도망갈 수도 없다.'라는 해석이 나올 수도 있다. 심지어 다들 먹고 사느라 바쁜데, 어느 누가 한가로이 도둑질이나 하며 ‘동녕질’(동냥) 할 ‘저를’(겨를)이 있을까?라고까지 했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 인지처럼, 도둑이 없는 게 먼저인지 훔치고 갈 재물이 없는 게 먼저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도둑이 없었다’라는 말 자체는 누구나 공감하고 있다. 도둑이 없으니 굳이 대문이 필요 없고, 대신 소나 말의 출입을 막고 집주인의 출타 상황을 알리는 정낭(錠木)만 있으면 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사실 제주 살림집 입구에는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는 문짝 달린 ‘시설대문’이 없다뿐이지, 나름대로 대문 구실을 하는 정낭과 사립문은 있었다. 신석하 제주국제대 건축과 교수에 따르면 제주도 전통가옥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요소는 바람이다. 신 교수는 “제주의 연중 평균 풍속은 초속 3.9m 수준이고, 매년 3~4회 태풍이 지나가는 데다, 겨울에는 북서풍이 강하게 붑니다. 이 북서풍을 어떻게 막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죠.”라고 했다.
제주에 대문이 없는 이유는 또 있다. 다른 지역에서 ‘사립문’이라 불리는 싸리문은 호랑이·늑대·곰·멧돼지 등 야생동물 피해를 막기 위해 생겼다. 제주에는 이런 무서운 동물이 없다. 그래서 우마 침입 방지용 목책문(木柵門) 즉 ‘정낭’만 있으면 됐다.
제주도에서는 ‘올레’ 바깥 끝(출입구) 양옆 돌기둥에 통나무를 끼워 넣었다. 이게 바로 ‘정낭’이다. ‘정주석’은 나무나 현무암 돌로 만들었다. 나무로 만들면 ‘정주목’, 돌로 만들면 ‘정주석’이라 했다.
제주 사람들은 정낭을 걸치는 ‘정주먹(구멍)’이 집을 지키는 수호신적 영험(靈驗)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어 왔다. 인도네시아 숨바·수마트라, 베트남, 중국 운남 지역에도 정낭 형태의 문이 있다.
정낭은 나무 개수에 따라 집에 사람이 있고 없음을 알리는 대문 역할을 했다. 나무 두 개가 내려 있으면 주인이 잠깐 외출, 한 개만 내려 있으면 다소 장시간 외출, 세 개가 다 걸쳐 있으면 종일 출타 중이라는 신호다. 이게 현대 디지털 ‘2진 3비트’ 정보 표시방식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낭 나무가 3개 다 걸쳐 있는데 들어가면 침입자로 의심받을 수 있다. 사람이 집 안에 있어도 소나 말이 들어올까 봐 정낭을 모두 걸쳐놓기도 했다.

그렇다고 제주에 대문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잘사는 집이나 외지인 출입이 많던 도회지에는 ‘이문간(里門間)’이라 불리는 대문이 있었다. ‘이문’이란 마당에 붙어 있지 않고 ‘길에 세운 대문’이라는 뜻으로, ‘여(閭)’라고도 한다. 마당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가장 잘 막아내야 하는 이문간은 반드시 가옥 중 한 칸으로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비를 가릴 수도 있고 바람에 쓰러지지 않는다.
이문간 없이 정낭만을 두었던 농촌 지역 민가에서는 살림집 공간기능을 합리적으로 배치하는 과정, 특히 마당으로 쇄도하는 강풍의 방비, 그리고 풍압(風壓)이 강할 때나 우마차 출입 시 무너질 위험이 있는 울 담 보호를 위해 통로를 잘 축조해야 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특보를 역임하고,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을 지냈다. 천사나래 주간활동센터 시설장을 맡아 일하며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학기 중에는 제주한라대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오달진 근대제주』(2019), 『오달진 제주, 민요로 흐르다』(2021), 『제주의 화전생활사』(202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