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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톺아보기] 말이 나거든 상산으로 보내라 (1) 말들의 지상낙원

 

“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이 나거든 제주도로 보내라”

 

한성이 조선의 수도로 완벽하게 자리 잡으면서 생겨난 이 속담이 여태 합당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려 시대 이후 지금까지 제주도가 ‘말의 고장’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제주 섬에는 바다와 해수욕장만 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 멋진 한라산과 360여 오름이 웅장하게 줄지어 있다.

 

땀샘이 없는 제주 조랑말들은 사시사철 불어오는 거친 바람 가르며 그 산과 오름을 마음껏 박차고 다녔다. 말 천지인 몽골인조차 인정했던 ‘말들의 지상낙원’이다.

 

제주에는 “사름(사람)을 나건 서울에 보내곡, ᄆᆞ쉬(마소)랑 나건 상산에 보내라(사람을 낳으면 서울에 보내고, 마소를 낳으면 상산(上山)으로 보내라”라는 속담이 있다. 제주에서는 해발 14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방목이 이루어졌다. 이를 상산에 ‘쉐(소)올리기’ 즉, 상산 방목이라 했다.

 

제주 말들은 다 착하다. 얼추 90년 전 일이다. 당시 4살이던 고경수(1920년생) 씨는 사람보다 말이 더 좋았나 보다. 그래서 밭에 나갔던 말들이 집에 돌아와 쉬면서 여물을 먹는 ‘쇠막(마구간)’안으로 들어가 말과 같이 놀았다. 심지어 말 가랑이 밑으로 들어가 말 젖꼭지나 ‘물건(생식기)’을 조물거리기까지 했다. 이런 행동을 본 어른들은 외동아들이 잘못되는 줄 알고 식겁했다. 정작 말들은 이 철모르는 어린아이의 장난을 가만히 다 받아주었다. 고경수 옹의 평생 친구, ‘착한 말’이니까 가능했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다. 하도 어릴 적이라 정확히 기억은 없지만 수백 번 들어 잘 알고 있다. 아직 걷지 못하고 기어 다니던 어릴 때다. 어느 날 ‘물애기’였던 내가 마당에서 여물을 먹고 있던 말의 ‘강알(사타구니)’ 밑에 앉아, 말린 무 껍질, 썩은 고구마 등을 주워 먹고 있었다고 했다.

 

아마 어머닌 다른 볼일 보고 있었고, 세 살 위 누나 역시 어렸을 때라 그런 동생을 제지하지 못했을 거다. 처음 그 광경을 발견한 주인집 아주머니는 너무 놀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그 상황이 아주 자연스럽고 너무 편안해 보였다고 했다. 어린 아기나 말이나 망아지 모두...

 

그 장면을 보고 순간, 기절 직전이던 어머니 옆에서 주인집 아주머니는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갑자기 소리치면 말들이 놀라 오히려 아기가 다칠까 하여, 그분은 말들이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레 아기에게 가까이 다가가 이름을 부르며 이리 오라 했더니, 내가 먹던 무 껍질을 양손에 쥔 채 엉금엉금 기어 나오더란다. 말들은 그런 아기에게 아무 관심 없어 보였고...

 

제주에서 말은 선사시대에도 살았다. 이것은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 ‘곽지 패총’(청동기 후기~6세기 전후) 유적과 제주시 한림읍 ‘한들 굴’ 유적에서 말 치아가 발견되고,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해안에서 말 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은 제주마의 먼 조상들이다.

 

탐라 개벽설화에서 태초에 삼성(三姓)이 탐라에 정주(定住)하면서 오곡을 뿌리고 망아지와 송아지를 길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제주도에서는 예로부터 말을 사육했다고 보아 진다.

 

백제 무왕 10년(610년) 탐라에서 말을 조공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1073년 탐라가 고려에 명마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육된 때는 660여 년이 지난 1276년쯤이다. ‘몽골마’ 160마리가 성산읍 수산리 일대에서 사육됐다는 기록이 있다.

 

삼별초의 난이 끝난 1276년경부터 몽골이 ‘몽골마’를 제주도에 보내 몽골식 목장을 설치, 운영하는 과정에서 제주마는 ‘몽골마’나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말들과 교잡이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제주도가 ‘말의 고장'으로 떠올랐다.

 

이를 계기로 소와 말의 사육 규모가 이전보다 훨씬 확대되었다. 이 시기 소와 말 사육의 규모와 경험은 고려 시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고, 제주 조랑말도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다. 추측하건대,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라는 말이 이때부터 나오지 않았을까?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된 제주마는 우리나라에서는 일명 ‘제주 조랑말'로 널리 알려졌다. 제주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재래마로 작은 말에 속한다. 제주도에서 생산된 말은 ‘탐라마’, ‘제주마’, ‘조랑말’, ‘토마’, ‘국마’ 등으로 불렀다.

 

조선 시대 제주마는 감귤, 전복과 함께 제주도의 3대 공물(貢物) 중 하나였다. 한양으로 진상된 제주마는 대부분 조정 관원들과 양반들이 이용했으며, 고가로 거래되어 아무나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와 권위의 상징이었다. 제주마는 편리한 교통수단인 동시에 양반 계층의 체면 유지에 필수 가축이었다.

 

제주마는 크기가 작아 말을 타고 과일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다고 하여 ‘과하마(果下馬)’라고도 했고 ‘토마(土馬)’라고도 불린다. 말을 타면 발이 땅에 닿을 정도여서 높이 30~50㎝ 정도 되는 안장을 얹어 탔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정책 특보를 역임하고,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을 지냈다.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제주지식산업센터 센터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오달진 근대제주』(2019), 『오달진 제주, 민요로 흐르다』(2021), 『제주의 화전생활사』(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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