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이트풀8(The Hateful Eight)’은 ‘오프닝 크레디트’가 흘러가는 배경화면이 무척이나 강렬하면서도 인상적이다. 1877년 눈 폭풍 몰아치는 와이오밍주州의 황량한 벌판에 십자가에 매달린 처참한 예수상을 배경으로 마차 하나가 힘겹게 길을 재촉한다. 꼭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다양한 ‘십자가 예수상’은 익숙하다. 대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은 비록 벌거벗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지만 범접 못 할 위엄이 느껴진다.
![감독 타란티노가 폐기된 예수상을 영상에 담은 이유는 무엇일까.[사진|더스쿠프 포토]](http://www.jnuri.net/data/photos/20251042/art_17606603611269_ec0dee.jpg?iqs=0.15241659772202265)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이 영화에서 길게 보여주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은 앙상한 갈비뼈가 모두 드러나고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지고 초라하고 비참하기만 하다. 예수를 새긴 나무도 들판에 버려진 시신처럼 썩어가는 느낌이다.
그 처참한 십자가상이 눈까지 뒤집어쓰고 있다. 굳이 신자가 아니어도 시각적으로 무척 당혹스럽고 민망하다. 타란티노 감독이 굳이 이렇게 흔치 않은 비참한 십자가상을 어렵게 구해 등장시킨 이유가 있을 법하다.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죽어버린 예수상을 존 루스(커트 러셀 분)의 마차가 무심하게 지나친다. 마치 벌판에 버려진 죽은 개 한마리를 지나치듯 지나간다. 죽어버린 ‘신’을 너무나 당연한 듯 눈길 한번 안 주고 지나쳐 루스의 마차가 도착한 곳은 ‘미니의 잡화점’이다.
타란티노 감독은 ‘신이 죽어버린’ 세상에서 인간들이 과연 얼마나 ‘헤이트풀(hatefulㆍ끔찍한)’한 짓까지 저지를 수 있는 존재가 되는지 보여주기 위해 그토록 처참한 모습으로 폐기처분된 예수상을 ‘롱테이크’로 보여주면서 그의 스토리텔링을 시작하는 듯하다.
아마도 영화 제목 헤이트풀8은 마태복음 산상수훈(山上垂訓)에 ‘8가지 참행복’으로 기록된 ‘뷰티튜드8(Beautitude Eight)’을 패러디해 반대로 뒤틀어 붙인 모양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온유한 자’ ‘옳은 일에 목마른 자’ ‘자비로운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평화를 위해 힘쓰는 자’ ‘옳은 일을 하다 박해를 받는 자’… 등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자라고 가르친다.
신(神)이 살아서 성군처럼 만기친람(萬機親覽)하는 세상이라면 그런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신을 죽여서 눈벌판에 내다버린 세상이라면 당연히 ‘뷰티튜드8’은 ‘헤이트풀8’으로 대체된다. 가장 ‘끔찍한’ 사람들이 제 세상을 만나 활개치는 세상이 된다.
![우리나라 정치인은 누구를 위해 정치를 할까.[사진|게티이미지뱅크]](http://www.jnuri.net/data/photos/20251042/art_17606603607699_451b7f.jpg?iqs=0.8075526672409149)
신을 죽여 십자가에 매달아 눈벌판에 팽개치고 미니의 잡화점에 모인 자들은 한결같이 산상수훈의 덕목과는 철저히 반대로 사는 인간들이다.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모든 끔찍함을 압축적이고도 폭발적으로, 그리고 경쟁적으로 보여준다.
서로 믿지 못하고, 서로 혐오하고, 기만하고, 타인의 고통을 즐기고, 권태롭게, 혹은 미소를 지으면서 사람을 죽이고, 옳은 일을 조롱하고, 시체마다 가격표를 붙여놓고 흥정하는 난장판에 피범벅이 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쩌면 우리들의 일상이다.
니체는 「즐거운 지혜(The Joyful Wisdomㆍ1882년)」에서 “신은 죽었다(Gotto ist tot)”고 감히 신에게 사망선고를 내린 최초의 인간이다. 신이 언제 사망했는지는 밝히지는 않지만 사망원인은 자연사도 아니고 자살도 아니고 우리 인간들에 의해 ‘타살’됐다는 것은 분명히 밝힌다. 니체는 인간이 신을 죽여버린 것을 인류사 최대의 사변(事變)으로 꼽는다.
무신론자인 니체가 사망선고를 내린 신이란 종교적 의미의 신이라기보다는 ‘절대적 가치’나 ‘절대적 이성’ ‘절대적 도덕’의 은유인 듯하다. 결국 인간들이 추구해야 할 숭고하고 고결한 절대적 가치와 도덕이 모두 사라졌다는 선언이고, 그 숭고하고 고결한 가치들을 거추장스럽다고 인간들이 스스로 파괴해버렸다는 개탄이다. 부모가 닦달하고 잘못을 꾸짖으면 그 부모를 죽여버리는 자식들이 있다. 신을 죽여버린 세상은 인간이 저마다 신이 되려고 할 수밖에 없는 끔찍한 세상이다.
현대 이탈리아 문학의 최고봉으로 기림받는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Giuseppe Tomasi di Lampedusaㆍ1896~1957년)는 그의 대표작 「표범(Il Gattopardo)」에서 권력의 급격한 진공상태가 발생하면 벌어지는 현상을 “영역을 지배하던 사자가 사라지면 양들이 몰려들어 조그만 영역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싸우는 것”이라고 비유한다.여기서 사자에 신을 대입하고, 양을 인간에 대입해도 될 듯하다.
신이 사라진 세상은 저마다 자신이 신이 되기 위한 ‘힘을 향한 의지(Will to Power)’가 인간을 지배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힘을 길러서 저마다 신이 되려는 자들을 조롱한다.
“이 쓰레기 같은 자들을 보라. 그들은 부를 갖게 되지만 그 때문에 더욱 가난해진다. 이 자들은 무능력하면서 권력을 원하고, 권력을 얻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다. 이 영악한 원숭이들이 기어오르는 꼴을 보라. 이들은 서로 밀치며 기어오르고, 서로를 진흙탕으로 끌어내린다. 그들 모두 왕좌에 오르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광증(狂症)일 뿐이다. 마치 참다운 행복이 그 왕좌에 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왕좌를 향해 기어오른다. 그러나 그 왕좌에 놓여 있는 것은 진흙탕이고, 때로는 왕좌 자체가 진흙탕에 박혀 있을 뿐이다.”
![나라살림을 주재하는 정치란 신이 죽어버린 정치판에 정치인다운 정치인이 잘 보이지 않는 건 당연할 수도 있겠다.[더스쿠프|뉴시스]](http://www.jnuri.net/data/photos/20251042/art_17606603604086_46ea47.jpg?iqs=0.3041012711237788)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장면은 디오게네스(Diogenes·기원전 400년께)의 일화를 옮겨온 듯하다. 디오게네스가 환한 대낮에 등불까지 켜고 길거리에서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다녔다고 한다.
그 기이한 모습에 사람들이 무얼 그리 찾고 있느냐고 묻자 디오게네스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한다. 디오게네스가 말하는 ‘사람’이란 ‘사람다운 사람’이다. 아테네 대로에 사람은 넘쳐나지만 디오게네스 눈에 ‘사람다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미니의 잡화점은 타란티노 감독이 보여주는 세상의 압축판이다. 신을 죽여서 내다버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 사람다운 사람이 있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나라살림을 주재하는 ‘정치’라는 신이 죽어버린 정치판에 ‘정치인다운 정치인’이 잘 보이지 않는 것 역시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