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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25)

 

이시돌 목장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맥그린치 신부는 당초 생각대로 주민 소득을 높일 방안을 골몰하기 시작했다. 이시돌 목장을 확장하면서 고용을 늘리는 것도 좋지만 지역 사람들로 하여금 목축업을 직접 하도록 하면 소득이 크게 늘 것이라고 봤다. 주민들이 직접 목장을 경영할 수 있는 충분한 경험이 있고, 의지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계획을 전해 들은 마을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양돈은 커녕 소를 키우는 기술은 고사하고 돼지와 소, 땅을 구입할 돈도 땡전 한 푼 없는데 세상 물정 모르는 외국인 신부의 착각이라고 허허롭게 웃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포기하지 않았다. 돼지와 소, 땅은 모두 외상으로 주면 될 것이고, 기술은 가르쳐 주면 될 것이고, 사료 역시 외상으로 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개척농가의 구상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다행히 그 시절 맥그린치 신부는 우리나라에서 민간단체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잉여농산물 원조인 PL480 제2관에 의하여 옥수수를 일 년에 수만 톤을 받았다. PL480으로 이시돌협회는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약 4년 동안 옥수수를 금액으로 치면 322만 달러어치를 지원받았다.

 

무상으로 미국에서 원조를 받은 옥수수는 시장에 헐값으로 팔고, 이 대금으로 농촌개발을 하겠다는 맥그린치 신부의 야심찬 계획을 원조를 대행하는 미국 가톨릭 구제회가 받아 준 것이다. 미국은 과잉생산으로 농산물 가격폭락 상황을 겪고 있었기에 후진국에 무상으로 원조, 시장격리 조치를 취해서 좋았다. 받은 후진국은 이를 국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고, 이를 시장에 팔아서 그 자금으로 지역개발자금으로 활용해서 좋았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이렇게 모은 돈과 일부 원조를 갖고 이시돌 주변 동광·구억리 등 7개 지역에 약 1000 ha(약 300만평)를 구입, 98가구에 분양했다. 가구당 약 3만평정도였다.

 

 

땅 구입비는 30년 상환 조건을 걸었고, 돼지와 사료도 외상으로 헐값에 분양해 주었다. 처음에는 18가구로 시작하였다. 말이 3만평이지 특별한 농기구가 없었던 때이고, 일할 식구는 얼마 없었던 때인지라 3만평은 너무나 광활했다. 당시 이 지역에 살았고, 이 개척자들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는 홍군석 노인이나 13년 동안 금악리장을 지낸 맥그린치 기념사업회 박승준 회장은 “그들의 고생은 말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오죽해야 그들 중 지금 생존해 있는 사람들이 한 분도 없겠냐고 할 정도였다. 많은 이는 중도에 포기하였다. 포기할 때는 이시돌협회에 땅을 반납하도록 계약돼 처분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결국 개척사업이 성공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결과 98가구로 늘었다. 이렇게 제주도내 목장은 급속도록 확대되어 나갔다.

 

개척농가가 성공하자 맥그린치 신부는 지역을 하나로 묶어 개발하는 걸 고안했다. 한림 주변 전체를 조합원으로 하는 협동조합형 지역개발이다. 다음 조직표가 1976년 이시돌협회의 당시 조직도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제이시돌 축산회사, 성이시돌 실습목장, 제주유휴지 개발, 부락공동목장개발, 농민교육, 지역사회개발, 협동조합 육성은 모두가 지역전체를 묶는 협동조합식 개발을 위한 조직과 기능이었다. 1976년 기준으로 이시돌협회의 규모를 보면, 직원이 462명에 예산이 12억7317만4000원이었다. 당시 북제주군의 공무원 수는 약 350명(1973년 북제주군 공무원 정원은 295명)정도였고, 예산은 13억817만2000원이었다. 이시돌협회 인원은 북제주군보다 많았고, 예산도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시돌협회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 한다.

 

이시돌협회가 추진했던 일 중에 협동조합과 관련된 핵심적인 사업만 더듬어본다.

우선은 양돈회원 농가를 만든 일이다. 맥그린치 신부는 모든 농가가 각자 돼지를 키우면 생산조절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문성이 떨어져 경제적인 양돈 사업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양돈농가로 하여금 양돈협업농가조합을 만들도록 하였다. 이시돌협회는 양돈협업농가 회원들에게 우수양돈을 분양하고 질 좋은 사료를 저렴한 가격으로 지원하였다. 양돈농가는 분양받거나 아니면 자체 조달한 돼지를 40㎏까지 키워 이시돌협회에 팔았다. 그러면 이시돌 협회는 비육시켜서 가장 경제적 무게인 95㎏로 만들어 이를 이시돌 산하에 있는 국제이시돌축산주식회사에서 일본과 홍콩에 수출하는 과정이다.

 

정리하면, 양돈농가는 자신들이 가장 경제적으로 키울 수 있을 때 돼지를 이시돌에 넘기면, 이시돌은 이를 부가가치가 가장 높은 수준으로 비육시켜 외국에 판매하는 식이다. 이렇게 수급조절은 물론이거니와 양돈농가와 이시돌 협회 모두가 경제적으로 이득을 보는 협동조합의 최상 결과를 끌어낸 것이다. 1977년 이시돌협회 현황이다. 비육돈의 경우 이시돌협회가 직접 키우는 돼지는 1만3000두, 양돈회원 농가에서 구입해 키우는 돼지는 1만1700두였다. 협업이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표에서 보면 지역개발 담당부서도 있다. 지역개발 담당 부서는 초기에는 한림지역인 수원, 대림, 명원, 동명, 남리 등에 목장조성에 많은 지원을 하여 주었다. 이 지역에 투자한 규모와 금액을 보면, 16억6000만 원에 543ha나 된다. 후반기인 1977년에서 1980년도까지는 애월, 납읍, 상가, 하가, 장전, 수산, 하귀 등 애월지역에 목장을 조성하고 초지를 개발해주었다. 이들 지역에 투자한 금액은 26억6000만원에 성과는 905ha였다. 마을공동목장이 주 지원 대상이었다. 행정기관에서도 지원을 하였지만 대부분이 이시돌협회가 지원한 돈이다.

 

 

초지 개발 등 목장 조성뿐만 아니라 이시돌 내 실습목장에서 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고 언제라도 실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경쟁이 아니라 협동하면서 목장을 육성하는 방식으로 간 것이다.

 

실제로 상법상에 협동조합 설립을 도왔고 그리고 지원도 적극적으로 하였다. 이미 여러 차례 기술하였지만 신용협동조합의 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주축산협동조합, 제주양돈조합, 제주낙동협동조합 역시 맥그린치 신부에 의해서 출발을 하였거나 기초를 만들어 주었다. 이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주양돈조합 양돈 사업에 뜻을 둔 200세대를 모집, 양돈협업농가를 결성하여 기술지원, 시설지원, 사료지원, 종돈분양 등을 실시해 양돈 사업이 활발하여 운영해 오다가 1979-1980년 ‘돼지파동’이 벌어졌다. 수요에 비해 지나치게 돼지고기가 많이 시장에 공급됐기 때문이다. 비싼 사료 등 운영비는 계속 들어가는데 돼지고기를 사겠다는 상인은 없으니 전국이 난리일 수밖에 없었다. 돼지를 폐기처분하는 농가들이 속출했다.

 

제주도는 더 문제였다. 한림지역을 중심으로 양돈 산업이 성황이던 때라 지역경제는 곤두박질쳤다. 이시돌 목장에서 생산되는 비육돈은 물론 이시돌협회에서 1973년도에 조직한 양돈협업 농가에서 생산되는 비육돈마저 팔리지 않아 목장과 협업농가 양쪽 모두가 쓰러질 지경이었다. 이시돌협회 이사장인 맥그린치 신부는 정부의 압력도 있었지만 일반양돈 농가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 하에 10여 년 동안 혼신을 다 했던 이시돌 목장의 양돈 산업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기르던 돼지들은 직원이나 지역주민들에게 넘겼다. 2년 후 양돈 산업은 다시 회복기를 맞이하게 되고, 맥그린치 신부는 양돈협업농가를 중심으로 협동조합을 만들도록 했다. 오늘의 양돈축협이 활성화돼 자립터전을 마련한 계기다. 이러한 노력으로 1986년 1월 농림부로부터 양돈조합 설립 승인을 받았고, 2013년 기준 양돈축협 총자산은 5000억에 이른다.

 

제주축산협동조합도 맥그린치 신부의 손을 거쳤다. 1970년대 국제이시돌축산은 한림읍 옹포리에 현대식 도축장을 설립, 돼지고기를 일본에 수출하였다. 수급조절을 위해서 과감하게 일본의 회사와 협력사를 만들어서 수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출고기 중에 제주풍토병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던 해충이 발견되어 수출이 중단됐다. 맥그린치 신부는 이제 막 출발하려는 제주축산협동조합에 도축장을 팔아 수익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1983-1984년에는 제주도 축정당국이 추천하는 소가 없는 농가 200세대에게 송아지 350두를 팔아줬다. 그것도 축협이 정한 현실가액의 절반값으로 분양, 조합원수의 확장과 축산업의 활성화를 통한 제주축협의 성장 기반을 만들었다.

 

제주낙농협동조합도 마찬가지다. 1982년 5월 호주에서 소를 들여왔다. 종축개량 및 낙농축산으로 육우 870두, 유우(젖소) 156두를 도입하여 일반농가에게 분양해 줌으로써 제주도 낙농축산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당시 도내에는 유가공 공장이 하나뿐이었기에 독점의 폐해도 컸다. 우유 비수기에는 생산농가들이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맥그린치 이사장은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이시돌 목장에서 치즈가공과 우유가공 공장을 지어 직접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우유 수요가 급증하면서 제주낙농업협동조합이 자체 우유공장을 설립하려고 하자 맥그린치 이사장은 제주도내에 우유공장이 3곳으로 늘어나면 전부 운영에 적자가 날 수 밖에 없다고 판단, 제주낙농업협동조합에 이시돌 우유공장을 넘겼다.

 

맥그린치 신부는 주민들이 주도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서슴없이 지원하였다. 이시돌협회가 운영하고 있는 사업이 지역주민 사업과 경쟁하거나 충돌이 생겨나면 아무리 이익이 많이 나는 사업이라도 과감하게 포기하거나 해당 사업체에 매각했다. 맥그린치 신부가 애초 지역사업을 추진한 목적은 돈벌이가 아니었다. 배고픔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기반을 주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과감했다.

 

지역전체를 협동조합화하는 맥그린치식 지역개발은 제주에서 최적이었다. 자원과 기술이 부족한 제주의 환경으로선 더없는 선택이었다. <26편으로 이어집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제주정착 60년이 되는 2014년 말엔 아일랜드 대통령이 대통령 훈장을 추서했고, 협성문화재단이 사회봉사부문 상을, 제주MBC가 자랑스런 제주인상을 시상한데 이어 대한민국 정부 역시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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