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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 특별기획]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12)

 

오랜만에 맥그린치 신부를 만났다. 원고를 쓰면서 확인할 일 때문이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홍차를 직접 대접해 주신다. 이시돌 목장에서 유기농으로 만든 우유가 곁들인 홍차 맛이 특별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예전 내가 연재를 하고 있는 내용과 책을 펴내고 싶다는 말을 건네자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다.

 

"아일랜드의 어느 신사 장례 미사 때 일이다. 장례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는 돌아가신 신사에 대하여 연이어 칭찬하면서 애석해 하는 강론을 하였다. 통상 장례미사에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칭찬이 너무 하다 싶은 미망인이 냉랭한 얼굴표정으로 옆에 있는 아들 보고 '야! 지금 장례미사를 하고 있는 분이 너의 아버지인지 다시 확인해 보아라!‘“

 

돌아가신 자신의 남편이 전혀 칭찬 받을 일이라고는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미망인이 칭찬하는 신부에 대한 푸념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농담에는 또 다른 뜻이 있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자신이 한 일이 전혀 칭찬받을 일이 없는데 글을 쓰는 내가 너무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빗대어 농담한 것이다. 늘 만날 때마다 다시 이 일을 하면 이 보다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란 아쉬움만을 이야기하지 한 번도 자신의 일을 자랑한 적은 정말 없었다.

 

 

이제 맥그린치 신부가 국가도 하지 못했던 일을 성공시킨 목초개발을 말하려 한다. 맥그린치 신부와 박정희 대통령의 인연을 이어가게 된 첫 스토리다.

 

맥그린치 신부의 아버지는 수의사였다. 때문에 맥그린치 신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소를 좀 알고 있었다. 열 살 때는 감자를 먹다가 목에 걸려 죽어가는 소도 치료해 줘 동네 사람들로부터 앞으로 훌륭한 수의사가 될 것이라고 칭찬을 받았던 적도 있었다.

 

맥그린치 신부가 처음 제주에서 본 소는 매우 빈약했다. 반면 육지에서 본 한우는 매우 우수한 품종이라고 생각했다. 제주소가 육지 소에 비해 품종이 좋지 않은 것은 섬이기 때문에 다른 우수 품종과 교배할 기회가 없어 근친 교배로 인해 열성유전이 된 결과였다. 제주 소는 밭갈이는 좋을지 모르지만 육식이나 비육용, 즉 경제용으로는 좋은 소가 아니다. 그런데다가 영양가 있는 목초도 없어서 먹이도 시원치 않으니 제주소가 육지 한우에 비해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제주 중산간은 4·3의 영향으로 집들이 없었다. 놀고 있는 땅이 대부분이었다. 맥그린치의 고향 아일랜드에선 쉽게 고기를 먹을 수 있었지만 당시 제주에선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하는 수 없이 고기 대용으로 가끔 중산간으로 꿩 사냥을 나갔다. 그러다보니 중산간 곳곳이 눈에 훤하게 들어왔다. 곳곳을 돌다 참 좋은 땅인데 왜 이 땅을 내팽개치는지 이해하지 모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중산간 풀을 보니 겉으로 보면 억새풀인데 자세히 보면 좋은 풀들이 많은 것을 알았다. “여기에서 목축을 하면 좋겠는데···.”

 

당시 제주에는 방목하는 관습이 있었다. 마을 땅에는 억새를 제거하고 잡풀도 제거하며서 비료대신 쓸 겸해서 불을 놓았다. 3월경 불을 놓으면 이후에 풀이 자라는데 이 풀이 초기에는 소들이 먹기 좋아서 잘 먹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풀이 자라면 질기게 돼 소들이 싫어한다. 그래서 장마가 지나면 마을사람들이 동아리로 소 몇 마리 또는 몇 십 마리 씩 한데 모아 청년 한사람 채용해서 중산간에 소를 방목하다 8월쯤 다시 마을로 내려온다. 추수기간엔 일하는 데 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목현장을 보니 소들을 약 10m 줄로 묶어서 서로 엉키지 않게 하여 풀을 먹게 하는 것이었다. 한 곳에서 풀을 다 먹으면 목동(청년)이 다시 끌고 옮기는 방식으로 방목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안타까웠다.

 

목초를 개발해 목장을 조성하면 자신의 고향 아일랜드처럼 1년 내내 그냥 방목해도 소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으면서 잘 클 수 있을 텐데 아쉬웠던 것이다.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주민들이 1년 내내 자라는 좋은 목초가 있는 목장에서 소를 잘 키워 잘 살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초개발은 전문가의 영역이었다. 당시 한국의 수준에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제주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맥그린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희망이 현실로 찾아 왔다. 정말 우연이나 다름 없다.

 

맥그린치는 1968년이라고 기억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뉴질랜드를 방문했다. 가서 보니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소들이 산꼭대기까지 가서 목초를 뜯고 있는 것을 직접 목격을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비행기로 목초 씨를 뿌리고, 비료를 뿌리고, 그리고 좋은 영양분이 있는 식량을 면양에게 주는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부러워했다. 박 대통령은 귀국하자마자 농림수산부 장관에게 당장 목초를 3년 안에 개발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하지만 전문가도 없는 마당에 성공은 부지하세월이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에게 사정을 말할 관료도 없었다.

 

농림수산부장관은 막막했다. 전국을 다 뒤집고 다녀도 목초를 연구한 기관이나 대학, 연구기관 하나 없었다. 장관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대통령이 보고 왔다던 뉴질랜드에 목초 전문가를 물색, 3개월 간 초청하였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목초개발전문가인 조지 홈즈(Gorge Holmes) 선생이었다. 그러나 막상 초정은 해놓고 무얼 어떻게 배워야 할 지 또 허둥댔다. 그러다 농림부가 찾아낸 방안이 그를 제주의 맥그린치 신부에게 보내란 아이디어였다. 아마도 제주에서 양돈과 목장을 운영하는 외국인이 있다는 게 혹이나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맥그린치는 그를 만나고서야 그가 세계적인 전문가란 걸 알았다. 세계 각국에서 초청을 받고 자문해 주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아일랜드 정부도 자문관으로 채용하고자 공을 들이던 사람이었다. 그가 한림에 당도하면서 맥그린치에겐 행운이 찾아왔다. 모든 경비를 정부에서 대줬으니 맥그린치로선 공짜로 세계적인 전문가를 3개월간 활용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비록 이시돌 목장은 아직 조성이 되지 않았지만 맥그린치는 또 그 홈즈선생의 성실에 탄복했다. 그는 한국에 오면서 한국의 토양· 기후를 이미 알아봤고, 거기에 맞는 목초 씨앗을 갖고 왓다.

 

 

그는 맥그린치와 사제관에서 1969년 3~5월말, 그렇게 3개월간 기거했다. 노구였던 그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제주토양에 심을 목초개발 작업에 착수했다.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는 성실 그 자체였다. 홈즈는 한림에서 시작해 해발 50고지 단위로 현재의 이시돌 목장이 있는 380고지까지 씨를 파종하면서 실험을 했다. 놀고 있는 땅을 골라서 약간씩 씨를 뿌렸다. 그 후 3개월이 되는 날에 뉴질랜드로 귀국하면서 맥그린치 신부에게 딱 한 페이지 보고서를 주고 떠났다.

 

고지 고지마다 알맞은 씨앗 이름, 파종방법, 파종일시, 비료종류까지 상세하게 적힌 ‘족집게’ 보고서였다. 그대로 했다. 가르쳐 준대로 목초 씨를 뉴질랜드에 주문하여 시킨 달에 뿌렸다. 정말 기적같이 성공했다.

 

이시돌의 성공에 비해 정부차원의 답은 요원했다. 대통령이 국정과제, 즉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정책 중에 하나로 목초개발을 지시했기에 총력을 펼 수밖에 없었다. 농림부는 도지사들에게 노는 땅을 개간해 목초개발을 서두르도록 지시했다. 정부 임명 도지사 시절이다. 도지사는 시장과 군수에게 지시하고 , 시장과 군수는 다시 읍장과 면장에게 지시하여 목초를 개발하라고 명령하고 다그쳤다. 행정은 안 되는 일도 되는 일로,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로 만들 수 있는 조직이다. 목초개발이 안 되는 줄은 대통령만 빼고는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읍장과 면장은 계획서 만들어서 군수에게 올리고, 군수들은 도지사에게 올리고, 도지사는 농림부 장관에게 올리면, 농림부 장관은 대통령에게 월마다 보고했다.

 

대통령으로선 보고만 보면 노력하는 흔적이 역력하기에 성공하는 줄 알았다. 초도순시 때 마다 지역에 내려가면 꼭 목초지 개발한 곳을 방문했다. 그러면 도지사들은 어느 한 지역만 집중파종, 대통령 보고용으로만 활용했다. 대통령은 브리핑을 받고 흐뭇하게 생각하고 돌아갔다. 이때까지도 박정희 대통령은 모든 것이 허위 보고인 줄 몰랐다. 한국에는 목초 전문가는 고사하고 씨앗도 없는데 목초개발이 성공하고 있다는 보고서만 계속 대통령에게 올라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코미디 같은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3년이 되는 해에 대통령은 "3년 동안 노력해 보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목초개발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는 농림수산부장관의 보고를 받고 대노했다. 지금까지 초도 순시 때 마다 보고한 내용이 거짓 보고임을 확인한 순간인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시돌 목장은 목초개발이 성공하여 소들이 겨울에도 싱싱한 목초를 먹으면서 자라고 있었다. 지역 도지사들은 이 사실을 숨겨야 했다. 거대한 조직과 재정을 투자하고도 실패했는데 민간인 목장 이시돌이 성공했다고 한다면 경을 칠 노릇이었다. 문책이 불가피하기에 행정기관은 이시돌의 성공사례를 철저히 가렸다. 언론에게도 갖은 방법으로 입막음을 했다. 제주도청 직원들도 이시돌 목장에 이 사정을 이야기 하면서 성공사례가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해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었다. 이시돌 역시 괜히 그 사실을 알려 도청과 관계가 나빠질 이유도 없었다. 그 시절 제주도청의 도움으로 나름 성장을 거듭할 때이기에 더 그랬다.

 

보도통제는 우연한 기회에 깨져버렸다. 제주 한림 출신 홍병철씨가 청와대에 근무하다 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됐다. 아주 젊은 나이었다. 홍병철 의원은 이시돌이 목초개발에 성공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홍병철 의원은 청와대 경제수석(제2수석, 농림수산담당)과 친했다. 경제수석이 목초개발에 대한 허위보고 때문에 대통령이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소식을 그에게 건넸다.

 

홍 의원은 곧바로 그에게 ‘굿 뉴스’를 전해줬다. 이시돌 목장의 목초개발 성공사례를 알려준 것이다. 소식을 들은 경제수석은 부리나케 제주도 이시돌 목장으로 달려갔다. 도지사를 비롯해 기자들까지 40~50명이 몰려들었다. 맥그린치도 어리둥절하도록 불시에 찾아온 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4월 초 찾아온 현장인데 파란 목초와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을 보고 그들은 뒤집어졌다. 책임자로 찾아 맥그린치 신부가 불려갔다. “처음 보는 분인데 굉장히 높은 분 같았다. 도지사가 꼼짝을 못하더군요.” 현장의 살벌한 분위기를 본 맥그린치의 말이다.

 

이 경제수석은 이시돌을 극찬했고, 현장에서 언성을 높이며 도지사와 허위보고 실무공무원을 질책했다. 목초의 개발과정, 성공요인 등을 상세하게 적어서 사진까지 첨부하고 월요일 아침 내 책상에 갖다 놓으라고 지시하고 갔다. 그날이 금요일 오후였다.

 

 

 

 

이 사건으로 맥그린치 신부는 난처한 처지가 됐다. 허위보고를 한 사실이 이시돌 목장의 목초 성공 때문에 드러났다고 그들은 생각했고, 맥그린치 신부가 그 정보를 몰래 청와대에 준 것으로 오해하는 이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주도청과 농림부는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하여 난리가 났다. 주말에 수십 명의 공무원들이 찾아 와서 사진 찍고, 인터뷰하고 등등 하면서 맥그린치는 넌덜머리 나도록 괴롭혔다.

 

시간이 흐르자 이번엔 청와대에서 요청이 왔다. 맥그린치 신부가 목초개발 성공요인을 직접 브리핑하라는 것이다. 요청이라기보다는 거의 명령이었다. 공무원들이 정말 벌벌 떨 때였다. 공무원들과 자료를 부지런하게 같이 만들었다. 이시돌의 시설, 농기계를 비롯, 트랙터 등 중장비 모든 현황을 맥그린치 신부가 직접 슬라이드로 만들었다. 슬라이드는 당시 최신 시연기법이다. 차트에 의한 브리핑이 주였던 시절이다.

 

맥그린치 신부는 이 슬라이드에 공무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림항까지의 터덜터덜한 농로 길을 찍어 몰래 집어 놓았다. 공무원들은 잘된 것만 보고하려고 하지 도로가 나쁜 것은 행정이 잘못으로 대통령에게 질책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역시 공무원다운 생각이었다. 그러나 맥그린치는 실상을 제대로 알리고 싶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호로 서울로 갔다. 그 시절엔 매달 한 번씩 수출진흥확대회의가 열렸다. 민간기업인과 장관들이 모인 자리다. 성공사례를 발표하기 위하여 초청된 것이다. 강당에는 약 100여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국무총리를 비롯한 소위 고위 공무원과 대기업 회장 등이 참석하고 있었다. 한 달 동안 무역을 비롯한 경제문제를 대통령이 보고받는 자리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당시에 ‘돌 얼굴’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정말 두 시간 동안 한 번도 웃지 않고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두 시간이 지나 졸고 있는 사람까지 나올 지경에 마지막 맥그린치의 발표 차례였다.

 

맥그린치 신부는 슬라이드를 비추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반전하고자 너스레도 떨었다. “제주도는 삼무라 하여 대문, 거지, 도독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큰 도독이 하나 있습니다. 한 번에 돼지를 1톤이나 훔쳐 먹는 도둑이 있습니다. 바로 이 길이 그 도독 놈입니다."

 

공무원들이 그렇게 말렸던 이시돌 목장과 한림항까지의 비포장 도로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 도로를 통해 한 달에 1000마리 정도 부산으로 나가서 도살하고 수출하는데 도로가 나빠서 목장에서 한림부두까지 가면 몸무게가 마리당 1kg이 감량이 된다. 그래서 1000마리면 1톤을 이 도로가 훔쳐 먹어 버리니 도둑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농을 부렸다. 졸던 사람들이 웃기 시작하였고, 힐끗 보니 대통령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브리핑이 끝나자 대통령은 맥그린치 신부에게 점심식사를같이 하자고 제의했다. 그는 꼭 ‘신부님’이란 존칭을 썼다. 대통령과 맥그린치 신부, 김종필 총리, 기획원장관, 농림부 장관 등 5명이 함께 식사자리를 했다. 맥그린치의 기억은 그 시절 대통령의 권위가 엄청났다는 것. 장관들도 대통령과 농담은 고사하고 대통령이 말하면 밥도 안 먹고 즉시 받아쓰기만 했다는 것을 맥그린치 신부는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다만 김종필 총리만 스스럼없이 말을 했다.

 

김종필 총리가 맥그린치에게 물었다. "신부님! 외국 소는 그렇게 큰데 우리나라 소는 왜 조그마합니까?“ 맥그린치가 머뭇거리던 찰나 박 대통령이 말을 받았다. ”임자! 나 보면 몰라? 어릴 때 못 먹었기 때문에 이렇게 작은 나를 보면 그것도 몰라?“

 

박장대소였다. 모두들 대통령이 그렇게 솔직하게 농담하는 것을 처음 듣는 모양인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날 무렵 박정희 대통령은 맥그린치 신부에게 말했다. "신부님! 국가가 하지 못한 일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한 번 이시돌 목장을 방문하겠습니다."

 

의례적인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졌고, 그것만이 아니었다. <글=양영철/ 13편으로 이어집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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