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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 특별기획]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9)

 

맥그린치 신부의 업적을 말하며 4H클럽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제주에서 가장 먼저 4H클럽을 조직한 것 역시 바로 맥그린치 신부의 역할이었다. 어떻게 흘러간 사정일까?

 

맥그린치 신부는 1957년 3월 제주에 4H클럽을 만들었다. 이시돌 개발만을 놓고 보더라도 4H클럽 조직을 만든 일이 가장 첫 번째 일이다. 이 4H클럽이 오늘날 이시돌 개발의 시금석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4H의 역사를 보면 1945년 해방직후 낙후된 농촌의 부흥과 실의에 빠진 청소년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당시 구자옥 경기도지사와 경기도 군정관인 앤더슨 중령, 이진묵 경기도 문정관 등이 미국의 4H활동을 도입, 그 불을 지폈다. 이후에 경기도 일원에 ‘농촌청소년구락부’를 결성하기 시작하여 1950년까지 1900여개 마을에 5만여 명의 회원이 참여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6ㆍ25전쟁으로 중단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52년 12월 정부가 4H운동을 국가시책사업으로 채택함에 따라 전국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4H는 머리(Head), 가슴(Heart), 손(Hand), 건강(Health)에서 머리 글자를 따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지(知), 덕(德), 노(勞),체(體)로 번역해 불렀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마을 마다 4H클럽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대유행했다. 이 때문에 그 시절에 농촌에서 자란 청소년들은 거의 4H 회원이 되거나 아니면 이 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을 정도다.

 

 

그 4H클럽을 제주에 제일 먼저 도입한 이가 바로 맥그린치 신부다. 맥그린치 신부는 생전에 듣도 보도 못한 가난에 찌든 모습을 첫 부임지인 한림에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농업인구가 90% 이상인데 토지는 비좁고, 식구는 많았다. 물을 대는 시설은 고사하고 오직 몸으로 때우는 농사를 짓기 때문에 수확량은 형편 없었다. 가뭄이 들면 속수무책으로 흉년을 맞았다. 1957년 제주도에 40년 만에 최악의 가뭄이 들어 제주도 농촌의 60%인 3만 가구 15만 명이 곡식이 전혀 없는 절양농가가 되었다. 한라산 갈대의 열매가 구황식물로 대체될 정도였다.

 

그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그저 숙명으로 받아들여 체념하고 있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주민들과 토론에 나섰다. 한 겨울 밤 자신의 숙소에 난롯불을 켜고 밤샘 토론과 설득을 벌였지만 허사였다. "신부님, 안됩니다"가 돌아오는 답이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아예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으로 증거를 만들겠다고 작심한다. 성공모델을 제시할 생각이었다. 이 청소년들을 모이게 할 방법을 고민하다 떠오른게 4H였고, 결국 조직에 성공한다.

 

4H 클럽은 처음 한림성당에 나오는 청소년 신자 25명으로 꾸렸다. 초등생과 중학교 진학도 못한 청소년들이 수두룩했다. 이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신부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된다는 수원 4H클럽을 찾아 교재를 빌려 오고, 가축을 기르는 방법을 배우고, 관련 책들도 얻어왔다. 이 교재를 갖고 코흘리개 4H 회원들과 밤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 인연으로 맥그린치 신부는 수원에 있는 4H후원농장인 한미농장(미국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중앙개척 농장)에서 양질의 돼지와 닭을 들여오게 된다. 돼지와 닭이 많아지기 시작하자 현재 이시돌 목장의 발원지인 ‘정물’에 일본군이 주둔하며 썼던 군인막사를 돼지 우리로 만들었다. 그 작업을 4H 회원들이 도맡았다. 그 다음에 닭과 돼지 종자를 나눠주는 ‘가축은행’을 설립했다.

 

 

당시 맥그린치 신부의 설명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결코 내버려지고 마는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각종 은행에서는 무이자로 가축을 대부해 주고 있다. 차용자는 자기들이 새끼를 낳게 되면 같은 종류로 갚게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배운 사람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이 언제라도 꿋꿋하게 어깨를 펴고 살 수 있도록 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

 

가축은행의 세부 활동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가톨릭시보, 210호, 1960년1월 3일: 291호, 1961년 8월 20일에서 참조).

 

- 조개 껍질을 이용하여 산화된 땅을 석회질로 바꾸고, 값싼 비료를 공급하는 일을 한다.

 

- 170여 마리 가축으로 가축은행을 마련하고, 순종 돼지 등으로 5배 값을 올릴 수 있는 돼지를 사육한다

 

- 800마리 순종 레그홍과 뉴햄프셔 등으로 닭 은행을 마련하였다.

 

- 30명 소녀들을 고용할 수 있는 직조 제품의 가내 공업(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이들 연약한 소년소녀 25명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였는지를 요약해 주고 있다. 이후 이 4H 회원에 신자가 아닌 이들도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한림 청소년들을 묶는 일이 나타났다. 결국 도내 곳곳의 4H클럽 탄생에 큰 역할을 한다.

 

한림 4H는 제주도 4H 운동 초창기를 주도했고, 각종 대회에서도 수많은 상을 거머쥐었다. 이들이 이이돌 개발의 주역이기도 하지만 훗날 제주지역개발의 선두주자로 나선다. 새로운 방식의 농업기술을 습득하였고, 의식개혁을 위한 경조사 개선 운동, 음식개선 운동, 마을 안길 정비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그 시절 한림 4H 활동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다 당시 4H 활동을 지켜 보았던 한림발전협의회 박승준 회장으로부터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4H 활동이 매우 활발하던 시절 마을 돌담을 정리하는 일을 하다가 소녀가 돌에 깔려서 죽었다는 것이다. 리어카에 돌을 싣고 가다가 리어카가 뒤짚이면서 돌들이 소녀를 덮쳐 깔려 숨졌다는 것이다. 그 분의 비석이 금악리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 가 보았다. 금악리 유아원 입구에 정말 비석이 있었다.

 

 

주인공은 고춘자 부원이었다. 앞에는 고춘자 부원 추념비라 쓰여졌고, 설립 일자는 1971년 4월 19일이며 설립자는 북제주군 4H 부원 일동으로 돼 있다. 뒷면에 비문을 읽노라면 꽃 다운 소녀가 거치른 돌을 실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으면서 마을을 깨끗하게 하는데 힘을 보태겠다고 하면서 앞만 보면서 가다가 굴러오는 돌에 압사를 당한 모습이 상상이 된다. 그 분들의 말을 빌면 그 당시에도 내려오는 리어카를 피했으면 살았을 것인데 그 것을 막으려고 하다가 희생되었다고 한 그 말이 얼마나 서럽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단순히 어리다고 무시하거나 홀대를 했음직 한 10대 청소년들이 그 속에는 얼마나 큰 잠재력이 숨어 있는지 확인하는 순간이다. 꽁꽁 숨어있는 그들의 꿈을 다시 일으켜 세운 맥그린치 신부의 실천은 참교육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글=양영철/ 10편으로 이어집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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