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예부터 축산업이 발달된 고장이다.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강우량, 그리고 넓은 중산간 토지는 축산업을 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게 경제적 풍요와 연결된 건 그리 오랜 세월이 아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제주도 축산은 국가를 위한 군마나 황실을 위한 명마를 키우기 위한 공납기지였을 뿐이다.
제주의 지역경제 수단으로 축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이후다. 맥그린치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의 목장을 지역경제와 연계시킨 최초의 창시자이며, 밴플리트(James Award Van Fleet, 1892~1992) 장군은 이를 연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을 이승만 대통령의 실패작을 리메이크 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맥그린치 신부는 관과는 따로 독립영화를 통해 제주의 목장개념을 새롭게 정리한 이다. 제주축산업을 대형화시키는 데 각자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서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우선 이승만대통령의 사례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이전 미국유학을 경험한 이다. 1904년 귀국 이전까지 한국인 중 미국 체류기간이 가장 오랜 이도 바로 그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미국에서도 명문대학인 조지 워싱턴대에서 학사, 하버드에서 석사,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상층부와 부단하게 접촉을 한 인물이다. 그런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은 비록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의 대통령이지만 재임 내내 미국의 대통령을 비롯한 각 부처 장관 등 소위 실세들과 교류했다.
6·25 전쟁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은 1951년 4월부터 1953년 1월까지 미국 주력부대인 미8군 사령관과 UN사령관을 겸직한 밴플리트 장군과 막역한 사이가 된다.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강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6·25전쟁은 밴플리트 장군이 시작과 끝을 맺었다고 할 정도다. 게다가 그의 외아들인 지미 대위는 미 공군 폭격기 조종사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북한군의 대공포에 맞아 행방불명이 되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그의 부하들이 행방불명된 자식을 찾기 위하여 대대적인 작전 계획을 세우자 다른 사례도 동일한 작전계획을 세우도록 해 전사에 유명한 이야기로 회자된다.
자신의 전성기를 한국전쟁에서 보냈고,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을 한국전쟁에서 잃었으니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 애정의 발로였는지 모르지만 한국전쟁 고아 1천명을 제주도로 후송, 사계한 것도 그다. 그는 제주도와 인연을 맺었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으로 하여금 국가재건 정책으로 제주도에 대형 목장을 건설할 것을 설득한다. 그 역시 퇴역 후 고향인 플로리다에서 목장을 운영했기에 제주도가 최적의 목장지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과도 허물없이 지냈기에 이승만 대통령은 밴플리트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다. 그게 국립 송당목장이다. 하지만 돈이 없기에 미국의 원조를 받을 수 밖에 없던 시절이다. 당시 미국 민간원조 단체 중 가장 큰 곳이 한미재단이었는데 한미재단 이사장이 바로 퇴역한 밴플리트 장군이었다. 이리 저리로 밴플리트 장군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부터 제주를 찾을 때 마다 국립목장을 건설하겠다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1956년 5월 23일 방문할 때는 아예 “이번 제주도 방문은 제주도에 큰 목장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공식적으로 말하면서 목장후보지만 살펴보고 서울로 간다. 물론 밴플리트 장군과 함께 왔음은 당연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송당에 국립목장을 건설하기로 하고 이를 전적으로 밴플린트 장군에게 맡겼다. 밴플린트 장군은 고향의 유능한 수의사를 채용, 한국 공병대와 농림부의 협력 하에 5개월 만에 300만평의 송당 목장을 만들어 낸다. 송당목장에 대통령 전용 숙소인 특호관사 1동(약 43평)도 지었다. 최근 복원을 완료한 귀빈사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후 제주를 방문할 때마다 호텔보다 이곳에서 지낼 정도로 송당 목장에 대하여 큰 애착을 가졌다. 이 대통령은 3년 봉사기간을 끝내고 미국으로 떠나는 수의사를 격려하고, 인수인계를 잘 하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도 송당목장을 방문할 정도였다.
송장목장 건설에 따른 모든 계획과 실행은 밴플리트 장군이 전적으로 책임졌다. 소도 경제성을 생각해 미국의 우수품종으로 수입해 왔다. 첫 수입 소는 166마리였다. 이 소들은 미국 플로리다에서 출발하여 35일 만에 부산항에 하역되어 여기에서 미 해군 군함인 LST로 성산포 항에 도착한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제주도에 축산을 중심 지역경제정책으로 시작한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이지만 모든 연출과 실행은 밴플리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제주 첫 방문은 1961년 9월 8일이다. 5·16군사 혁명이 일어난 지 채 4개월도 안 된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항에서 "제주도는 꼭 한번 오고 싶었던 곳인데 난생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어 감회가 깊다"고 말했다. 그 시절 그는 축산에 대해 발언하지 않았다. 그저 감귤과 관광에 집중하도록 주문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두 번째 제주방문부터 달라져 있었다. 제주축산업에 강력한 집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두 번째 방문은 1962년 5월 24일. 이날 방문은 송당목장을 진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송당목장은 국립이었기에 공무원들이 근무하고 있었고, 목장장은 전 서울대 농업대학 학장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미리 보낸 송당목장 조사단의 보고를 직접 듣고자 직접 현장에 나타난 것이었다. 보고를 받는 중간에 박정희 대통령은 소리를 쳤다. "지금처럼 운영하려면 문을 닫아라.“
그의 목소리는 육중했고 싸늘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농림부 장관에게 "단 한 푼의 예산지원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낙담한 얼굴이었다. 다행히 동행한 밴플리트 장군의 설득에 의해서 폐쇄는 막았다. 박 대통령은 송당목장이 국립이기 때문에 직원들의 무사안일로 생산성이 없다며 민간불하를 명령했다. 하지만 제주축산에 대한 관심이 거기서 그친게 아니었다. 서귀농고에 목장을 건설하라고 예산을 지원해 주고, 심지어 제주도지사에게 삼의악과 산천단 주변 지형을 기초로 설계도를 그려 주며 목장 건설을 독려할 정도 였다. 그러나 그의 관심과 투자에 비해 제주축산업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로선 화가 치밀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실패한 제주축산업을 자신이 성공시켜서 지난 정부와 다른 능력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실패만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림부 장관을 보내 실패원인을 찾아오라고 역정을 내고, 어느 해 초도 순시 때는 3시간 동안 도지사로부터 장시간 직보를 받기도 했다. 축산정책 문제였다. 왜 그렇게 지원을 해 줘도 실패하느냐를 따지는 박 대통령 덕(?)에 도지사는 혼쭐이 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렇게 얻고 싶었던 해답은 그러나 다른 곳에 있었다. 국립 송당목장이 실패를 거듭하는 사이 제주 서쪽 중산간 초원지대에선 기대하지 않았던 ‘성공스토리’를 써 나가고 있었다. <글=양영철/ 15편으로 이어집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