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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주년 특별기획]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4)

한림수직의 양모의류가 서울 명동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기 시작한 건 사실 꿈같은 일이었다. 제주 촌구석에서 만든 옷이 서울 한 복판, 그것도 조선호텔에 매장을 마련한 것도 그렇지만 서울의 유명 마나님이 딸을 데리고 와 사는 호사·혼수품으로 팔려나가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그게 맥그린치를 보는 제주사람들의 마음을 뒤바꿀 줄은 또 몰랐다. 너도 나도 한림수직에서 일하겠노라고 통사정을 하는 통에 오히려 난처할 지경이었다. 맥그린치로선 어리둥절하기도 했고, 까닭모를 서울 마나님들이 고맙기도 했다. 주한 외국인들에게 알음알음 팔려나갈 것이라 보았던 게 이런 유명 브랜드 취급을 받을 줄 꿈에라도 생각했겠는가?

 

 

그 쯤 이르자 이제 맥그린치의 눈엔 그저 달구지나 모는, 밭일이나 돕는 제주 외양간 소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양털을 생산하는 양떼들이 드넓은 초원에서 방목이 가능한데 못할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아니었다. 한림수직의 성공으로 반신반의하던 그들이 마음이 풀리는 듯 했건만 이번엔 그들의 반대가 분명했다. 이유는 하나. “소를 들여오는 것도 그렇지만 그 많은 소를 먹여 키울 목초가 없다"는 것. "야산을 개간, 초원을 조성하더라도 겨울엔 목초가 모두 말라 죽는데 무슨 수로 목장을 하려냐”며 오히려 타박이었다. 1960년대 초였다. 그 시절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젖소 사육을 전제로 전국에 목초개발을 지시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한 마당이어서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물론 주민들의 판단은 경험의 소산이기도 했다. 이미 일제 강점기 하에서도 일본인들이 갖은 수를 동원, 목초 개발과 초지조성에 나섰지만 매번 실패를 거듭했다는 것이다.

 

 

맥그린치에게 의문이 밀려왔다. “제주도 보다 토양이나 기후가 훨씬 나쁜 고향 북아일랜드도 겨울에 목초가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는데 왜 제주도에서 목초를 개발하지 못한단 말인가?”

 

아예 목초 전문가를 찾아 나섰다. 양축산업의 선진지인 뉴질랜드를 지목, 전문가를 수소문했다. 안식년을 맞아 쉬고 있는 한 대학의 교수를 알아냈다. 장문의 편지를 쓰고, 그저 살려달라는 통사정을 곁들여 그를 제주로 모셨다. 그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딱 한번만 도와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3개월여 제주행을 선택했다.

 

이미 만들어 둔 4H클럽 한림 청년들이 그의 수족이 돼 주었다. 뉴질랜드에서 모셔 온 목초전문가는 이제 실험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림 해안가부터 중산간 지대를 향해 50m 간격으로 목초 씨를 뿌리고 생육상태를 비교해 나갔다. 각기 다른 종자를 뿌려 싹이 트고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다 “이것이다”고 하나를 찾아냈다. 이시돌 목장 조성의 기틀이 된, 가장 적합한 품종의 목초가 이시돌 목장에 안착하게 된 사연이다. 겨울에도 소에게 여물을 먹일 수 있는 목초가 우리나라 최초로 제주의 한 목장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목초 개발에 성공한 기쁨도 잠시. 당시 제주도지사는 “목초개발 성공을 절대로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거의 사정이나 진 배 없었다. 그땐 몰랐다. 하지만 훗날 듣고보니 윗선의 문책을 두려워 한 도지사의 처신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각 도지사에게 책임을 지고 목초를 개발하라고 지시한지 3년이 지난 뒤 거둔 민간인의 성공으로 그는 목이 달아날지 모를 처지였던 것이다. 3년 동안 죽 실패만 거듭하는 보고를 했는데 관의 도움도 받지 않은 민간인이, 그것도 파란 눈의 외국인 신부가 목초개발을 성공했다고 하면 자기 체면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은폐는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겨울에도 소를 먹일 수 있는 목초개발 성공 소식은 박 대통령에게 알려 졌다.

 

대통령이 돌연 이시돌 목장으로 날아왔다.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질퍽거리는 농로 길을 따라 짚차를 타고 이시돌 목장을 찾은 것이다. 다른 기회에 더 말할 사연이지만 맥그린치 신부가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이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제 이시돌 목장의 터전인 한림마을 청년들은 이제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가슴 팍에 채우게 됐다.

 

이제 사람은 됐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이 문제였다. 그 당시 경제활동인구의 종사산업은 농업이 주류. 농가인구가 무려 90%에 가까웠다. 그것도 고작 평균 1000평 이하 밭에 온 식구가 매달려서 주로 보리·유채·고구마를 재배했다. 이 규모의 농사로는 한 가족 입에 풀칠도 어려운 여건이었다. 게다가 매년 보릿고개를 앓았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농민들에게 자본은 꿈이었다. 기술 역시 마찬가지다. 변변한 기술을 가진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 때다.

 

그러니 산업을 일으켜 세울 ‘자본’을 운운하는 맥그린치 신부의 말이 씨알도 먹힐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설득했다. 그는 주민들에게 자본은 차츰 만들어 가면 된다고 설득했다. 그리고선 그는 경기도로 갔다. 물어물어 미군 대령을 찾아간 것이다. 한국전쟁 뒤 그 지역 작전권을 가진 그 미군 대령을 만나 영국의 개량 돼지인 요크셔 두 마리를 얻었다.

 

당시 주민들이 주로 키웠던 흑돼지가 낳는 새끼는 한 번에 3~4마리. 하지만 이 돼지는 낳았다 하면 10마리 내외였다. 흑돼지는 1년 반 이상 키워야 겨우 60kg 이었지만 이 서양돼지는 6개월이면 거뜬히 60kg을 넘어섰다.

 

돼지를 키우는 우리는 우선 급한 대로 성당 마당에 만들었다. 새끼를 낳으면 우선 4H회원들에게 분양하였다. 그는 분양 받은 4H 회원에게 분양 받은 돼지가 다시 새끼를 낳으면 두 마리를 가져 오게 하였다. 이 두 마리를 다시 회원 두 사람에게 분양하고, 다시 두 마리를 받고···. 자본은 이렇게 만들어갔다.

 

닭도 분양, 분양받은 사람은 달걀 10개를 가져 오도록 했다. 이 달걀이 다시 부화하면 병아리를 분양하고, 또 달걀을 받고 ···. 맥그린치 신부는 돼지도 공동으로 판매하기 위하여 ‘돼지은행’을 만들어서 공동생산·판매했다. 당연히 제 값을 받기 마련이었다.

 

이제 맥그린치 신부는 그런 자본을 대규모 자본으로 전환하는 걸 꿈꿨다. 그 당시 제주도는 적은 자본을 모으는 방법으로 ‘계’가 유행이었다. 소위 사설 은행인 셈이다. 그러나 계는 계주가 계원에게 빌려 준 돈을 받지 못하거나 꾸어 간 사람이 갚지 못하는 경우 파산이 되는 사례가 너무나 많았다. 어느 날 그렇게 착한 베드로라는 신자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밤늦은 시간에 사목회장으로부터 들었다. 열심히 곗돈을 부었는데 막상 자신이 받을 차례가 되자 계가 파산해버렸다는 것. 이를 비관, 스스로 목숨을 끊았다는 얘기를 듣고 그는 움직였다.

 

그는 주위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안심하게 돈을 맡기고 필요할 때 타서 쓰고, 빌려서 쓸 수 있는 은행을 만들었다. 한림신협의 탄생 비화다. 현재 제주도내에 있는 26개의 신협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지역개발에 있어서 지역의 자원은 한계자원이라고 한다. 잘 쓰면 금이 되고 못쓰면 걸림돌이 되는 경계선상에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맥그린치는 자신의 고향보다 훨씬 좋은 환경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려 둔 자원에 대해서 늘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그는 처음 이시돌 목장을 만들려고 금악리에 있는 ‘정물’이라고 하는 곳의 땅 3천 평을 샀다. 당시에 시가로 10원도 안 되는 0.5원이었다. 1500원으로 3천 평을 산 것이다. 이튿날부터 그 주변 땅을 가진 주민들이 숱하게 그를 찾아왔다. 자기네 땅도 사 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주민들은 그 땅은 가시덤불만 있고, 길도 없는 형편 없는 땅이란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정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 신부가 땅을 구입하니 “잘 되었다. 이 참에 바가지나 씌우자”라는 생각에 땅을 팔겠다고 득달 같이 매달린 것이다. 마침 그 시절 맥그린치 신부는 안식년을 받아 고향 아일랜드에서 제주개발을 알리며 1년 동안 모금 활동 끝에 어느 정도 돈을 쥐고 있던 터였다. 요구하는 대로 거의 살 수 있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그 땅으로 보물을 만들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땅 주인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외국인 신부가 바가지를 썼다”고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땅들이 지금 이시돌 목장의 연원이다. 한림의 4H 회원 청년 20여명이 일당도 없이 합심하여 개간하고 목초를 심고, 돼지·소·면양을 키우면서 오늘날 300만평이 되는 옥토를 만들어 낸 것이다.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배워주라”는 지역개발의 1원칙을 맥그린치 신부는 이미 당시부터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제주지역 주민, 특히 한림읍 주민들이 스스로 한림읍 내의 자원을 갖고 개발에 나섰기에 개발이익은 자연히 지역과 지역주민에게 환원될 수밖에 없다. 가장 바람직한 지역개발 모습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가난한 지역과 나라는 바로 자신들의 주변에 수많은 자원들이 있다는 걸 외면하는데서 비롯된 결과다. 지난 1월 자원봉사차 갔던 라오스도 1년에 3~4모작을 할 수 있는 비옥한 토지와 메콩 강이라는 풍부한 수량의 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는 땅이 그렇게도 많았다. 심지어 옆에 흘러가는 강을 보면서 물이 없어서 농사를 짓지 못하겠다고 불평을 한다. 우리나라 농림축산식품부에서 해외원조 프로그램으로 수로를 만들어 줘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을 보았다. 농림식품부도 맥그린치 신부의 지역개발 과정을 도입했더라면 그들에게 돈이 아니라 의식개혁을 통한 자신감을 부여하고, 그들 스스로 지역의 자원을 활용하도록 하는 조련사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라오스 지역에 우리나라 유명 기업이 3만개의 교실을 지어 초‧중‧고교를 만들어줘 화제가 됐다. 그러나 지금 그 교실 대부분은 망가지거나 소가 드나드는 축사로 변해버렸다. 해외원조는 자금을 얼마나 지원해 주느냐 보다 조련사 역할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맥그린치 신부의 지혜가 새삼 돋보이는 이유다. <글=양영철/ 5편으로 이어집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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