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람이 자기 밥그릇의 밥을 각각 한 숟가락씩 떠서 모으면 한 사람의 먹을 식량이 된다는 십시일반(十匙一飯)!
십시일반의 기적은 맥그린치가 가는 길에서, 이시돌 현장에서, 그의 염원이 맞닿은 곳곳마다 이뤄진다.
맥그린치 신부가 십시일반의 성공을 이룬 첫 작품은 한림성당 신축이다. 1954년 제주도 한림읍에 처음 부임한 맥그린치 신부는 한림우체국 옆 신순영 신자 집에 숙소 겸 성당으로 삼아 미사를 집전했다. 하지만 신자가 늘어가는 터에 두어칸 가정집은 한계였다. 그렇다고 6·25동란의 참화를 겪은 가난한 동네, 가난한 국가에서 신자들의 도움을 얻어 성당을 짓는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맥그린치와 신자들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꾸는 꿈은 꿈밖에 되지 않지만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이 사실로 돌변하는 일이 잇따라 벌어진다.
때마침 미국 선적 화물선이 한림읍 수산리 앞 바다를 항해하다 좌초되는 일이 벌어졌다. 레이더 고장으로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암초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썰물 때는 걸어서 갈 수 있는 수원리 용운동 앞바다 인근이었다. 운이 따랐다. 선장과 선원의 고국은 맥그린치 신부의 고국인 북아일랜드였다. 물론 선장·선원 모두 가톨릭 신자였다. 이역만리 바다에서 배가 좌초, 하루하루를 불안한 나날로 보내던 그들은 그 외로움을 고국출신 신부를 만나 풀 수 있었다. 허름한 성당에서 미사를 보내며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걸 행운으로 여기고 있던 터였다.
맥그린치 신부는 이들을 고향친구처럼 대했다. 좌초된 배에 올라 미사까지 집전해줬다. 뜻하지 않은 환대를 받게 된 이들은 성당조차 없이 집 한 구석에서 미사를 보고 있는 고향 신부를 보고 도와주고 싶었다. 그들이 떠올린게 화물을 보호하기 위한 고정목재였다. 9천톱급 화물선 안에는 그런 목재가 그득했다. 그러나 남은 시간은 고작 3일. 선박 보험사와 선박회사가 사고조사차 3일 후에 당도한다는 소식이었다. 성당을 지을려면 필요한 게 목재였고, 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서둘러 목재를 치워야했다. 하지만 뜯어내 그걸 제주 본섬 육상으로 옮겨올 인력은 없었다.
그때 십시일반의 기적이 일어났다. 주민들이 주인공이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우선 신자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신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래봐야 기껏 진자는 25명. 모두가 나섰지만 중장비는 고사하고 리어카도 변변치 않았던 시절이라 몸과 마차, 소달구지가 전부였던 시절이다. 신자들은 들고 나올 수 있는 모든 걸 들고 나왔다. 하지만 25명이 하루 종일 목재를 날라봐야 그저 마차 한 수레 분량 목재나 채울 정도.
맥그린치는 캄캄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다. 용운동 주민을 중심으로 수원리 주민 400명이 모두 나선 것이다. 수원리 주민 중엔 신자가 단 한명도 없었는데 그들이 포구로 들이닥친 것이다. 맥그린치로선 입이 쩍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일이 막바지에 이르자 한림읍 주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웃 한경면 신창·고산 등 소문을 들은 인근 주민들이 모두 일을 돕겠다고 나섰다. 일부는 배 안에서 나무를 뜯어내고, 일부는 내리고, 일부는 바다에서부터 나무를 들쳐 메고 나왔다. 그러면 뭍에 있던 주민들은 그 나무를 손에서 손으로 넘겼다. 소달구지와 마차가 성당을 지을 장소로 그 목재를 실어 나르는 광경! 영화의 한 장면이 따로 없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그 시절을 회고할 때마다 "모든 주민들이 나와 마차 100대 분량의 목재를 실어 나르는데 조금도 사라지거나 잃어버린 목재가 없었다. 그 순간 난 이들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십시일반의 기적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성당을 짓는 일은 목재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다. 돌과 시멘트를 비롯해 여러 자재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새로운 십시일반은 맥그린치 신부가 출장 중에 우연히 만나게 된 한 미군 장교로부터 시작된다. 전북 군산의 미군부대에 군종단장으로 파견되어 있는 미 공군 중령인 조지 신부다. 우연한 만남이란 맥그린치 신부가 뭍으로 갔다가 군산발 제주행 비행기가 결항이 되면서 이뤄졌다. 군 부대에 미사를 드리러 갔다가 생긴 인연이었다.
그는 돌연 조지신부가 생각났고 그를 만나러 군산에 갔다. 맥그린치 신부의 사연을 들은 군종신부는 군인신자들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고, 신자들은 한달에 한번씩 한림성당 신축헌금을 모았다. 1달러도 아닌 1센트, 10센트 등 동전들이다. 하지만 중령이 군종장교라면 사단급인 부대. 그래도 한달에 미화 100~120달러가 꼬박꼬박 맥그린치에게 전달됐다. 여기에 모슬포에 주둔한 미군부대에서도 신자들이 정성을 보태기 시작했다. 한림성당은 좌초된 외국 화물선의 선원, 한림읍 주민, 미군 신자 등의 십시일반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또 있다. 맥그린치 신부가 가장 성공한 사업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한림수직이다. 양털 하나로 일자리 없는 시골 1000여명의 여성들에게 고급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니 이보다 더 큰 작품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앞서 말했지만 일자리를 찾아 부산으로 간 10대 처녀 순임이가 3개월만에 싸늘한 주검이 돼 돌아온 일로 시작된 사업이 한림수직이다. 먼저 양을 구입해야 하는데 돈이 있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고향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손을 벌렸다. 편지를 썼다. 한 푼씩 도와주면 양을 구입하여 불쌍하지만 착하기만 한 여성들에게 옷을 짜서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계획도 함께 전달했다. 푼푼이 돈이 모였고 그 돈은 9000km의 여정을 거쳐 맥그린치에게 전달됐다. 그 돈으로 성산포 노인에게 찾아가 35마리의 양을 샀다. 마침 조직된 한림의 4H 청소년 회원들이 그 양을 키웠다. 튼튼한 양털은 그들로부터 얻어냈다.
이 털을 갖고 한림지역 여성들이 장갑과 양말, 옷을 짜기 시작했다. 한림 여성들에게 양털을 벗겨 이를 가공하여 실을 만들고 다시 옷을 짜는 일은 듣도 보도 못한 일. 맥그린치 신부가 고향 마을에서 어깨 너머로 본 것을 떠올리며 무수한 실패끝에 기술이 축적돼 갔다. 하지만 엉성했다. 노점상 하듯 맥그린치 신부가 서울 명동에 가서 내다 팔았지만 사는 이는 없었다. 낙심해서도 안 되고 한림 여성들에게 상처를 줘서도 안 되기에 맥그린치는 그걸 들고 명동의 골롬반 신부와 수녀회를 찾아갔다. “제발 도와달라”는 맥그린치의 말에 그들은 또 십시일반의 정성을 보탰다.
십시일반은 가속도를 붙여 맥그린치 신부의 어머니가 자신의 고향 옷을 짜는 물레를 보내주고, 양털로 옷을 짜는 기술을 가진 수녀들이 일을 거들겠다며 제주도로 찾아왔다. 서울 명동 최고의 호텔인 조선반도호텔에 매장을 열게 된 사연이다. 모든 이들의 합심과 땀, 정성, 기원이 모여 이뤄진 십시알반의 기적이 또한 한림수직이다. 협동과 협력은 이제 서서히 자신감이란 최고의 자산으로 변모해갔다.
십시일반의 기적에 협동과 협력의 정신, 자신감으로 확보된 자산은 이제 이시돌 목장을 만나 일을 저지르고 만다. <글=양영철/ 11편으로 이어집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