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성탄전야.
온 누리에 평화(平和)가 넘쳐난다는 거리마다 하느님의 은총을 노략질한 것 같은 취객들과, 사탄의 저주를 억울하게 받았을 것 같은 폐지할머니들이 세밑 대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평화(平和)는 쌀(禾)이 입(口)으로 골고루(平) 들어간다는 말이라던데, 이마저 창조주 하느님의 전지전능이라면 대체 당신의 평화는 어떤 것인지? 하느님은 천지창조를 대충 하신 건지? 아니면 이것이 완벽하게 창조된 세상인지?’
성탄절에 똬리를 튼 의념(疑念)에 쏠려 얼추 연말을 보냈다.
따지고 보면 하나 마나 한 생각이 바람에 구름 가듯 서서히 멀어질 때쯤, 우근민 도지사의 신년사가 미처 도망치지 못한 구름조각을 다시 붙들어 맸다.
‘위목, 아랫목이 고루 따뜻한 제주’
먼저 참 좋은 말씀을 하셨다. 그 중에도 ‘고루 따뜻한’이라는 수식이 가슴시리다.
‘윗목’과 ‘아랫목’은 노골적으로 해석하면 상류층과 하류층을 은유한 것으로 짐작이 간다.
행여 그 명징한 어휘의 바탕에 우리 편과 그들 편이라는 묵은 더께가 끼어있지 않기를 바란다.
상류든 하류든 우리 편이거나 그들 편이거나 ‘제주사회에 엄존하는 불평등을 인식은 하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잠시의 착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뒤이어 ‘행복한 도민, 희망찬 제주’
그렇다. ‘고루’ 따뜻하면 두말할 것 없이 도민들은 행복해진다.
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
백성은 빈곤한 것에 대한 걱정보다 고르지 못한 분배에 근심이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
불평등은 더 적대적이고 덜 친화적인 사회를 만든다.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왜 사회적 관계가 열악해지는지를 임기 내내 염두에 두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때늦은 발아지만 ‘고루 따뜻한 제주’가 신년사에서 밝힌 ‘행복한 도민, 희망찬 제주’의 밀알이 되길 간절히 빈다.
그런데 일념삼천이라 했던가, 이놈의 의념(疑念)이 또 꼬리를 문다.
행복의 밀알이 될 ‘고루’라는 것을 어떻게 가꾸어 나갈 것인가.
목메게 부르짖는 관광객 1천만 명과 경제성장률 전국 1위, 수출 1조원을 섞어 만든 화학비료만으로 도민이 고루 따뜻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것은 풍요를 추격하는 것일 수는 있으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풍요와 행복이 어느 정도까지 동질한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좀 더 대놓고 말하면 경제성장률 1위가 가져다준 재화의 배분을 염두에 두고 ‘고루’라는 단어를 인용했다면 도지사로서는 주제넘는 일이다.
극히 미시적이지 않는 한 국민과 대통령과의 문제이지, 도민과 도지사와의 문제는 아니다. 시장자본주의의 한계로 드러난 빈부의 양극화는 오히려 경제성장률로 집약되는 지나친 자유경쟁이 가져온 폐해다. 이것은 오늘날 전 세계의 문제이며 따라서 글로벌 리더들의 몫이거나 창조주 하느님의 영역이다.
외형적인 경제성장률과 상관없는 아랫목의 행복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라가 잘 살든 말든 연탄 300장과 쌀 한 가마만 들여놓아도 이 겨울이 행복한 도민들이 얼마든지 있다. 다시 말해 가난한 도민이 다 불행하지는 않다. 그런데 억울한 도민들은 다 불행하다.
그래서 ‘위목과 아랫목이 고루 따뜻한 제주’는 제주사회에 만연한 기회와 결과의 불평등을 제거하는 것이다. 평등(고루)이냐 불평등이냐가 협력이냐 갈등이냐를 결정짓는다. 그 기회와 결과의 평등을 훼손하는 윗목의 불공정을 쓸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아랫목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이다.
이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밝힌 ‘비정상의 정상화’와 일맥상통 한다. 비정상의 정상화란 과거로부터 지속되어 온 잘못된 관행과 비리, 부정부패를 바로잡는 것이라고 했다. 제주사회의 비정상과 불평등을 정상화하는데 제일 무서운 적은 윗목들의 기득권이다.
윗목들은 대체적으로 기회와 결과의 평등(고루)에 대하여 파렴치하거나 무관심하다. 그들에게 정상화라는 옷을 갈아입히기에는 이미 많은 불평등, 불공정, 반칙의 비곗살이 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곗살을 도려낼 만큼 아픔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이제 그들이 위목으로 타고 올라 온 사다리를 내놓으라고 해야 한다. 그 사다리를 위목에게 발길질 당하며 소외되었던 아랫목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그동안 우근민 지사의 편에 서지 않았다가 하류로 전락한 아랫목의 신음을 들어야 한다. 그동안 외부 전문가 영입 같은 위장 공모제도를 빌려 노략질한 전문성 없는 별정직과 계약직, 단체장, 공기업 간부 등 잘못 꼬여진 줄을 제대로 펴놓아야 한다.
사다리 주변에서 위목을 염탐한 학계의 지성 없는 지식인, 도청의 생각 없는 사무관(思無官-생각 없는 공무원의 총칭), 상도(商道) 없는 사업가, 시비를 가릴 줄 모르는 지역의 유지들을 본연의 자리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 자리에 아랫목이 빼앗긴 기회의 평등을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사실 그들은 백범이나 도산 같은 그럴싸한 호를 갖고 싶어 하지만 원래가 정통성이 없었으니 윗목에 오를 자격이 없지 않은가. 도지사가 먼저 그들과 함께 형성한 사적인 공적 구조를 청산해야 한다.
행불행의 대별 기준은 윗목과 아랫목이 아니다. 아랫목에게도 아랫목 나름대로 소박한 행복이 있다. 제발 아랫목의 소박한 행복을 뜯어다가 윗목의 비곗살을 더 살찌우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자기편이라고 은근슬쩍 정체불명의 석불에게 5억원을 시주해서는 안 된다. 부처님 정도라면 빛바랜 모시 너머에서 사바세계를 다 보고 계시다. 세간의 중생들 몫을 빼돌려서 부처도 모르는 출세간의 바윗덩어리에게 시주했으니 잘했다고 할 것 같은가.
아랫목을 따뜻하게 하려거든 너무 요란하게 공치사하지 말아야 한다.
하류가 자존심은 상류이다. 곧 죽어도 선거판에 빌붙어서 먹고 사는 석불 따위와는 질이 다르다.
다음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또다시 수면 아래에서 편 가르기 해서는 안된다.
알 사람은 다 안다. 그래서 이번에는 속지 않겠다고 벼른다.
얼마 전에 모방송사와의 대담에서 왜 우리가 3김에 비유되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는데 진짜 모르시는 건지 모르는 척 하시는 건지 모르겠다.
당시 3김 청산을 요구하는 국민여론은 영호남과 충청권을 편 가르는 지역감정을 조장한 장본인들이 퇴진해야 대통합을 이룰 수 있다는 국민의 여망이 아니었던가. 도민들은 세분의 전현직 지사가 어쩐지 3김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걸 진짜 모르시나.
이왕에 ‘고루’따뜻하게 하실 마음이라면 편 가르기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
‘편 가르기’와 ‘고루 따뜻한 행복한 도민’은 멀어도 너무 멀다.
☞김성민은? =탐독가, 수필가다. 북제주군청에서 공직에 입문, 제주도청 항만과 해양수산 분야에서 30여년 간 공직생활을 했다. 2002년엔 중앙일보와 행정자치부가 공동주관한 제26회 청백봉사상 대상을 수상한 전력도 있다. 그해 12월엔 제주도에 의해 행정부문 ‘제주를 빛낸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8년 월간 한맥문학사의 ‘한맥문학’에 의해 수필부분 신인상으로 등단한 수필가다. 공직을 퇴직한 후에는 그동안 미루어 왔던 깊은 독서와 보이차의 매력에 흠뻑 젖어서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