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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이니셰린의 밴시 (10)
어렵게 민주주의 쟁취해놓고 ... 혼란스럽고 시끄럽기만 해
철권통치나 권위주의 시대가 ... 행복한 기억으로 윤색되기도

이니셰린 섬에서 ‘동네 바보형’ 파우릭과 잡담으로 시간을 죽이고 살던 콜름은 뜻밖에도 한때는 음악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랬던 콜름이 어쩌다가 외진 이니셰린 섬까지 흘러들어와 ‘청산별곡’ 같은 삶을 살게 됐는지 영화는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콜름은 어느날 문득 음악가로의 삶을 그리워한다. ‘노스탤지어(향수)’에 사로잡힌 거다. 그는 아마도 음악가로서의 삶에 실패했든지, 음악 자체가 무의미해져서 음악을 버렸을 듯하다.

영화는 콜름이 왜 오래전에 음악을 버렸고 또 갑자기 음악가의 삶에 ‘향수’를 느끼게 됐는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자신이 떠나온 과거에 느끼는 향수란 대개 이성적이라기보단 대단히 감성적이다. 설명 가능한 특별한 계기가 있을 리도 없다.

콜름은 ‘청산별곡’의 삶을 정리하고 다시 음악가의 삶으로 돌아가 ‘이니셰린의 밴시’라는 불후의 명곡을 남기겠다는 결심한다. 그런데 음악가의 삶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그의 첫 조치는 바이올린과 악보를 다시 꺼내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그동안 잡담으로 자신의 시간을 죽였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파우릭을 자신의 삶에서 몰아내는 일이었다. 

콜름의 입장에서는 다시 음악에 매진하겠다는 상징적 조치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파우릭에게는 아무런 양해나 설명도 없이 일방적으로 절교를 통보한다. ‘향수’는 이처럼 인간을 비이성적으로 몰고간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명작 중 하나인 자신의 대작(大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In Search of Lost Time)’에서 향수(nostalgia)의 정체를 명쾌하게 정의했다. “과거 기억과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향수는 과거의 사실을 미화하고 윤색해서 기억한다.

단테(Dante)는 ‘신곡(神曲)’에 이렇게 적었다. “고통스러운 시간에 떠올리는 과거는 모두 행복했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고통스러운 시간에 떠올리는 행복했던 시간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향수는 그렇게 고통스럽기도 하다. 지옥의 고통이 실감난다.

콜름은 아무런 희망 없이 시간만 죽이는 이니셰린의 삶에 고통을 느낀다. 과거에 떠나왔던 음악의 고통도 행복했던 시간으로 느껴지고, 다시 돌아가고 싶다. 그것이 곧 향수다. ‘노스탤지어(nostalgia)’라는 말은 그리스어 ‘nostos(돌아가다)’와 ‘algos(고통)’의 합성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너무나 돌아가고 싶은데 돌아갈 수 없어서 느끼는 고통을 의미한다. 클롬이 느끼는 고통의 정체를 알 것 같다.
 

 

‘노스탤지어의 고통’은 파우릭에게도 다간온다. 콜름에게 절교를 당한 파우릭은 잠시 황당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사실 콜름이 파우릭의 삶에서 처자식이나 연인과 같은 절실한 존재는 아니다.

그저 동네 펍(pub)에서 시시한 잡담이나 나누는 나이 많은 말동무에 불과하다. 없어도 그만인 존재이다. 그런데 파우릭은 묘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절교를 통보받은 순간부터 콜름과 함께했던 시간들은 과거가 돼버리고, 돌아갈 수 없는 ‘잃어버린 시간’에 고통스러운 향수를 느끼기 시작한다.

콜름과 퍼질러 앉아 무의미한 잡담을 나누던 시간들은 너무나 소중하고 행복했던 시간들이었고, 지금은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콜름과 파우릭 모두 ‘잃어버린 시간’으로 돌아가기 위한 전쟁에 빠져든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이란 우리에게 행복의 수수께끼를 제시하고 있는 희미하고 눈부신 환영(幻影)”이라고 말한다. 프루스트의 표현을 따르자면 콜름과 파우릭은 ‘환영의 전쟁’을 하는 셈이다.

우리도 종종 ‘잃어버린 시간의 환영’에 빠지곤 한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시간들도 돌이켜보면 문득 지금보다 행복했던 시간들로 느껴지곤 한다. 오죽하면 ‘국민 가곡(歌曲)’쯤에 해당되는 정지용 시인의 ‘향수’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가난한 고향 시절이 시리도록 그립고 돌아가고 싶다”고 노래한다. ‘노스탤지어’의 마법이다.

개개인이 느끼는 ‘향수’야 프루스트의 말처럼 ‘희미하고 눈부신 환영이자 행복의 수수께끼’일 수도 있겠지만, 돌아가서도 안 될 과거에 집단이 향수병에 걸려버리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러시아는 최근 ‘위대했던 소련제국의 영광’을 외치면서 우크라이나로 쳐들어갔다. 중국은 ‘위대했던 중화제국’의 본때를 보여주겠다면서 여기저기서 행패를 부린다. 미국의 ‘MAGA(Make America Great Aga inㆍ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공화당원’들은 트럼프를 중심으로 뭉쳐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독일에도 히틀러의 제3제국을 향수로 물들이는 ‘네오 나치’가 여전히 기승을 부린다. 모두 ‘집단 향수병’ 환자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그 ‘위대했던 시절’에 정말 그들은 행복하기만 했을까. 고통의 기억은 사라지고 영광의 기억만 남는다. ‘노스탤지어’의 함정이다.

‘노스탤지어’는 종종 민주주의 퇴보의 원흉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기나긴 투쟁을 통해 어렵사리 민주주의라는 것을 쟁취해놓고 보니, 혼란스럽고 시끄럽기만 하고 뭐 하나 화끈하게 이뤄지는 것도 없다.

과거에 버리고 떠나왔던 가난한 고향처럼 과거의 독재 철권정치 시대나 권위주의 시절이 오히려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이 윤색된다. 그 시절의 참담했던 기억들은 대개 분칠돼 희미해진다.

어렵게 민주주의를 쟁취했던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많은 국가들이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혀 다시 철권통치나 권위주의 시대에 ‘향수’를 느끼기도 하고, 실제로 돌아가기도 하는 모양이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 노랫말에 유난히 공감하는 우리는 어떤지 문득 궁금해진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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