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자명(陳子明), 옛 부하에게 사기 치며 구걸하다 역사에는 벼슬하다가 거지로 전락한 후 사람들에게 어떤 동정도 받지 못하는 사인이 있다. 진자명(陳子明)이 바로 그이다. 진감(陳鑑), 자는 자명(子明), 광동(廣東) 사람으로 명(明)나라 말기의 공사(貢士)다. 청(淸)나라 순치(順治) 때에 화정〔華亭, 현 상해 송강(宋江)현〕 현령에 발탁되었다. 진자명은 사람됨이 험악하고 외지어 타인을 비방하기를 즐겼다. 나중에 직권을 이용해 양식을 횡령하니 파직되어 감옥에 갇혔다. 만기 출소 후 생계가 막막해지자, 아무 때나 옛 부하였던 관리들을 찾아가 먹을 것을 요구하였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은밀하게 숨겨진 일이나 단점을 캐내기도 했다. 심지어 관부에 고발까지 하니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이가 들어 입에 풀칠하지도 못하게 되자, 마누라와 함께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80세까지 살다가 결국 얻어먹지 못하여 굶어 죽었다. 평상시에도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거지를 대하는데 진자명 같은 나쁜 자가 궁핍해져서 거지꼴하고 구걸하며 돌아다니니 가련하게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낡은 버릇을 고치지도 않고 계속 사기치고 협박하며 재물을 가로채다가 결국 굶어 죽었으니, 어찌 인과응보라 하지 않겠는가. 거지 중의 은사(隱士) 산과 들, 강호에 은거해 관직에 나오지 않는 사람을 은사(隱士)라고 한다. 은사는 특수한 사회현상의 하나다. 예부터 지금까지 존재한다. 상황이 다를 뿐이다. 『논어·계씨』에 “숨어 지내면서 그 뜻을 추구한다”라는 말이 있다. 은사란 뜻이 없는 것도 아니요 세상사와 절연한 것도 아니다. 그저 각자 지향과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각자 처지와 고락이 다를 뿐이다. 『순자·정명』에 “천하에는 은사가 없고, 버려진 착한 이가 없다”라고 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사기·화식열전』에 “동굴 속에 숨어 사는 선비가 높은 명성을 얻으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인가?”라는 말이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은거하면서 이름을 떨친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부지기수다. 진(晉)나라의 도연명(陶淵明)이 유명한 은사가 아니던가. 삼국시대의 제갈공명(諸葛孔明)도 산야에 은거했던 은사였다. 이름이 떨치자 나중에 유현덕(劉玄德)이 삼고초려 해서 산문을 나서게 하고 마침내 평생의 큰 뜻을 펼쳐 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는가. 은사란 ‘숨다’〔은(隱)〕에만 뜻을 두었다고 할 수 없다. ‘숨다’(隱)의 뜻은 ‘나타내다’〔현(顯)〕에 있다. 기회가 주어지면 뜻을 펼치고 꿈을 이루는 것이다. 오중(吳中) 동정산(洞庭山)의 거지 은사 은사(隱士)의 길은 여러 가지다. 불문에 은거하기도 하고 도교에 은거하기도 한다. 초야에 묻히기도 하고 고향에 내려가기도 한다. 상업계 여러 분야에서 장사하며 은거하기도 하고 몰래 거지와 같이 행동하면서 은거하기도 한다. 거지와 같은 부류에 은거한 은사가 가장 청빈하다고 할 수 있다. 상황도 복잡하기 그지없다. 어떤 때는 숨었다가 어떤 때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해, 일정치 않다. 예를 들어 청나라 때에 오중(吳中) 동정산(洞庭山)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거지가 살았다. 미친 듯한 모습으로 낮에는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밤에는 사당에 숙박하였던 숨은 군자다. 일찍이 왕요봉(汪堯峰)이 그가 지은 절구 시가 몇 수를 기록하였다. 예를 들어 이렇다. “건곤이 크다는 걸 믿지 않고 초연히 세상에서 무리를 짓지 않네. 삼협의 물을 입으로 토해내고 만방의 구름을 발로 밟네.” “형태가 있는 것은 모두 가짜인데 형체가 없는 것이 어찌 진짜이겠는가? 무생지(無生地)를 깨달으니 매화가 이웃에 가득하네.” “등불 휘황하니 이 밤 경축하고 밤 깊으니 사내와 계집이 서로 부르지 않네. 얇게 만든 낡은 주렴 위의 하룻밤의 꿈인데 명조가 현 왕조라는 게 무슨 상관이랴!” “일 장으로 구름 뚫고 위쪽에 이르니, 호수와 푸른 산 모두 망망하다. 건곤은 내가 능히 질 수 있나니, 밝은 달 맑은 바람 아래가 너무 바쁘다.”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다. 아무 근심 걱정 없다. 여유롭고 기쁘다. 행각승으로 다니다가 밤이 되면 사당에 머문다. 당연히 푸대접이다. 쉽고 통속적인 시어 중에 강호에 은거하는 거지의 마음을 간간히 표출하고 있다. “건곤은 내가 능히 질 수 있다.” 은사 거지, 구걸한 돈으로 책을 사다 청나라 때 일이다. 어느 날, 복주(福州) 서시(西市)에 거지 한 명이 나타났다. 키는 작고 갸름한 얼굴에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다. 손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베로 만든, 울퉁불퉁한 자루 하나를 들고 있었다. 비틀비틀 걸으면서 때때로 시구를 읊조렸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해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다가 뒤쫓아 갔다. 빈 터에 다다르자 그 거지가 자루를 땅 위에 내려놓고는 안에서 종이를 꺼내 넓게 깔았다. 위에는 “사해(四海)에 쓸모없는 사람은 괴롭다”라는 해서로 된, 돈과 같은 크기의 글자가 쓰여 있었다. 아래에는 절강(浙江)에서 복건(福建)으로 친지를 찾아 나섰는데 만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미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으니 여러분이 돈주머니 끈을 풀어 도와주십사 등의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둘러싸 구경하던 사람들은 가련하다 여겨 몇 십 매의 동전을 던져주었다. 거지는 많든 적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천천히 자루에서 책을 꺼내 큰소리로 낭독하였다. 맑고 시원시원한 목소리였다. 읽는 책 내용에는 여러 은어가 포함돼 있었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거지는 몸을 굽혀 땅에 떨어진 동전을 주워서 돈주머니에 넣고서는 늠름한 모습으로 서점으로 들어섰다. 구걸한 돈으로 책을 사서는 허리춤에 메고 어정어정 걸어 나갔다. 이상하다 여긴 사람이 거지에게 물었다. “당신, 어찌 남는 돈이 있어 책을 샀소?” 생각지도 못하게 거지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당신이 홍곡(鴻鵠)도 아니면서 어찌 나의 뜻을 안다고 하겠소!” 말을 마친 후 소매를 툭툭 털고는 떠나갔다. 그곳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구걸하는 사람들과 함께 다녔던, 은거하면서 큰 뜻을 가슴에 품은, 은사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가버린 인생 돌이킬 수 없다 시간은 조석이 밀려오듯 많은 사람들을 어디론가 데려간다. 그 누구도 시간에 저항할 수가 없다는 것은 진리이며, 그 시간의 물살을 거슬러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세를 상상한다. 특히 종교인들은 현실의 편안함과 더불어 더욱 적극적으로 영생을 꿈꾼다. 그렇다. 종교는 믿는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믿는다는 것은 생각일 뿐 실존은 바뀔 수가 없다. 그 누구도 부활이라는 것에 대해 반증하지 못하였으므로 그것은 현실적으로 착각에 불과하다. 그저 생각뿐인 것. 삶이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감이 있다. 생명체의 태어남과 죽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모르는 생명체의 위대한 행로는 그 자페로 경이롭다. 최근 작고한 제주 작가는 누구인가. 2020년대 작고한 제주 작가는 강용택, 강광, 강영호, 백광익, 강길원 등 5명이다. 강광은 제주대 강사로 왔었고, 강길원은 제주대 교수로 재임했는데 본적이 육지 출신이지만, 직업상 제주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후진을 가르쳤다. 김창열은 한국전쟁 당시 경찰관으로 제주에 온 화가다. 그 인연으로 저지리 예술인 마을에 김창열미술관이 건립되었다. 강용택, 강영호, 백광익은 토박이다. 제주작가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제주출신이거나, 제주에서 교육자로 지내다가 육지로 간 일련의 화가들을 말한다. 지금은 제주작가라는 말이 예전보다 큰 의미는 없지만 정책적으로 볼 때 구분이 필요할 때도 있다. 이들 6인의 작고작가들은 나름 제주와 육지에서 활동을 했던 화가들이다. 화가 본인이 제주를 바라볼 때와 제주에 와서 살 때, 또 제주에 짧게 근무하더라도 화가 자신의 정서적 감수성들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가 있다. 강광(1940~2022)은 유독 과묵한 인상으로 조용히 살아온 화가였다. 강광은 평안남도 북청 출신으로 1965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베트남 전쟁 참전 이후 제주도에서 약 10년 동안 오현고 미술교사와 제주대 강사로 지내면서 상징주의적인 리얼리즘을 구현하였다. 1960년대 한국전쟁의 상처를 잊으려는 듯 추상미술이 유행하던 시기에 다시 충격적인 5‧16군사쿠데타를 목격해야만했던 화가로서는 당시 삶의 모순들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의기(義氣)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강광은 감수성이 예민한 대학시절에 4‧19혁명을 겪었고, 서울미대 졸업 후 미국의 대리전쟁인 베트남 참전이라는 육중한 역사의 무게를 견디면서 참전의 아픈 기억의 경험들에 대한 침묵을 배웠다. 그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懷疑)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사람이란 무엇이었던가? 전쟁 앞에선 삶이란 존엄하지도, 존엄한 적도 없었다. 적이란 이념이 만들어낸 괴물이자 허상이어서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싸워야 했는지도 분별할 수가 없었다. 전쟁터에서는 오로지 살아남는 것만이 정의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곤 인간 존재에 대한 트라우마뿐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강광에게 제주의 4월은 여전히 야생 들녘의 바람으로 휘돌고 있었고, 그 역사의 바람은 다시 5월 광주로 불어가 그 슬픔을 묵과하지 않게 만들었다. 슬픔은 비장함의 끝이 아닌가. 그래도 비극 속에서도 끝내 희망의 실마리를 놓지않은 채 평화의 다리가 보이는 한반도를 꿈꾸었다. 공안검찰에 의해서 불온시 된 '다리가 보이는 산하'는 그의 내면 깊숙히 우러나온 고민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강광의 기법으로는 캔버스 화면 위에 마티에르를 살리고자 두텁게 바르는 폴리에스테르 퍼티(putty, 일본 발음으로 빠데라고도 불렀다) 위에 색을 입히는 작업을 선호했고, 이 퍼티 작업은 당시 젊은 제주 작가들에게도 그 기법이 전수되었다. 삶이란 의미의 연속이지만 시간은 모든 존재를 무력화시킨다. 생전에 분단된 한반도를 여전히 황야라고 인식했던 강광은 2022년 4월 5일 향년 82세를 일기로 영원한 야생의 대지로 돌아갔다. 강광의 '오월의 노래-잃어버린 섬'(1985년)은 오늘에 보아도 여전히 예사롭지가 않다. 젊은 날의 사회적인 고뇌로부터 양심의 메아리가 울려오는 것일까? '오월의 노래'는 제주 4‧3의 섬에서 보는 비극적 현대사의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1948년 4월의 학살로 얼룩진 제주섬이 물결은 여전히 1980년 오월 광주로 흐르며 겹쳐지고 있다. 강광의 인식처럼 규명되지 않고 치유되지 못한 역사는 계속 중첩되면서 나쁜 역사가 돼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자행되는 억울한 죽음이 없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강광은 잠들지 못하는 제주섬이야말로 광주를 위해서 상징적인 오름에서 봉화를 피우고 있다. 우리의 소망은 현실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며, 역사의 물결은 결국 평화를 향해 열려 있기에 섬에서 벌어진 죽음의 의미를 한반도에서 새롭게 되새겨져야하므로 ‘오월의 노래’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깨침의 죽비라고 할 수 있다. 강광의 '횃불'(1980년대)은 말 탄 여성이 황량한 대지에서 죽음을 위령하려있는 듯 빛이 없는 잿빛의 세상을 향해 횃불을 들고 있다. 그러나 빛은 보이지 않고 형상만 어렴풋이 실루엣으로 처리돼 암울한 세상의 들판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횃불의 상징이란 우리는 암울한 현실을 마치 환한 대낮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 세계는 잿빛인데도 불구하고 컬러로 덮힌 채 착각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마치 화가 자신이 약소국에서 태어난 설움인듯 미국의 대리전인 베트남전이라는 더러운 전쟁에 참전해서 알게 된 수많은 한반도의 모순은 마치 돌파구 없는 구덩이에 빠져 불빛 없는 횃불을 들고 있는 형국이 아닐까? 자신의 위치를 깨닫지 못하는 가혹한 현실은 갇힌 세계에서 강요된 정의와 다름 없을 것이다. 화가는 우리에게 잿빛 세계를 벗어나야만 실제로 푸른 자연과 따스한 대지, 아름다운 생명의 광야를 달릴 수 있다는 암시를 하고 있다. 백광익(1952~2024년)은 밤하늘의 별을 노래했던 화가였다. 우주를 수놓은 수많은 별이 그의 벗이었지만 2024년 결국 그도 별이 되었다. 모든 인간은 별과 같다. 별의 원소가 인간을 이루는 원소와 같기 때문이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인간 모두 별로 가거나 지구별이 된다. 백광익은 제주 출신으로 제주대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현대 추상미술을 제주에 도입을 시도하여 1976년 ‘관점동인’을 결성하고, 이듬해 창립하면서 제주 현대미술의 다양성을 추구하는데 앞장 선 화가 중 한 명이다. 제주도미술대전 최우수상 및 특선 4회를 수상했고, 창작미술협 회 공모전에 출품하여 대상을 수상하는 등 공모전에 도전하여 성과를 냈다. 부산청년비엔날레, 남부현대비술제 등 국내외에서 30여 회의 개인전과 수많은 단체전을 열 정도로 활발한 작품활동했다. 국내의 수많은 공모전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고,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과 심사위원을 역임하여 후세대 발굴에도 기여했다. 한국미협제주지회 17대, 20대 지회장을 역임했다. 미술교사로 시작하여 오현중‧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제주국제예술센터 이사장과 무릉갤러리 관장으로 활동하다가 2024년 7월 16일 불의의 사고를 당한 후유증으로 영면하였다. 7월 19일 오전 6시 부민장례식장에서 미협장으로 발인하였다. 바야흐로 인생의 무상함을 절감한다. 백광익의 '78-세월'(1978년)은 관점동인의 일원이었던 화가의 추상 초기의 즉흥적인 작업이다. 화면에는 사각의 모양들과 비정형적인 형상에 스크레치들을 남기고 있다. 추상이란 무엇인지 모를, 그래서 화가 자신마저 생각지도 못한 감각을 일깨우고자 작업을 한다. 추상은 형태와 색의 향연이다. 어떤 구조를 이루거나 그 구조의 속, 혹은 안감과 같은 유사한 것들의 흔적일 수가 있다. 세월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물질에서 시간의 흔적을 추적한 것 같다. 오래된 흔적이 묻어나는, 혹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퇴색과 풍화, 마모가 주는 감성적 느낌들은 시간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몽키지 말앙 혼저 오라게" (꾸물대지 말고 빨리 오시게.) “Don't delay, come quickly.”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관중(管仲), 배고파 구걸하니 밥을 무릎 꿇고 먹이다 춘추시대에 유명한 정치가, 『관자(管子)』의 작가라 알려진 관중(管仲)은 관경중(管敬仲)이라고도 불린다. 이름은 이오(夷吾)요, 영상(潁上) 사람이다. 포숙아(鮑叔牙)가 추천하자 제(齊) 환공(桓公)에게 경(卿)에 임용되어 ‘중부(仲父)’라 존칭되었다. 제나라에 관리로 있을 동안 관중은 정치, 군사, 경제 등 일련의 개혁정책을 펼쳤다. 국력을 크게 떨쳐 당시에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다. 제환공도 패주가 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혁혁한 공을 세운 사인도 일찍이 노(魯)나라에서 제나라에 의탁하러 가던 중에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기오(綺烏)의 관리에게 구걸하였다. 그 관리는 무릎을 꿇고 관중에게 밥을 건넸다. 기오의 관리는 눈치 보면서 조용히 물었다. “만약 당신이 다행히 죽음을 면하여 제나라에서 중용된다면 내게 어떤 보답을 하려 하시오?” 관중이 답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현인을 뽑고 능력자를 임용할 것이오. 어떻게 당신에게 보답하여야 되겠소?” 기오의 관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 시대의 명사는 곤궁에 빠져 구걸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하여도 지조는 잃지 않았다. 그러니 나중에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고! 거지의 시조 오자서(伍子胥), 퉁소를 불며 구걸하러 다니다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가난 때문에 걸식하며 유랑하다 나중에 동산재기 한 사인이 있다. 여태껏 거지들이 조사(祖師)로 받드는 오자서(伍子胥)가 그이다. 『초사·구장·섭강(涉江)』에 “오자(伍子)가 재앙을 당했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왕일(王逸)이 주를 달았다. “오자는 오자서(伍子胥)이다. 오왕 부차(夫差)의 신하가 되어 월(越)나라 정벌을 명하라 간언했으나 부차가 듣지 않자 끝내 왕이 선물한 칼로 자살하였다.” 이에 대하여 오대(五代) 때에 촉(蜀)나라 사람 두광정(杜光庭)은 『녹이기(錄異記)』 7권에서 더 기묘하게 기술하였다. “오자서가 여러 차례 오왕에게 간언하였다. 왕의 명령을 거역하니 촉루검(屬鏤劍)을 내려 죽도록 하였다. 임종 전에 아들에게 절대 잊지 말라며 말했다. ‘내 머리를 남문에 걸어둬서 오나라를 정벌하러 오는 월나라 군대를 보게 하라. 물고기 껍질로 내 시체를 싸서 강에 던져두라. 나는 지금의 왕조가 저물어갈 때 파도를 타고 올라와 오나라가 패배하는 것을 보겠노라.’ 이로부터 해문산(海門山) 조수의 파구가 용솟음쳤다. 전단(錢塘)을 넘고 어장을 넘어서야 점차 줄어들었다. 온종일 계속되었다. 큰 소리를 내며 줄달음치고 번개가 번쩍이니 백여 리까지 들렸다. 오자서의 장례식에 썼던 마차가 보이자 조수의 파구에 표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이 전설은 민속신앙이 되었다. 오월(吳越) 지역을 넘어 양주(揚州), 안휘(安徽), 민광(閩廣, 복건과 광동, 광서 일대) 등지까지 퍼져나갔다. 당송(唐宋) 이래로 제왕들은 종종 오자서를 제후에 봉하거나 왕에 봉했다. 이 전설과 민속신앙은 오자서가 오나라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처참하게 생을 마감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거지들은 오자서를 조사(祖師)로 받들었다. 오자서는 성은 오(伍), 이름은 원(員)이요, 자서(子胥)는 호이다. 부친 오사(伍奢)는 초(楚)나라의 대부였다. 초평왕(平王) 7년(BC522)에 평왕은 오서와 가족 대부분을 죽여 버렸다. 다행히 횡액을 피한 오자서는 홀로 도망쳐 송(宋), 정(鄭) 등을 거쳐 오나라에 의탁하였다. 오나라의 힘을 빌려 복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소관(昭關)을 지날 때 초나라 병사의 단속이 심했다. 방도를 마련하고자 수심에 잠겼다가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 모습이 백발로 바뀌고서야 출관할 수 있었다. 도피 중에 산도 넘고 강도 건너며 온갖 고생을 하였다. 구걸하면서 배를 채웠다. 오나라 수도(소주)에 도착했을 때에는 무일푼이었다. 머리털이 헝클어졌으며 얼굴이 꾀죄죄하여 거지꼴이었다. 어쩔 수 없이 길거리에서 퉁소를 불며 구걸하였다. 퉁소를 불면서 걸식하다가 3일 만에 관상을 보는 피리(被離)에게 발견되었다. 퉁소 소리가 지극히 슬펐다. 관상도 비범하지 않았다. 공자 희광〔姬光 : 합려(闔閭)〕에게 추천하였다. 전하는 바는 이렇다 : 오왕이 오자서를 소견할 때에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본래 일반인이 아닌데 곤궁하다하여도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는가?” 오자서는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려 울며 하소연했다. “우리 부친은 아무 죄도 없는데 평왕에게 형과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저는 대왕께서 이 복수를 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왕은 그러겠노라 대답하였다. 궁궐에 머물게 하여 3일 밤낮을 시국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오왕은 오자서가 비범한 지혜와 용기를 지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명령을 내렸다 : 오늘 이후로 상하 귀천과 노소를 막론하고 오자서에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왕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사형으로 죄를 묻겠다. 이렇게 힘을 얻은 오자서는 오나라에 충성을 다했고 부모형제를 죽인 초평왕에게 복수할 수 있었다. 민간에는 위와는 다른 전설도 전해져온다. 나중에 희광이 오왕이 되자 사람이 냉혹하고 이기적이며 각박하게 변했다. 가렴주구 하니 백성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희광이 오자서에게 고소성〔姑蘇城, 소주(蘇州)〕을 개축하라고 명했다. 오자서는 아무도 몰래 묘수를 남겨두었다. 성곽이 완성된 후 오자서는 조용히 부하에게 말했다. “내가 죽고 국가가 기황에 시달리거든 성곽을 허물어라. 그러면 백성을 구할 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자서는 간신에게 모함당하여 죽임을 당했다. 월(越)나라는 그 틈을 이용해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얼마 없어 홍수에 가뭄이 겹쳐 백성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었다. 초근모피도 구할 수 없게 되자 굶어죽은 시체가 들을 덮었다. 그때 오자서의 부하가 오자서가 남긴 말을 떠올리고는 성곽을 허물었다. 땅을 3척 정도 파자 성곽 아래에 찹쌀로 만든 벽돌이 쌓여있었다. 사람들은 ‘벽돌’ 몇 개씩을 들고 가서 밥을 지어 허기를 달랬다. 그렇게 현지 백성들은 흉년을 견딜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예전에 소주에서 구걸하며 지냈던 오자서가 소주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 하였다. 나중에 소주 일대의 거지들이 오자서의 상을 세우고 공양하면서 조사(祖師)로 모셨다. 그렇게 오자서는 죽은 후 민간신앙으로 재탄생하여 한 몸에 두 가지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하나는 조신(潮神)이요 다른 하나는 거지 조사다. 강에도 머물고 육지에도 머무니 얼마나 일이 많을까. 중국민간신앙 중 이런 현상은 그리 많지 않다. 중국 백성이 오자서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하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오자서가 퉁소를 불며 길거리에서 구걸했다는 이야기는 역사서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다. 필기, 전기, 돈황 변문, 소설, 평서, 희곡에도 선별된 제재로 수록돼 있다. 널리 퍼져있고 영향력도 심대하다. 민간신앙 중에 물의 신도 되고 땅의 신도 됐다는 오자서의 현상이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닐 정도로 넓고도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 민속심리 중 사람들은 결국은, 자신이 좋아하고 존중하는 현상이 완벽하면서도 보통을 초월할 만능의 힘을 가지고 있기를, 바라지 않던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게메 마씀, 귀 눈이 왁왁허우다." (그러게 말입니다. 귀와 눈이 캄캄합니다.) “I mean, really. My ears and eyes seem to be blind."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팔기(八旗)1) 자제가 거지로 전락하다 진(晉)나라 때 중이(重耳)는 왕공 귀족이었다. 유랑하며 걸식을 경험하는 등의 난관을 뚫고 대업을 이루어 일대 패주, 정치가가 되었다. 명 태조는 구걸했던 경험이 명 왕조를 건립하는 기틀이 되었다. 신사(紳士) 계층도 가난 때문에 걸식하며 생계를 유지한 사례가 많다. 예를 들어 청대 동치(同治) 시기에 상군(湘軍)의 유명한 장군, 나중에 복건(福建)제독이 된, 왕명산(王明山)은 어린 시절 상담(湘潭)에서 걸식하다가 나중에서야 군에 입대하였다. 여러 차례 군공을 세워 한때 부귀를 누렸다. 인생은 변화무쌍하다. 재미있는 것은 나쁜 일은 계속해 반복하듯이 똑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청대 건륭(乾隆) 시기에 팔기의 제군(制軍) 출신이 있었다. 부유하게 살다가 궁핍해진 후 거지가 되었다. 부귀했을 때에는 시첩, 하인 할 것 없이 복식이나 음식, 노리개 모두 지극히 사치했고 무절제하게 낭비했다고 전한다. 관직에서 쫓겨나 경사로 돌아갔을 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궁핍해져 있었다. 얼마 없어 한 집 한 집 돌아다니며 걸식하는 거지가 되었다. 경사의 왕공 귀인 모두 그를 받아주지 않았는데 대흥(大興) 사람 주문정(朱文正)만이 문지기에게 거절하거나 무시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10일에 한 번씩 구걸하러 들렀다. 그럴 때마다 주문정은 매번 친히 200청부(靑蚨)2)을 선사하였다. 어느 날, 그가 또 방문했는데 집에 사람이 없자 자그마한 거울 하나를 도둑질해 갔다. 하인이 거울을 찾지 못하자 제군이 왔었는데 그가 가지고 간 것 같다고 말했다. 주문정은 하인에게 거울을 찾지도 말고 얘기도 퍼뜨리지 말라고 명했다. 그가 다시 오면 그저 차를 내주고 시중들면 된다고 덧붙였다. 이런 대접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감탄해 말했다. “인생이란 실로 어렵구나. 옛사람은 과도하게 호사하다 궁핍해져 죽었나니.” 청나라 사람 설복성(薛福成)이 말했다. “제군은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이 죽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사람 볼 체면이 서겠는가.) 예전에 오리를 즐겨 먹는 사람이 있었다고 들었다. 매 끼니 마다 오리를 잡아먹었다. 갑자기 꿈속에서 어떤 지역이 보였는데 연못 속에 수많은 거위가 있는 게 아니가. 연못을 지키는 사람이 저 모든 것이 당신의 입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꿈에서 깬 후 기쁨에 넘쳐 오리를 더 남살해 먹었다. 나중에 다시 꿈을 꿨는데 오리가 셀 수 있을 만큼 수가 줄어든 것을 보고 급히 오리를 잡지 말라고 하였다. 마침 그때 그가 병을 앓자 친구들이 먹을 것으로 오리를 보내왔다. 수를 세어보니 꿈속에서 본 오리의 숫자와 맞아떨어지는 게 아닌가. 그래서 놀라 두려움에 떨다 세상을 떠났다. 한탄스러운 것은 사람이 자기 오리를 다 먹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또 오리가 자기가 없으면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걸 어찌 알겠는가?” 은유적으로 제군의 처지와 타락을 탄식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빈사의 구걸은 박부득이한 일이다. 시정에서 몸을 굽히거나 길거리에서 유랑하기도 하였고 할 수 없어 도둑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사례가 적지 않다. 어떤 사람은 거지였다가 나중에 뜻을 이루어 사림에 들어가 귀한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그랬을 때 스스로 부끄러운 경력이라고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 이런 때도 있고 저런 때도 있지 않던가. 어찌 모든 것을 덮을 수 있겠는가! 거지가 수레에 오르다 송(宋)나라 공이정(龔頤正)의 『속석상담(續釋常談)』에 있는 기록이다. “『한관의(漢官儀)』에 기록되어 있다. 장형(張衡)이 말했다 : 명제(明帝)가 평대에 나와 앉아 가림막하고 이부(二府)를 보니 건물이 웅장하고 아름다운데 태위부(太尉府)만 나지막하고 초라하였다. 현종(顯宗)이 동쪽을 돌아보며 탄식하며 말했다. ‘소를 잡아 연회를 베풀더라도 거지에게 일을 관리하도록 맡기지 마라.’” 현종은 무슨 생각으로 이 말을 했는지, 본뜻은 무엇인지 마음 쓸 필요는 없다. 거지도 황제가 되지 않던가. 거지가 재상 같은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옛날에 관리가 너무 빨리 승진하면 ‘거지가 수레를 탔다’라고 비유하고 풍자하였다. 이 전고는 『세어(世語)』에서 나왔다. “관직이 정로장군(征虜將軍), 가절도독강남제군사(假節都督江南諸軍事)에 이렀다.”3) 배송지(裴松之)가 『세어』를 빌어 주를 달았다. “선왕(宣王)이 주태(州泰)를 위하여 모임을 만들고서는 상서(尙書) 종요(鍾繇)에게 주태를 놀리라고 하였다, ‘당신은 석갈(釋褐)하고 재상 자리에 오르더니 36일 만에 휘개(麾蓋)를 가진 채 병마(兵馬)를 관장하며 (태수가 되어) 군(郡)을 맡게 되었습니다. 거지가 작은 수레에 오르고서, 어찌 이토록 빨리 달린단 말이요?’”4) 이렇듯 역사에 ‘거지가 작은 수레에 올랐던’ 일은 분명 존재한다. 여러 아사(雅士)나 귀인이 타락하고 곤궁해져서 거지가 된 사례도 많다. 원(元)나라 때에는 사림의 독서인을 경시하여 말류인 거지 바로 위에 나열하였다. 사회 여러 부류에서 아홉 번째에 해당한다. 이른바 ‘구유십개(九儒十丐)’5)가 그것으로, 얼마나 비천했는지 알 수 있다. 원나라 때 사방득(謝枋得)이 말했다. “우리 대원 전장에 10등급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관리, 둘째는 벼슬아치로 앞선 자는 귀한 것이다. 귀한 자는 나라에 이로움이 있다 하겠다. 일곱 번째는 장인, 여덟 번째는 창녀, 아홉 번째는 유학자, 열 번째는 거지다. 나중에 있는 자는 천한 것이다. 천한 자는 나라에 이익이 없다고 하겠다.”6) 원나라 때에 독서인의 처지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일정한 역사 조건 아래의 구체적 상황, 현재와는 다른 시각에서 이루어진 관점이다. 예부터 지금까지를 종관하면 사인(士人) 계층은 대부분 평민 위에 군림하였다. 청고(淸高)하고 풍아(風雅)하다고 자처했던 ‘유한(有閑)’ 계층이다. 하지만 어찌 영원한 게 있으랴. 그들도 곤궁하게 된 후 나락에 빠지면 그 처지는 일반 평민보다도 훨씬 못하였다. “털이 빠진 봉황은 닭보다도 못하다.” 그렇지 않은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팔기(八旗)는 청(淸)나라의 지배 계층인 만주족이 소속되었던 사회, 군사 조직이다. 그 제도를 팔기제라고 부른다. 깃발〔기(旗)〕의 빛에 따라 정황(正黃), 정백(正白), 정홍(正紅), 정람(正藍), 양황(鑲黃), 양백(鑲白), 양홍(鑲紅), 양람(鑲藍) 팔기로 나눴다. 후에 몽골팔기(蒙古八旗)와 한군팔기(漢軍八旗)를 추가 설치하였다. 모든 만주족은 8개의 기 중 하나에 소속되었다. 팔기에 소속된 만주족, 몽골족, 한족은 기인(旗人)이라 불렸으며 청나라 지배계층이 되었다. 2) 청부(靑蚨), 파랑강충이이다. 『회남자(淮南子)』 「만필술(萬畢術)」에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새끼를 잡아오면 어미가 스스로 잡히는 청부(靑蚨)라는 곤충 이야기이다. 어미의 피와 새끼의 피를 서로 다른 돈에 바른다. 자혈(子血)을 바른 돈은 가지고 있고 모혈(母血)을 바른 돈만 사용하면 돈이 나중에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그런 까닭인가, 청부는 돈의 다른 이름으로도 쓴다. 3)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등애전(鄧艾傳)』 부(府) 『주태전(州泰傳)』에 기록돼 있다. 4) 선왕(宣王)은 사마의(司馬懿)이다 ; 종요(鍾繇)는 종요의 아들인 ‘종육(鍾毓)’ 혹은 ‘종회(鍾會)’의 오류다 ; 석갈(釋褐)은 평민의 복장인 ‘갈옷’을 ‘벗는다’ 뜻으로 처음 관직에 부임한다는 말이다 ; 휘개(麾蓋)는 의장용 깃발과 거개(車蓋)다. 5) 미천한 사람, 나약한 지식인(독서인)을 비유한다. 원대(元代)에는 사회적 신분을 관(官), 리(吏), 승(僧), 도(道), 의(醫), 공(工), 렵(獵), 민(民), 유(儒), 개(丐) 등 열 개의 서열로 구분했는데, 이로부터 독서인·지식인을 야유, 조롱하는 말로 쓰였다. 6) 사방득(謝枋得) 『사첩산집(謝疊山集)』 2권 「송방백재귀삼산서(送方伯載歸三山序)」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요즘 들어 어머니와 벌이는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는 옷 입기와 벗기기다. 입고 또 입고 다시 껴입는 어머니를 상대로 벗기고 또 벗기는 나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만다. 완전한 항복이다. 오로지 안방에 앉아서 입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어머니의 수비 작전에 비해 나는 이방, 저방, 부엌, 마당, 개집, 쓰레기통 등 공격해야 할 대상들이 산재하다. 오늘 아침도 어머니는 웃옷 5벌, 아래옷 4벌을 입으시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콩 고르기를 하신다. 하기야 요즘 같은 날씨에 깨·조·고구마 밭에 앉아서 숨이 턱턱 막히도록 헐떡거리면서 김을 매던 일과 비교하면, 선풍기 두 대가 마주 서서 바람을 일으키는 거실에서 하는 소일거리란, 아이들의 소꿉장난에 진배없으리라. 아, 새벽같이 밭으로 나가서 불볕더위에 불한당처럼 뒤덮은 잡초들을 뽑다 보면, 온몸이 땀에 절어서 체열과 지열이 합쳐질 즈음 재열(매미)이 목청을 다해 위험을 경고하던 그때가 생각난다. ‘매앰 매앰 매앰, 지금 당장 땡볕과의 싸움을 중단하고, 어서 이 나무 그늘로 피신하시오. 그러다가 숨이 막혀서 쓰러지거나 죽을 수도 있음을 경고합니다. 맴 맴 맴'라고 급하게 울어대던 그 소리가 얼마나 고맙고 시원하던지..... 그제야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어머니를 따라 재빨리 일어나 허리를 펴면, 서늘한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와 ‘어서 와, 물때야!’라고 소리치던 바다. 일찌감치 물질 채비를 하고 오신 어머니가 테왁과 망실이를 담은 구덕을 등에 지고 와랑와랑 바다로 달려가면, 뒤따라서 눈썹을 휘날리며 신바람 나게 언덕을 내달리던 우리들의 여름이여! 기상청의 일기예보에 의하면 오늘 현재 제주도에는 폭염특보가 발효 중이며, 최고 체감온도가 33도 이상(제주도동부 35도 이상)으로 올라서 가혹하고 지독하게 무덥겠단다. 더욱이 당분간은 전국 대부분 지역에 열대야가 나타나겠으니 건강관리에 유의하란다. 국가기관의 국민에 대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며칠 전부터 고장난 우리집 에어컨은 성수기의 대기행렬이 무려 일주일 이상 길어져서 목요일이나 되어야지 담당기사가 방문할 수 있다는 비보 앞에 그저 죄송할 뿐이라고 묵묵부답 고개를 떨구고 있다. 어찌할 것인가? 게다가 각종 매체들은 ‘기온이 30∼32도일 때 사망자가 급격히 증가하여 36도가 되면 30도일 때보다 50% 증가한다. 특히 고령자, 노약자 및 어린이 등이 체력적으로 적응이 힘들기 때문에 피해가 상대적으로 크며, 65세 이상 노인은 일반인에 비해 폭염에 4배 이상 더 취약하다’라며 오늘은 꼼짝 말고 집에 있으라 한다. 이런 날은 집에서 허송세월을 할 수밖에 없을 터. 김훈의 산문집 ‘허송세월’을 펴니, ‘여름편지’란 제목이 가슴을 두드린다. ‘책을 읽다가 눈이 흐려져서 공원에 나갔더니 호수에 연꽃이 피었고, 여름의 나무들은 힘차다. 작년에 울던 매미들은 겨울에 죽고 새 매미가 우는데, 나고 죽는 일은 흔적이 없었고 소리는 작년과 같았다./호수의 물고기들 중에 어떤 놈은 내가 물가로 다가가면 나에게로 와서 꼬리 치는데, 아 저 사람 또 왔구나, 하면서 나를 알아보고 오는 그놈이라고 나는 믿는다/여름 나무들은 이제 막 태어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빛났다. 나무들은 땅에 박혀 있어도 땅에 속박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김훈의 여름 편지는 스스로에게 쓴 것이다. 이 무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기에게 편지를 쓰기란, 그만한 저력이 있는 유명 작가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노인의 초입에 서서 깜박거리는 기억력의 한계를 절감하는 나에게, 편지란 쓰기보다 받을 때가 좋다. 오늘 같은 날 나에게도 편지 한 통 날아든다면, 가슴 속으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들어올 터이다. 편지를 보내지 않았으니 올 리도 없겠지..... 혹여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 바다에 들어가서 낚싯대에 ‘여름 편지’를 드리워본다. 아하, 이혜인 수녀님의 편지가 그분을 닮은 미소를 머금고 살며시 고개를 든다. '움직이지 않아도 태양이 우리를 못 견디게 만드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서로 더욱 뜨겁게 사랑하며, 기쁨으로 타오르는 작은 햇덩이가 되자고 했지?/산에 오르지 않아도, 신록의 숲이 마음에 들어차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묵묵히 기도하며, 이웃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자고 했지?’라고 속삭이면서. 7월 22일 중복을 사흘 앞둔 여름날 정오에 어머니와 나는 선풍기 두 대가 요란하게 돌아가는 거실에 앉아서, 어찌하면 이 더위를 버텨낼 수 있을까 근심스레 서로의 얼굴을 살피면서 눈동자를 맞춰본다. 어머니에게 이 여름은 어떤 의미일까? 혹여 마지막은 아닐까? 요즘 들어 어머니가 뜬금없이 “니네 아방은 어디 가시니?”라고 물으시니, 그때마다 무심한 가슴을 밀치면서 써늘한 기운이 스며든다. 그래 이럴 때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날아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가 볼티모어 공원에 묻힌 지도 어언 22년. 그래 아버지가 보내온 지난여름의 편지를 찾아보자. 그동안 모아둔 수십 통의 편지들이 색 바랜 봉투에 담겨서 저마다의 추억을 그려내고 있다. 세상에! 그중에서 유독 봉투가 누렇게 되어 오래된 이야기가 담겨 있을 듯한 게 시선을 끈다. 1988년 소인이 찍힌 아버지의 편지에 낚시 바늘이 꽃혀 있다. 세상에! ‘날 좀 보소’하며 고개를 치켜드는 편지에는 미국으로 이미 가신 직후의 그리움이 뚝뚝 떨어진다. 아, 보고 싶은 우리 아버지. “정옥 앞 어제, 그러니 6월 8일자, 낚시질 갔다 와보니, 어머니가 ‘네가 전화해 왔더라’고 기뻐하더라. 나도 퍽 기뻤다. 고향에서 별 문제가 없다니 다행한 일이다. 이곳도 모두가 잘 지내고 있다. 그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 뿐이다. (중략). 그런데, 내가 좀 유치한 부탁을 하고 싶구나. 요는 일이 없어서 집에만 있자니 시간이 얼마나 지루한지 힘이 들어 낚시를 가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세월을 보내기 좋으니, 여름 내내 다녀볼 작정이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서 올 때 제주에서 낚시줄 200원어치를 샀다. 1개 10원이라면서 주인이 세어보지도 않고 그저 집어주는데, 한 50개가 되겠더구나. 이거면 하고서 왔는데, 써보니 너무 쉽게 떨어져 버려서, 여기 걸로 써보니, 아무래도 내 소견에는 한국산만 못하구나. 그러니 네가 미국 올 때, 내가 견본을 보내니, 꼭 이만큼 한 걸로 한 포만 사 가지고 오너라. 한 포가 약 1천원 될 거여. 큰 것도 말고 작은 것도 말고 맞추어 보고서 사기 바란다. 네 앞 길을 우리 하나님께서 늘 지키시고 돌보고 계시기를 믿고 기도한다. 머지않은 시간에 만나서 즐겁게 대화하자. 6.9일, 父 書.” 이 편지를 읽어드리는 동안, 눈가에 이슬이 가득하도록 그리움이 가슴 저린 어머니가 편지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신다. “이 종이도 미국에 갔다 왔구나.....”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그 편지가 부럽기라도 한 듯 어머니는 한참 동안 쓰다듬고 안아도 보고, 낚시를 소중하게 만져보신다. 아, 부부란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의 화신이로다. “정옥 앞 3일 전 네 편지를 잘 받아보았다. 강씨 사진도 받아서 본인한테 우송했으니 오늘쯤 도착할 것이다. 어머니는 네가 옷을 여러 벌 사서 보내주니 너무도 좋아서 입을 때마다 고마움을 느낀다. 금년 내로 네가 미국으로 와서 원하는 공부를 계속하고, 우리의 기대를 이루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이곳 식구들도 다 평안하고 잘 지낸다. 어머니는 직장(교포가 운영하는 군복 공장)에 나가는 것이 매우 즐거운 것 같다. 미국에도 한 차례 비가 내려서 대지를 푸르게 하여서 한시름 놓게 되었다. 고향 소식을 자주 전하여 주렴. 여기서는 편지라는 불편이 그만저만 아니다. 영준 엄마나 아빠가 차로 가서 부쳐주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형편이니, 그리 알고 고향에서 자주 편지하여 주기 바란다. 내가 온 지 벌써 20일이 지났는데, 네 소식밖에 못 받았다. 서로 언니들한테 연락해서 편지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이모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몸이나 편안한지 전해주렴. 네 어머니가 무척 궁금해 하는구나. 다음 소식 기다리며 이만 쓴다. 8월 1일, 父 書" 여기서 강씨는 어느 목사님의 소개로 나와 맞선을 보기로 약속된 볼티모어의 교포 청년이다. 무슨 영문인지 내 사진을 받았을 그로부터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학교 내 한국인 교수는 나를 보자 뜻밖의 장담을 하였다. “서른이 넘어서 혼자 유학을 왔다면, 실컷 놀아도 석사는 문제 없을 터. 노는 게 남는 것이다” 그의 예언처럼 1년 4개월만에 MBA(경영학 석사)를 마친 나는 졸업을 하자마자 귀국해 복직하였다. 은행원으로. 이 결정은 내 인생의 가장 잘못된 판단으로 ‘인생에 3번 기회가 온다’는 시쳇말 중 한 번에 해당하는 거였으니.... 인생을 돌아보는 노년에 이르러 나는 솔직해지고 싶고, 청년들에게 나의 실패 사례를 전해주고 싶은 것이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현안은 어머니와 내가 어떻게 이 무더위를 잘 견뎌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글을 마칠 즈음 어머니는 국수에 옥돔을 얹어서 점심을 완료할 것이다. 어머니는 늘랜내(비린내) 나는 것만 있으면 어떤 장애나 문제도 이겨내고 밥 한 그릇을 뚝딱 드실 수 있다. 해녀 출신인 어머니에게 생선이나 게장은 밥도둑인 셈이다. 부디 오늘도 무사히... 그리고 이 글을 마치고 섶섬 앞으로 나가서 바다에게 여름 편지를 들려줄 수 있기를 빌어 본다. 아버지가 보내주신 여름편지를!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옜다’하고 던져 주는 음식은 먹지 않는다 중국에 “‘옜다’하고 던져 주는 음식은 먹지 않는다”는 유명한 전고가 있다. 모욕적인 베풂은 받지 않는다는 말로, 멸시하거나 모욕적인 보시는 결코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전고는 『예기(禮記)·단궁(檀弓)』에 기록돼 있다. 춘추시대 때에 제(齊)나라에 큰 기근이 들었다. 식량이 부족하여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쓰러졌다. 검오(黔敖)가 길가에 음식을 늘어놓고는 지나가는 배고픈 사람을 기다렸다. 하루는 굶어서 부황이 든 사내 한 명이 찾아왔다. 너덜너덜한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다 해진 짚신을 신고 있었다. 지팡이에 의지한 그의 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본 금오가 왼손에는 밥, 오른손에는 마실 것을 들고 사나이에게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이봐라, 이리 와서 이걸 먹어라.” 그러자 사내는 오히려 굶주림을 잊은 듯 허리를 쭉 펴고 머리를 곧추세운 후 검오를 매섭게 쏘아보면서 자못 경멸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이런 차래지식(嗟來之食) 따위를 먹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꼴이 되었다. 가짜 선심은 그만두어라”하고는 그대로 가버렸다. 금오는 황급히 그 사나이를 뒤쫓아 가서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고 음식을 받아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사나이는 결코 음식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끝내 굶어죽었다. 이렇듯 곤경에 빠졌으나 지조를 잃지 않는 거지처럼 의사(義士)와 같은 부류가 사림에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전국시대에 제(齊)나라 은사 검루(黔婁)가 그랬다. 그는 가정 형편이 빈한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제나라, 노(魯)나라 국군이 내리는 하사품도 받지 않았다. 죽은 후에 몸을 덮은 이불이 너무 작아, 머리를 덮으니 발이 삐져나왔고 발을 덮으니 머리가 삐져나왔다. 증자(曾子)가 문상 가서 상황이 그러한 것을 보고는 검루의 아내에게 말했다. “이불을 비스듬히 해서 염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검루의 아내가 말했다. “비스듬히 해서 여유가 있는 것보다 바르게 해서 부족하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불을 옆으로 비스듬히 하면 머리와 발을 전부 덮을 수 있지만 다 덮을 수 없다하여도 비스듬히 하는 것보다 바르게 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현(弦) 밖에 소리가 있다지 않는가. 말에 숨은 뜻이 있으니. 내포된 뜻이 깊고도 깊다. 사람들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以食爲天)고 하지 않던가. 백성이 살아가는 데에는 먹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 사인은 ‘쌀 다섯 말을 위하여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지만 세상에서 화식을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던가. 그렇기에 거지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벼슬에 나가기 전에 걸식하며 살아가는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괴이한 빈사(貧士) 동경(董景) 진대(晉代, 266~420)에 가난한 사인이 있었다. 성은 동(董), 이름은 경(景), 자는 위련(威輦)으로, 어느 지역 사람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찍이 농서(隴西) 계리(計吏)와 함께 낙양의 백사〔白社, 현 하남 언사현(偃師縣) 내〕에서 살았고 도학(道學)에 능했다. 진자서(陳子敍)가 그에게 도를 배웠다. 먹을 것이 없어 그는 늘 길거리에서 걸식하였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행동하며 시를 읊었다. 조각난 풀솜을 얻으면 몸을 덮었다. 완전한 명주는 받지 않았다. 당시에 저작랑(著作郞) 손초(孫楚)1)가 편지를 써서 같이 지내거나 관직이라도 얻으라고 권했지만 거절하였다. 몇 년이 지난 후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저 머물던 곳에 대나무 한 섬과 시 두 편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가난한 은사였던 동경은 차라리 길거리에서 걸식하면서 살지언정 벼슬길에 나가기를 원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 시대의 괴인이었다. 그의 일은 괴사로 전해져 온다. 공(孔) 씨 아들, 무학무능 해 평생 거지로 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청대 옹정(雍正), 건륭(乾隆) 연간에 호남, 호북의 빈사(貧士)가 배움의 기회를 잃게 되자 밖에 나가 유학하였다. 서당이 보이면 들어가 훈장을 배알해 돈을 구걸하고 서당에서 밥을 얻어먹고 하룻밤 묵은 후 떠났다. 사방을 유랑하며 탁발하는 스님과 같았다. 지방의 재력가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 공부하기를 원하지 않아 결국 거지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청대 가경(嘉慶) 연간에 남회(南匯)현 주포(周浦)진에 돈 많은 공(孔) 씨가 살고 있었다. 만년에 아들을 얻으니 지나치게 귀여워했다. 여러 차례 스승을 초빙해 공부를 가르치려 했으나 수업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선생은 아무 일도 않으면서 밥을 먹기가 부끄러워 시 한 수를 썼다. “학당은 낡은 절 같아, 와서 주지승이 되었구나. 그저 하루 3찬, 환혼이며 등 한 잔. 경 읽는 소리 본래 들리지 않으니 불호를 무빙(無憑)이라 지었노라.” 어느 날, 선생이 공 씨 아들이 뜰에서 노는 것을 보고는 강제로 공부시켰다. 아들이 화가 나 욕을 하자 선생은 질책하며 꾸짖었다. 그러자 아들이 어머니에게 일러바쳤다. “선생이 나를 때렸어요. 반드시 보복하고 말거예요.” 어머니는 위로하며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거들랑 다시 얘기하자.” 아버지가 밖에서 돌아와서는 아들을 교육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선생의 친한 친구를 초정하여 한 대만 맞아주고 참아달라며 선생에게 뇌물을 주었다. 아들이 성장했으나 무학무능 그 자체였다. 그저 밖에서 빈둥거릴 뿐이었다. 재산이 많으면 뭘 할 것인가. 빈둥거리며 앉아서 까먹으면 산이라도 말아먹지 않던가.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놀고먹으면 없어지나니. 많던 재산 다 사라진 후에는 어쩔 수 없이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죽을 때까지 살았다.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모든 사람이 자식이 잘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사람구실을 할 수 있는 교육이 우선 아니겠는가. 익애하여 보호만 한 결과 거지로 전락했으니 슬픈 일이다. 지방 재력가 가문에서 태어났다하여도 거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손초(孫楚. ?—293), 서진(西晉)시기의 태원(太原) 중도(中都) 사람으로 자는 자형(子荊)이다. 글 짓는 재주가 탁월하고 성격이 호탕하였다. 무리를 짓지 않았으며 의기양양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나이 40여 세에 진동군사(鎭東軍事)에 참여했다가 저작랑(著作郞)으로 옮긴 후, 남을 시기하고 도도하게 굴면서 알력을 조장하니 한동안 버려졌다. 나중에 부풍왕(扶風王) 사마준(司馬駿)이 옛 정을 생각해 참군(參軍)으로 기용했다. 혜제(惠帝) 초에 풍익(馮翊)태수를 지냈는데, 은거한답시고 ‘수석침류(漱石枕流 :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는 뜻, 억지 부리는 것을 꼬집는 말)’한 이야기로 유명하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양화가 백성원의 제5회 개인전이 제주시 아라갤러리(대표 이숙희)에서 신작 15점, 오브제 9점 등 총 24점을 가지고 2024년 7월 13일부터 7월 28일까지 2주간 열리고 있다. 제주를 시각혼합 기법으로 바라보는 백 화가는 새로움을 시도하기 위해 신촌을 미학적으로 방황하던 시절 만난 제2의 회화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백성원은 세계미술사에서 점묘법이라는 신인상주의 방법을 수용하면서도 제주적인 회화의 창작방법론으로 전환하려는 현대미술의 응용적인 개척자가 돼 고뇌하고 있는 작가이다. 오늘따라 신천의 기운이 리듬을 타고 맑은 기운이 느껴진다. <편집자 주> 그림은 마음 속 언어, 존재 드러내기 보는 것은 최고의 즐거움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속엣 말을 해버리면 후련한 것과 같이 말이다. 아름다움에는 내면적 즐거움을 주는 황홀함과 감미로움이 숨어있는데 그림은 시를 읽으면 떠오르는 기쁨처럼 어떤 형태를 그려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매우 감미로운 감정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운 미적 감정은 때로 신비롭기도 하다. 우리 인간에게는 어떤 영성(靈性)이 있다. 자신마저도 그 깊이를 모르는 창조적 본능이 그것을 일깨운다. 우리의 정신활동이 영혼이 깃든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창조적 본능에서 나오는 힘이다. 인간은 호모 파베르와 호모 사피엔스라고도 하는데 이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높은 단계의 정신적 활동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문명사의 원조(元祖)를 이 둘의 결합인 노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술의 창조적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한 것도, 예술이 고결한 영혼의 활동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한 것도 이 노동 때문이었다. 미술은 그림이라는 언어로 말하는 방식이다. 회화를 ‘그림으로 된 시(詩)라고 하는 이유가 틀린 말이 아니다. 화가는 언어가 있어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이자 소통의 역할을 수행한다. 바로 표현이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집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화가는 색깔과 형태가 있는 집에서 늘 지내고 있다. 그 집에는 포근한 색의 온화함과 터치의 격정적 감정도 살고, 냉철한 이성과 논리의 색깔도 같이 지내고, 점들의 서로 생동하는 강약의 리듬도 함께 있어서 열정적인 기운도 있다. 화가의 집은 다양한 감정의 벗들도 방문하고, 집에는 그 집의 독특한 성격도 풍기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의 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이용하면 변화가 가능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가의 집은 실험실과 같아서 언제 어떤 결과를 얻을 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꿈을 꿔야만 자기집을 확장할 수 있다. 때로는 익숙하지만 알지 못하는 미지의 감정, 생각치 못한 무의식의 모습에 이따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나의 집 그림자에 놀라기도 한다. 화가들에게 목표가 있다면 평생 나의 언어로 말해보고 싶은 충동(compulsion)일 것이다. 충동은 창조적 본능을 자극시키는 긴장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화가들은 매력적인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때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마음속에 숨어있는 말을 고백하기 위해서이다. 말을 하지 않으면 자기 존재를 알 수가 없고, 오히려 다하지 못한 말을 찾아 표현행위로 나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다할 수 없는 말이 남아 있다. 그것은 자아를 찾기 위한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현재 자신에게 숨쉬는 것 중 가장 적극적인 활동인자(活動因子)이고, 존재에 대한 생존의 지평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현재 진행형인 자기 삶의 모습이기에 내가 무엇이고,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 화가는 누가 뭐래든 수행자가 돼야만 한다. 나를 찾고 나를 바로 세우려는 존재, 그 수행하는 행위가 바로 존재자의 결과가 되면서, 쾌(快)를 누리는 현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림을 육필(肉筆)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과 육체가 공동으로 만들어 낸 수행의 결과인데 보이는 행위가 보이지 않는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성원의 수행적 회화(performative painting) 색 물감을 붓으로 바르게 되면 붓에 따라 터치들이 다르고, 화가 자신의 손의 힘에 따라 강약이 다르게 나타난다. 다양한 터치의 움직임에는 강약의 호흡처럼 감정이 따른다. 찍기와 긋기는 긴장과 흐름이 오로지 화가의 마음에 달려있다. 직선, 곡선, 자유곡선, 점, 점의 크기에 따라 혹은 당시 화가의 감정에 따라 화면의 분위기는 달라진다. 즉흥적 감정은 우연성이 많아서 화면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데 그것을 멈춰야만 자신이 어디까지 온 것인지 알 수가 있다. 수행에는 변화무쌍한 동작이 병행된다. 백성원은 신인상주의(Neo-Impressionism) 분할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분할주의는 혹은 '분할묘사법'이라고도 하는데 오늘날은 점묘법(點描法)이라고 부른다. 한 화가가 어떤 유파의 영향을 받는 것은 처음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기법을 찾는 실험적 시도로부터 점점 자신의 성격과 취향에 맞는 스타일로 이동하게 된다. 분할주의는 조르죠 쇠라나 폴 시냐크가 오그던 루드와 외젠 슈브뢸들의 이론에 따라 추구했던 19세기말 물리적 색채의 작용을 활용한 창작방법이다. 이 분할주의는 캔버스 위에 원색을 혼합하지 않고, 그대로 보색 점들만 찍어서 화면의 색상이 상호교감의 효과를 보는 회화기법으로 색채의 동시대비(simultaneous contrast of colors)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색채의 동시대비 현상이란 화면의 색점들이 감상자의 눈으로 보게 되면 색깔과 색깔이 서로 혼합하여 다른 색상으로 보이는 착시(錯視) 효과를 말하는 데 우리는 이를 눈에서 섞인 색이라고 하여 ‘시각혼합(visual mixing)’이라고 부른다. 이는 그림이란 느끼는 감정의 작용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점묘법이라고 말할 때, 색점(色點)이라는 표현행위 시각에서 보면 동양화에서 말하는 묵점(墨點)과 유사한데 쌀방울 점인 미점준(米點皴)과 빗방울 모양의 우점준(雨點皴)과도 유사하다. 물론 여기에 검은 색으로만 점이 찍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백성원이 점묘법을 선호하게 된 것은 색상들의 어른거리는 움직임이 대상을 볼 때마다 다른 감정들이 누적되는 것처럼 중첩되는 느낌을 강하게 받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을 색 자체에서 찾는 구상화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이 마치 눈이 내리듯 중첩되는 느낌을 덮어씌우는 행위에서 찾는다. 고정돼 보이는 정지된 광경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고 꿈틀되는 유기체의 운동을 화면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화면의 움직움은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감정이 시시각각 다르듯이, 그의 점들은 크기에서 다르고, 점이 점 위로, 또는 꼬리를 늘이듯이 점점들의 사이사이와 그 위를 지나친다. 감정이 북돋았다가 서서히 눅여지는 것처럼 화면에 표현행위를 할 때마다 다른 느낌을 거듭 부여하는 것이다. 백성원은 색은 풍경을 재현하는 색이 아니며, 형태 또한 그와는 거리가 먼 실루엣의 불명확한 움직이는 형상이 된다. 대상을 볼 때마다 변화하는 감정의 색과 행위의 움직임을 화면에 중첩되도록 하는 작업을 한마디로 ‘수행적 회화(performative painting)’라고 말할 수 있다. 화면의 진행에서 감정이 꺼지지만 않거나, 혹여 감정이 식어버렸더라도 다시 새로운 느낌으로 감정이 되살아나게 되면 그 대상의 상태는 다시 그때의 다른 감정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게 한다. 대기의 변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화가 자신의 감정을 대상 위에 몇 번이고 입히는 것이다. 바라보면서 다르게 느끼는 그때그때 감정들이 바로 ‘중첩된 감각’의 실체가 된다. 중첩된 감각-신촌, 인간적으로 느껴보기 인간은 자연에서 타 생물과 다른 것이 없다. 단지 영장류라는 사실에서 특별하게 부여된 도구 사용, 인문과 문화의 차이가 어떤 포유류보다도 월등한 능력이 있다는 것뿐이다. 지금까지 호모 사피엔스의 지구 지배는 생물계의 폭압이기도 했다. 동물들은 자연적응에 놀라운 감각을 보여주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감각은 자연감각이 퇴화됐지만 오히려 문명적이면서 문화적으로 발달해 있다. 인간의 감각으로 돌아오면, 감각은 보통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오감(五感)으로 나뉘며, 시각은 색과 형태를 인지하고, 청각은 소리를, 후각은 냄새를, 미각은 맛, 촉각은 만져서 재질을 감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각 중에 시각을 말하는 것이다. 시각 감각은 어떤 대상을 보면서 끌림, 감탄, 즐거움, 쾌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회화 또한 시각 작용으로 느낄 수 있는 여러 감정들이 우러난다. 포근함, 서늘함, 투박함, 부드러움, 무서움 등 미추(美醜)의 감각이 있다. 니체의 표현대로 '이성은 감각들의 증거를 날조하는 원인이지만 감각들이 생성, 소멸, 변화를 보여줄 때 그것들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감각은 우리 몸의 실제 작용이므로 논리와 상상으로만 판단하는 이성의 밑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밑바탕이 없이는 어떤 새로운 집도 기초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바로 백성원의 ‘신촌’은 감각의 중첩을 추구해온 작품들이다. 신촌은 제주의 해안가 마을이다. 사람들은 자연광 아래 마을이라면 되도록 빛이 해석해 낸 그대로 자연적인 색상의 풍경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색이 빛의 작용 때문에 보이는 것이어서 한라산, 숲, 오름, 바다, 마을, 집, 돌담 등이 충실하게 재현하게 된다. 그렇지만 백성원은 신촌 풍경을 바라볼 때 순간의 인상(印象)을 중시 여긴다. 인상은 기억을 통해서 저장되지만 볼 때마다 계속 새로운 인상이 기억으로 중첩되는 것이다. 인상은 순간적인 감정을 동반하여 미추(美醜)의 감정으로 교차하기도 한다. 이런 감각의 중첩 상태는 감성적인 경험들이 다른 새로운 감각을 자극함으로써 숨어있는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다. 감각의 레이어(Layers)라고나 할까, 여기서 레이어란 기술적인 과정에서 쌓기처럼 처음의 것들이 그 위로 계속 겹쳐지는 현상을 감각에 빗댄 말인데, 처음의 느낌이 다시 기억으로 남아 또다시 다음 시각경험을 받아들인 기억과 더불어 새롭게 연계하는 혼합된 감정을 표현하는 창작방법을 의미하는 말이다. 백성원의 작법을 보면, 맨 처음 먹이나 아크릴 물감을 혼합하여 바탕에 드로잉 작업을 하고, 옐로우(황색계열), 마젠타(적색계열), 싸이안(블루계열)의 점들과 속도 있게 작은 선들의 율동이 마치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듯이 즉흥적인 감정의 스펙트럼을 화면에 보여준다. 물감이 겹쳐짐은 경험적 인상의 시간을 나타내며, 색들의 하모니는 즉흥적인 즐거운 감정상태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백성원의 이런 수행적 회화는 서양미술사에서의 점묘법을 몸이라는 물리적 동작과 결합시킨다는 점에서 몸의 기호가 만드는 표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먼저 화면은 자연에서 생명력의 대상을 찾고, 분할된 많은 점들을 그 드로잉된 대상 위에 찍으면서, 다시 그 위로 점들이 눈발같이 내리는데 그때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흐트리듯 점들이 거듭 쌓이고 서로 교차한다. 사실 중첩은 반복이 아니다. 새로운 것 위에 다시 씌움이다. 이 덧씌움은 아래 것이 덮여서 보이지 않지만 여기저기 새어 나오고 그 안에 겹으로 존재한다. 사라지는 것은 퇴화이다. 우리는 영원히 소멸되기 전에 그것을 되살리는 새로운 관계를 물색해야만 한다. 부단한 수행은 새로운 개념으로 되살아나는데 이는 백성원에 의해서 서구 미술사조로만 남게 되는 분할주의 미학이 제주 신촌에서 변형된 형태로 부활하고 있다. 이렇듯 백성원은 달라지는 화면의 기억들로 제주 해안 마을 신촌 풍경을 통해 퇴화된 인간의 감각을 되찾고자 한다. 바로 그의 감각은 끊임없이 덧씌워지는 시각적 욕망으로 미추를 넘나들면서 몸의 언어로 표현되고 있다. 신촌에서.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경허지 맙서" (그러지 마세요) “Don't do that”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단백질은 생체 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물질이다. 단백질은 20종류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되는데, 단백질을 건물에 비유하자면 아미노산은 건축에 필요한 벽돌, 창문, 문, 타일 등등의 다양한 재료로 보면 될 것이다. 현실에서도 건물에 들어가는 재료가 거의 같음에도 크기, 모양, 기능이 각각 다른 건축물이 지어지는 것은 설계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즉, 같은 재료를 가지고 건물을 세우더라도 설계도에 따라 학교가 될 수도 있고 공장이나 아파트가 될 수도 있다. 생체에서 단백질을 만드는 설계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 유전자인 DNA이다. 유전자에는 어떤 아미노산을 어떻게 연결하여 어떤 단백질을 만들지에 대한 모든 정보가 들어있다. 설계도(유전자 DNA)에서 필요한 부분을 일부 복사한 것이 전령 RNA이고, 여기에 있는 정보를 인부(운반 RNA)들이 해석하여 정해진 위치에 맞는 재료(아미노산)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면 건물(단백질)이 되는 것이다. 설계도가 저절로 건물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재료도 필요하고 공사를 하는 인부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DNA에 있는 모든 정보가 단백질을 만드는데 이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인체의 세포 수는 약 60조로 알려져 있고, 모든 세포들은 같은 유전자를 가진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이 된 하나의 세포로부터 모든 인체 세포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같은 유전자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 현장에 떨어진 머리카락 유전자를 분석하는 것만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한 개체의 모든 세포는 같은 유전자를 갖지만 세포에 따라 만들어지는 단백질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하는 일도 다르다. 예를 들어 시각 세포는 보는 역할을 하고, 후각 세포는 냄새 맡는 일을 하는데 서로 모양, 크기, 기능이 완전히 다르다. 눈 세포와 코 세포는 모두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만 분화 과정을 거치면서 각 세포의 기능에 맞도록 특화된다. 눈 세포는 눈에 필요한 유전자만 풀어놓고 나머지는 닫아버림으로써 눈의 기능을 하는 단백질만 선택적으로 만드는데 이것을 유전자 발현이라고 한다. 즉 눈 세포는 세포 생존과 보는 기능에 관련된 DNA(설계도)만 복사가 가능하도록 열어 놓고 나머지는 금고 속에 넣어 잠궈 버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병에 걸리는 대표적인 이유는 외부에서 적이 침입했는데 이겨내지 못해서이다. 체내에 바이러스나 세균이 들어 왔는데 우리 면역 체계가 이기지 못하면 병에 걸리게 되는데, 인류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백신, 항생제, 항바이러스제를 개발하였고 이는 인류의 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려주었다.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내부의 문제에 의해서도 병이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상처가 나면 피부 세포가 증식하여 상처 부위를 덮으면 낫겠지만 다 덮고도 그치지 않고 계속 증식하면 암 덩어리가 된다. 정상적인 세포는 필요한 만큼 증식되면 유전자를 잠궈서 세포 증식에 관련된 단백질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도록 하고, 암 억제 유전자에 의해 세포 증식을 억제하는 단백질이 만들어져 세포 증식을 꼭 필요한 만큼만 하고 중단한다. 세포증식 유전자에 이상이 생겨 조절이 되지 않으면 암 유전자가 되는 것이고, 암 유전자에 의해 세포 증식에 관련된 단백질이 계속 만들어지면 결국 암으로 진행된다. 이렇듯 유전자에 이상이 있거나 약한 유전자가 있으면 내부의 문제로 생기는 병에 취약해진다. 물론 환경, 식습관 등의 다양한 요소가 관여하지만 암뿐만 아니라 당뇨, 고지혈증, 고혈압, 통풍, 면역질환 등도 유전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주위에 어르신들 중에 흡연을 즐기는데도 큰 병 없이 장수하는가 하면,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는데도 주방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로 인해 폐암에 걸리는 주부도 있다. 사람마다 암 유전자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암에 걸리는 확률이 다른 것이다. 암 유전자가 취약한 경우에는 소량의 발암물질에 노출되더라도 방아쇠로 작동하여 암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에 발암 물질에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내 유전자가 어떤 질병에 강한지 또는 약한지 모르기 때문에 올바른 식습관을 유지하고 일상 생활에서 위험 요인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유전자를 파악하면 어떤 질병에 취약한 지 알 수 있기 때문에 한 생명체의 전체 유전자를 연구하는 유전체학(genomics, 제노믹스)이 필요하게 되었다. 개인의 유전체 분석을 통해 특정 유전자 변이나 유전자 상호작용이 암, 당뇨, 심혈관계 질환 등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파악함으로써 개인 맞춤형 예방 및 치료 방법을 개발하는데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단백질 발현, 유전자-유전자 상호 작용과 다양한 환경 요인 또한 질병 발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유전체 연구만으로는 질병 발생과의 인과 관계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이 어렵다. 따라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생체 내의 모든 단백질을 분석하여 연구하는 단백질체학(proteomics, 프로테오믹스)이 부각되고 있다. 건축에 빗대어 보면, 유전체학은 설계도를 연구하는 것이고, 단백질체학은 건축물을 연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유전자 수는 약 2만~2만5000개로 알려져 있고, 단백질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100만개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지고 있는 설계도에 비해 지어지는 건축물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 예를 들면, A빌딩과 B빌딩의 설계도는 각각 하나씩 존재하지만 A빌딩 1층의 설계도와 B빌딩 2층의 설계도를 조합하면 새로운 2층 건물을 만들 수 있듯이 한정된 설계도만으로도 다양한 건물을 지을 수 있다. 또한 설계도에 따라 10평짜리 방을 만들더라도 집기, 기구나 표지판에 따라 강의실이 될 수도 있고 카페나 휴게실이 될 수도 있다. 이렇듯 단백질은 유전자의 정보를 기반으로 만들어지지만 유전자 수에 비해 월등히 많은 종류의 단백질이 존재하게 된다. 생체 내에서 다양한 생화학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단백질이기 때문에 단백질체를 연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설계도가 없는 건축물이 있을 수 없듯이 유전자가 없다면 단백질도 만들어 지지 않는다. 따라서 한 생명체에 다른 개체의 유전자(설계도)를 도입하여 발현할 수 있게 하면, 그 생명체는 원래 만들지 못했던 다른 개체의 단백질(건축물)을 만들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유전공학이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들의 키를 크게 하는 성장 호르몬은 단백질인데 생체에서 매우 소량 만들어진다. 우리 애의 키를 키우기 위해 다른 아이들로부터 혈액을 뽑아 성장 호르몬을 얻어내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현재 성장 호르몬이 시판되어 병원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사람의 성장 호르몬을 만드는 유전자를 분리하여 미생물의 유전자에 끼워 넣음으로써 미생물로 하여금 사람의 성장 호르몬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인슐린, 항체, 백신 등이 만들어지고, 또한 제초제 내성 콩과 같은 GMO로 불리는 유전자 재조합 농산물도 생산된다. 유전자(설계도)에 이상이 생기면 지어지는 건축물(단백질)도 잘 못 되기 때문에 기능을 못하거나 떨어져서 병에 걸리게 된다. 예를 들면, 혈액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헤모글로빈(단백질)의 유전자에 변이가 생기면 제대로 된 헤모글로빈이 만들어 지지 않아 산소 운반 능력이 떨어지는 겸상적혈구 빈혈증에 걸리게 되는데 이는 철분을 먹는다고 낫는 것이 아닌 유전자의 결함에 의해 발생한 유전병이다. 내가 이러한 유전자를 가졌을 경우 정상적인 유전자를 가진 배우자와의 결혼을 통해 내 자손은 이러한 결함을 극복할 수 있지만 내 자신은 유전자를 고치는 수 밖에 없다. 현재 암이나 난치성 유전질환, 류마티스 관절염과 같은 자가면역 질환에 유전자 치료가 시도되고 있다. 인체는 수십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세포의 유전자를 한꺼번에 치료하는 것은 쉽지 않다. 수 많은 세포에 특정 기능의 유전자를 집어 넣거나 목적 세포의 손상된 유전자를 잘라내고 수정하는 유전자 가위를 들여보내기 위해 인체에 해가 없는 바이러스나 운반체가 이용된다. 성인의 경우 수십조개 세포의 유전자를 치료해야 하는 반면 정자와 난자의 수정으로 만들어진 인간 배아는 초기에 16개 정도의 세포 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만 유전자 치료를 하면 여기서부터 분화되어 만들어지는 수십조개의 인체 세포는 모두 치료된 유전자를 갖게 된다. 따라서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인간 배아에 유전자 치료를 시도한 사례가 있다. 인간 배아에 대한 유전자 치료는 법적, 윤리적, 과학적 제약으로 인해 시도 자체가 어렵고, 많은 규제와 규정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이다. 여전히 일부 과학자들은 인간 배아의 유전자 치료에 대한 유혹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배아에 대한 유전자 치료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고 있다. 배아는 인간 생명의 초기 단계로 존엄성을 가진 생명의 형태이므로 배아에 대한 유전자 수정은 생명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로 인식될 수 있다. 또한 질병 예방 및 치료를 위한 인간 배아의 유전자 치료에 대해서도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되지만, 이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우수한 유전자를 갖도록 개량하거나 인간의 특정 능력을 강화하는데 유전자 수정이 시도될 수 있는데 이야 말로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심각한 윤리적 및 종교적 문제가 될 것이다. <끝> (연재를 마치며) 이제 14개월에 걸쳐 이어온 연재를 끝내려고 합니다. 식품과 바이오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쓴다고는 했지만 읽기에 어려운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보아 주신 독자 분들과 미흡한 글을 실어 주신 <제이누리> 식구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필자 주 ☞ 김동청 교수는? = 연세대 생화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대학원 생화학과 이학석사 및 서울대 대학원 농화학과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상㈜ 중앙연구소 선임연구원, 순천제일대 조교수, 영국 캠브리지대 방문연구원, 성균관대 기초과학연구소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청운대 인천캠퍼스 화학생명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식품기술사 자격도 갖고 있다.
‘사(士)’는 오래된 한자다. 한나라 때 허신(許愼)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일하다, 섬기다(事)이다. 숫자는 일(一)에서 시작해 십(十)에서 끝나니 일(一)과 십(十)을 따랐다. 공자는 ‘십(十)을 미루어 일(一)을 합하면 사(士)가 된다’고 하였다.”라고 풀이하였다. 숫자 기록에서 퍼져 나온 ‘일하다, 섬기다(事)’가 본뜻이라 여겼다. 양백준(楊伯竣)의 『논어역주(論語譯注)』 통계에 따르면 『논어』 중에 단독으로 ‘사(士)’자 하나만 사용한 곳은 두 가지 상황이라 한다. 3차례는 일반 인사(人士)를 총괄하여 가리키고 있고 12차례는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수양한 사람을 특별히 지칭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사(士)’자의 갑골문 원형은 뜻밖에도 생식 숭배를 상징하는 생식기로 보는 학자도 있다. 먼저 남자의 통칭으로 발전한 후, 나중에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가지거나 수양한 사람을 가리키는 미칭으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른바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가지거나 수양한 사람은 중국문화전통 중 관직을 근본으로 삼아 귀한 것으로 여기는 관점인 관본위(官本位)의 전형적인 구현이다. 『논어·자장(子張)』에 “벼슬하면서 여력이 있으면 학문하고, 학문하면서 여력이 있으면 벼슬하라.”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형병(邢昺)·소(疏)에서 “사람이 관리가 되어 자기의 직무를 행하고 유유하여 여력이 있으면 선황의 유훈을 배운다.”라고 풀이하였다. ‘사(士)’와 ‘사(仕)’는 통한다. ‘사(士)’는 일찍부터 중국사회의 계층이 되었다. 이른바 ‘사민’〔四民, 사농공상(士農工商)〕 중에서 가장 높은 사회 계층이다. 예를 들어 『구당서(舊唐書)·최융전(崔融傳)』에서 “사농공상(仕農工商) 넷은 직업이다. 배워서 높은 자리에 앉으면 사(仕)라 하고 토지를 개간하여 곡식을 심으면 농(農)이라 하며 기교를 부려서 쓸모 있는 그릇을 만들면 공(工)이라 하고 돈을 변통하여 상품을 팔면 상(商)이라 한다.”라고 하여 등급 구별을 설명하고 있다. 동시에 이 사회 계층은 벼슬한 자를 포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벼슬을 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평생 관직에 앉아보지 않은 사람인 은사(隱士), 신사(紳士)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관본위’ 제도 아래에서 파생된 ‘사(士)’의 부류로 모두 ‘아사(雅士)’라 자처하였다. 도연명(陶淵明)이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으로 귀거래 했어도 결국 농, 공, 상 계층에 속하지 않고 3개 계층 위에 있는 ‘사(士)’의 부류에 떠있다. 곤궁해진 사인이 세속에 영락하여도 그 ‘사기(士氣)’는 여전히 존재하였다. 한어 단어 중에 ‘사자(仕子)’, ‘사호(仕戶)’, ‘사녀(仕女)’, ‘사림(士林)’, ‘사문(仕門)’, ‘사빈(仕貧)’, ‘사은(仕隱)’ 등은 ‘사(士)’가 중국사회에서 특정한 계층에 속했다는 역사의 반증이라 하겠다.1) 사림(士林), 즉 사대부 계층이 아사로 자처한다. 그런데 일단 가난해져서 초라하게 되거나 재난을 당하여 곤궁해지면 일순간에 지위는 천 장이나 떨어져 사회 저층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것이 사인이 가장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에 상응하는 많은 피휘(避諱) 언어가 존재한다. 가난〔빈(貧)〕을 “집이 본래 빈궁하다”, “자금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군곤(窘困)을 “절박하게 고통스럽다”고 말하고 빈사(貧士)를 “쑥 위에 머물고 흰옷을 입는 사인”이라거나 “콩잎을 먹는 사람”이라 부른다. 먹을 것이 없어 춥고 배고픈 것을 “배고프고 추워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한 삶”이라고 말한다. 지극히 가난한 거지를 “벗고 다니며 초식한다” 말하며 거지를 “바가지를 사용해 구걸한다”고 말한다. 걸식하는 것을 “오원(伍員, 오자서)이 퉁소를 부는 것을 본받는 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송나라 때 임광(任廣)이 편찬한 『서서지남(書敘指南)』 권10의 ‘기한빈천(飢寒貧賤)’만 보더라도 옛 서적 중에 유사한 상용 어휘가 200여 종이나 된다. 그러나 인간세상은 상전벽해가 아니던가. 세상사는 몹시도 심하게 변한다. 세간 풍운의 변화가 무궁하다고 말할 필요 없이 한 시기 제왕 옆에서 영예롭게 영광스런 은총을 다툰다하여도 ‘군주를 모시는 것은 호랑이 옆에 있는 것과 같다.’ 하물며 많고도 많은 사림이야 더 말할 나위 없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엎어 버릴 수도 있다하지 않는가. 사림 중에 있으면서 지위를 얻거나 재야에서 수양하거나, 그리 지내다보면 근본을 지지하고 있던 지위를 잃고 민간 하층 사회로 떨어지거나 심지어는 거지로 전락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호랑이도 평지에서는 개에게 물리고 털이 빠진 봉황은 닭보다도 못하듯이 권세가도 일단 지위를 잃으면 약한 자도 넘보게 되는 법이다. 사인이 거지로 전락하여 달갑지 않게 사회 저층에 머물게 되면 처참한 지경에 빠지는 게 당연하다. 제왕조차도 거지와 인연이 있는데 하물며 일인지하의 사림에 있는 사람들이야 말하며 무엇 하겠는가. 그런 사람은 부지기수다. 기연이 많고도 많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종관해보면 아사와 거지는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다음 몇 가지 유형이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한어 단어 중에 ‘사자(仕子)’는, 벼슬한 사람 ; ‘사호(仕戶)’는, 벼슬한 집안 ; ‘사녀(仕女)’는 귀족 부녀자 ; ‘사림(士林)’은, 사대부 계층 ; ‘사문(仕門)’은, 벼슬한 가문 ; ‘사빈(仕貧)’은 곤궁해 벼슬에 나아가 봉록을 받다 ; ‘사은(仕隱)’은 출사하고 은퇴하다 뜻이다. 이 단어들은 ‘사(士)’가 중국사회에서 한 계층에 속했다는 역사의 반증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