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 때, 무칠은 걸식하며 돌아다니다 관도(館陶)현 설점(薛店)촌에 이르렀다. 장(張)씨 성을 가진 거인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며 연 6000문(文)을 받는 고용인이 됐다. 3년을 쉬지 않고 일하다가 예전에 자신을 길러준 백모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을 수령해 돌아가 효도하려 했다. 그런데 어찌 생각이나 했을까, 장 거인은 무칠이 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가짜 장부를 들이밀며 다그쳤다. “네 임금은 일찍이 모두 지급하였다. 이게 네 장부이지 않느냐?” 고의로 트집 잡고 있다고 모함하고 하인을 시켜 길거리로 끌고 가 온몸이 멍들도록 타작하도록 했다. 나중에 무칠은 또 수재의 집에서 고용인이 되었다. 어느 날, 그의 누나가 인편에 돈과 편지를 보내왔는데 때마침 무칠이 부재중이라 수재가 대신 받았다. 무칠이 돌아오자 수재가 대신 편지를 읽어주었다. 그가 글을 모른다는 것을 이용해 돈을 보낸다는 말은 빼버렸다. 다른 소식만 알려주고 돈을 몰래 삼켜버렸다. 나중에 누나가 다시 사람을 보내 돈을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에야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재를 찾아가 사실여부를 물으니 욕만 먹었다. 설날 때 수재가 춘련을 써서 무칠에게 붙이라고 하였다. 바람이 불어 춘련을 뒤엉켜 놓으니 엉망이 되었다. 침대 머리맡에 붙인 것은 ‘고양이 개 평안’이고 닭장에는 ‘온 집안이 상서롭게 되라’는 글귀였다. 수재는 대노해 뺨을 때리며 현장에서 임금을 20% 깠겠다고 하고는 꺼지라고 욕을 해댔다. 무칠은 참지 못해 욕을 되돌려 주었다. “너, 이 나쁜 인간! 처음에 내가 글을 모르니까, 나를 속여서 내 누나가 보낸 돈을 몰래 처먹더니, 지금은 내가 글을 몰라 춘련을 잘못 붙였다고 임금을 삭감하겠다고. 양심이 있기는 한 것이오? 네 그 더러운 돈, 내 더러워서라도 안 받겠소. 네게 줄 테니 뇌물을 쓰든 헛지랄 하든 멋대로 하시오!” 말을 마친 후 돈을 면전에 던져버리고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무칠을 가장 참지 못하게 만든 일은 나중에 벌어진다. 이모부인 장(張)사장이 무칠이 글을 모른다고 무시한 일이었다. 무칠의 이모부는 전지 몇 무(畝)를 가지고 있었고 두부를 파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모부 집에서 평일에는 맷돌질하고 농번기에는 밭에 나가 농사일을 했다. 1년에 일정한 임금을 받기로 이야기가 됐었다. 연말이 되어 임금을 계산할 때 이모부는 뜻밖에도 가짜 장부를 꺼내며 임금은 이미 지불하여 한 푼도 남아있지 않다고 거짓부렁 하는 게 아닌가. 인정하지 않는 무칠에게 강변하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웃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이모부는 거짓 장부를 내보이면서 똑 같이 말했다. 이웃은 무칠이 손윗사람을 존중하지도 않고 돈만 탐한다고 여기어 무칠의 말은 듣지도 않고 화내면서 가버렸다. 누구를 탓한다는 말인가, 자신이 공부할 기회가 없어 글을 모르는 까닭에 이렇게 되지 않았는가. 이번에는 너무 괴로워 마음병이 생겨버렸다. 병 때문에 마을에 있는 낡은 사찰에서 쓰러졌다. 3일 밤낮 동안 인사불성이었다. 물 한 모금 마실 수조차 없었다. 글을 모르는 고통과 분노는 무칠에게 너무나 깊은 상처를 주었다. 자기 길을 잃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 여러 고장을 전전하면서 무칠은 자신의 운명을 탄식하였다. 자신과 닮은 천하의 사람들의 운명을 탄식하였다. 불만을 넘어 분노하게 되었다. 평정을 얻지 못하면 소리를 낸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이 글을 몰라 가는 곳마다 무시당한 것처럼 글을 모르는 다른 사람도 똑같이 모욕을 당하지 않겠는가! 문득 한 생각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의학을 일으키자.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자. 글을 몰라 무시당하는 일은 없게 하자. 무칠은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운명과 닮은 후배들을 구해내자고 맹세하였다. 마음이 정해지자 낡은 사찰에서 뛰쳐나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머슴살이는 무시당하지 않느냐. 구걸하면서 내 마음대로 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느냐. 내가 구걸하고 돌아다닌다고만 보지 마라, 조만간 의학원(義學院)을 지으리라.” 일시에 무가장(武家莊)을 놀라게 하였다. 사람들은 무칠이 미쳤다고 여겼다. 무칠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지 개인에 대하여 말한다면, 오직 빈 손 두 쪽으로 의학을 일으키는 일이 어찌 쉬울까! 백 년 전 그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 날에도 사람들은 쉬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기상천외’한, 천진난만하고 어리석은 발상이라 여길 게 분명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상을 추구하고 희생을 아끼지 않는 무칠의 분투아래 마침내 ‘하늘이 내린 중대한 임무’, ‘학문이 발전하는 기운’이 사실상의 장거가 되어 ‘무칠(七)’을 ‘무훈(訓)’으로 바뀌게 했다. 당시에 상금과 포창을 받아 생전에 패방을 세웠다. 죽은 후에는 국사관에 전기를 세울 수 있었다. 더욱이 옛날 남통(南通) 대용(代用)사범학교에는 무훈의 화상이 공자상과 병렬되었다. 진정으로 고아한 사인의 사림에 들어갔다. 개인이 품은 꿈을 실현시키는 것이 어찌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무훈 본인이 모욕을 감내하면서 간고의 노력을 다한 결과였다. 세상의 쓴 맛 단 맛을 다 본 결과였다. 일생의 심혈을 다 쏟아낸 풍상의 결과였다. 사실, 무훈 본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글은 배우지 못했다. 옳을 일과 명예와 절조로 사림에 영광스럽게 뛰어올랐지만, 실상은 종신토록 걸식하면서 살았던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기이한 거지’였다. 쉬이 믿을 수 없을 것은 사실이다. 의학을 일으킨다는 것은 우선 상당할 정도로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학교를 건립할 거대한 자금을 저축하고 모금하기 위하여 무훈이 가장 기본적으로 한 방법은 구걸이었다. 돈을 구걸하기 쉽도록 우선 자신이 광대역을 자처하였다. 왼쪽과 오른쪽 각각 반씩 돌아가며 머리를 빡빡 깎았다. 사람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보시를 쉽게 받기 위해서였다. 무훈은 노래하였다. “이쪽은 깎고 저쪽은 남겼소, 의학을 지으면 걱정할 필요 없소. 이쪽은 남기고 저쪽은 깎았소, 의학을 짓는 것은 힘들지 않소.” 사람들이 ‘의학증(義學症)’에 걸렸다고 하면 그는 노래하였다. “의학증엔 조급함이 없소. 사람을 만나면 예의로 존중하고, 돈을 주면 연명하고, 의학을 일으키면 만년은 변함이 없소.” 돈을 보시하지도 않고 오히려 호통 치는 인색한 사람을 만나면 무훈은 노래하였다. “내게 주지 않는다고 난 원망하지 않소, 내게 밥을 주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요. 강요하지 않소, 억지로 동냥하지 않소, 급할 필요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소. 내가 동냥하고 당신은 선을 행하면 모두가 의학원을 지을 수 있소.” 혹은 노래하였다. “어르신, 삼촌, 화내지 마소, 잠시 화를 멈추면 내가 곧 떠나리다.” 지주가 어쩔 수 없어 돈 몇 푼 쥐어주었다. 구걸해오면 좋은 것은 돈으로 바꿨고 나쁜 것은 골라내 자신이 먹었다. ‘비열한 놈’이라고 비꼬는 사람이 있으면 무훈은 노래하였다. “야채 뿌리 씹네(가난을 견디어 내네), 야채 뿌리 씹어도 나는 배부르니 사람에게 더 요구하지 않네. 남은 밥으로 의학원을 짓네. 토란을 먹네, 토란을 먹어. 불도 물도 필요치 않네, 남은 돈은 의학을 일으키는 데에 어렵지 않네.” 심지어 물을 얻으면 먼저 얼굴을 씻고 난 후 물을 마시면서 노래하였다. “더러운 물을 마셔도 더럽지 않네. 의학을 일으키지 않는 게 더 더럽네.” 조금 많은 돈을 희사하는 사람을 만나면 무훈은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찬가를 불렀다. “난 밥을 구했는데 당신은 선을 행하네요. 의학을 지으면 당신 와서 보세요. 당신은 선을 행하고 나는 대신 일할 뿐, 모두 의학을 짓는 데 도와주네요. 많아도 좋고 적어도 좋아요, 의학을 짓는 데에 돈을 보시하세요. 이름도 날리고 선도 행하면 문창제군(文昌帝君)이 알아서 당신의 자자손손이 팔인교(八人轎)를 타게 만들 거요.”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혼저왕 먹읍서" (어서 와서 드세요) “Please come on and eat.”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숨겨진 제주섬 이야기 뭉치를 펼칩니다. 그동안 알았던 제주가 아닌 신비의 세계 뒤에 숨겨진 제주의 이야기와 역사를 풀어냅니다. ‘제주 톺아보기’입니다. 그렇고 그렇게 알고 들었던 제주의 자연·역사, 그리고 문화가 아니라 그 이면에 가리워진 보석같은 이야기들입니다. 사회사·경제사·사회복지 분야에 능통한 진관훈 박사가 이야기꾼으로 나서 매달 2~3회 이 스토리들을 풀어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애독을 바랍니다./ 편집자 주 서귀포시 대정읍 노을 해안은 남방큰돌고래가 매일 오전 10~12시, 오후 3~5시쯤 자주 나타난다는 곳이다. 얼마 전부터 ‘남방큰돌고래 멍’ 때리는 힐링 성지로 이름나 있다. 매일 해수면 위로 나오기만 기다리는 관광객들이나 지역주민들이 많다.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려고 갯바위 끝까지 가서 망원경으로 바다를 관찰하거나 드론을 띄우는 열성 팬도 있다. 바다 날씨가 흐려 볼 수 없는 날도 있지만, 날이 개고 바다 날씨가 좋아지면 틀림없이 남방큰돌고래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틈만 나면 거의 매일 이곳을 찾는 지역주민도 있다. 와서 한 시간 정도 ‘돌고래 멍’하며 자연치유하고 간다고 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눈으로도 식별이 가능한 가까운 바다에 남방큰돌고래 수십 마리가 모습을 보여줬다. 장난치듯 솟아오르며 물장구치는 남방큰돌고래 무리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꺼내 동영상 찍기에 바빴다. 파도를 가르며 미끄러지듯 헤엄치는 남방큰돌고래 지느러미가 수면 위로 보일 때마다, “와~ 몇 마리야?”하는 탄성이 쏟아졌다. 어린 남방큰돌고래가 머리 들고 수면 위로 높이 점프할라치면 이구동성으로 “어머 저것 좀 봐, 너무 귀여워~”하며 즐거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그곳에 자주 나타난다고는 하지만 그 시간에 거기만 가면 누구나, 당연하게 남방큰돌고래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평소 좋은 일 많이 하고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다. 그 덕에 혹여 남방큰돌고래를 보게 된다면, 그를 영접한 기운으로 앞으로도 많은 행운이 따를 거라 믿으며 겸손하게 기뻐하면 될 터다. 설령 못 보더라도, 아쉽지만 기분 나빠할 정도는 아니다. '역시 남방큰돌고래가 자신을 쉽게 보여주지 않은 신비스러운 존재구나!'하며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 사실 남방큰돌고래를 못 봤더라도, 한 시간 이상을 청정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대자연의 신비를 꿈꿨으니 그것만으로 돈 안 들고도 해양치유가 된 셈이지 않은가? 제주에는 이렇듯 돈 안 드는 치유 자연자원이 많다. 산이 그렇고, 바다가 특히 그렇다. 바다에 가서 멍하고 있다 돌아오면 자연적으로 해양치유가 된다. 감귤이나 구상나무·왕벚나무 등이 제주를 대표하는 식물이라면 남방큰돌고래는 바다 보물이다. 국제 멸종위기종인 남방큰돌고래는 또 다른 제주 상징물이자 소중한 자연치유자원이다. 이런 남방큰돌고래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계기로 더 관심을 끌었다. 이 드라마 방영 이후 서귀포시 대정읍 해안마을은 명소가 됐다. 드라마에서 우영우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제주도 서귀포 대정읍에 가면 삼팔이·춘삼이·복순이가 어린 돌고래들과 함께 헤엄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수족관에 붙잡혀 돌고래쇼를 하다가 대법원 판결 때문에 제주 바다로 돌아간 남방큰돌고래들입니다. 언젠가는 꼭 보러 갈 겁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방큰돌고래는 정확한 종 분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비슷한 종인 큰돌고래로 잘못 알려지곤 했다. 특히 어디에 어떻게 사는지, 무엇을 먹는지, 몇 마리가 있는지 등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국립수산과학원 조사 결과 지난 16년간 식별한 제주 연안 남방큰돌고래는 120여 마리로 확인됐다. 제주 남방큰돌고래는 수명이 40~50여 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배 쪽에 검은 반점이 많아지고 배 쪽에 분홍빛을 띠는 게 특징이다. 매우 친화력 있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성체는 몸길이 2.6m, 몸무게 220∼230kg 정도다. 12개월의 임신 기간을 통해 한 마리의 새끼를 낳아 기른다. 갓 태어난 새끼는 몸길이 1∼1.5m, 몸무게 20∼23㎏ 정도. 제주도를 비롯해 인도양과 서태평양의 열대 및 온대 해역 연안에 주로 서식한다. 2012년 10월 당시 국토해양부는 멸종위기에 놓인 남방큰돌고래를 보호 대상 해양생물로 지정, 공연 등 영리 목적의 포획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제주도 사람들은 예로부터 돌고래를 신성시했다. 살아있는 채로 다른 어류와 섞여 잡히더라도 절대 죽이지 않았다. 제주도 해녀들은 돌고래를 가리켜 ᄀᆞᆷ새기, ᄀᆞᆷ수기, 곰새기, 수애기, 수어기, 수해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제주에는 “감새기 올 때 궂인 것 하나 조친다(돌고래 올 때 상어가 따라온다)”, “웨ᄀᆞᆷ새기 노는 딘 가지 말라(외톨이 돌고래 노는 데는 상어가 나타나므로 가지 말라)”라는 속담이 있다. 돌고래 뒤를 따라다니는 상어가 해녀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었으므로 돌고래가 나타나면 작업을 중지하고 경계해야 했다는 의미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에 등장 제주 돌고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5권에 나온다. 조선 선조 때 성리학자인 유희춘(1513∼1577)은 전라도 수군의 조운(漕運) 폐단을 아뢰면서 “신이 삼가 살피건대 제주에는 강돈(돌고래)이 사슴으로 변해 그 생산이 끝이 없고 그 지방에는 호표(호랑이와 표범)나 시랑(승냥이와 이리)이 없어 사슴과 노루가 번성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원담을 사랑하는 남방큰돌고래 19세기 이전 제주에서는 연안에 전통 돌 그물인 원담(石堤)을 쌓아 어로 작업을 했다. 원담은 자연지형과 물때를 이용해 만든 제주의 전통 고기잡이 시설이다. 돌로 담을 쌓고 밀물이 들어오면 물을 가두었다가 밀물 때 바닷물과 함께 들어왔다가 썰물 때 원담 안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남아 있던 멸치나 숭어를 ‘족바지’(뜰채) 혹은 ‘당망’으로 건져 올렸다. 남방큰돌고래는 이런 숭어나 멸치를 아주 좋아한다. 원담은 작게는 수 m, 크게는 수십m 크기로 둥그런 모양으로 만든다. 요즘도 가끔 원담에 들어오는 남방큰돌고래는 왕성한 먹이활동을 한다. 바닷물이 빠지면서 숭어나 넙치 등 먹잇감이 갇혀 나가지 못하는 생리를 잘 알아 수시로 들어온다. 바닷속 사정을 훤히 아는 이 남방큰돌고래가 원담에 들어오면 최소 한 달 이상 머문다. 원담 안에서 남방큰돌고래는 조석간만에 맞춰 움직인다. 물이 많이 빠졌을 때는 활동반경이 물이 고이는 한 곳으로 줄어들고 한 방향으로 천천히 유영한다. 바닷물이 만조일 때에는 커진 웅덩이에 따라 활동반경도 넓어지면 넙치를 잡아먹기도 한다. 그러다가 원담 안에 먹이가 떨어지면 만조를 이용하여 넓은 바다로 나간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특보를 역임하고,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을 지냈다. 천사나래 주간활동센터 시설장을 맡아 일하며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학기 중에는 제주한라대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오달진 근대제주』(2019), 『오달진 제주, 민요로 흐르다』(2021), 『제주의 화전생활사』(2022) 등이 있다.
장영덕(張永德), 낡은 옷을 입고 때 묻은 얼굴로 분장한 후 도적에게 구걸해 온가족이 소란을 피하다 거지를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며 코웃음 치는 사인도 있지만 긴급한 상황에서 거지 모양으로 분장하여 재앙을 피해간 사인도 있다. 『송사·장영덕전(張永德傳)』의 기록은 이렇다. 장영덕, 자는 포일(抱一), 병주(幷州) 양곡(陽曲) 사람으로 부친 장영(張穎)은 안주(安州) 방어사를 지냈다. 장영덕이 4세 때, 모친 마(馬) 씨가 이혼 당하자 조모가 부양하였다. 계모 유(劉) 씨는 효부로 유명하였다. 시위(侍衛) 관리를 시작한 주조(周祖)는 장영과 가까이 지내며 딸을 장영덕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다. 장영덕이 모친과 함께 송주(宋州)로 처자를 맞이하러 갈 때에는 도적떼가 도처에서 출몰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장영덕은 낡은 옷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흙을 발라서 더럽힌 후 골목길에 머물다가 도적이 나타나면 그들 앞에 나아가 구걸하였다. 상대방은 적선하지도 않고 “이곳은 거지들을 먹여 살리는 비전원(悲田院)이다.”라고 말하며, 소동도 일으키지 않고 떠나갔다. 그렇게 온가족이 재난을 면했다. 기지가 뛰어나다 할 밖에. 당시 상황은 ‘거지와 어울리면 조상의 명성을 더럽힌다’는 모욕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는 시기였다. 무훈(武訓), 구걸해 자금을 모아 의학(義學)을 일으키다 청나라 도광 18년 10월 19일, 즉 1838년 12월 4일, 산동 당읍(堂邑, 현 요성聊城 서쪽)현 무가장(武家莊)의 가난한 농민 무종우(武宗禹) 집안에서 가문의 일곱 번째 항렬의 아이, 무칠(武七)이 태어났다. 그가 바로 구걸하며 자금을 모아 의학1)을 일으킨, 중국근대사상 ‘광세(曠世)기인’이라 불리는 무훈(武訓)이다. 무칠은 본래 사림에 속하지 않은 어린 거지였다. 출신은 학자 가문도 아니요 땅 파먹는 농민세가였다. 부모 이외에 시집간 누나 1명, 형 무양(武讓)이 있었다. 무칠이 5살 때, 부친이 죽었고 흉년도 들었다. 나이가 조금 많은 형은 혼자 밖에서 살길을 찾아 나섰다. 무칠은 모친 최(崔) 씨와 함께 곳곳으로 구걸하고 다니며 지냈다. 음식을 구걸해 오면 나쁜 것은 골라 자신이 먹었고 좋은 것은 모친에게 주었다. 어떤 때에는 노래를 불러 모친을 기쁘게 해드렸다. 거지였으니 공부할 돈이 없었다. 그래도 공부하고자 하는 갈망은 억제할 수 없었다. 구걸할 때에 학당에서 책을 읽는 낭랑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무칠은 저절로 걸음을 멈추어 자리를 뜨지 않고 주의 깊게 들었다. 마을 아이들이 등교하거나 하교할 때 부러운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한참을 뒤따라가곤 하였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질책과 혐오가 뒤따랐다. 어느 날, 무칠은 갑자기 공부하고 싶은 간절한 바람을 억제하지 못하고 학당에 뛰어들어 선생에게 글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하였다. 결과는? 계척과 욕설이 날아왔고 학동들의 비웃음만 들었다. 마음에 상처 입은 무칠은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 모친에게 말했다. “다른 집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데 저는 왜 학교에 가지 못하나요?” 최 씨는 눈물을 머금고 아들을 안위하며 말했다. “우리 집은 가난하여 먹을 밥도 없는데 학교에 갈 돈이 어디 있다는 말이냐? 학교에 가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 법이란다! 불쌍한 녀석, 터무니없는 생각, 다시는 하지 말거라.” 어쩔 수 없이 무칠은 매일 타구봉(打狗棒)과 낡은 바구니를 들고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대문을 두드리며 구걸하였다. 7세가 됐을 때 모친마저 세상을 뜨자 마음 착한 백모(伯母)가 거두어들여 부양하였다. 백모의 집안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구걸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처지까지는 아니었다. 무칠은 2년간 잠시나마 거지 생활을 끝낼 수 있었다. 어린이는 천진무구하지 않던가. 무칠은 구걸하러 다니지 않으면 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있다고 여겼다. 9살 때에 무칠은 결국 마음속 갈망을 참지 못하여 대담하게 백모에게 학교에 가겠다는 생각을 말했다. “책은 가난한 아이가 읽는 게 아니다. 나중에 커서 머슴살이 하면서 먹고 살 생각이나 하거라!” 백모의 처참한 대답은 무칠을 다시 절망 속에 빠뜨렸다. 공부할 수 없다! 어찌 할 것인가. 그저 모진 운명을 탓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다. 거듭 몇 번이고 글을 알지 못하는 고통을 겪으니, 의학을 일으켜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강열한 의지를 품게 되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허황되다 싶은 망상은 끝내 실현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의학(義學), 청나라 때 정규 지방학교에 접근하긴 어려운 일반 민중을 위하여 설치한 지방의 초급학교다. 지방관의 주도하에 주로 지방 유지들의 출연에 의해 설립됐으므로 의학이라 한다. 강희(康熙) 41년(1702) 숭문문(崇文門) 밖에 설립한 것이 최초다. 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아래 전국적으로 세워짐으로써 명나라 말기 이후 쇠퇴해오던 사학(社學)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의학과 사학은 행정적으로는 유사하게 취급되었다. 빈한한 학생을 위해 일반 농촌지역에 설립된 의학 말고도, 소수민족 교화를 위한 변방의 의학도 있었다. 지배민족인 만주족의 가난한 계층을 위한 팔기의학(八旗義學)도 있었다. 명청 시기의 사학, 의학에 의해 교육이 지역적, 계층적으로 확대되었다. 의무교육은 아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게메 양! 경 해시민 얼마나 좋으쿠과?"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That's right. How nice would it be to do that?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속담에 한 사람이 높은 벼슬에 오르면 그 딸린 식구도 권세를 얻는다〔계견승천(鷄犬升天)〕라고 하였다. 외척으로 얻은 파벌관계, 종족 관념은 중국문화 전통 속에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왔고 깊이 뿌리 박혀 있다. 그런데 신사들은 그 친척과 친우, 벗이 거지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가문의 명예를 잃고 조상을 욕되게 하는 데에는 방법이 없다. 소자첨〔蘇子瞻, 소식(蘇軾)〕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천하의 현사를 두루 아끼었다고 전한다. 스스로 “위로는 옥황상제를 곁에서 도울 수 있고 아래로는 비전원(悲田院)의 거지도 곁에서 도울 수 있다”라고 자부하였다. 벗이 거지라 할지라도 결국 벗은 벗이다. 상국(相國)의 증손자, 시를 지어 구걸하다 청나라 때에 상국 문공공(文恭公) 왕욱령(王頊齡)의 증손, 즉 왕유문(王幼文) 원외의 손자가 시가지를 돌아다니며 걸식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가 구걸할 때에는 연화락(蓮花落)1)을 부르지 않고 시를 지었다. 점포 사람들 모두 그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늘 그에게 많은 돈을 보시하였다. 그의 부모가 그를 집안에 가둬두기도 하고 묶어두기도 했지만 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도망쳐서는 늘 하던 대로 걸식하였다. 밤에는 시내의 돌 위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나중에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본래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 현귀한 가문 출신이 기꺼이 걸식을 행하며 즐거워했으니, 가풍을 훼손하고 가문을 욕되게 했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 어찌할 것인가, 본인이 좋아서 그러한 것인데. 황실(皇室) 노태야(老太爺), 개방(丐幇)에 가입하다 청나라 광서 중엽에, 수도 남성(南城) 난광(暖廣)에 살던 거지 무리 중에 황조 종실 출신 노태야가 한 명 있었다. 걸식을 달갑게 여겼다. 때때로 창포, 마괘자를 입은 귀인이 다가와 안부를 전하고 돈을 전달하였다. 노태야는 성격이 좋지 않았다. 아무 때나 타인과 싸움했다. 난광 관원이 사람을 시켜 포박하려하니 노태야가 말했다. “너희가 나를 묶는 것은 쉬울 것이다. 그러나 나를 놓아주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이 짐짓 화난 체하며 말했다. “포박하는 것으로 그칠 줄 아느냐, 곤장을 때릴 것이다.” 당시 곤장을 치려면 포박을 풀어야 했다. 포박을 풀 때 노태야의 바지 위에 황대(黃帶)가 둘려있었다. 선례에 따르면 종인부(宗人府) 이외에 다른 관원은 종실 사람에게 형벌을 내릴 수 없었다. “가시오. 곤장도 때리지 않을 것이오.” 어쩔 수 없이 풀어주었다. 현귀 종인 중에 거지 무리에 가입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거지가 됐어도 여전히 종친 특권을 향유하고 있었던 모양이고. 일반인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특별한 거지였다. 친척과 친구 중에 거지가 있으면 가문의 명예를 손상시키기도 했으나, 사인 중에도 거지와 벗을 맺은 경우도 있었다. 청나라 때 산동 내양(萊陽)에 풍아한 사인 강학재(姜學在)가 있었다. 자는 실절(實節)이요, 황제 근신의 둘째아들이다. 그는 동정동산(洞庭東山)을 유람하면서 돈이 있는 사람들과는 교류하지 않았다. 상양승사(相羊僧寺)에서 기념으로 절구시를 벽에 쓴 거지를 초청한 후 상좌에 앉혀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며 함께 술을 마셨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거지는 강학재의 손은 잡고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나의 지기입니다.” 강학재는 기뻐서 이후에도 자주 그와 담론하였다. 나누지 않은 이야기가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만났다. 사찰 스님이 거지를 무시하여 떠나라고 하자, 거지는 스님의 뺨을 한 때 때린 후 떠나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강학재가 일부러 그 거지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강학재가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고 비난했으나, 강학재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바로 ‘아래로는 비전원(悲田院)의 거지도 곁에서 도울 수 있다’고 한 소동파와 같은 기개다. 제왕장상, 사인학자 모두 거지 출신도 있고 거지로 전락한 부류도 있다. 그 친척이나 친구도 예외는 없다. 거지와 친구를 맺기도 하고 거지를 상좌에 앉히고 교류하기도 하였다. 송나라 원나라 이래로 거지 집단이 점차 추락하여 본뜻이 변질된 이후에도, 곤궁해져 거지로 전락하거나 자의적으로 거지가 된 현재(賢才) 은사(隱士)가 적지 않았다. 1) 몇 사람이 간단히 분장하고 대나무 판을 치면서 노래하는 통속적인 가곡이다. 보통 노래의 매 단락마다 ‘蓮花落, 落蓮花’라고 메기는 소리를 붙인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희재(韓熙載), 기방에서 구걸하다 한희재(韓熙載), 자는 숙언(叔言), 오대(五代) 때 유주(濰州) 북해(北海) 사람으로 후당 장종 이존욱(李存勖)의 동광(同光, 923~926) 연간에 진사였다. 그의 부친 한광사(韓光嗣)가 명종에게 피살되자 강을 건너 남당에 의탁하였다. 세종 때에 병부상서를 지냈다. 포용력이 있었고 비굴한 바가 없었다. 해고를 당해도 시종 절기를 잃지 않았다. 문장을 잘 써서, 서현(徐鉉)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큰돈을 주고서라도 문장을 사려고 하는 사인과 승려, 도사들이 많았다. 이런 아사도 의외로 기원에 가서 걸식하는 것을 놀이로 삼았다. 가기(歌妓) 100여 명을 한꺼번에 사서 하루 종일 가기와 함께 뒤섞여 놀기도 하였다. 낡은 옷을 입고 짚신을 신어 맹인 예인처럼 분장하고서는 홀로 거문고 타면서, 문아한 문객에게 박자판을 들게 하고는 기방에 가서 걸식하는 것을 즐겁고 유쾌하다고 여겼다. 송나라 때 소동파(蘇東坡)가 친우 보각(寶覺)이 낡은 승복을 주자, 감사의 뜻을 표하며 시를 읊었다. “아픈 몸에는 옥대 걸치기도 벅찬 일인데, 불민하여 화살촉 같은 기봉에 떨어지도다. 기생집에서 술이나 얻어먹을 물건으로, 운산 선승의 옛 가사와 바꾸었도다.”1) 바로 한희재의 풍류 일사를 전고로 사용해 쓴 시이다. 이처럼 당시 풍속과 맞지 않는 심리적 변태행위는 대체로 일시적으로 처한 상황이 좋지 않은 고민에서 비롯된, 모든 것을 하찮게 대하고 제때에 즐기려는 심리와 연관이 있다. 송나라 사람 황조영(黃朝英)은 『정강상소잡기(靖康緗素雜記)』에서 평가하였다. “한의재는 본래 고밀(高密) 사람이다. 후주가 즉위 후 북인을 심히 의심하여 독주로 독살당한 자가 많았다. 한희재는 두려워 마음 가는 대로 솔직하게 행동하면서 예법을 준수하지 않았다.” 송나라 사람 주밀(周密)도 『계신잡식(癸辛雜識)』에서 평했다. “후인은 화야연도(畵夜宴圖)로 조롱했지만 그 정서는 슬프기 짝이 없다.” 사림에 거처하는 사람을 보면 풍아하고 맑으며 고아하지만, 역시 위험하고 고생스러워 고충이나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다. 북송 영종 조서(趙曙) 치평(治平, 1064~1067) 때의 전중어사 전기(錢覬)는 왕안석을 따르는 손창령(孫昌齡)을 비판했다가 수주(秀州)로 쫓겨났다. 집안이 가난하고 모친이 나이가 들어 친척과 친구에게 음식은 구걸했으나 의연하여 귀양살이 하는 관리의 형색이 없었다. 사인의 절기를 잃지 않은, 사림이 찬양하는 풍아한 일이었다. 그래서 소동파는 증시를 써서 “오부(烏府) 선생은 쇠로 간을 만들었나”라고 읊으면서 ‘철간어사(鐵肝御史)’라는 명칭이 붙었다. 그런데 한희재와 비교하면 후련하지 못한 억압된 심리가 생겨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한희재보다 유쾌하지 않다. 한희재는 행위가 방종하여 세속 예법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반면 전기는 예전과 다름없이 도덕군자라는 가식적인 면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어멍 어디 갔당 왐수과?" (어머니 어디 갔다가 오십니까?) “Mom, Where have you been and are you coming?.”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거지 은사 마옹항(馬翁恒) 거지 무리에 은거하였던 아사(雅士)가 있다. 세상을 업신여기고 스스로 즐기는 유형에 속한다. 청나라 때 봉대(鳳臺)에 마체효(馬體孝)라는 이름의 제생(諸生)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마체효는 성정이 호쾌하고 시원시원하였다. 부부가 모두 시를 읊고 불학을 좋아하였다. 창화하며 즐기다가 참선의 이치를 논하면서 밤새기도 했다. 다년간 강남의 명산대천을 유람하고 난 다음 이름을 광(曠), 호를 옹항(翁恒)이라 고친 후 행적이 묘연해 졌다. 나중에 숙천(宿遷)현에서 죽은 거지가 발견되었다. 가슴에 시 한 수를 품고 있었다. 말미에 ‘개은(丐隱) 옹항 절필’이라는 서명이 있었다. 현령은 기이하다 느끼고 매장한 후에 그 시를 새기고 창화시까지 써서 비석을 세웠다. ‘개은(丐隱) 옹항 선생의 묘’라 불렀다. 숙천에서 죽은 거지의 절명시가 마체효의 부인 진(晉) 씨에게 전해지자 진 씨가 읽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죽은 사람은 내 남편이다.” 그 시에는 서명이 없었다. 집안사람이 숙천에 가서 대조 확인한 결과 틀림이 없었다. 은사가 아니면 뭐라 할까. 벼슬길에 마음을 두지 않고 배움을 버리고 멀리 유람하며 숨어 지내는 거지가 됐으니. ‘속세의 덧없음을 깨달은’ 은사가 아닐는지. 유랑하며 구걸하는 것을 최후의 귀착점으로 삼은 은사일 터이다. 모든 것을 하찮게 대하며 걸식을 놀이로 삼은 방탕한 사인(士人) 세상사를 벗어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가 있다. 세상을 업신여기며 냉소적 태도를 취했던 사인이 많다. 방탕하기 그지없이 방종하게 지냈던 자들도 대대로 존재한다. 그런 행동 때문에 대부분 풍류 명사가 되었다. 국군(國君) 중에 걸식을 재미로 삼은 자도 있었다. 풍류 아사(雅士) 중에도 그런 예가 적지 않다. 모두 세속과 상반되는 변태 행위다. 변형된 마음 상태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이상한 행적으로 굴절되게 표현하고 있다. 조경종(曹景宗), 자기 공로를 믿고 걸식을 오락으로 삼다 남북조시대 양(梁) 왕조에 용감하고 날래어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운 대장군이 있었다. 성은 조(曹), 이름은 경종(景宗), 자는 자진(子震)으로, 신야(新野, 하남에 있는 지역)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했고 사냥을 좋아하였다. 관직이 시중(侍中), 중위장군(中衛將軍), 강주자사(江州刺史)를 역임하였다. 52세에 부임 도중 세상을 떴다. 사람됨이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모르는 글자가 있으면 몸을 낮추어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조작하였다. 술 마시기를 즐기고 놀기를 좋아하였다. 음력 섣달에 소리를 지르며 길거리로 뛰쳐나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구걸하는 것을 오락거리로 삼았다. 그런 기회를 틈타 그의 날랜 부하들은 부녀자들을 희롱하고 재물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그런 사실이 계속해서 양 고조(高祖)에게 전해져서야 비로소 조경종이 그런 변태적 유희를 하지 않게 되었다. 황제는 그를 책망하지 않았다. 예전에 고조는 공신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어 과거 이야기를 나누는 주연을 여러 차례 마련하였다. 조경종은 때때로 술에 취하여 본분을 잊어버렸다. 간혹 소관이라 잘못 불렀는데도 황제는 일부러 내버려 두고 그런 말을 듣는 것을 즐길 거리로 삼았다. 조경종이 자기 공로를 믿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여러 가지 변태 행위는 당시 황제가 총애하면서 벌어진 일이니, 갖가지 추태를 부린 것도 이상할 것도 없다. 명사 배휴(裴休), 탁발 거지가 돼 기원(妓院)에서 구걸하다 당나라 때에 서법, 문장으로 유명한 명사 배휴(裴休)는 자가 공미(公美)다. 당 선종(宣宗) 이침(李忱) 때, 대중(大中) 연간에 병부시랑(兵部侍郎)에서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진급할 때까지 5년 동안 조운(漕運) 적폐를 개혁하고 방진(方鎭)의 세금 포탈을 제지하면서 정치적 공적을 많이 쌓았다. 집안 대대로 불교를 믿었는데 배휴 대에 이르러 더욱 깊어졌다. 아사(雅士) 배휴는 때때로 승복을 입고서 발우를 들고 기원에서 구걸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풍류 일사로 여태껏 남아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강영호(1943~2021)는 사실주의 화가로 한국의 옛 기물이나 제주의 풍광을 즐겨 그렸다. 제주시 도남 출신으로 1963년 오현고를 졸업하고, 1967년 홍익대 서양화과와 조선대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개인전 17회, 2010년 17회 개인전 이후 지병이 악화되어 작품 활동을 중단하였다. 국내외 다수의 개인전과 한·러 교류전, 아시아미술대전, 10개국 예술교류전, 서양화 중견작가 초대전 등에 참가하였다. 제주대 강사, 한국미술협회제주도지부장, 한국예총제주도지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문우회, 상형전, 이상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2015년 연갤러리 특별기획전 '강영호 화백 초대전'을 마지막으로 투병하다가 2021년 8월 타계하였다. '탐라이야기'(1993년)는 강영호 화가가 줄곧 관심을 가져온 제주의 옛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다. 탐라의 옛 사람들이 남기고 간 유물에서 진정한 제주의 아름다움을 찾고자 한 작품이다. 애기대백이 허벅, 각지불, 불상, 석류가 서로 뿜어내는 조형적 아름다움이 과거 시간으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탐라이야기는 화면 전체가 과거의 회상처럼 보이려고 면을 겹치고 있으며, 점묘적인 마티에르가 사물 서로가 공간에서 연결되는 장치가 되고 있다. 색상 또한 마치 아스라한 각지불 조명처럼 어른거리는 느낌을 준다. 옛제주인의 과거 여행을 소박하게 보여주고 있다. 강영호의 '상(象)'(1988년)은 불상의 상체와 머리부분을 그린 작품이다. 반가사유상을 통해 법열을 느끼도록 한 작품이다. 이미지는 보여지는 불교의 세계관을 상징한다. 전체적인 색조의 분위기는 전기가 없는 불당의 느낌을 주는데 이 또한 오래된 시간의 경험이 배어나는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란 불상으로서 오른쪽 다리를 왼쪽 허벅다리 위에 얹고, 오른손을 받쳐 뺨에 대고 생각에 잠겨 있는 부처의 형상이다. 부처가 성불(成佛)하기 전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부처의 사유란 업보를 받은 인간이 결국 번뇌를 이기고 해탈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데 청동불이 주는 느낌이 오랜 고뇌가 시간에 드리워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창열(1929~2021)은 물방울 화가로 널리 알려졌다. 1929년 평안도 출신으로 어릴 때는 할아버지에게 서예를 배웠고, 광성고보 시절에는 외삼촌에게 뎃생을 배웠다고 한다. 가족의 회고록에 의하면 김창열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한 지 2년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학업을 중단하였고,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서 경찰관이 된 아버지와 친척들의 권유로 자신도 경찰관이 되었다. 휴전 후 다시 서울대학교에 등록하려고 했지만 월북한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 다닌 것이 문제가 돼 등록할 수 없게 되자 경찰관 생활을 하면서 혼자서 그림을 그렸다. 1957년 현대미협 동인회를 결성하여 앵포르멜 운동을 한국에서 전개했다. 이후 박서보의 주선으로 제2회 파리비엔날레 한국이 초청되면서 참여작가 4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1971년 다시 파리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고, 1972년 물방울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했는데 2004년 프랑스 국립 쥐드폼미술관 초대전에서는 물방울 예술 30년을 결산하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2016년 여름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저지리에 개관되었고, 2021년 91세를 일기로 영면하자, 화장한 뒤 미술관 뒤 숲에서 수목장을 지냈다고 한다. 김창열의 '무제'(1958년)는 한국 현대미술운동 초기의 작품으로 1950년대 후반의 한국미술의 시대정신과 경향성이 모두 드러나는 작품이다. 김창열은 1957년 조선일보사에 의해 시작된 현대작가초대전에 1958년 2회전부터 참가했으며, 김창열의 당시 작품 경향을 알 수 있다.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추상미술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서구미술이 한국적인 수용은 당시 우리에게 현대성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식민지를 겪은 채 바로 분단전쟁을 치른 직후의 상황에서 무엇이 새로운 것이 돼야하는지 되묻게 되었다. 작품 '무제'는 마치 즉흥적으로 순식간에 그려진 탑과 같은 모습인데 이상하게도 하단부가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형태이다. 종전 직후의 상황들이 모든 것들을 처음부터 해야했고 해결해야할 과제가 산더미 같은 마음의 초조함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김창열의 '판자집'(1959년)은 서울의 판자촌 모습을 조형적 겹치기 작업으로 인식한 반추상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화가의 속성이 그렇듯이 자연 안에 구상과 추상의 조형성이 동시에 들어있어 어떤 측면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어떤 정신사적인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 작품의 경향이 결정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경향성은 변하기도 하면서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에 놓이게 된다. '판자집'은 처절한 사회 현실이 보이지 않은 채 미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여 기하학의 모습으로 접근한 작품이다. 사상이 미학을 결정하는 게 맞다. 서양화가 강길원(1939~2021)은 전남 장흥 출신으로 조선대 문리대 미술과를 졸업했다. 국전에서 여섯 번 특선하면서 1960년대에 국전 최연소 초대작가가 되었다. 1965년 홍익대 회화과 석사를 이수하여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재직하다가 1977년 제주대 미술교육과 교수를 거쳐 공주대 교수로 정년퇴임하였다. 제주대 교수시절 강길원은 친절하고 자상한 교수법으로 유명했다. 제주의 풍경을 그리면서 육지 화가들이 제주의 풍경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곧바로 따라서 그리는 화가가 나올 정도였다. 2004년 옥조근정훈장을 수여했으며, 다작의 작가이면서도 부부 금슬이 좋기로도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전남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했으며 2021년에 세상을 타계했다. 강길원의 '용두암'(1987년)은 대표적인 자연물 관광지이다. 용의 상징은 바다를 지키는 영물이고,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이기도 하다. 바위가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용두암인 것이다. 동양인들은 용을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는 대상으로 인식했지만 서양인들은 반대로 퇴치해야 할 사탄의 일종으로 여겼다. 기독교 세계관을 받은 것이다. 용두암은 화산 때문에 생긴 바위로 흐르는 용암이 바다를 만나면서 솟아올라 생성된 것이다. 일종의 투물러스의 형상석인 것이다. 용이 오른 쪽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승천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비춘 모습과 같아서 환상적인 느낌마져 들게 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후작(侯爵)이 구걸에 열중하다, 호적에서 지워지다 청나라 도광(道光) 연간에 북경 해대문(海岱門) 안 영광사(永光寺) 앞에 40살 쯤 먹은 거지가 있었다. 채찍질을 잘했고 해학(諧謔)에 뛰어났다. 아무 때나 속어로 내키는 대로 소곡을 편성해 읊었다. 듣는 사람들이 탄복해 앞 다퉈 돈을 희사하였다. 돈을 구걸한 후 거지는 술을 사서 맘껏 마시고는, 남은 돈은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전부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거지는 훈구 세신으로 이미 후작을 세습하였고 예전에 건청문(乾淸門)을 지켰다고 했다. 30세 이후에 집을 벗어나 거지 행렬을 따라다녔다. 어떤 때에는 몇 개월에 한 번 돌아왔다. 일 년 내내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집안사람들이 여러 번 집에 돌아와 산해진미를 향유하라고 애걸복걸해 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집에 잡혀 들어가도 삼사일이면 집안사람들이 소홀한 틈을 타 옷을 갈아입고 담을 뛰어넘어 숨어버렸다. 조정에서도 그 소식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병이 들었다는 핑계로 호적을 지우고 그의 아들에게 작위를 세습하도록 하였다. 기이한가? 속세의 관점일 수 있다. 그 거지는 부귀영화를 버려버리고 거지 행세를 한 은사임이 분명하다. 무엇을 지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세상을 꿰뚫어본 인물일 수도 있다. 세상에 그런 예가 어디 한 둘인가. 이선(李仙)이라 자칭한 거지 이 또한 청나라 때에 있었던 일이다. 스스로 이선이라 부르는 거지가 있었다.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커다란 표주박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걸하였다. 돈을 얻으면 곧바로 술을 사서 마셨다. 사람들은 표주박 거지라고 불렀다. 술에 취하면 돈을 길거리에 뿌렸다. 앞 다퉈 돈을 줍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 거지가 가는 곳마다 백여 명의 아이들이 뒤따라 다녔다. 그런 어지러움이 싫어 그에게 더 많은 주면서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시장 상인이 많았다. 그런 까닭에 그가 얻는 돈은 다른 거지보다도 10배 정도나 많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거지는 글자를 쓸 줄 알았다고 한다. 시장 사람들이 100원 정도를 주면서 일 년 내내 다시는 그곳에 오지 않겠다는 약조를 써 달라고 하면 곧바로 승낙하고는 차용증을 써줬다. 약속을 위반하는 경우는 없었다. 차용증을 쓸 때, 한 글자를 쓸 때마다 북쪽을 향하여 세 번 절했다. 큰 글씨로 “우리 주인이신 광서 황제 모년에, 걸식하는 신하 이선 씀”이라 적었다. 궁금해서 “가난해져서 이런 지경에까지 전락한 당신이 어째서 황제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한 시도 잊지 못하는 게요?”라고 물으면 그는 대답하였다. “나는 공도 없으면서 백 호의 사람들에게 흠뻑 취하게 얻어먹을 수 있잖소. 관리들도 죄라며 따지지 않으니 모든 것이 황제의 관용과 은전인 게지요! 지금 천하는, 한 읍을 관장하면 한 읍을 배불리 먹이고 한 군을 관장하면 한 군을 배불리 먹이잖소. 그들 모두 나처럼 공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백 호의 사람들에게서 먹을 것을 얻어먹으니 부끄럽지요. 그래서 감히 황제의 은혜를 잊을 수 없는 것이외다.” 그 거지가 말하는 뜻을 이해하는 사람은 ‘도력이 있는 거지’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그 거지를 평하며 말했다. “그는 관리였다. 모처에서 일을 했었다. 백성이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고 백성에게 부당한 이익만을 추구는 상급자의 행태에 화가 나서, 관직을 버려두고 구걸하면서 풍자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연시(燕市) 거지, 어리석은 노인 광서 23년(1897), 북경시에 화갑이 지난, 백발에 하얀 수염이 난 늙은 거지 한 명이 나타났다. 스스로 표주박 늙은이라 불렀다. 모자도 쓰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겨울이든 여름이든 홑옷만 걸치고 다녔다. 커다란 표주박 하나를 들고 다니며 먹을 것과 쓸 만한 것들을 구걸해 표주박에 담았다. 얻은 것이 돈이면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어떤 때에는 폭죽을 사서 터뜨리기도 했다. 미친 듯한 그의 행동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리석은 늙은이라고 불렀다. 그 거지가 신선이라 굳게 믿고는 도를 알려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그는 말했다. “나는 신선이 아니오. 예부터 지금까지 신선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소. 신선이 있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요. 사람을 속이는 방법인 게지요.” 관리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전에 산서(山西)의 어떤 현의 현령이었다고 했다. 사람됨이 강직해 부패한 상사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여러 번 모욕을 주자 사지에 몰리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가정을 버리고 강호에 은거하게 됐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거지는 말했다. “골육을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한다? 나는 절대 그렇게는 하지 않소.” 그 늙은이가 산동(山東)의 모 지방 출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소년시절에는 재능이 있었는데 시험을 여러 번 봤으나 결국 낙방해 화가 난 나머지 거지가 됐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거지는 말했다. “나는 본래부터 재능이 없는 사람이오. 그리고 재능이 있으면서도 펼 기회를 만나지 못하는 게 어디 한 둘이요? 그것 때문에 화가 나서 불평하고 집을 떠난다는 말이요!”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물었다. “당신은 왜 폭죽 터뜨리는 것을 그리 좋아하오?” 거지가 답했다. “꿈속을 헤매고 있는 사람을 일깨우기 위해서요.” 호기심이 생긴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볼 요량으로 많은 돈을 보시하면 늙은 거지는 말했다. “나는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치 않소.” 몇 문(文)만 챙기고 나머지는 돌려주었다. 어떤 때에는 다른 거지나 길에서 만난 아이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당시 조정은 하루가 다르게 쇠락하고 있었다. 거지는 분개하며 말했다. “재난이 닥칠 거야.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없어.” 그러고는 사라져 버렸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3년 후(1990)에 경자사변(庚子事變)1)이 발생하였다. 이를 보면 그 거지는 분명 보통 거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반청(反淸) 은사가 아니라면 사회 밑바닥에서 생활하였던, 의식이 있는 지사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1901년 9월 7일, 청(清) 정부 전권대표 혁광(奕劻), 이홍장(李鴻章), 그리고 영국(英國), 미국(美國), 러시아〔아라사(俄羅斯)〕, 독일〔덕국(德國)〕, 일본(日本),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오흉제국(奧匈帝國)〕, 프랑스〔법국(法國)〕, 이탈리아〔의대리(意大利)〕, 스페인〔서반아(西班牙)〕, 네덜란드〔하란(荷蘭)〕, 벨기에〔비리시(比利時)〕 11개 국가의 대표가 북경에서 《신축조약(辛丑條約)》 체결)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 청나라 말기에 의화단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운동이다. 청나라 말기에 그리스도교는 서양 군사력을 등에 업고 들어온 종교였다. 이러한 이유로 보수적 관료, 지방의 신사, 농민 모두 반대하였다. 1850년대부터 전국에서 반(反)그리스도교 폭동이 일어났다. 특히 독일의 세력 범위로 사회 불안이 가장 심했던 산동에서는 의화단이라는 종교 결사가 조직되어,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구호로 하여 반그리스도교, 반제국주의 운동을 일으켰다. 의화단이 베이징에 입성한 후 외국 공사관을 습격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8개국 연합군에게 패배하였다. 8개국 연합군은 청 정부를 압박하여 불평등 조약 ‘신축조약’을 체결하였다. 1900년은 중국 달력으로 경자(庚子)년으로 100년 전에 발생하였던 동란을 중국인은 ‘경자국변(庚子國變)’, ‘경자국난(庚子國難)’이라 부른다. 바로 ‘경자사변’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부현일(1939~2022)의 호는 남도(南島),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서 출생했다. 작은 키에 어진 심성을 가진 사람 좋은 아저씨 인상을 가진 화가다. 한국화에서 매란국죽의 사군자를 가르치던 부현일은 마치 서당 훈장처럼 이해심이 많은 인물로 천성이 온순한 성격에다가 제자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하는 제주대 한국화 교수였다. 1964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5년 동안 부산·마산 등지에서 중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1979년 제주대 미술교육과 강사, 1980년 전임강사로 임용되면서 제주대 미술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하였다. 1980년 제주 산호다방에서 제주풍경을 그린 20점으로 첫 개인전을 시작해 2008년까지 7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자연에 대해 진지하고 언제나 외경심(畏敬心)을 가지면서, 실경(實景)에 바탕을 둔 제주의 풍광을 소탈한 필치로 담아내었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제주도립미술관 관장을 역임하는 동안 온갖 이해관계에 따르는 예술 행정가의 쓰라린 어려움을 절감하면서 그 휴유증으로 인해 결국 암과 투병하는 말년을 보냈다. 국내외 다수의 초대전 및 교류전에 출품하였다. 한국미술협회, 제주한국화협회, 정연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2018년 제주원로예술가회고사업 부현일 작품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2021년 8월 지병으로 소길리에서 자연치료를 택해 요양하다가 영면하였다. 장례는 미협장으로 치러졌다. 한 사람의 명예를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다치게도 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 주는 것도 아니고, 많은 오해와 이해관계에 얽힌 채 따르기도 하고 공격하고도 한다. 지위란 늘 그런 바람 앞에 있는 것이다. 부현일의 '한라산 하경(夏景)'(1988)은 한라산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이 잔잔하게 묻어나는 서정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한라산의 여름을 그린 작품인데 부현일이 소박하고 꾸밈없는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청록 산수라는 화풍의 영향은 학창시절 배운 양식으로 한때 유행했던 동양화 작법이기도 했다. 안개로 덮이는 한라산의 자태에서 화가의 온순하고 따뜻한 감정과 기운이 전해지는 작품이다. '서귀포 황우지해안'(1986)은 서귀포 외돌개가 있는 해변인 황우지를 그린 작품이다. '한라산 하경'보다는 2년 전에 그려진 그림이어서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전해온다. 바다와 하늘도, 바위의 표현이나 경관, 사물도 모두 황토의 느낌으로 은은하게 표현되고 있다. 본격적으로 청록산수 스타일로 가기 전의 화풍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강용택(1931~2021)의 호는 녹전(綠田)이며, 서귀포시 대정읍 안덕면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그림을 잘 그려 안덕의 셋슈로 불렸다. 셋슈는 일본의 선승(禪僧)으로 명나라에서 남종화를 공부하고 일본에 처음 남종화를 소개하여 선화(禪畵)를 유행시킨 인물이다. 녹전은 제주공립농업중 4학년을 중퇴, 1950년 3월 국립체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 9월부터 1956년 9월까지 해병대 군복무 중 미술활동을 하였다. 제대 후 1958년 송죽중학교에서 미술강사, 1956년부터 1967년까지 제주전신전화국 무선통신사, 1967년부터 1979년 제주어업무선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9년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장르를 전환하여 4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제주신문 연재 역사소설 삽화를 그렸고, 한국문화예술진흥원, KBS, 기당미술관 초대전 및 다수의 전시회에 참가하였다. 화랑무공훈장 2개, 2007년 재암문화공익상을 수상하였고,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2021년에 타계하였다. 강용택의 '1945년 여름'(1985)은 1945년 여름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한 일본군 병사에게 물을 떠 주는 비바리를 그렸는데 비록 적국의 병사지만 항복하여 본국으로 떠나는 병사에게 테러 대신 우물가에서 물 한 그릇을 떠 주는 가톨릭적 휴머니즘이 배어나는 작품이다. 수묵 담채로 그려진 이 작품은 강용택 화가의 가톨릭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일본군 병사이지만 죄는 군국주의 정치에 있었지 일 개 병사에게 잘못을 물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류의 평화를 해친 일본군이지만 대승적으로 용서를 해주는 인간성이 돋보인다. 허벅을 지고서 우물가에 왔다가 마침 지나가는 패잔국 병사가 물를 달라기에 주는 모습에 기독교 인류애가 깃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