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가 1276년(충렬왕 2) 탐라에 군민총관부(軍民摠管府)를 설치하였다. 이듬해(충렬왕 3)에는 동·서아막(東西阿幕:aimag)을 설립하여 소·말·낙타··당나귀·양을 방목하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파견하여 이들을 감독하였다. 1300년(충렬왕 26)에 동도현과 서도현을 설치하였는데, 대촌현, 귀일, 고내, 애월, 곽지, 귀덕, 명월, 신촌, 함덕, 김녕, 호촌(狐村), 홍로, 예래(猊來), 산방, 차귀 등 15개 현이었다. 이 해에 원나라의 기황후(원래 이 때는 명종의 모후인 유성황후(裕聖王后))가 황실마를 방목하였다. 탐라에는 뱀, 독사, 지내가 많아 만약에 회색뱀을 보면, 차귀신이라고 하여 죽이지 못하게 했다. 고려시대 현촌에 특별한 것은 제주에 없는 동물로 마을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예래현(猊來縣)인 경우 ‘사자 예(猊)’가 있고, 호아현(狐兒縣)은 ‘여우 호(狐)“자를 쓰고 있다. 전승되는 말에 고려시대의 신선사상이 깃들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라산을 지키기 위해 선선의 사는 집은 산방(山房)이고, 신선이 거느린 동물들을 쭉 동서로 배열했는데 지명에 호위 무사인 형제(兄弟섬)와 함께 동물로는 말(馬羅島), 호랑이(虎島:범섬), 사자(猊來), 토끼(兔山), 소(牛島), 뱀(遮歸의 신:원래는 蛇歸라는 설이 있다)을 거느리고 있다. 물론 그럴듯한 민간전승의 상상력이다. 그러나 15세기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맹수가 없다고 했다. 맹수라고 하면 곰, 사자, 호랑이, 늑대 등 사람이나 초식동물에게 사나워서 위협적인 동물을 말한다. 지리학적인 요인 때문에 제주에는 맹수가 없다. 다시 이 기록은 17세기의 문헌 『탐라지(耽羅志)』로 이어지는데, “산무악수(山無惡獸):산에는 사나운 짐승이 없다”라고 하여, 호랑이·표범·곰·승냥이·이리 등 사람을 해치는 짐승이 없고, 또한 여우·토끼·부엉이·까치도 없다고 했다. ‘토산(土産)’ 동물로는 말·소(황소, 흑소, 얼룩소)·사슴·노루·돼지·살쾡이·해달·지다리(너구리)가 있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국영목장이 돼 마·소목장이 성행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세계관의 차이로 동물에 대한 분류체계가 허술하여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누락되었다. 특히 조류는 제주도가 철새 도래지인 까닭에 새의 종류가 매우 많지만, 새들은 아예 언급하지 않고 있다. 까마귀와 백로 정도는 틈틈이 조선시대 시문에 나오기도 하고, 상상의 동물인 용은 바다 용궁의 신이 돼 무소신으로 나온다. 전설의 동물 배도록은 16세기 저서인 『남명소승』에 처음 나온다. 백로에 관한 이야기는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가 영실의 존자암 노승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임제도 이를 기담(奇談)이라고 하면서도 그대로 기록해 두었다. “여름밤에는 사슴이 시냇가로 내려와 물을 마시곤 합니다. 근래 사냥꾼(山尺)이 활을 가지고 시냇가에 엎드려 엿보니, 사슴 무리가 몰려와서 그 숫자가 백 마리인지 천 마리인지 셀 수 없는 지경인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제일 웅장하며 털빛이 흰빛이었습니다. 이 사슴의 등 위에는 백발 노옹이 타고 있었고, 사냥꾼은 놀랍고 괴이하게 여겨 감히 범하질 못했으며 뒤에 처진 사슴 한 마리만 쏘아 잡았습니다. 이윽고 노옹이 사슴을 점검하는 것 같더니 한 가락 휘파람을 불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습니다.” 임제가 기록한 이 이야기가 조선시대 내내 한라산 백록담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돼 백록담의 전설로 자리 잡게 되었다. 17세기 바다 생물로는 바다거북(玳瑁)·조개·앵무조개는 우도와 가파도에서 나고, 사향쥐(香鼠)를 비롯하여 전복·모시조개(黃蛤),옥두어(玉頭魚:옥돔)·은구어(銀口魚:은어)·크고 작은 상어들·도어(刀魚:갈치)·고도어(古刀魚:고등어)·멸치(行魚)·문어와 그밖에 생선(生魚:土着魚種)들이 잡힌다. 18세기 문헌에는 조류도 기록하고 있다. 이형상 저술한 『남환박물(南宦博物)』에 들짐승으로는 살쾡이·오소리·돼지·사슴 등이 있다. 여전히 사나운 동물이 없다는 기록은 앞의 문헌과 비슷하다. 이 문헌에서는 날짐승, 즉 조류를 기록하고 있는데 매·꿩·까마귀·솔개·제비·참새·갈매기·백로·두루미·두견새·앵무새·기러기·올빼미·부엉이 등 14종이 언급돼 있고, 황새와 까치는 없다고 전하고, 대형 어류로는 상어·고래·악어(鰐魚)·수달·해달 등이 있다고 한다.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과거 동물의 역사 기록에는 누락된 것도 있고, 이미 멸종된 것들이 있다. 한라산의 사슴은 지나친 진상으로 조선 말기에 멸종되었고, 지금은 그 자리에 노루가 많이 늘어나 있으며, 멧돼지도 자주 사람들에게 목격된다. 뱀 또한 산과 계곡은 물론 민가에서도 쉽게 볼 수 있지만 과다한 농약의 사용 때문에 밭 주변에서는 보기가 어렵다. 버려진 개들은 야생의 들개로 변해 등산객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고, 마을. 해변, 길가를 가리지 않고 들고양이들이 쉽게 눈에 띈다. 동물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조류이다. 제주도는 새들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새들이 오고 간다. 그런 만큼 계절마다 새들이 다양하다. 제주 토착어로 새들을 통틀어 부르는 용어로 ‘생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날질승은 생이가 된다. 그러나 새를 한 개체로 부를 때에는 생이를 ‘참새’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생이=모든 새'이고, 또한 '생이 하나=참새'가 된다. 제주인들에게 생이는 의미에 따라서 대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일본 학자 모리 타메조(森 爲三)는 제주도 동물을 조사했는데 날개를 가진 동물로는 볼수염박쥐와 대백로, 황로, 큰덤불해오라기, 느시, 찌르레기 등 6종은 미기록이고, 두견새 울음도 들었다고 해서 제주도에 두견새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6종을 합쳐 제주도 조류는 120종이 된다고 했다. 그는 제주도 조류의 특징을 말했는데 조선 반도에는 까치가 많은 데 제주도에는 까치가 한 마리도 서식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까치는 아시아나 취항과 더불어 두 마리 까치를 기념으로 제주도에 가지고 온 것이 화근이 돼 오늘날 제주도에 까치가 늘어나면서 생태계가 교란되고 있다. 모리 타메조에 의하면, 제주꿩은 육지의 꿩과 같은 종이고, 노랑딱새도 육지의 흰눈썹황금새라고 한다. 동백나무가 많은 관계로 동박새와 휘파람새가 극히 많다고 했다. 그는 제주도 조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아비류(阿比類):아비, 큰회색머리아비, 논병아리, 검은목논병아리, 뿔논병아리. 2)전혜류(全蹊類):민물가마우지, 가마우지, 쇠가마우지. 3)노류(鷺類): 흑로, 노랑부리백로, 왜가리, 황로, 대백로, 큰덤불해오라기. 4)압안류(鴨雁類):원앙새,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흑부리오리, 황오리, 알락오리, 청머리오리, 쇠오리, 고방오리, 넓적오리, 홍머리부리, 검은머리흰죽지, 흰뺨오리, 흰줄박이오리, 비오리, 바다비오리, 흰비오리, 큰기러기, 고마가리가네(미상), 흰이마기러기, 쇠기러기, 고니. 5)응로류(鷹鷺類):흰꼬리수리, 검독수리, 말똥가리, 솔개, 매, 황조롱이, 물수리, 6)계류(鷄類):꿩. 7)앙계류(秧鷄類):흑두루미, 재두루미 느시. 8)압천조류(鴨千鳥類):댕기물떼새, 흰목물떼새, 꼬마물떼새, 흰물떼새, 알락꼬리마도요, 중부리도요, 깝짝도요, 삑삑도요, 붉은어깨도요, 세가락도요, 민물도요, 깍도요, 알라도요, 멧도요. 9)구류(鷗類):검은머리갈매기, 큰재감매기, 갈매기, 괭이갈매기. 10)해조류(海鳥類):바다쇠오리. 11)구류(鳩류):멧비둘기. 12)두견류(杜鵑類):두견새, 뻐꾸기. 13)불법승류(佛法僧類):파랑새, 14)어구류(魚狗類):미야마쇼빙(미상), 청호바새, 물총새. 15)악류(鰐類):큰소쩍새. 16)양연류(兩燕類):칼새. 17)탁목조류(啄木鳥類:딱다구리):제주큰오색딱다구리, 제주쇠오색딱다구리. 18)명금류(鳴禽類):팔색조, 큰종다리, 쇠종다리, 붉은가슴밭종다리, 밭종다리, 노랑할미새, 백할미새, 직박구리, 쇠솔딱새, 흰눈썹황금새, 노랑딱새, 큰유리새, 개똥지빠귀, 노랑지빠귀, 흰배지빠귀, 흰눈썹붉은배지빠귀, 바다직박구리, 유리딱새, 딱새, 고무시쿠이(쇠솔새의 일종), 쇠솔새, 산솔새, 떼까치, 붉은배동고비, 동박새, 밀화부리, 휘파람새, 제비, 제주박새, 제주곤줄박이, 제주오목눈이, 큰부리까마귀, 까마귀, 떼까마귀, 찌르레기, 콩새, 장박새, 섬참새, 제주참새, 붉은뺨멧새, 큰오색딱다구리, 제주맥새, 제주굴뚝새 등이 있다. 제주도 파충류(爬蟲類)는 모리 타메조가 처음 조사했는데 7종이 있다고 하는데, 1)석갈류(蜥蝎類):도마뱀, 흰줄장지뱀. 2)사류(蛇類):유혈목이, 대륙유혈목이, 누룩뱀, 실뱀, 살무사. 본도에는 귀류(龜類)에 속하는 거북, 자라가 서식하지 않고 있다. 제주도 양서류(兩棲類) 또한 모리 타메조가 처음 조사했는데 8종이 있다. 제주도롱뇽, 청개구리, 맹꽁이, 두꺼비, 배붉은두꺼비, 개구리, 옴개구리, 산개구리 등이다. 사진가 서재철의 『제주도 새』(2004)에는 텃새와 철새, 나그네 새와, 길 잃은 새로 분류하고 있다. 서재철의 분류에 의하면, 텃새로는 흑로, 말똥가리, 검독수리, 황조롱이, 매, 꿩, 멧비둘기, 흑비둘기, 큰오색딱다구리, 종다리, 직박구리, 때까치, 딱새, 흰배지빠귀, 바다직박구리, 제주휘파람새, 방울새, 박새, 동박새, 멧새, 노랑턱멧새, 어치, 큰부리까마귀, 까마귀, 참새, 찌르레기 등 26종을 소개하고 있다. 철새로는 여름철새와 겨울철새로 분류하였다. 여름철새는 슴새, 해오라기, 검은댕기해오라기, 흰날개해오라기, 중백로, 중대백로, 쇠백로, 붉은왜가리, 왜가리, 황로, 쇠물닭, 쑥독새, 물총새, 청호반새, 파랑새, 후투티, 제비, 노랑할미새, 알락할미새, 칡때까치, 흰눈썹붉은배지빠귀, 개개비, 흰눈썹황금새, 황금새, 노랑딱새, 큰유리새, 삼광조, 꾀꼬리 등 28종을 소개하고 있다. 겨울철새로는 큰회색머리아비, 아비, 논병아리, 뿔논병아리, 민물가마우지, 가마우지, 먹황새, 황새, 노랑부리저어새, 저어새, 큰고니, 큰기러기, 쇠기러기, 흑기러기, 고니, 황오리, 흑부리오리, 원앙, 홍머리오리, 알락오리, 쇠오리,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고방오리, 넓적부리, 발구지, 댕기흰죽지, 검은머리흰죽지, 흰뺨오리, 비오리, 재두루미, 흑두루미, 독수리, 괭이갈매기, 재갈매기, 갈매기, 검은머리갈매기, 큰소쩍새, 쇠부엉이, 물닭, 댕기물떼새, 백할미새, 긴발톱할미새, 황여새, 개똥지빠귀, 떼까마귀 등 45종을 수록하고 있다. 또 나그네새로는 물수리, 흰배뜸부기, 장다리물떼새, 민댕기물떼새, 검은가슴물떼새, 큰왕눈물떼새, 흑꼬리도요, 큰묏부리도요, 마도요, 알락꼬리마도요, 중부리도요, 학도요, 청다리도요, 알락도요, 뒷부리도요, 노랑발도요, 쇠청다리도요, 깝작도요, 꼬까도요, 멧도요, 깍도요, 붉은어깨도요, 종달도요, 흰꼬리좀도요, 좀도요, 메추라기도요, 민물도요, 제비딱새, 쇠솔딱새 등 31종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길잃은새로는 검은머리흰따오기, 쇠뜸부기, 물꿩, 검은머리물떼새, 구레나룻제비갈매기, 홍비둘기, 뮛부리장다리물떼새, 녹색비둘기, 할미새사촌, 노랑머리할미새, 잿빛쇠찌르레기, 검은바람까마귀 등 12종을 소개하고 있다. 정리하면 텃새 26종, 철새는 74종(여름철새 28종, 겨울철새 46종), 나그네새 31종, 길잃은새 12종 등 모두 합쳐 143종이 30년 동안 발로 뛰어 새를 찾아다닌 새들을 소개하고 있다. 제주도 육상동물상은 시베리아 아구와 만주 아구에 속해서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 분포하는 공통의 종들이 많고, 제주도는 동양구에 속하는 종들이 있는데 한라산의 기온 차이에 따른 다른 동물상이 나타난다. 이를 테면 해안저지대나 상록 계곡림에서는 아열대성에 속하는 곤충류나 참개구리, 맹꽁이, 팔색조, 물꿩, 흰날개해오라기와 같은 종들이 나타나며, 한라산 고지대에서는 산굴뚝나비, 가락지나비와 같은, 한대성 곤충류가 서식한다. 특히 이동성이 약한 일부 양서류, 조류, 포유류의 경우는 같은 종이라도 제주도롱뇽, 제주휘파람새, 제주큰오색딱다구리, 제주족제비, 제주동물쥐와 같이 제주 고유의 종이나 아종으로 진화된 동물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제주도가 동무리리적 위치로 인하여 무당개구리, 맹꽁이, 줄장지뱀, 쇠살모사, 누룩뱀의 남방한계선이 되고 있는가 하며, 비바리뱀의 북방한계선이 되기도 한다. 또한 제주도는 이동철새들의 중간기착지, 번식지, 월동지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2008)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그 해 음력 7월 7일에, 여대요의 장 씨 두목이 대련의 흑석초(黑石礁) 밖에서 그에게 즉위 의식을 거행하였다.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낸 후 그가 관할할 27명의 거지 명단을 건네주었다. 그는 ‘재능’이 있었다. 4년여 만에 단동 개방의 위세를 크게 떨쳤다. 그때부터 그는 역에서 잠을 청하지 않아도, 음식점 접시를 핥지 않아도 됐다. 비수 하나와 안테나선을 감아 만든 쇠 채찍 하나에 의지해 호의호식하였다. 구걸을 위주로 하거나 구걸만 하는 기존의 단동 개방의 생계 방식을 크게 바꿨다. 힘들이지 않고 남의 물건을 손에 넣는 방식이었다. 상대에 따라 방법을 바꾸고 구걸하지 못하면 훔쳤다. 개방의 규정을 제정하여 개방을 강성하게 만들었다. 점차 부하 중에 유형이 다른 용장 몇몇을 배양하였다. 예를 들어 ‘법야(法爺)’가 있었다. 50세 전후로 키가 컸으며 약간 곱사등으로 구레나룻이 나 있었다. 발 한 쪽을 좀 저는 귀주(貴州) 출신이었다. 일찍이 동족 형제 한 명과 아미산에서 왕노릇을 했는데 통행인에게 돈을 빼앗은 후 마침 ‘폭력배의 돈을 뺏는’ 무리를 만나 다리 하나가 부러졌다. 반년 후에 길거리에서 구걸하면서 돌아다니며 자신에게 ‘신선이 붙어 다닌다’고 핑계 대면서 재물을 편취하였다. 어느 날, 수백 리나 떨어진 고향의 정부기관에서 사람이 찾아오자 그날 밤에 도망쳐 흑룡강 숲속에서 유랑자 생활을 하였다. 그렇게 10여 년을 지내다 고향이 생각나서 달리는 차에 올라타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차를 잘못 골라 타게 되면서 대련으로 흘러들어갔다. 대련의 작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동향인을 만났다. 여러 해 재난을 당하여 고향의 집안사람들도 타향으로 이주했다는 말을 들었다. 거지 생활을 하고 있던 동향인에 이끌려 단동 개방에 가입하였다. 그는 학문 소양이 있어 글을 알았다. 1년 후에 ‘법야’에 임명되어 단동요 구성원의 활동 상황을 순시하는 책임을 맡았다. 개방 규칙을 어기는 자를 직접 처리할 수도 있었다. 그는 냉혹하고 무정했다. 단동 개방 중에는 규율을 어기는 반도가 거의 없었다. 구걸, 강요, 더듬어 꺼내고, 챙기는 것 모두에 각별히 힘을 쏟았다. 이제 ‘유연한 것’으로 자리를 잡은 자들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미신에 의지하여 사기 쳐서 얻은 방주다. 산동 제남에 스스로 왕 씨라고 하는 거지가 있었다. 기름레드 빛 피부에 새까만 수염을 기르고 한 쪽 팔이 잘린, 우성(禹城) 감리보(甘里堡) 사람이었다. 온종일 막대기를 짚고 큰 포대를 지고서는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저녁에 거지들이 머물고 있는 곳에 가면 기독교의 『요도문답(要道問答)』1)을 꺼내 사람들에게 읽어주면서 설교하고 포교하였다. “교회를 믿으면 정신의 의탁처가 되고 영혼이 구원받게 되나니. 예수께서 선행하고 덕을 쌓으라고 가르쳤나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착한 덕행을 쌓아서 좋은 사람이 되면 영혼은 영생을 얻으리라. 천국에 가게 되리라.”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니, 우리에게 밥을 주고 즐거운 나날을 보내게 해준다는 말이요?”라고 물으면 그는 답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돌아갈 집이 없는 모든 유태인을 동정하셨고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동정하셨나니. 당신이 편안하게 밥을 구걸하면 빛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오. 관건은 좋은 덕행을 쌓는 것이오. 『교의(敎義)·십계(十戒)』에서 말했나니.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언하지 마라, 네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거지들이 머리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할 정도로 간곡하게 포교하였다. 그러자 그의 곁에는 신도가 생겨났다. 자원해 그를 ‘교부(敎父)’로 모셨고 심지어 어떤 때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보기도 했다. 그의 말은 지고지상의 권위 있는 언어가 되었고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었다. 신도들은 고분고분 순종하였다. 본인 자신은? 그렇게 종교 미신을 이용하여, 그 마취제를 가지고 다른 거지 무리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분화되어 나와, 개방 방주와 같은 권력을 누리는 거지가 되었다. 개방 패주의 지위를 획득하는 방법 중 가장 많이 보이는 형태는 유연함과 강함을 동시에 활용하는 것이다. 동북지방의 요충지 심양(瀋陽), 역전 광장 중소인민우의기념탑 아래에 자주 출몰하는 ‘탑 아래 사령관’으로 유명한 개방 두목이 있었다. 후(侯) 씨로 ‘후 장님’〔할자(瞎子)〕이란 별명을 가졌다. 반백의 나이의 현지인이다. 도둑질과 사기로 8년 유기징역을 받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직업이 없이 빈둥거리자 아내는 이혼 후 떠나버렸다. 그는 가산을 탕진하여 거지로 전락하였다. 후 장님은 보잘것없는 모습에 자랑할 만한 기술이라고는 없었지만 현지 개방의 7대 방파를 견고하게 통치하였다. 방파로는 식당을 전전하며 구걸하는 ‘절라(折羅)’파, 강편을 주워 파는 ‘강대괴(扛大塊)’파, 소매치기 조직 ‘노세(老細)’파, 피를 팔아 생활하는 ‘도선(桃線)’파, 여자를 이용해 협박하며 재물을 강요하는 ‘견로(牽老)’파, 푼돈을 구걸하는 ‘노궤(老饋)’파 등등이 있었다. 각 방파에는 자신들의 두목이 있었지만 그 두목 및 구성원은 모두 후 장님에게 공물을 바쳤다. 조금 태만하면 약간의 ‘무서운 얼굴빛’의 꾸지람을 받았다. 그는 노련하고 용의주도한 현지인이었다.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고 폭력까지 행사하였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양수겸장 치면서 현지 개방의 패주가 됐다. 과거에 그는 ‘공안부’에서 임시 노동자로 일하면서 몇몇을 알게 됐었다. 예전에 발행한 노랗게 변한 ‘증명서’를 수중에 보관하고 있었다. 걸핏하면 ‘증명서’를 꺼내어 그 남아있는 위력으로 거지 무리에게 사칭하였다.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관가’에 고발한다고 공언하며 거지들을 겁박하여 절대 복종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요남(遼南)에서 거지 셋이 심양에 갔다가 후 장님을 만났다. 그는 마치 일국의 군주처럼, 현지 토지신처럼 손을 뻗어 ‘효경하는 돈’을 요구했다. 외지에서 온 체격이 우람한 거지 3명이 어림없다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는 ‘증명서’를 꺼내어 사기 쳤다. 상대방이 받아들고서 이리저리 훑어보더니만 흥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런 걸 가지고 우리에게 공갈치는구먼. 이런 장난감은 우리도 본 적이 있소이다. 당초에 우리도 ‘관가’에서 빌어먹은 적이 있구먼!” 후 장님은 상대방이 말 한 마디로 정통을 찌르니, 잠깐 머뭇거리다가 내뱉었다. “너희들 기다려. 내 곧 가서, 가서……, ‘관가’에 가서, 불러올 테니.” 오래지 않아 남색 제복을 입은 사람 몇 명이 노기충천해 달려와서는, 요남에서 온 거지 셋을 둘러싸 두들겨 팼다. 두들겨 맞아 코가 시퍼렇게 되고 얼굴이 부어오른 셋이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상급자인 듯한 사람이 말했다. “가자, ‘관가’로 가서 보자!” “아닙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셋이 함께 용서를 빌었다. 당초에 ‘탑 아래 사령관’이 누구인지 몰라서 무례하게 굴었다고, 후회하고 있다고 애걸복걸하였다. “그래? 법적으로 할까, 개인적으로 풀까?” “개인적으로 하겠습니다. 우리 돈을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셋이 주머니를 털어 100여 원을 모아서 줬다. 어찌 알았겠는가, 후 장님과 서로 짜고 연극한 것임을! 그렇게 되자 ‘탑 아래 사령관’의 위명이 더 널리 알려졌다. 그를 보면 두려워하지 않는 거지가 없게 되었다. 새로 가입하는 거지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먼저 ‘탑 아래 사령관’을 진현하고 ‘후 아버지’로 모셨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Main lines of the Bible』, Goodman, Fred. S (Frederick Simoun)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5년 3월 7일부터 16일까지 제주시 봉개동 ‘아트인명도암’에서 아트스페이스산과 미술평론가 김유정이 공동기획한 <동물의 화원전>이 열렸다. 제주작가 9명의 참여작가에 18점의 작품이 선보였다. 지난 8일에는 오프닝 강연으로 ‘세계의 동물화’가 있었다. 동물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 새로운 생태적 관계가 설정돼야 하는 시대 여섯 번째 멸종의 예견되는 공포의 시대,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애 인간의 미래 시간은 불안하다. 그래서 인류세라는 말이 무섭기만 들린다. 인류세는 산업혁명이라는 편리함과 화려한 빛도 주었지만, 자기 집을 마구 파괴하는 어둠도 안겨주었다. 이제 인간의 벗은 인공지능(AI)으로 변해가고 있다.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연대이지만 앞으로 치러야 할 대가는 예상하는 수준을 넘어설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한 자연계의 동물은 최대의 약자가 되었는데 그들은 오로지 본능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자연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나날이 폐허가 되는 지구 환경에서 그들과 생물의 미래는 너무나 큰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예견이 따른다. 늦었지만 우리에게는 동물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우애는 필요하다. 인간의 희망에 대한 원리가 자연 생물계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위대하고 아름다워 인간이 맘대로 부리거나 처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다섯 번의 멸종을 겪었다. 현재 여섯 번째 멸종 위기 앞에 선 우리의 선택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 위기를 인간들은 크게 뉘우치고 바로 잡아야 하지만 세계는 위기 앞에서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 죄가 없으니 인간이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제주도의 형성 신생대에 한반도 주변에서 일어났던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한다면 약 3000만 년 전인 올리고세 초에 시작된 동해(東海)의 형성이다. 이때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일본 열도가 떨어져 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골짜기에 처음에는 화산암과 육성 퇴적층이 쌓였고, 그 골짜기로 바닷물이 들어와 채워지면서 동해가 탄생했다고 한다. 동해가 탄생하였을 때는 마이오세 초인 약 2300만 년 전으로 이 시기부터 신진기 해성층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지금의 한반도의 모습이 갖춰진 것은 약 2000만 년 전이라고 한다. 제4기(第4期) 하면 통상적으로 빙하시대라고도 하는데 이 빙하시대를 제4기 플라이스토세를 의미한다. 이 빙하시대는 수십 차례 반복된 빙기(氷期)와 간빙기(間氷期)로 이루어지는데 빙기는 빙하가 북반구 중위도 지역까지 확장돼 추웠던 시기며, 간빙기는 빙기와 빙기 사이의 시기로 비교적 따뜻하게 온도가 풀린 시기로 빙하가 고위도 지역으로 물러나 있었다. 제4기는 지구 역사의 마지막 기(紀)로 258만 년 전 이후 지금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제4기는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 Epoch)와 홀로세(Holocene)로 나뉜다. 플라이스토세는 258만 년 전에서 1만 1700년 전까지의 기간이고, 홀로세는 1만 1700년 전 이후 지금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플라이스토세에는 약 256만3000년 동안 빙기와 간빙기가 수십 차례 반복되었으며, 1만 7000년 전 홀로세에는 플라이스토세에 마지막 빙기가 끝난 후에 시작된 간빙기에 해당한다. 우리 인류는 간빙기의 끝을 향해가고 있다. 하나의 시대구분은 자주 바뀌기도 한다. 과학은 새로운 증거와 논증들이 나타나면 당연하게 수정되기도 한다. 플라이스토세의 새로운 분류가 2020년 국제지질과학연맹에서 3개의 아세로 나누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전기 플라이스토 아세(젤라절, 칼라브리아 절), 중기 플라이스토 아세(지바절), 후기 플라이스토 아세(아직 공식적인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제4절’:마지막 빙기 직전의 간빙기)로 정해졌다(최덕근, 지질시대, 2024). 제주도는 넓은 평지의 뻘과 모래로 된 지형의 해중에서 솟아난 섬이다. 섬의 가장 큰 특성은 사방이 물로 고립된 돌출된 땅이며, 한반도 남쪽 비교적 먼 거리에 있다. 타원형 모양으로 제주도가 탄생한 것은 약 188만 년 전이다. 이 기간은 젤라절(258만 년 전~180만 년 전)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제주도의 해수면 깊이는 약 44m~258m이며, 그 하부에는 모래와 점토로 구성된 퇴적층(U층)이 나타난다. 이 U층은 해수면이 가장 낮았던 시기에 육지와 연결되어 있던 제주도 초기의 환경을 보여주는 지층이다.(한국지질자원연구원 외, 2013)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20년 넘게 구걸한 경험을 가진 거지가 말했다. “물고기에는 머리가 있고 뱀에게는 사정(蛇精)〔뱀 모양의 요괴〕이 있는 법이요. 개미에게도 주인은 있고 꿀벌에게도 왕은 있소. 우리와 같은 사람에게도 보금자리가 있고 우두머리가 있소. 기질이 세고 횡포한 사람이 여럿을 통솔하는 것이오. 조 씨, 전 씨, 손 씨, 이 씨, 주 씨, 오 씨, 정 씨, 왕 씨, 가릴 게 없소. 우두머리에게는 한 근 밥을 얻으면 반 근으로 효경하고 빵 한 덩어리를 얻으면 절반 가까이 드려야 하는 거요. 담배는 공손하게 올리고 돈은 늘 드려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매를 버는 거지요. 초짜들은 산과 같이 엄한 법규를 모르지요. 누가 이곳의 주인인지를 모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심해야지. 눈 뜬 장님인가, 보고도 모르면 안 되지. 상대를 보면 눈을 부릅뜨고 성을 내거나 표정이 엄숙하거나 얼굴빛이 위엄이 서려있지. 패왕의 기질이 없다면 왕의 기색을 갖추었지. 그런 사람을 만나거들랑 기민하게 곧바로 달려가서 절해야 해. 어디서 왔노? 그러면, 뒤쪽에 있습니다. 어떻게 대관원에 왔노? 그러면, 저는 못해먹어서요, 얻지를 못해서요, 어른께서 관대히 봐주시고 저를 받아주십시오. 허, 이 녀석 얌전하구먼. 됐어. 날 잘 따르거라. 절대 문제 만들지 말고. 몇 살이야? 38! 됐네. 너를 다섯째로 봉해줄게, 괜찮지? 그래! 물고기는 물을 따라야하고 풀을 흙을 따라야지. 허리 한 번 숙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얼굴하고 담배를 권하며 돈을 바치면, 된 거야. 그의 사람이 된 거지. 이곳에서 밥을 얻어먹고 살 게 되는 거야.”(『중국의 개방 군락』) 그러나 개방 방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왕으로 우뚝 서는 것은 수월하지 않았다. 거지 두목은 한 지역의 토신이나 다름없었다. 평상시에는 지하에 숨어있어야 했다. 적당한 상대, 적합한 기회를 만나기만하면 땅속에서 튀어나와 자신의 권위를 발휘했다. 중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속담이다. “약한 사람은 강한 사람을 두려워하고 강한 사람은 횡포한 사람을 겁내며 횡포한 사람은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겁낸다.” 강호 사회 전통 중 ‘성과’를 얻으려면 문무의 길에서 최소한 하나의 길에 성취를 얻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었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길 수 있다. 어떤 때에는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 횡포한 것,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을 제압할 수도 있다. 당대의 개방 방주는 대부분 유연한 방법(계책)을 가지고 있거나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유연한 방법과 강함을 모두 갖춘 사람도 있었다. 강약을 모두 갖추어 자신의 지위를 확보한 것이었다. 먼저 ‘강한 것’으로 방주 자리에 앉은 경우를 보자. 1986년 12월, 각각 연주(兗州), 서주(徐州), 천진(天津), 덕주(德州) 4곳에서 올라온 거지 5명이 태주(泰州)에서 만났다. 큰 키를 자랑하는 교금성(喬金城), 28세, 빈주(濱州)시 사람으로 당시에 이미 8년 동안 구걸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앞니가 드러나 있는 20세의 장청문(張靑文)은 구걸하기 시작한지 4년이고 안휘 소호(巢湖)지구 여강(廬江)현 금려(金廬)향 출신이었다. 곱슬머리에 귀밑머리가 특색인 17세 한급문(韓及文)과 네모난 얼굴에 큰 눈을 가진 19세 이영규(李永奎) 둘은 장구(章邱)현 문조(文祖)향 삼원(三元)촌 출신으로 6년 동안 거지 생활을 했다. 신체가 다부지고 상고머리에 기질이 난폭하며 경솔하게 지껄이거나 웃거나 하지 않는 산동 사나이 공상옥(孔祥玉)은 곡부(曲阜) 남신(南新)향 왕가장(王家莊) 사람으로 12세 때에 집을 나와 구걸하였다. 사부에게서 치기와 발차기를 연마해 무공을 할 줄 알았다. 완력이 남달랐고 권법에 능했다. 그는 권법과 담대함에 의지해 거지 5명 중에서 ‘노대(老大)’(우두머리)가 되었다. 자신보다 팔구 세나 많은 교금성은 오히려 ‘노말(老末)’(막내)가 되었다. 어느 날, 그들 5명이 작은 음식점에서 우연히 만났다. 교금성이 빵 3개를 얻어서 먹으려는 순간 공상옥이 빼앗아갔다. 교금성이 불복하자 공상옥은 귀를 움켜쥐고 뺨을 몇 대 때리고는 다리걸이1)로 고꾸라뜨렸다. 같이 온 이영규와 한급문은 교금성을 도우려 나섰으나 주먹 한 대를 맞아 뒷걸음질 쳤다. 때마침 들어온 장청문이 중간에 끼어들어 좌우에 읍하며 말했다. “모두 우리 형제요. 할 말 있으면 좋게 말로 합시다. 싸우지 마시고, 싸우지 마시고!” 그때 공상옥이 벽돌 하나를 들어올렸다. 그러고서 다리를 올렸다 내린 후 숨을 내쉬고 힘을 모은 다음 손가락으로 벽돌 모퉁이를 깎자 퍽 소리와 함께 잘려나갔다. 4명은 일시에 제압당했다. 4명은 멍하니 서 있다가 곧바로 무릎을 꿇고 ‘큰형님’ 소리치면서 두목으로 모셨다. 동시에 간단한 규정을 정하고 큰형님이 배정해주는 것에 따라 행동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벌을 받기로 하였다. “방주의 말을 들으면 먹을 밥이 생긴다!” “큰형님에 의지해 쇠같이 단단한 형제애로 뭉친다. 노심할 필요 없다!” 공상옥은 그렇게 해서 거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중국의 거지 군락』) 단동요(丹東窑) 개방의 ‘토야(討爺)’(두목)도 힘으로 방주가 되었다. 그는 현재 37세로, 원래 길림성 농촌의 농민이었다.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다 노잣돈이 없어 도둑질, 강도질 등 1개월에 20여 차례 범죄를 저질렀다. 결국 심양으로 가려고 차를 기다리다 은팔찌를 차고 교도소에 갔다. 1978년, 출옥하니 악명이 자자해져 아내조차 이혼 후 4살 난 아들을 데리고 떠나버렸다. 그러자 그는 하얼빈으로 가서 같이 수감되었던 사람의 지시로 다시 범죄를 저질렀다. 다시 교도소에서 석방되자마자 대련으로 건너갔다. 상황이 좋지 않아 감히 경솔하게 강도질을 못하여 해산물 식당에서 접시를 핥으며 배를 채우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거지 2명이 나타나더니 그가 얻은 접시를 뺏어갔다. 엉키어 한바탕 싸우고 나서 무릎을 꿇렸다. 저녁에, 역 대합실에서 누워 잠을 청하려 할 때 낮에 얻어맞은 거지 2명이 동료 10명을 이끌고 와서 밖으로 나와 ‘맞대보자’고 소리쳤다. 한 판 격전을 벌인 후 그가 승리했다. 같이 온 10여 명의 거지는 무릎 꿇고 ‘어르신’이라 불렀다. 원래 그 거지 무리는 ‘단동요(丹窑窯)’였는데 대련(大連)에서는 세력이 미미해 ‘여대요(旅大窑)’에 귀속되어 있었다. 그렇게 그는 뜻하지 않게 단동 개방의 방주가 되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다리걸이, 소당퇴(掃蹚腿)로 소퇴(掃腿)라고 하기도 한다.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기로 ‘걸이’다. 무술 동작의 하나로, 발로 걸어 넘어뜨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외에 찰각(擦脚) : 앞차기, 척이기(踢二起) : 이단 앞차기, 등일근(蹬一根) : 옆차기, 선풍각(旋風脚) : 다리를 안쪽(시계반대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감아 차는 발차기, 다른 말로는 ‘내합퇴’, 파각(擺脚) : 다리를 바깥쪽(시계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돌려 차는 발, 다른 말로는 ‘파련각’ 또는 ‘외파퇴’, 십자각(十字脚) : 파각의 한 종류, 쌍파련은 발로 양손닥을 차는데 반해 십자각은 한 손으로 발을 친다. 등퇴(蹬腿) : 발바닥으로 상대방 복부를 내지르는 발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50년대 이래로, 개방을 포함한 여러 가지 명목을 가진 봉건의 유물인 항방(行幇)은 중국대륙에서 금지되면서 일시에 소리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 거지나 거지 항방이 야기한 문화 토양, 경제 환경은 사회제도의 변혁에 따라 깨끗하게 없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빈곤과 그에 상응하는 전통문화는 거지를 생겨나게 했다. 그 사회현상을 이용해 범죄 활동하는 거지 항방의 출현은 피할 수 없었다. 당대 중국대륙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랑자 범죄 집단이 된 거지 항방은 부정할 수 없는 폭력조직, 흑사회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없애지 못하면 현실 사회 환경을 오염시키고 파괴하게 될 것이었다. 잠재된, 잠복해 있는 폐해이며 재난이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보도에서 드러난, 조사했던 자료 중에서 당대 중국 거지 항방의 종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여기는 만리장성 이북에 있는 중소형 도시다. 거지들은 각각 ‘점아(點兒)’가 있어 아무렇게나 끼어들 수 없다. 나는 9일을 머물렀다. 거의 매일 거리를 헤매는 ‘흑색의 유령’을 ‘정찰’하러 다녔다. 놀랐다. ‘유령’들의 얼굴에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는 기색을 어찌 전혀 찾아볼 수 없는가? 인원이 거의 고정되어 있고 행동도 규칙적이어서 충돌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안내원이 내게 말했다. 여기에서 구걸하는 거지는 모두 ‘자격’이 있다고. ‘경력’이 짧은 사람은 1년 반 정도이고 ‘경력’이 많은 사람은 칠팔 년이나 됐다고 하였다. 마침내 알게 되었다 : 그곳의 거지는 한 ‘개방(丐幇)’에 속해 있었다. 느슨한 연합 방파였다. 피차 협력하고 이끄는 방주인 ‘대야(大爺)’ 한 명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대야’는 거지가 아니었다. 직업은 개인 경영자로 책을 팔고 있는 노점상이었다. 30여 세가 됐을까, 겉으로는 문약하게 보였으나 내실은 강하고 횡포했다. 무술을 할 줄 알았고 감옥에도 갔다 왔다. 지금은 연간 수입이 1만 원(元)을 넘었다. 그의 수중에는 몇 개의 ‘근거지’(세력 기반)가 있었다. 가로로 놓인 길이 가장 풍부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영지’였다. 그는 ‘근거지’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지만 거지들을 느슨하게 통제하였다. 새로 온 거지는 그에게 큰절하기만 하면 됐다. 그는 그들에게 활동지역을 분배해 주는 책임이 있었다. 현재의 거지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거지들 사이의 관계를 조절하였고 그들의 갈등을 해결해 줬다. 우연히 다른 거지가 재난을 당하고 병에 걸리면 그가 ‘자신의 재물을 내어 의로운 일을 하였다.’ 거지들은 그를 의지했고 신뢰하여 공물을 바치기를 청원하였다. 물론 그가 얻는 것이 그가 보시하는 것보다도 많고도 많았다. 그런 거지 사이의 묵인은 ‘개방’의 법규가 되었다. 월권을 하는 자는 엄격한 제재를 당했다. ‘지역’은 좋은 곳과 나쁜 곳으로 3, 6, 9 등으로 나누어 직접적으로 거지의 수입과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지역 분배는 사람마다의 표현, 경력 등을 기준으로 제때에 조정했다. 급작스럽거나 경솔하지 않았다.(『거지종적(乞丐行踪)』)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쌍성 거치처의 초기 단두는 팔기(八旗) 출신 장상(張祥)이었다. 사람들은 ‘점야(占爺)’라 불렀다. 1914년에 장상이 죽자 그의 수양아들 관복길(關福吉)이 계승하였다. 별호는 관사자(關傻子)였다. 관사자는 익살스런 관상을 가지고 태어났다. 극단에서 단역을 맡을 때에 『법문사(法門寺)』 중의 어린 태감 가계(賈桂)역과 『홍란희(紅鸞禧)』 중의 거지 단두 김송(金松) 역을 연기할 정도였다. ‘점야(占爺)’의 의발을 이어받으면서 현관(縣官)과 상회 회장의 환심을 샀다. 처음에는 괜찮게 거지를 관리했지만 나중에는 갈수록 각박해져서 구타하지 않으면 욕을 해댔다. 모든 거지에게 길거리에 나가 구걸하도록 했다. 그리고 구걸해온 밥과 탕을 먼저 그의 조수에게 검사케 하여 고기나 완자 같은 것을 골라내어 자신이 먹었다. 겨울이 오면 거지 방에 땔감을 제한하였다. 언 방에서 추워서 덜덜 떨게 만들어 설사까지 할 지경이었다. 1917년 겨울, 20여 구의 얼어 죽은 거지 시체를 거지 집에 차곡차곡 쌓아둔 후 얼었던 것이 녹을 때쯤에서야 성 밖 귀왕묘(鬼王廟)의 만인갱(萬人坑) 속에 던져 넣었다. 매장할 때 널을 뽑아냈을 뿐만 아니라 입었던 닳아빠진 의복까지 벗겨냈다. 외지에서 구걸하러 온 거지들은 낡은 사찰에서 야숙을 하는 일이 있어도 감히 거지처에는 가지 않을 정도였다. 10년 후, 관복길이 병들어 죽었다. 그때 전대 단두 장상의 손자 장흥방(張興邦)은 40여 세에 이른 나이였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아편쟁이였다. 장흥방은 상회에 뇌물을 주고 선조의 유산을 이어받아 제3대 단두가 되었다. 그는 관복길보다 더 잔혹하게 거지를 학대하였다. 거지들은 그에게 돈을 벌어주기 위하여 일해야 했다. 만주(滿洲)정부 시절에 격배(袼褙, 헝겊 조각이나 넝마 조각을 붙여서 만든 두꺼운 조각. 주로 천으로 된 신발을 만드는 데에 쓰였다)가 일시에 부족해지자 그는 폐품을 모두 사들여 여러 거지에게 격배를 만들게 한 후 고가로 팔아치워 많은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주택을 수리했을 뿐만 아니라 농지 20여 경(垧)을 추가 구입하여 소작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고리대를 놓아 높은 이득을 얻었다. 1946년 쌍성이 해방군에게 복속되자 당시 거지처에 있던 50여 명의 거지와 소작농들이 한꺼번에 철저한 결산을 요구하였다. 장흥방은 분노한 민중 앞에서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이때부터 3대에 걸쳐 통치한 쌍성의 거지처는 자연스레 해산되었다. 쌍성부 거치처와 같은 그런 관청에서 경영하는 특수한 개방은 일반 오합지졸이 모인 개방과는 달랐다. 지방 관료와 토호가 자신의 이익을 유지하려고 만든 자선 기구였지만 항방을 우두머리의 방법으로 단두를 임용하고 관리토록 하였다. 개방 전통 관습처럼 권위를 상징하는 ‘간아(杆兒)’(타구봉)를 내세워 단두 권력의 상징으로 삼았다. 당시 거지들을 거지 항방에 대한 신비감과 공포 심리를 이용하여 말도 안 되는 사기를 묵묵히 감내하고 사역하는 노예로 만들었다. 실로 ‘고명(高明)’한 거지 정책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런 개방의 패권은 여전히 본바닥 건달과 불량배들이 장악하고 있는 구조였기에 역시 거지 흑사회의 하나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오승익의 그 자리에 있는 마음 작품은 화가 자신의 정신적 가치를 보여준다. 거기에는 작가의 기질이 그대로 나타난다. 기질이란 생태학적이고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특유의 성격을 말한다. 우리는 작품에서 바로 연상되는 의미를 떠올릴 수 있다. 작품에서 첫인상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인상이 전체를 말하지는 않는다하더라도 적어도 그 화면에서 화가의 정신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림에서 보여주는 색채와 형태와 분위기는 그 화가의 형태적 사유와 미학의 지향점을 말해준다. 오승익의 작품에 드러나는 모티프에는 두 가지 감정이 배태돼 있다. 차분한 이성으로 행동을 절제하는 태도가 드러나고, 다른 하나는 잠재된 의욕이 모여서 분출의 순간을 기다리는 고요한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이런 감정들은 오승익 화폭의 몇 가지 특질로 나타난다. 오승익의 한라산의 분위기는 매우 육중하게 다가온다. 적어도 그 산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실재보다 더 많은 무게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 무게는 바로 오승익이 잠재된 삶의 무게라고 할 수 있다. 한라산은 오승익의 마음에 품고 있었던 역사적인 운명의 무게라면, 거기에는 말 못할 가족사가 묻혀있고, 이웃의 아픔들이 스며있어서 거기에서 파생된 삶과 4·3이라는 역사적 고뇌들이 쌓인 심리적 높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술은 어떤 각도로 봐도 고뇌의 산물이다. 그것이 삶 자체의 고뇌이든 그것이 반영된 표현적 고민이든 물감의 색과 마띠에르는 오승익의 내면이 뚫고 나온 표면의 껍질이 된다. 표면에는 상처를 상징하고 있는 흔적들이 있다. 화면에 빠른 붓으로 드문드문 그어진 가로선의 돋을 표현들은 오랜 시간 억눌린채 지나온 상처받은 영혼들의 고함이기도 하다. 무릇 그 흔적의 두께는 그의 숨겨진 역사의 심리상태에 대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승익의 화면은 가로로 분할된다. 네 가지 색으로, 혹은 세 개의 색으로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 유형들을 보면, 먼저 엷은 하늘, 적설(積雪)의 흰색, 초록으로 덮인 아아용암색, 그 아래에는 갈색 등 4단의 공간으로 구분된다. 엷은 하늘, 붉은색과 녹색 3단 화면 공간, 황토색 하늘 녹색의 산맥, 짙은 초록 기슭의 3단 구성, 밝은 황토의 하늘, 붉은 산, 갈색으로 변해가는 녹색의 3단 화면, 그리고 황토색의 하늘, 검어지는 브라운 컬러의 그러데이션 3단 구성 등이 있다. 화면은 대체로 강렬한 보색을 이루면서도 어둡다. 화려하거나 찬란한 색들은 보이지 않는다. 분할된 화면이지만 전체적으로 모노톤의 특성들이 배어난다. 빛의 흐름도 밝음과 어둠이라는 대비가 주를 이룬다. 한라산은 뼈와 살, 아픔과 인내, 고통과 치유, 노출과 그늘, 내면과 표면, 감춤과 드러냄이라는 상징체계가 되고 있다. 그리고 화면에는 누군가 묻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기호처럼 죽은 자의 산담 무덤이 있고, 민군(民軍)의 돌무지 무덤, 천리(遷移:이장)한 무덤이 숨은 듯 있다. 인적이 드문 길 숲 앞에 중심을 잡고 서 있는 나무는 마음에서 삭이면서 살아온 묵시적(黙示的) 존재들에 대한 기념비로 보인다. 한라산은 4가지 색채로 등장한다. 화산의 아아용암색, 식생의 녹색, 계절의 흰색, 그리고 마음의 붉은 색이 그것이다. 아아용암색은 제주를 상징하는 화산의 색으로 불의 색이기도 하다. 검회색의 현무암과 더불어 제주의 몸체를 이루는 섬의 외피가 되는 색이다. 이것이 승화되면서 비로소 붉은색으로 변하게 된다. 아아용암은 태토(胎土)와 같다. 가장 근원적인 시작을 의미하는 원형(原形)인 셈이다. 녹색은 오랜 세월 한라산을 3계절 덮는 현상적 색이다. 녹색은 미묘하게 변하며, 내부적으로 토양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고, 외부적으로는 온도와 비바람의 조건에서 태어나는 색이다. 흰색은 눈이며, 한라산의 외형을 덮는 색이다. 흰색이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한라산의 아픔을 덮으면서 평온을 찾고, 희망을 기다리는 순간의 색이다. 한라산을 덮음으로써 새로운 것들을 기다리게 한다. 하얗게 덮인 산간의 모습은 휴지기의 여유를 보여줌으로써 산도, 사람도, 잠시 숨을 돌리게 한다. 그러나 그 눈 아래, 마음속 선연한 색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관념적 사상 때문에 그 붉은 색을 정치적인 이념이 색으로 도색(塗色)해버린 파시즘의 역사를 묵인해서는 안 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오승익은 다시 붉은색으로 붉은색을 치유하고 있다. 단지 색은 색일 뿐이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있는 사람들의 뒤틀린 의도가 만들어낸 도그마를 용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붉은색은 마음의 색으로 순전히 작가의 정신에서 탄생한 심리적인 색이다. 그 붉은 색은 자극적인 감정 상태에 의해 만들어진 색으로 막힌 가슴을 풀어버리는 색이기도 하다. 인생 자체가 고통의 시작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은 그 고통을 감내할 뿐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통로를 찾지 못한다. 오승익이 유독 붉은색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그 색을 보면 마음이 더 후련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 색의 자극이, 치유를 위해 내 던져진 존재를 새롭게 풀어헤치는 살풀이와도 같은 것이다. 상처를 자극으로 치유하라. 가족사의 아픔을 고백적 외침으로써 맺힌 가슴을 뚫어버리는 행위가 같은 것이다. 붉은색의 고정된 관념을 극복하면서 얻은 평온이 그에게 색다른 기쁨을 안겨주고 있다. 비로소 붉은색은 흘러나오는 식은 색이 아니라 온기를 가지고 돌고 도는 생명의 색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이번 그 자리, 한라산은 지금껏 작가가 집중해온 토르소, 흔적, 치유, 실험이라는 담론의 노정(路程)에 있다. 그 길은 무겁고 오래 걸리기도 했다. 짐을 벗으면 발길이 가볍다.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마지막 프로세스로서 한라산이란 테마를 마감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자리 한라산은 시간의 지층 아래에서 새로운 주제를 떠받치는 또 다른 태토가 돼 줄 것이다. 오승익은 이제 미술교사라는 위치에서 벗어나 전업 화가의 출발선에 서게 됐다. 그 자리, 한라산이 이제는 내 자리 한라산이 돼 그 산에 올라서 멀리 보게 될 것을 기대한다. 시간의 힘은 위대하다. 이제 그는 다른 흔적을 시간과 함께 남겨야 한다. 어머니 산 한라산이 자신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숭고한 이름으로 남을 때까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거지 항방(行幇)은 모두 민간 비밀집단이었지만 예외적으로 관청이 경영하는 개방도 있었다. 옛날 흑룡강(黑龍江) 쌍성부(雙城府)의 ‘걸개처(乞丐處)’가 관방의 개방이다. 옛날에 쌍성부 서남 모퉁이에 부익장(富翼長)이라는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에는 산병홍(傘屛紅) 대문이 있었고 대문에는 금색 문자로 쓴 ‘쌍성부 걸개처’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곳이 청나라 말기부터 민국을 거쳐 만주국 14년(1945)까지 약 반세기 가까운 기간 동안 떠들썩했던 쌍성부 관청이 경영했던 개방의 소재지였다. 외원에는 동서로 곁채 초가집 5동이 있었다. 처마가 낮고 종이 창문으로 돼있는 일명량암(一明兩暗)1) 형태였다. 실내 맞은편에 있던 온돌이 거지들의 숙식처였다. 문을 들어서면 정면의 해청방(海靑房) 5칸이 있었고 동서로 각 2칸이 배치되어 있었다. 모두 기둥과 대들보를 채화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거지처의 단두(團頭)가 머무는 곳이었다. 명의상에는 유랑하는 거지를 맡아 기르는 자선단체라 되어있지만 사실상은 항방(行幇)이라는 수단으로 거지에게 사기 치는 그야말로 염왕전(閻王殿)이나 다름없었다. 거지가 거지처에 들어가면 단두의 부하 아닌 부하, 노예나 다름없었다. 노역 하면서 욕 듣고 매 맞았다. 단두의 권위는 ‘간아(杆兒)’〔타구봉(打狗棒)〕를 가지고 상징으로 삼았다. 2척 길이의, 위에는 검은색, 아래는 붉은색으로 되어 있는 몽둥이였다. 몽둥이 끝에는 가죽 채찍이 묶여있었다. 그것을 근거로 관리가 거지를 관리하면서 관방에서 직접 파견된 특별한 개방 방주가 되었다. 거지의 식량은 화명책(花名冊)을 근거로 매월 상회에서 1인 1두 수수쌀〔고량미(高粱米)〕을 공급했다. 의복은 매년 군경에서 반납, 폐기하는 낡은 의복 중에서 골라 썼다. 땔나무는 성문 4곳에 파견되어 지키는 거지가 성으로 들어오는 땔감 파는 사람의 짐이나 수레에서 뽑아 가졌다. 가장 많은 시기는 한 계절에 수천 다발이나 모을 수 있었다. 단두가 거지에게 버려진 시체나 사형수 시체를 염하고 매장하는 일에 노역하도록 할 때에는 관례대로 상회에서 별도로 비용을 발급하였다. 그러나 그런 수입은 거지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많은 부분을 단두가 개인적으로 착복하였다. 이외에도 단두에게는 매년 음력 정월 15일 대보름날과 부잣집에서 혼례나 장례를 거행할 때에 관례대로 뭉칫돈이 들어왔다. 정월 15일 전후 3일 전통 대보름 기간에 단두는 ‘등관(燈官)’을 맡아 등을 걸지 않은 상점에 벌금으로 양초, 원소(元宵) 등을 받았다. 한 번에 수천 가치나 되는 물품을 걷을 수 있었다. 동시에 ‘등관녀’〔등관양자(燈官娘子)〕로 분장하여 ‘창기의 빚’〔표장(嫖帳)〕을 요구한다며 점포에 ‘구상(求償)’ 명목으로 돈을 요구하였다. 부잣집에서 혼례나 장례가 거행될 때면 단두의 ‘간아’(타구봉)를 문 옆에 걸어두고 거지가 와서 구걸하지 못하도록 했고 그에 따른 하루 노임을 계산해 단두에게 사례금을 납부하도록 했다. 큰일을 하면서 거지를 고용해 의장을 들도록 했다면 단두가 얻는 사례금은 더 많았다. 그러한 수입 대부분은 거지에게는 돌아가지 않았다. 모두 단두의 소유로 귀속되었다. 거지처가 거둔 거지는 상회에서 규정한 음력 매월 초하루, 보름 이틀 동안만 거리에 나가 구걸하였다. 그날이 규정대로 행하던 거지에게 돈을 지불하는 날이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중국 가옥의 방 배치의 하나로 한 동(棟)이 세 칸으로 되어 있으며 외부로의 출입구는 중앙의 칸 ‘당옥(堂屋)’에만 있고, 양 곁의 칸 ‘이옥(里屋)’에서는 중앙의 칸을 통하여 출입하게 되어 있는 구조의 집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양화가 오승익은 제주대 미술학과 강사로 한라산을 주제로 줄곧 작업하고 있다. 마음에 깊이 남은 트라우마를 한라산을 보면서 치유하는 심정으로 가족과 지역 공동체의 삶의 기억을 되새기며. 역사속의 사계절을 마음속에서 흐르는 시간의 흐름으로 인식하여, 마치 허물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속살로 시작하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에게 한라산은 어머니이자 제주의 상징이 되었다. 2025년 1월 22일부터 2월 3일까지 서울 인사동에 있는 제주갤러리에서 개인전 '그 자리 한라산'을 열었다. 그곳이 내 마음이 사는 곳이다 우리는 평생 장소에 귀속돼 산다. 장소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활동공간을 말하기도 하지만 나 자신이 몸소 겪는 자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최소한 한 곳 이상에서 살면서 그곳의 경험을 몸으로 습득한다. 이것은 역사적 경험이라는 실존의 현실적 ‘겪음’을 의미한다. 내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세계가 있는 것이다. 나는 곧 내 몸이라는 시간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현재다. 나의 현재는 나의 모든 과거의 기억과 공동체의 상황적 관계들, 사건, 경험, 그리고, 그것들의 기억을 쌓아놓은 의식 속의 지층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내몸의 현재를 이룬다. 그 현재는 미래에는 도달할 수 없을지라도 그 미래만은 가리킨다, 나는 존재하므로 현실에 살면서 생각한다. 자리(place)는 처소(處所)라는 의미의 곳, 장소를 가리키는 공간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자리는 어떤 대상이 차지하거나, 차지할 수 있는 표면에 있는 공간을 말한다. 또한 자리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거나 작용이 생기는 곳인 현재의 시간에 놓여있거나, 어떤 대상이 있었던 곳으로써 과거의 공간이기도 하다. 또 좁은 의미로써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고, 그리고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위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자리는 시공간을 감싸고 있는 특정한 장소를 지칭한다. ‘그’는 이미 알려진 대상을 가리키는 관형사이다. 그 자리란 꼭 집은 점을 말하는 ‘그곳’으로, 지리학적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다. ‘곳’은 공간의 어느 일정한 점이나 부분을 말하며, ‘그곳’은 그런 특정한 위치를 지명(指名)한 것이다. 여기서는 그곳은 한라산이다. 우리는 평생 많은 것을 가리켜왔다. 방향이란 상징적으로 목표를 나타내기도 한다. 한 사람이 가리키는 방향은 삶의 이유, 살아가는 지향점을 표현함으로써, 거기서 어떤 의미를 찾게 된다. 서양화가 오승익에게 그 자리는 한라산이었다. 하나의 상징인 한라산은 그에게는 인식의 대상이자 직간접적인 역사 경험의 장소가 된다. 한라산은 바다의 피라미드이다. 타원형의 섬 가운데 솟아난 삼각형의 피라미드가 마냥 제주인의 삶 속에서 건져 올린 사랑과 슬픔, 기쁨과 희망, 좌절과 절망마저도 그대로 쌓아 올려버린 섬 공동체의 산이다. 최초로 한라산이라고 한 사료는 1374년 최영이 탐라에서 목호를 토벌할 때 '여러 장수가 한라산(漢拏山) 아래에 주둔하면서 군사들을 쉬게 하였다(諸將屯漢拏山下休兵)'라는 『고려사』 「열전」 최영의 기록에서부터이다. 또 1388년 산방산에 살아서 산방법승(山房法僧)이라고 불렸던 혜일(慧日) 선사(禪師)의 시에 '한라산의 높이가 어느 만큼인가(漢拏高幾仍).'라는 시에도 나오고, 조선 초기 권근의 시에도 '푸르르고 푸른 한 점의 한라산(漢拏山)이, 만경창파 아득한 속에 멀리 있네.'라는 기록에서 보는 것처럼 한라산이라는 지명의 계보를 알 수 있다. 한라(漢拏)라는 말은 ‘은하수를 끌어당길 만한 산’을 말한다. 흔히 한라산을 진산(鎭山)이라고 하여 탐라의 수호신으로 여겼다. 한라산은 바다에서 솟아오른 화산이며, 곧 한라산이 제주도이고, 제주도가 바로 한라산이다. 삶에서의 희망의 원리 세상은 형태이고 색으로 표현된다. 자연이 모든 미의 근원이었으며, 우리의 실체였다. 거기에서 우리는 단지 시간의 길을 헤쳐 나가는 한 점 나그네일 뿐이다. 우리는 그 자연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사회적 존재란 자연에서 살아가기 위해 무리를 지어야만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리 지음이 종국에는 또 다른 욕망의 공포를 만들어낸다. 그 공포에서 나오는 것이 무리 짓고 살아가는 자들의 오랜 역사였다. 역사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의 정치적 행위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관계일 것이다. 자유롭기는 개인처럼 자유로운 것이 없지만, 남과 여의 삶이 가족을 이루면서 살아감으로써 운명공동체가 만들어지고, 거기에 경제적 분배가 수반함으로써 이해관계는 복잡해진다. 부와 빈의 차이란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의 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경제적인 표현으로써 최고의 단계가 전쟁이라는 이름의 약탈과 방어의 수단으로 나타나게 된다. 어쩌면 역사는 전쟁과 평화가 오가는 두 줄의 다리라고 할 수도 있다. 두 다리 사이에서 욕망하는 자들이 벌이는 탐욕과 그것을 인내하는 관계가 역사의 실체일 것이다. 이 두 다리에서 역사는 고민 끝에 개인으로 사는 것처럼 자유로운 삶을 꿈꾼 것이 오늘날 인류가 찾아낸 민주주의 체제일 것이다. 사회는 서로서로 인정하는 관계일 때에만 평화롭다. 인간은 이성적이며, 윤리적이며, 도덕을 판단할 수 있는 정신세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만들어내어 급진적인 상황들을 조절할 수 있는 장치인 법을 만들었다. 물론 법도 다양한 체제의 사회적 스펙트럼을 갖게 된다. 그러나 어떤 체제라도 그것의 목표는 잘 사는 것이며, 안전한 평화를 누리는 삶을 얻을 수 있을 때 그 체제의 존속성이 유지되고 희망의 원리로써 인정된다. 변화하는 자연의 몸, 화산의 마음 약 200만 년에 달하는 한라산의 몸체에도 여전히 자연은 오고 가기를 반복한다. 자연의 본질이 변화에 있지만 결코 무란 없다.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다른 형체에 녹아있어서 그 녹아있는 것이 만물을 이루는 것이다. 만물이 자연의 실체이다. 자연에서는 모든 것이 동등하여 그대로 머무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 길고 짧은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서로 교감하면서 자연히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일어난다. 물과 불, 흙이, 고체와 액체, 기체가 하나인 순환 체계이며,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도 원소의 원자가 된다. 우리의 세계에서 빛으로 표현한 색에서 가장 오래된 색상은 RGB라는 3원색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색은 Red(빨강), Green(초록), Blue(파랑)라는 3원색을 가산혼합한 색으로 구현된다. 이 3원색(RGB) 공간에서는 이 RGB색 모두가 0인 지점에서는 검은색이 되고, 반대로 RGB색 모두가 최대인 지점에선 흰색이 된다. 현재 RGB색은 0에서 255까지 256단계의 색가(color value:色價)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볼 수 있는 색상의 수는 RGB색에서 만들어진 1677만6216(R256xG256xB256)가지가 된다. 색은 빛의 작용으로 감지된다. 자연에서 보이는 만물의 색은 바로 우리 눈이 감지하는 스펙트럼에 의한 색들이다. 우리 눈은 파장이 400~700nm 영역인 가시광선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눈의 시각세포를 통해 들어온 색 정보를 뇌가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리 뇌가 구분할 수 있는 수만 가지의 색의 이름을 말할 수 없으므로 우리 눈이 가장 뚜렷하게 감지할 수 있는 대표적인 3원색만의 머리글자만을 따서 모든 색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한원택 2022). 그러나 색은 빛의 물리적 작용으로 차이를 나타낼 수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색이 감정을 자극한다는 데 있다. 우리가 아는 색의 감정을 보면, 빨강은 뜨거움:정열, 녹색은 자연:상쾌함, 파랑은 차가움:냉정 등으로 상징화되었다. 물론 색은 국가나 지역마다, 혹은 관습과 풍속의 역사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또는 지역 풍토에 따라 표현되기도 한다. 오승익인 경우 제주의 색은 역사와 자연이 함께 숨 쉬고 있는 색으로 인식한다. 붉은색을 보면, 4·3역사의 색으로 인식하거나 화산암재인 스코리아(scoria)와 그리고 갈옷의 색깔을 연상하며, 초록은 한라산의 자연과 밭의 작물을 떠올리며, 파랑은 4계절 변하는 푸른 바다와 산호사(珊瑚砂)의 비취색의 해안을 떠올린다. 흰색은 눈이 덮인 오름과 한라산을, 그리고 갈색에선 잠자는 대지의 평원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색은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과 그 취향을 형성시킨 사회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한마디로 색의 상징들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심리적인 경향성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특히 만물에 밴 색에 따라서 사실적으로 불리는 이름 아래 감정이입을 시킨 경우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하늘색은 파란 하늘에서 비롯되고, 살색은 피부색을 말하며, 살구색, 복숭아색 등 자연물의 색깔을 따오기도 했다. 검정색은 사회적으로 권위와 위엄의 제복으로 상징되거나, 까마귀처럼 흉조라는 의미에서, 혹은 어둠이라는 암흑이 두려워 죽음의 색으로 상징화되어 애도의 색이 되기도 했다. 색은 본래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색과 연결되는 물질 속성의 색채와 사회적인 관념이나 이데올로기적 상징에서 불리기도 한다. 한라산을 지질적인 색으로 보면, 바탕에는 검은색과 적색, 변화된 갈색, 청색 등 돌이라고 하는 매재가 있으며, 기후 조건에 따라 그 위를 덮는 4계절의 변화무쌍한 생태 자연의 색과 더불어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계절의 색이 있다. 그러나 화가 자신의 색은 자신의 환경적 조건에서 자기의 역사적인 경험과 성장 과정에서 받아들인 삶의 인상을 투사한 색의 감정으로 표현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이외에 그들은 또 길거리 쓰레기를 청소하거나 관방 측간의 똥오줌을 치우고 길거리에서 죽은 시체를 치우는 일도 담당하였다. 화재 등 자연재해에 대처하는 책임도 졌다. 1918년 포두 지역에서 흑사병이 유행하여 3000여 명이 죽었는데 그들이 책임지고 시체를 성 밖으로 옮긴 후 화장하였다. 죽은 시체를 피하려 할 때에는 그들이 나서서 운반하여 매장하고 검시관의 검시를 돕기도 했다. 주인이 없는 사형수의 시체가 있을 때에는 그들이 옷을 벗겨내고 깨끗이 빨아 헌 옷 파는 노점상에게 팔았다. 심지어는 시체에서 심장이나 뇌를 꺼내어 약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다. 평상시에는 공업계, 상업계의 노동조합이 양산에게 일상용품이나 노임 등을 공급하였다. 매년 사대 명절이 되면 여러 상점에서 그들에게 따로 선물을 보냈다. 그 외에도 ‘부수입’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분수에 만족하여 본분을 지키면서 입에 풀칠하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양산을 삶을 돌보아주며 평생 의지할 수 있는 집단으로 여겼다. 그러나 양산에 가입하면 항방(行幇) 규칙을 반드시 따라야 했다. 일반적으로 업종을 바꾸어 다른 일을 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항방의 비밀도 엄수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각 거리에 밀정으로 파견된 거지가 제때에 양산으로 돌아가 상황을 보고하지 않으면 ‘괴정(拐挺)’으로 죽도록 얻어맞았다. 봉건주의 가부장적 통치방식을 따르는 항방에서 때리거나 욕설을 퍼붓는 것은 일상사였다. 흉년이 들면 사회 기부금과 관방의 구제 물품 대부분은 양산의 우두머리가 중간에서 자신의 주머니를 채워버렸다. 최전성기 때에는 우두머리가 첩을 두기도 했고 주방도 두어 개가 있는 집에서 살기도 했다. 산서방(山西幇)의 은행업계가 자금 유통이 원활하지 않는 기간에는 이자를 갚으려고 양산의 우두머리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다. 20년대 전후로 양산의 많은 사람이 가로회(哥老會)1)에 가입한 후에 토비로 전락하면서 다년간 ‘사인구’에 똬리를 틀었던 흑사회였던 개방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다가 4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와해되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가로회(哥老會), 청(淸)나라를 몰아내고 명(明)을 부활시킬 목적으로 활동한 비밀결사 조직 중의 하나다. 18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의 통치력이 점차 쇠퇴하자 궁핍한 농민이 서로 돕고 보호하기 위하여 만든 일종의 투쟁 단체였다. 처음에는 농민끼리 모여 부자를 타도하고 명나라의 대의를 따르는 것으로 시작했으나 차츰 정치적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그 뿌리는 명나라가 쇠약해지고 청나라가 일어설 즈음 청나라에 맞서 명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결집한 비밀세력인 홍문(洪文)이었다. 홍문에 뿌리를 두고 일어났던 비밀결사조직으로는 가로회, 백련교(白蓮敎), 의화단(義和團) 이외에도 천지회(天地會), 배상제회, 삼합회(三合會), 홍화회(紅花會), 삼점회(三點會), 첨제회(添弟會), 소도회(小刀會) 등이 있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내몽고자치구에 속해있는 포두(包頭, 바오터우)의 옛 시가지역 초시가(草市街) 북쪽에 ‘자인구(慈人溝)’라는 지역이 있다. 근 반세기 이전에는 그 지방을 ‘사인구(死人溝)’라 불렀다. 본래 관을 놓아두던 곳이었다. 많은 거지가 그곳에 구멍을 파서 모여 살았다. 그래서 점차 포두의 유명한 빈민굴로 변했다.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에 그곳에 범인을 잠시 구류하는 ‘흑방(黑防)’이 있었다고 전한다. 포두(包頭)에서 체포한 범인과 오원(五原), 동승(東勝), 싸라치(薩拉齊) 뒷산 지역에서 압송해 온 범인은 모두 그곳으로 이송하여 구류했다가 다시 싸라치의 큰 감옥으로 호송하였다. 포두의 흑사회 조직 ‘양산(梁山)’의 대본영 ― ‘충의당(忠義堂)’ ― 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양산(梁山)’이라는 말은 ‘쇄(鎖)’와 ‘리(里)’ 양 가문의 병칭이다. 어김없는 깡패 집단이었다. ‘쇄가(鎖家)’는 건륭 연간에 귀화성(歸化城) 공주부(公州府)에서 야경을 돌던 마삼홍(馬三紅)과 농사를 짓던 진사해(秦四海)가 창립했다고 전한다. 명나라 영락제 주체(朱棣)를 조사(祖師)로 모셨다. 마 씨, 진 씨 가문의 인원은 모두 취고수(구식 혼례나 장례식을 할 때의 악사)와 교자꾼이 골간이었다. 그들의 정상적인 생계 방식은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끌어 모으는 것이었다. 각자 활동 근거지가 있었다. 근거지를 ‘방장(方場)’이라 부르고 어느 누구도 그 경계를 넘지 못했다. 예를 들어, 포두 ‘쇄가’의 방장은 동으론 사르친(莎爾沁)진, 서로는 마지(馬池)진, 북으로는 석괴구(石拐溝), 남으로는 대수만(大樹灣)까지였다. 이것이 홍방(紅幇)의 ‘반청복명(反淸復明)’〔청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움〕 의식이 유래한 항방이다. 이렇게 추측한다. “당시 옹정 황제가 자기의 통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방회(幇會)의 ‘반청복명’의 민족혁명역량을 약화시키고 그의 종실과 가권에게 자기 의견을 알려 반대 되는 두 개의 하층 사회집단을 따로 조직하면서 분화되고 와해되었다.”〔유영원(劉映元)〕 ‘리가(里家)’의 우두머리는 처음에 북경성 팔기 중에서 가난해진 왕야(王爺) 여덟이라고 전한다. 나중에 장(張), 고(高), 한(韓) 3문으로 나뉘었다. 리가의 성원은 모두 거지였다. 「연화락(蓮華落)」을 연주하거나 「수래보(數來寶)」를 부르며 구걸하면서 곳곳을 돌아다녔다. 범염(范冉)〔범단(范丹)〕을 조사로 모셨다. ‘쇄(鎖)’, ‘리(里)’ 양대 가문은 힘을 확대하려고 ‘양산(梁山)’과 합쳤다. 쇄 가의 각 고방(鼓房) 단장 중에서 양산의 우두머리를 천거했기에 ‘충의당’은 해당 고방에 설치했다. 문 앞에 ‘대행(大行)’이라 쓴 호두패(虎頭牌)와 소가죽 채찍을 걸어두었다. 당에는 ‘쇄’, ‘리’ 두 가문의 조사를 모셨다. 우두머리가 밖을 나서면 호위가 따랐다. ‘괴정(拐挺)’이라 부르는 나무 몽둥이로 권력의 상징으로 삼았다. 평상시에는 괴정을 조사의 신탁 위에 놓아두었다. 그것을 이용하여 항방의 규칙을 집행하여 장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양산의 권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쇄가의 손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평소에 리가의 거지는 모두 주어진 세력 범위 내에서 구걸하였다. 자기 구역이 아닌 곳에서는 잔치나 장례식이 있어도 동냥할 수 없었다. 현지에서 일반 집안에서 큰일이 생길 때에는 양산 사람을 청해서(실제로는 고용) ‘준문(蹲門)’, 즉 대문을 지키고 거지들이 오지 못하게 막았다. 하루에 은화 1원이었지만 떠날 즈음에는 구걸하지 못하고 양산에 남아있던 거지에게 1원을 더 얹어 주었다. ‘준문’하는 거지와 리가 거지는 고장(鼓匠) 막에서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었을까?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탁상에 앉을 수 없습니다. 양산의 규칙을 어기게 되니까요.” 양산의 거지는 어떤 때에는 점포 취사장에게 탄 재를 퍼내주거나 개숫물을 버려주거나 하면서 남은 밥을 얻어먹었다. 생일, 회갑, 개업, 이사, 승진, 연말에 해당 집에 가서 축하노래를 불러주면 신선한 술과 음식을 얻을 수 있었다. 저녁이 되면 사인구로 돌아가 아편을 흡연하는 거지가 많았다. 평상시에 길거리에서 구걸할 때도 리가의 사람은 어렵지 않게 동냥할 수 있었다. 리가는 토비와 암암리에 결탁해 있었고 관부의 밀정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거지들에게 미움을 사서 재난을 초래할까 두려워했다. 다시 말해 양산 현지는 안팎이 결탁되어 있었다. 그들은 관부에 도적을 체포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훔친 물건이나 돈을 도적과 나누었다. 외지에서 포두까지 도망쳐 온, 죄를 지은 도적은 먼저 양산에 가서 등록해야 했다. 야간에 도둑질하는 거지는 ‘빨간 줄 뛰는 자’라 불렀고 낮에 도둑질 하는 거지는 ‘청색 줄 뛰는 자’라 했으며 아침과 저녁에 도둑질하는 거지는 ‘등미(燈謎)놀이1) 하는 자’라 불렀다. 야간에 도둑질할 때 망을 보며 휘파람을 부는 거지를 ‘막대에 올라간 자’라 불렀고 집에 들어가 도둑질하는 거지는 ‘못에 뛰어는 자’라 했다. 장물을 나눌 때에는 후자가 전자보다 많이 가졌다. 낮에 도둑질하는 거지는 일반적으로 4부류로 나뉘었다. 상점 소매를 터는 거지를 ‘고매(高買)’라 하고 시장 행상인을 터는 거지를 ‘노점을 쓸다’라고 불렀다. 농민의 수레, 나귀바리를 터는 거지를 ‘바퀴 굴린다’라고 하고 큰길의 행인을 터는 거지를 ‘자루 집다’라고 했다. 등록된 여러 도둑질은 이 중에 하나만 할 줄 알면 되고 양산이 지정한 지역을 벗어나서는 안 됐다. 그렇지 않고 규칙을 위반하다가 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에게 발견되면 윗선에 보고되고 양산에서는 곧바로 사람을 보내 체포했다. 경범(예를 들어 초범)이면 곤장을 맞는 선에서 끝나지만 누범자는 사라치(薩拉奇)의 큰 감옥으로 보내졌다. 도둑이 현지에 발을 붙이려면 반드시 양산 기준에 맞는 약속을 받아들여야 했다. 도둑질한 장물은 3일 이내에는 마음대로 처분해서는 안 됐다. 잃어버린 물건이 지방 세력자의 것이면 양산에서 분실물을 찾아내어 돌려줘야하는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물을 판 후에는 30%를 꼭 양산에 헌납해야 했다. 이후에 우두머리가 경찰과 개인적으로 나누어 가졌다. 양산에 속한 거지 중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권법이나 봉술을 하는 사람, 본바닥 불량배 등 사회에 해를 끼치는 인간들은 다 모여 있었다. 당시의 공업계, 상업계, 경찰도 그 강호 세력이 현지 치안을 유지하는 것을 기꺼이 이용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밤에 포두 전 지역의 순찰과 야경을 책임졌다. 밤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행인을 단속하고 심지어 체포할 수도 있었다. 성을 지키는 병사가 도박하려고 성 밖으로 나갈 때에는 성문의 열쇠를 그들에게 맡기기도 하였다. 그들도 야간을 이용해 성문을 열고 행상의 통행을 허가하면서 이익을 취하기도 하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등미(燈謎), 타호아(打虎兒), 문호(文虎)라고도 하는데 음력 정월 보름이나 중추절 밤, 초롱에 수수께끼의 문답을 써넣는 놀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에 북경의 ‘강방(杠房)’ 업종은 한때 흥성하였다. ‘강방’이란 전문적으로 장례(葬禮) 의장(儀仗)을 세주는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관을 덮는 수놓은 단자 덮개, 의장대용의 길을 여는 징, 우산, 부채, 깃발, 패, 수레, 가마 등을 빌려 주었다. 그와 동시에 의례하고 관을 메고 의장을 드는 인원을 대신하여 고용하기도 하고 관을 짜는 데에 필요한 목재 등 필요한 물품을 대신 구매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강방은 장례를 청부 맡아 처리하는 전문 직업이었다. 관을 메고 의장을 드는 것과 같은 막일은 비록 당시에 대단히 중히 여기는 의식 중 하나였기는 했지만 결국은 비천한 일에 속했다. 그래서 거지에게 임시로 일하여 돈 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때의 품삯은 행하(行下)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방에 교부하는 금전을 빼더라도 평상시에 구걸하는 금전보다도 많았다. ‘효자(孝子)’에 충당되어 길을 따라가면서 지전을 뿌리기도 했다. 그래서 강방은 또 ‘화자두(化子頭)’라는 명칭이 붙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실제로 북경의 이른바 화자두는 몇 푼 안 되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었다. 북경에서 과거에 푼돈을 구걸하는 것은 대부분 외지에서 온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겨울이 되면 올라와 적은 돈을 구걸해 갔다. 봄철에는 고향으로 내려가 목돈을 벌 수 있었다. 진정한 북경 토박이 화자두는 패거리를 이루어 대놓고 구걸했다. 그러한 사람들을 ‘간상인(竿上的)’이라 통칭했다. 노동력을 팔려고 하면 개인은 방법이 없었다. 항방에 가입해야 했다. 먼저 ‘간자(竿子)’에게 절하고 ‘간상(竿上)’에 가입해야만 나중에 일이 있으면 일을 맡겼다. 돈을 벌면 먼저 일정한 비율을 떼야했고 동시에 우두머리가 명령하면 반드시 따라야 했다. 민국 이후에 ‘간상인’의 세력은 다소 감소하기는 했지만 강방의 업종에서 행했던 관을 메는 사람과 의장을 드는 사람은 여전히 구시대의 유풍이 되어 행해졌다. 현 중국이 성립한 이후에야 정부는 그런 노동인민을 조직하여 장례업 공회에 가입시켰다. 일이 있으면 돌아가면서 출근하고 함부로 할 수 없도록 했다. 노임도 강방과 협상한 후에 결정하였다. 나중에 그런 사람들은 모두 정식적으로 기중(忌中)조직에 가입하였다.”〔장관정(張官鼎)〕 옛날에 북경의 강방(杠房) 업종을 ‘화자두(化子頭)’라고하기도 했는데 항상 거지를 고용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거지를 고용하면 현지 거지 항방과 왕래해야 했다. 그래야 아무 때나 필요할 때 어려움 없이 고용이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정한 범위 내에서, 일정한 정도에서 필요한 지역 질서를 유지할 수 있어서 경영 과정 중에 생기는 의외의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모두 거지 항방 세력을 빌려야 가능한 일이었다. 중국문화가 쌓여온 과정을 보면 여러 가지 항방은 선천적으로 탄생 시기부터 봉건 색채가 침투되어 있다. 거지 항방은 직업이 없는 유민으로 이루어진 오합지졸이라, 유랑민 의식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크고 작은 흑사회(黑社會, 폭력조직) 단원이기도 했다. 이것이 중국 거지 단체가 타락하고 변질된 기본 이유 중 하나였다. 항방은 관방이나 토비와 결탁하여 서로 이용하고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다하며 불법 세력(조직)이 되었다.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 즉 50년대 이전에 불법조직이 된 거지 항방은 계속해서 나타나고 활략하였다. 심지어 8,90년대에 이르러서도 범죄 집단이 된 거지 항방 세력이 또다시 대두하여 해악을 끼치기도 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