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丐幇)은 거지의 동업조직 항방(行幇)1)이다. 일종의 민간직업 집단형태로 출현한 민간 비밀 사회조직 형태다. 거지라는 특수한 직업을 기초로 형성된 조직으로 일반적인 방회(幇會)2) 단체의 성격을 갖추고 있다. 당나라 때 가공언(賈公彦)은 『주례·지관·사장(肆長)』에서 “사장(肆長)은 각각 그 시장의 정령을 관장한다.”라는 문장의 ‘소(疏)’에 말했다. “이 사장(肆長)은 1사(肆, 가게)에 1장(長, 우두머리)을 세워 1사의 일을 검사 대조하게 하였다. 지금의 행두(行頭)〔행수〕와 같다.” 항방은 우두머리를 세워 외부조직을 구성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사장(肆長)’은 관방의 행정관리 구성원에 속하는 것이다. 민간의 동업조합(guild)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요 동업조합이 출현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개방’은 민간 직업단체, 비밀 사회조직이라는 이중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2개의 대립된 사물은 하나로 융합’되지 않던가. 민간 직업집단의 동업조직 형태로 형성된 시기는 송나라 때이다. 송나라 사람 차약수(車若水)의 『각기집(腳氣集)』의 기록이다 : 금릉에서 상민에게 행원(行院)이 있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 찐빵을 파는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이나 다른 지역에 자금을 주지 않았다. 찐빵을 파는 여러 집에서 함께 모여 시장을 빌렸다. 어떤 사람은 취사도구를 보내고 어떤 사람은 자금을 보내고 어떤 사람은 면류를 보냈다. 필요한 것은 다 있기에, 호인행원(護引行院)이라 했다. 조금도 거리끼는 마음이 없었다. 여기의 ‘행원’이라는 용어가 바로 당시에 여러 공업이나 상업 업종의 ‘항방’을 부르는 명칭 중 하나였다. 송나라 때에는 축국(蹴鞠)놀이가 성행하였다. 이에 따라 한때 ‘원사(圓社)’, ‘제운사(齊雲社)’ 등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오락장소가 있었다. 축국과 같은 구예(球藝)를 가지고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의 업종도 있었다. 송나라 사람 주밀(周密)의 『무림구사(武林舊事)』 권6 『제색기예인(諸色伎藝人)』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항주(杭州)에 황여의(黃如意), 범노아(范老兒), 소손(小孫), 장명(張明), 채윤(蔡潤) 등 명성이 자자한 ‘축국’ 예인이 있었다고 한다. 민간 동업조직의 또 다른 두드러진 상징(표지)은 상응하는 내부 교류용 은어 ― 항화(行話, 직업은어)가 있었다는 점이다. 송나라 때 왕운정(王雲程)이 편찬한 『축보(蹴譜)』 중의 「원사금어(圓社錦語)」는 당시 ‘원사’ 내부에서 유행하던 은어의 한 부류다. 중국에 있어 결사(結社)의 방회(幇會) 형태는, 멀리 원나라 때의 농민봉기와 초기 민간 종교 흥기 때의 비밀 단체부터, 근대에 한때 극성하였던 청홍방(靑紅幇)에서 그 원류와 궤적을 찾아볼 수 있다. 거지의 동업조합 조직은 상술한 두 가지 민간 사회단체 조직의 형태가 혼합, 파생되어 나왔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항방(行幇), 옛날에 도시 상인, 소수공업자, 기타 노동자의 직업 혹은 지역 관계로 결성된 작은 단체를 가리킨다. ‘trade association’라 할 수 있다. 동업 조합, 동업자 단체인데, 여기에서는 ‘동업조직’이라 한다. 2) 중국에서 지하 조직을 ‘흑사회(黑社會)’라 부른다. 이 지하 조직은 중국 사회 곳곳에서 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흑사회는 ‘대규모 조직(幇)을 가진 범죄 집단’을 의미한다. ‘흑방(黑幇)’, ‘방회(幇會)’, ‘방파(幇派)’로 불리기도 한다. 중국 공안부의 내부 자료에 따르면, 90년 중국 내에는 5백여 개에 이르는 흑사회 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조직의 강령과 지방 활동 계획을 가지고 일부 지방 도시 또는 농촌에서의 활동을 조종하는데 이를 위해 막대한 자금과 차량, 심지어 무기도 갖추고 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무훈은 가르치는 데에 소홀리 하는 선생이 있으면 찾아가 무릎 꿇고 사정하였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학생이 있으면 찾아가 오랫동안 무릎 꿇고 충고하고 타일렀다. 성과가 있는 학생이나 선생에게는 여러 사람 앞에서 무릎 꿇고 감사를 표시하고 포상하며 장려하였다. 그가 의학 자금 모금에 다소간 희망이 생겼을 때 도박 빚을 진 친형이 찾아와 도와달라고 하였지만 무훈은 한 푼도 나누어주지 않았다. 관(冠)현 장팔채(張八寨)의 효부 진(陳) 씨가 밤샘 바느질로도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구걸하면서 시어머니에게 효양한다는 말을 듣고서는 아끼지 않고 10무의 토지를 증정하였다. “이 사람 훌륭해, 훌륭해. 10무 토지를 줘도 아깝지 않지. 이 사람 효부야, 효부. 토지 10무를 줘서 노인을 봉양하게 해야 돼.” 그가 구걸한 돈의 절대 다수는 의학을 창설하는 데에 썼다. 의학 창설이 성공한 후에도 무훈은 여전히 유랑하고 걸식하며 살았다. 잠은 사찰에서 잤다. 학생들이 찾아가 무릎 꿇고 학당에 거주하라 애걸할 때에도 그는 말했다. “착한 사람들이 돈을 희사한 거야. 내게 의학을 세우라고 한 거지. 가난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라고 한 거야. 나를 위하여 그것을 써버린다면 착한 사람들을 속이는 거와 다름없어. 양심에 위배되는 일이지. 나는 그런 일은 절대 할 수 없어. 그리고 나는 즐겁게 살고 있어. 아무런 근심 걱정 없어. 너희는 돌아가서 열심히 공부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가난한 아이들이 공부하고 글을 읽을 수 있다면 그의 숭고한 이상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세상에 더 이상 그것보다도 즐거운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무훈이 그랬다. 광서 22년(1896) 4월 23일 새벽, 59세였던 무훈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영락하여 유랑하고 걸식하며 교육 사업을 일으킨 일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학생들은 방성대곡하였다. 당읍(堂邑), 관도(館陶), 임청(臨淸) 3현의 관리와 신사 모두 장송하였다. 장례에 참석한 각 현의 향민은 2만 명이 넘었다. 광서 30년(1904), 무훈이 죽은 지 8년이 되는 해에, 신임 산동순무 원수훈(袁樹勛)은 무훈이 생전에 구걸하며 교육 사업을 일으킨 고행과 의거를 사실대로 조정에 상신하였다. 국사관(國史館)에서 전기를 쓰고 ‘충의전사(忠義專祠)’를 건립하도록 주청하였다. 이후 무훈이 구걸하며 교육 사업을 일으킨 정신에 영향과 감화를 받아 중국 내에 계속해 많은 학교가 세워졌다. 당읍현에서는 사범강습소를 무훈중학으로 개편하였다. 무훈의 족형제의 손 김동(金棟)이 기부해 관도, 관현에 각각 무훈고급소학을 건립하였다. 풍환장(馮煥章)이 태안(泰安)현과 안휘 소현(巢縣)으로 나누어 각각 무훈을 기념하는 소학교를 20여 곳에 창립하였다. 단승무(段繩武)는 수원(綏遠) 포두(包頭) 일대에 독립적으로 기부해 무훈을 기념하는 소학교 20여 곳을 지었다. 이외에도 많은 지역이 무훈의 영향을 받아 소학교를 세웠다. 그해 무훈이 임청현 신사 시선정(施善政)의 찬조아래 창설한 ‘어사항의숙(御史巷義塾)’에서 교편을 잡은 사람이, 학문과 품성이 모두 훌륭한 왕비현(王丕縣)이다. 무훈이 죽은 후 왕비현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금을 했다. 무훈 생전에 창설한 3개의 의숙 중 가장 작았던 어사항의숙을 규모가 가장 큰 교육시설로 만들었다. 왕선생 본인은 1933년 80여 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의숙의 돈 한 푼을 개인적으로 쓴 적이 없었다. 그렇게 하면서 아내의 이해와 지지를 받지 못하자 깨끗하게 관계를 끊었다. 왕선생은 조상이 전해준 비방을 팔아서 입에 풀칠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후인들은 그를 ‘제2의 무훈’이라 불렀다. 실로 무훈이 생전에 간청하고 중탁한 것을 성실히 실행했으니, 동지라 해도 부끄럽지 않다. 무훈은 평범한 거지가 아니었다. 일반적인 고아한 사인도 아니었다. 그의 인품과 덕성은 사림의 많은 사인과 한데 섞어 논할 수 없다.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가는 위험해진다. 교육 사업만 그러한가. 어떤 사업을 하든지 간에 실제로 무훈과 같은 정신이 필요하다. 명리를 추구하지 않고 용감히 헌신하며 추구하는 바를 견지하는 정신과, 몸소 체험하고 힘써 실천하는 행동이어야 한다. 나라와 사회를 위하여 온 힘을 다하다 죽으면 그만이다. 죽을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면 될 일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아사와 거지의 각종 일사기문은 중국문화의 내부에 사인문화와 하층문화 사이의 계층(계급)을 넘어선 교류를 반영하고 있다. “네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네가 있다.” 라는 말처럼 한 몸이나 마찬가지다. 변이를 두루 겪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 한 몸처럼 함께 스며들어 있다. 그 실질을 강구해보면 인생의 지향, 품격 정조, 그리고 사회의 처지가 두 계층 문화를 교류하게 만드는 기본 축이다. 그 계층 간의 문화 교류가 지극힌 제한적이고 영역이 비교적 좁지만 중국문화사에 독특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일정한 수준에서 아(雅)문화와 속(俗)문화 사이의 인위적인 역사의 한계를 타파하였다. 서로 영향을 주었고 서로 같이 스며들어 있다. 그렇게 중국문화의 발전과 사회 발전을 촉진시켰다. 동시에 사회·역사·문화 중 여러 분야의 인물의 세태, 사회 면모, 사회 현상, 심리 상태를 고찰하고 분석하는 데에 별천지와 같은 관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3. 중산간이라는 말의 기원 ‘산간(山間)지대’라는 말은 『삼국사기(三國史記,1145(인종 23년)』 「고구려본기」에 보이고, ‘산간(山間)’은 중국 당나라 정사(正史)인 『구당서(舊唐書, A.D.940)』에도 나오는 매우 오래된 용어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높아 수려한 지역이어서 산지(山地)가 발달해 있어서 페르낭 브로델(P.Braudel)의 말마따나 “산지의 사람들은 넓고 소통이 힘든 공간 속에 파묻혀 있어 대개 경작이 불가능하든지 혹은 아주 힘들어서 문명의 재건에 필요한 접촉과 교환이 어렵다”라고 했다. 그런 곳에서는 삶에 필요한 핵심 물품들을 모두 자체 조달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와 문명, 경제는 모두 후진성과 빈곤함을 면치 못했다는 것이다. 제주도의 산지(山地)는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한라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지만 산지의 규모가 크지 않고, 사면이 바다인 관계로 해안마을이 발달하였으며, 그 한라산과 해안 사이에 초지(草地)와 곶(藪: 2000년대 이후 곶자왈이라는 신생어로 사용)이 형성돼 있어서 고려시대 몽골점령기에는 목장을 동·서 아막의 행정에 의해 운영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삼읍으 10소장 체계로 나누어서 목장지로 활용되었다. 과거 제주도 ‘준(準)산간지대’라고 할 수 있는 웃뜨르에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대륙침략을 위해 1937년부터 축산개발사업을 실시하여 중산간 일대에 100여 개소의 공동목장을 설치한 바 있다(강경선;1998).' 당시 일본제국주의는 비단 말과 소만이 아니라 돼지·닭·양 등 전쟁에 필요한 식량 군수자원이면 모두 규모를 파악하고 장려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중산간 지역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도 않으며, 대개 관행적으로 ‘평야를 제외한 산간지역’ 또는 ‘평야와 산간의 중간지역’ 등으로 혼동돼 사용되는 정도이다. 일본은 중산간 지역에 대한 견해를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 중산간 지역이라는 용어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사용돼 왔다는 것으로, 본래는 산촌지역과 평지지역의 중간에 위치하는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중산간을 도시근교 및 평지지역을 제외한 중간·산간 공간으로 경지가 소규모이고, 자급자족적이며 복합적 농림업 생산을 주체로 하면서 저밀도 경제활동이 전개되는 지역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또 다른 견해로는 중산간 지역이라는 개념이 극히 최근에 만들어진 용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미 일본인들이 일제강점기 제주에서 중산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일본에서도 오래 전에 사용된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장우환;1997). 제주의 풍수적 전통에서는 중산간이라는 지리적 개념이 없었으며, 해안마을을 알뜨르, 산간마을을 웃뜨르로 뭉뚱그려서 불렀다. 동서남북 방위를 중심으로 우(上)알(下), 왼쪽(左), 노든쪽(右)으로 설명을 했지, 중앙은 우주, 왕이라는 중심이라고 해서 지존이기 때문에 중(中)이라는 말을 조심했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우리나라에서는 산이 많은 지대를 ‘산지(山地)’라 하고, 산골짜기 지역·산골을 말하는 ‘산간(山間)’이라고 하여 매우 오래 전부터 그렇게 불러왔다. 지리적인 의미에서 중산간(中山間)이라면 ‘산간지역의 가운데’라는 말인데 그 기준에 대한 설정이 애매하기 때문에 이 중산간을 설명하려면 그 용어가 성립되기 이전 그 용어가 사용된 변화들을 추적해봐야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여러 문헌들을 살펴보게 되면, 어떻게 개념이 형성되었는지 그것의 흐름이 명확하게 다가온다. 단언하면, 중산간이라는 지리적 구분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말이다. 일제는 아시아 대륙의 전진기지로써 제주도를 이용했는데 그 때 한반도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토대를 크게 변질시켰다. 일제에게 제주도는 오로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일본의 환상적인 식민지 건설을 위한 군수기지에 불과했고, 제주도의 토지·산림정책을 통해 전쟁 물자 조달을 활성화하기 위한 수탈지로써 생산지를 구분하는 개념으로 중산간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중산간이라는 말이 탄생하기까지 일제 식민지 제주도를 방문한 총독부 촉탁, 일본 기자 등 일본인 학자들의 저서를 보면 그 용어의 맥락을 쉽게 읽을 수가 있다. 1905년에 발행된 『조선(朝鮮)의 보고(寶庫) 제주도(濟州島) 안내(案內)』에서는 대체로 제주도를 탐색하는 관찰자 시점에서 일제식민지 경영의 이로운 점을 파악하고 있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데, 일제강점 이전의 시기에 제주도를 샅샅이 파악하여 분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여기에 보면 '본도에 있어서 농민이란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벽지에 살고 있으며, 연안의 주민은 반농반어(半農半漁)의 모습이다'라고 하여, 제주도 구역을 산간과 연안으로 나누고 있다. 일본은 1905년까지만 해도 관찰자 시점으로 우리나라의 지리 개념을 사용하여 말하고 있다. 1923년에 발행된 『남국(南國)의 보고(寶庫) 제주도(濟州島)』에서는 '산간부락 쪽은 땅이 척박하다는 것과 음료수 때문에 인구가 적으며, 신탄업(薪炭業, 땔감과 숯굽기)이나 목축업을 겸하고 있다'라고 하여 1923년까지만 해도 여전히 ‘산간’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의도적으로 일본에서 천민들이 사는 마을을 비하해서 부르는 ‘부락’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우리에게도 적용하고 있다. 1928년 『제주도 개세(濟州島ノ槪勢)』에서는 농기(農期)와 관련하여 제주도의 지리 구분을 3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산간지대, 중간지대, 해안지대이다. 산간지대는 삼림지대 아래에 위치하며 농경지로서는 가장 높은 지대로 해발 3000척(尺) 내외이고, 산간지대와 해안지대 중간에 위치하는 지대를 중간지대라고 하였고, 온난한 지대로 겨울에도 강설(降雪)이 없는 곳을 해안지대라 하고 있다. 여기에서 산간지대와 해안지대 사이를 ‘중간지대’로 설정하고 있는데 한 개념이 새롭게 도입되면서 중간지대가 설정되고 있다. 1929년 조선총독부 촉탁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의 『제주도생활상태조사(濟州島生活狀態調査)』에는 농업 토지의 이용을 분류하면서 화전지대의 항목에서 중산간지대 및 중간지대라는 말이 섞여서 나온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삼림지대, 산간지대, 중간지대, 해안지대라는 틀에서 토지의 성격을 신·구(新舊)로 구분하고 있다. 이때부터 중산간지대라는 말이 처음 나온다. 舊 분류 新 분류 해발 삼림지대 삼림지대 600m 이상 삼림 화전(火田)지대 중산간지대, 산간지대 300m 이상 농지 목장지대 중간지대 200m 이상 농지 경작지대 해안지대 200m 이하 농지 1930~38년까지 여덟 번의 제주도 답사와 200일 이상의 제주도 현지 연구로 8년 만에 발간된 마수다 이치지의 『제주도(濟州島)의 지리학적(地理學的) 연구(硏究)』에서도 토지이용상의 지대를 3개 지대 즉, 산간지대, 중간지대, 해안지대라는 개념으로 나누고 있는데 이 지대들이 취락지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193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제주도세요람(濟州島勢要覽)』에서는 경작지대별 분류나 경지(耕地)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산간지대, 중간지대, 해안지대로 구분하고 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3개 혹은 4개의 구역으로 상정하고 해발 고도의 높이로 토지이용을 위해 산간지대와 해안지대 사이를 중간지대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띤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는 방어기지 건설의 맥락에서 전략적으로 구상한 것으로 보이는 분류 방식이다. 같은 맥락에서 제주도 농가 분류 방법을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제주도편(朝鮮半島)의 農法과 農民-濟州島篇)』 에서는 산지부(山地部), 평야부(平野部), 해안부(海岸部)로 나누고 있다. 1935년~1965년 30년에 걸친 제주도에 관한 보고서인 이즈미 세이치(泉靖一)의 『제주도(濟州島)』에서는 자연촌의 독립적인 공동체의 예외로서 ‘중산간(中山間)’이라는 말이 1929년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가 주장한 이후 다시 등장하고 있다. 또 1942년 7월에 발행된 『문화조선(文化朝鮮)』에 실린 특파기자(特派記者) 미즈시마 유즈루(永島 謙)의 「제주도 일주(濟州島 一周)」라는 글에도 또 다시 ‘중산간지대’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 기사에 “얼마 없어 아라리(我羅里)라는 중산간지대의 고풍(古風)의 부락에 들어선다”라는 말에서 보듯, 중산간이라는 개념이 일제강점기인 1929·1935·1942년에 점차 성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대체로 제주도를 산간지대, 중간지대라고 구분하고는 산간과 해안 사이의 지대를 중간지대로 설정했으나 1929년에 중산간이라는 말이 처음 나오면서 점점 그 용어가 확산되었던 것이다. 발행연도 지리적 용어 출전 저자 1905 산간벽지, 연안 『조선(朝鮮)의 보고(寶庫) 제주도(濟州島) 안내(案內)』 아오야기 츠나타로오(靑柳網太郞) 1923 산간부락 『남국(南國)의 보고(寶庫) 제주도(濟州島)』 朝鮮總督府 全羅南道濟州島廳 1928 산간지대, 중간지대, 해안지대 『제주도 개세(濟州島ノ槪勢)』 朝鮮總督府 全羅南道濟州島廳(추정) 1929 산간지대, 중산간지대, 중간지대 『제주도생활상태조사(濟州島生活狀態調査)』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 1930~38 산간지대,중간지대,해안지대 『제주도(濟州島)의 지리학적(地理學的) 연구(硏究)』 마수다 이치지 1935 산간지대 중간지대 해안지방 「제주도(濟州島)의 사람과 마을」 미즈키 도라오(水城寅雄) 1939 산간지대,중간지대,해안지대 『제주도세요람(濟州島勢要覽)』 朝鮮總督府 全羅南道濟州島廳 1935~65 중산간지대 『제주도(濟州島)』 이즈미 세이치(泉 靖一) 1939 산지부, 평야부, 해안부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제주도편(朝鮮半島)의 農法과 農民-濟州島篇)』 다카하시 노로루(高橋 昇) 1942 중산간지대 『문화조선(文化朝鮮)』「제주도 일주(濟州島 一周)」 미즈시마 유즈르(水島 謙) 4. 해방 이후 중산간이라는 용어 해방 이후에 ‘중산간지대’라는 말이 언급된 사례를 들면 1949년 4·3과 관련한 것이 있다. <평화일보> 1949년 6월 2일자 「제주 4·3사건의 1년간 진상과 진압소탕전의 경과」라는 글에서, '…… 제2차 중산간지대 총공격 1월 6일 새벽부터 맹공격이 개시되었다'라고 하면서 중산간지대라는 말이 나온다. 또 1965년 발행된 우락기(禹樂基)의 『제주도-대한지지1(濟州道-大韓地誌1)』에 '본도의 종합개발안의 당면과제로서 중산간 부락 150개리를 이어주는 중산간 일주도로의 준공……'이라고 개발 계획을 소개하며 ‘중산간 부락’, ‘중산간 일주’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중산간과 부락이라는 개념은 해방 후에 4·3 사건 때 한라산 무장대 토벌시기와 이후 제주도종합개발계획과 함께 등장하면서 오늘날은 웃뜨르 마을들이 어느새 ‘중산간 마을’로 통용되었다. 언어는 행정적인 제도나 정책에 의해서 장려되거나 공익적인 실용성에 따라 편의상 유포되거나 사용된다. 이후 제주도종합개발과 관련한 정책적인 사업에 힘입어 웃뜨르라는 말보다는 중산간이라는 말이 자주 불리게 되었다. 지금은 중산간 마을이라는 말이 보편화되었다. 아름다운 우리의 웃뜨르라는 말이 어느새 역사 속으로 사장(死藏)돼 버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高昌錫 譯解, 「孝烈錄」, 『鄕土文化敎育資料集』, 제주교육박물관, 2011. 고창석·김상옥 역, 『濟州啓錄』, 제주발전연구원, 2012. 김종철, 『오름 나그네3』, 1995. 김현영, 『조선시대의 양반과 양반사회』, 集文堂, 1999.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신영대, 『제주의 오름과 풍수』, 백산출판사, 2009. 오성찬 외, 『제주의 마을⑬저지리』, 반석, 1991. 저지리향토사편찬위원회, 『저지리 향토지』, 2021. 정구복, 『古文書와 兩班社會』, 일조각, 2002. 제주도, 『濟州先賢誌』, 1988.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국문학보』 제15집, 1990.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16. 제주편 IV.1984.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어느제 오쿠과?" (언제 오시겠습니까?) “When would you like to come?”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1. 토포필리아 우리는 가장 작은 단위로 집에 살고 있지만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다. 집은 장소이기에 편안하고, 마을은 보다 넓은 공간이기에 여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지리학자 이-푸 투안(段義孚, Yi Fu Tuan)은 ‘장소는 안전을 상징하고, 마을은 자유를 상징한다’라고 말한다. 사람이 사는 곳인 집(home)이라는 이름을 가진 각각의 공간이 다른 여러 집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마을을 이루는 것이고, 그 마을이 자신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게 함으로써 그곳의 특별한 장소감(sense of place)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장소감이란 한 개인이, 자신이 자란 고향, 곧 그 장소를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을 감성의 근원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객지에서 내가 태어난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바로 내가 자란 마을이 주었던 편안함과 자유를 누렸던 만족감에 대한 투사(投射)라고나 할까. 삶의 안정적인 발판이 되는 것으로 제일 우선인 것이 바로 집이며,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서 집을 이루어 사는 공동체 마을, 즉 고향이라는 이유가 그 삶의 자유를 위한 시작이 되는 것이다. 고향은 애틋한 경험과 친밀한 장소이자 애착이 가는 친밀한 공간으로 이푸 투 안은 ‘토포필리아(Topophilia)’라는 독특한 개념을 만들기도 했다. ‘토포필리아(Topophilia)’ 는 그리스어 ‘장소, 땅’을 의미하는 토포스(topos)와 ‘애착,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philia)를 합성하여 ‘장소에 대한 사랑’을 새롭게 개념화했다. 우리는 시간의 그물을 벗어나지 못한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하게 만드는 원인이며 시간 앞에서는 그 무엇도 견딜 재간이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욱 더 영속성을 꿈꾸면서 힘닿는데 까지 기억을 되살려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어떤 문명도 퇴락(頹落)하지 않는 것이 없고, 거기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 또한 언젠가는 떠나지 않고 머물 수가 없다. 마치 일월(日月)이나 조석(朝夕)의 작용처럼 우리가 가면 후대가 오고 그들이 다시 우리가 남긴 문명의 바톤을 받고 이끌어 간다. 한 시대의 주인이었던 우리의 시대는 계절의 바람처럼 바뀌면서 시간은 계속 사람의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대로 그러하게(自然)’ 한다. 이것이 자연의 본 모습으로. ‘자연(自然)’의 ‘자(自)’ 라는 글자에서 보듯이 ‘스스로’, ‘저절로’라는 두 가지의 뜻이 있는 것처럼 ‘원자(原自), 본자(本自)와 같이 본래(本來), 원래(原來), 우주는 자연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자연은 본래 변화하는 것이 그 속성이라고나 할까. 떠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일까. 사람들은 자신과 관련된 것들에 대해서 기원(起源)을 중시 여긴다. 아마도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 때문에 내 고향은 어떻게 이루어진 곳이고, 그 뿌리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 1886~1944)는, 기원(起源)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시작’과 ‘원인’이라는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시작의 의미로 볼 때 기원은 역사적인 사실로써 출발점이라는 말이 되나 ‘출발점을 어떻게 잡느냐’라는 개념 자체의 파악이 특히 힘들고, 또 기원을 ‘원인’으로 본다고 해도 자연과학과는 달리 인문과학에서는 본질상 그 원인을 탐구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기원이라는 것이 ‘원인・이유를 설명하는 ’발단’ 혹은 ‘설명하기에 충분한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그 역사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설촌에 대한 탐구는 필요하다.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는가?” 2. 중산간 마을의 성격 용어도 시대의 산물이어서 시대가 만들어 낸다. 용어의 탄생은 전통어(傳統語) 바탕 위에 새롭게 신조어(新造語)가 나오고 필요에 따라 합성어(合成語)와 외래어까지 덧붙여진다. 언어의 탄생은 변화이자 새로움 자체이다. '중산간'이라는 용어는 근대적 개념어이다. 중산간은 곶자왈(곶+자왈)과 마찬가지로 알뜨르와 웃뜨르 사이, 즉 산간지대와 해안지대 사이의 지역을 가운데(中)로 설정하여 중(中)+산간(山間)을 구성해서 만든 합성어인데 옛날에는 없었지만 식민지 정책의 필요에 따라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용어이다. 저지리는 웃뜨르였다. 웃뜨르라는 의미가 산간마을, 외진 마을의 다른 의미였다. 이제는 중산간 마을로 불리면서 어느새 웃뜨르라는 말은 퇴화돼 버렸다. 중산간 마을 저지리(楮旨里)는 ‘저지리’라는 말의 어감에 비해서 해발 고도의 위치가 비교적 높은 곳에 자리한 마을인데 바로 한라산의 장엄한 산세가 지붕처럼 다가오는 한라산 서쪽 마당에 해당한다. 저지리는 동경 126도 20분, 저지리를 누구나 중산간 마을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저지리를 제주도 서북부지역 제주시 한경면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로 생각한다. 사실 저지리만이 아니라 소위 알뜨르에 대비되는 웃뜨르 마을들을 대개 중산간 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추세다. 또 서뜨르라는 지리적 개념도 있다. 서뜨르인 애월, 곽지지역에서는 서뜨르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웃뜨르라는 말을 쓴다. 이 의미로 봐서는 남서쪽 대정지역에서는 알뜨르에 대비되는 지리 개념으로 웃뜨르라 하고 있고, 제주도 서쪽 애월, 곽지지역에서는 서뜨르에 대비되는 중산간 지대를 웃뜨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중산간이라는 말을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현재 저지리는 한림리에서 남동쪽으로 16km, 한경면 신창리에서 동쪽으로 8km에 이르는 곳에 있다. 저지리에서 남쪽 모슬포까지는 14.5km, 저지리에서 제주시까지는 약 38.5km이다. 과거 대표적인 중산간 마을 저지리는 제주도에서 가장 물이 귀하고 변화가 더딘 곳이라는 평을 받았던 곳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어느 마을보다도 이주 인구가 늘고 있는 가장 변화가 빠른 지역 1순위 마을로 탈바꿈 했다. 한경면 저지리(楮旨里;堂旨)는 해발고도가 130~140m 정도로, 이웃 마을 조수리(造水里;造乎勿, 해발 60~70m)와 그 높이가 두 배 차이가 나고 한경면에서는 한라산 방향 안쪽에 있는 제일 높은 지역이다. 제주도 서북부 지역 마을의 해발고도를 보면, 애월읍의 유수암리(流水巖;今勿德)가 해발 210~250m, 광령2리(有信洞)가 해발 200~220m, 어음2리(於音非) 해발 190~210m, 광령1리(光令)가 해발 150~180m, 해안동(海安, 伊生里)이 해발 190~210m이고, 한림읍 상명리(上明, 牛屯)가 해발 140~150m로 다음을 차지한다. 1997년 제주특별자치도에서 발행한 『제주도 중산간지역 종합조사』 에 따르면, 해발고도를 이용한 제주도 마을 설정을 0~200m 이하를 해안 마을로, 200m~600m 사이를 중산간 마을, 600m 이상을 산간마을로 구분하였다. 하지만 지리적 구분에도 시간의 역사가 있어서 시대에 따라 다르게 구분돼야 하는데 이 구분대로라면 현재의 많은 제주도 전통마을들이 중산간 마을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구분은 20세기 이후 새로운 도로망의 개설로 인해 달라진 산업시대의 구분이기 때문에 그 이전 조선시대에 성립된 마을 설촌의 과거 토대와는 한참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 제주의 전통 자연마을의 분류는 15~20세기 초까지, 그리고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의 마을의 상황을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산간마을을 웃뜨르, 해안마을을 알뜨르, 혹은 서부 해안 마을을 서뜨르, 그 마을 위 한라산 방향을 웃뜨르라고 불렀던 옛제주인들의 지리적 구분과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산간마을과 해안마을의 중간 마을로써 중산간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성립됐는지 그 역사적 경험을 알아야 제주도 전통마을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다. 현용준은 중산간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현용준은 중산간의 해발고도, 과거 도로망, 해안 어로활동과 용천수 의존도, 농경지 확보와 화전경작의 차이를 전제로 하여, 해발 100m 미만을 해안마을, 100m 이상~300m 이하를 중산간 마을, 300m 이상을 산간마을로 구분하였다. 현용준의 이 구분을 적용하면, 많은 전통마을들이 해발 100m~300m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중산간 개념의 역사적인 경로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17살 때, 무칠은 걸식하며 돌아다니다 관도(館陶)현 설점(薛店)촌에 이르렀다. 장(張)씨 성을 가진 거인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며 연 6000문(文)을 받는 고용인이 됐다. 3년을 쉬지 않고 일하다가 예전에 자신을 길러준 백모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을 수령해 돌아가 효도하려 했다. 그런데 어찌 생각이나 했을까, 장 거인은 무칠이 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가짜 장부를 들이밀며 다그쳤다. “네 임금은 일찍이 모두 지급하였다. 이게 네 장부이지 않느냐?” 고의로 트집 잡고 있다고 모함하고 하인을 시켜 길거리로 끌고 가 온몸이 멍들도록 타작하도록 했다. 나중에 무칠은 또 수재의 집에서 고용인이 되었다. 어느 날, 그의 누나가 인편에 돈과 편지를 보내왔는데 때마침 무칠이 부재중이라 수재가 대신 받았다. 무칠이 돌아오자 수재가 대신 편지를 읽어주었다. 그가 글을 모른다는 것을 이용해 돈을 보낸다는 말은 빼버렸다. 다른 소식만 알려주고 돈을 몰래 삼켜버렸다. 나중에 누나가 다시 사람을 보내 돈을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에야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재를 찾아가 사실여부를 물으니 욕만 먹었다. 설날 때 수재가 춘련을 써서 무칠에게 붙이라고 하였다. 바람이 불어 춘련을 뒤엉켜 놓으니 엉망이 되었다. 침대 머리맡에 붙인 것은 ‘고양이 개 평안’이고 닭장에는 ‘온 집안이 상서롭게 되라’는 글귀였다. 수재는 대노해 뺨을 때리며 현장에서 임금을 20% 깠겠다고 하고는 꺼지라고 욕을 해댔다. 무칠은 참지 못해 욕을 되돌려 주었다. “너, 이 나쁜 인간! 처음에 내가 글을 모르니까, 나를 속여서 내 누나가 보낸 돈을 몰래 처먹더니, 지금은 내가 글을 몰라 춘련을 잘못 붙였다고 임금을 삭감하겠다고. 양심이 있기는 한 것이오? 네 그 더러운 돈, 내 더러워서라도 안 받겠소. 네게 줄 테니 뇌물을 쓰든 헛지랄 하든 멋대로 하시오!” 말을 마친 후 돈을 면전에 던져버리고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무칠을 가장 참지 못하게 만든 일은 나중에 벌어진다. 이모부인 장(張)사장이 무칠이 글을 모른다고 무시한 일이었다. 무칠의 이모부는 전지 몇 무(畝)를 가지고 있었고 두부를 파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모부 집에서 평일에는 맷돌질하고 농번기에는 밭에 나가 농사일을 했다. 1년에 일정한 임금을 받기로 이야기가 됐었다. 연말이 되어 임금을 계산할 때 이모부는 뜻밖에도 가짜 장부를 꺼내며 임금은 이미 지불하여 한 푼도 남아있지 않다고 거짓부렁 하는 게 아닌가. 인정하지 않는 무칠에게 강변하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웃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이모부는 거짓 장부를 내보이면서 똑 같이 말했다. 이웃은 무칠이 손윗사람을 존중하지도 않고 돈만 탐한다고 여기어 무칠의 말은 듣지도 않고 화내면서 가버렸다. 누구를 탓한다는 말인가, 자신이 공부할 기회가 없어 글을 모르는 까닭에 이렇게 되지 않았는가. 이번에는 너무 괴로워 마음병이 생겨버렸다. 병 때문에 마을에 있는 낡은 사찰에서 쓰러졌다. 3일 밤낮 동안 인사불성이었다. 물 한 모금 마실 수조차 없었다. 글을 모르는 고통과 분노는 무칠에게 너무나 깊은 상처를 주었다. 자기 길을 잃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 여러 고장을 전전하면서 무칠은 자신의 운명을 탄식하였다. 자신과 닮은 천하의 사람들의 운명을 탄식하였다. 불만을 넘어 분노하게 되었다. 평정을 얻지 못하면 소리를 낸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이 글을 몰라 가는 곳마다 무시당한 것처럼 글을 모르는 다른 사람도 똑같이 모욕을 당하지 않겠는가! 문득 한 생각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의학을 일으키자.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자. 글을 몰라 무시당하는 일은 없게 하자. 무칠은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운명과 닮은 후배들을 구해내자고 맹세하였다. 마음이 정해지자 낡은 사찰에서 뛰쳐나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머슴살이는 무시당하지 않느냐. 구걸하면서 내 마음대로 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느냐. 내가 구걸하고 돌아다닌다고만 보지 마라, 조만간 의학원(義學院)을 지으리라.” 일시에 무가장(武家莊)을 놀라게 하였다. 사람들은 무칠이 미쳤다고 여겼다. 무칠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지 개인에 대하여 말한다면, 오직 빈 손 두 쪽으로 의학을 일으키는 일이 어찌 쉬울까! 백 년 전 그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 날에도 사람들은 쉬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기상천외’한, 천진난만하고 어리석은 발상이라 여길 게 분명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상을 추구하고 희생을 아끼지 않는 무칠의 분투아래 마침내 ‘하늘이 내린 중대한 임무’, ‘학문이 발전하는 기운’이 사실상의 장거가 되어 ‘무칠(七)’을 ‘무훈(訓)’으로 바뀌게 했다. 당시에 상금과 포창을 받아 생전에 패방을 세웠다. 죽은 후에는 국사관에 전기를 세울 수 있었다. 더욱이 옛날 남통(南通) 대용(代用)사범학교에는 무훈의 화상이 공자상과 병렬되었다. 진정으로 고아한 사인의 사림에 들어갔다. 개인이 품은 꿈을 실현시키는 것이 어찌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무훈 본인이 모욕을 감내하면서 간고의 노력을 다한 결과였다. 세상의 쓴 맛 단 맛을 다 본 결과였다. 일생의 심혈을 다 쏟아낸 풍상의 결과였다. 사실, 무훈 본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글은 배우지 못했다. 옳을 일과 명예와 절조로 사림에 영광스럽게 뛰어올랐지만, 실상은 종신토록 걸식하면서 살았던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기이한 거지’였다. 쉬이 믿을 수 없을 것은 사실이다. 의학을 일으킨다는 것은 우선 상당할 정도로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학교를 건립할 거대한 자금을 저축하고 모금하기 위하여 무훈이 가장 기본적으로 한 방법은 구걸이었다. 돈을 구걸하기 쉽도록 우선 자신이 광대역을 자처하였다. 왼쪽과 오른쪽 각각 반씩 돌아가며 머리를 빡빡 깎았다. 사람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보시를 쉽게 받기 위해서였다. 무훈은 노래하였다. “이쪽은 깎고 저쪽은 남겼소, 의학을 지으면 걱정할 필요 없소. 이쪽은 남기고 저쪽은 깎았소, 의학을 짓는 것은 힘들지 않소.” 사람들이 ‘의학증(義學症)’에 걸렸다고 하면 그는 노래하였다. “의학증엔 조급함이 없소. 사람을 만나면 예의로 존중하고, 돈을 주면 연명하고, 의학을 일으키면 만년은 변함이 없소.” 돈을 보시하지도 않고 오히려 호통 치는 인색한 사람을 만나면 무훈은 노래하였다. “내게 주지 않는다고 난 원망하지 않소, 내게 밥을 주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요. 강요하지 않소, 억지로 동냥하지 않소, 급할 필요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소. 내가 동냥하고 당신은 선을 행하면 모두가 의학원을 지을 수 있소.” 혹은 노래하였다. “어르신, 삼촌, 화내지 마소, 잠시 화를 멈추면 내가 곧 떠나리다.” 지주가 어쩔 수 없어 돈 몇 푼 쥐어주었다. 구걸해오면 좋은 것은 돈으로 바꿨고 나쁜 것은 골라내 자신이 먹었다. ‘비열한 놈’이라고 비꼬는 사람이 있으면 무훈은 노래하였다. “야채 뿌리 씹네(가난을 견디어 내네), 야채 뿌리 씹어도 나는 배부르니 사람에게 더 요구하지 않네. 남은 밥으로 의학원을 짓네. 토란을 먹네, 토란을 먹어. 불도 물도 필요치 않네, 남은 돈은 의학을 일으키는 데에 어렵지 않네.” 심지어 물을 얻으면 먼저 얼굴을 씻고 난 후 물을 마시면서 노래하였다. “더러운 물을 마셔도 더럽지 않네. 의학을 일으키지 않는 게 더 더럽네.” 조금 많은 돈을 희사하는 사람을 만나면 무훈은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찬가를 불렀다. “난 밥을 구했는데 당신은 선을 행하네요. 의학을 지으면 당신 와서 보세요. 당신은 선을 행하고 나는 대신 일할 뿐, 모두 의학을 짓는 데 도와주네요. 많아도 좋고 적어도 좋아요, 의학을 짓는 데에 돈을 보시하세요. 이름도 날리고 선도 행하면 문창제군(文昌帝君)이 알아서 당신의 자자손손이 팔인교(八人轎)를 타게 만들 거요.”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혼저왕 먹읍서" (어서 와서 드세요) “Please come on and eat.”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숨겨진 제주섬 이야기 뭉치를 펼칩니다. 그동안 알았던 제주가 아닌 신비의 세계 뒤에 숨겨진 제주의 이야기와 역사를 풀어냅니다. ‘제주 톺아보기’입니다. 그렇고 그렇게 알고 들었던 제주의 자연·역사, 그리고 문화가 아니라 그 이면에 가리워진 보석같은 이야기들입니다. 사회사·경제사·사회복지 분야에 능통한 진관훈 박사가 이야기꾼으로 나서 매달 2~3회 이 스토리들을 풀어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애독을 바랍니다./ 편집자 주 서귀포시 대정읍 노을 해안은 남방큰돌고래가 매일 오전 10~12시, 오후 3~5시쯤 자주 나타난다는 곳이다. 얼마 전부터 ‘남방큰돌고래 멍’ 때리는 힐링 성지로 이름나 있다. 매일 해수면 위로 나오기만 기다리는 관광객들이나 지역주민들이 많다.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려고 갯바위 끝까지 가서 망원경으로 바다를 관찰하거나 드론을 띄우는 열성 팬도 있다. 바다 날씨가 흐려 볼 수 없는 날도 있지만, 날이 개고 바다 날씨가 좋아지면 틀림없이 남방큰돌고래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틈만 나면 거의 매일 이곳을 찾는 지역주민도 있다. 와서 한 시간 정도 ‘돌고래 멍’하며 자연치유하고 간다고 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눈으로도 식별이 가능한 가까운 바다에 남방큰돌고래 수십 마리가 모습을 보여줬다. 장난치듯 솟아오르며 물장구치는 남방큰돌고래 무리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꺼내 동영상 찍기에 바빴다. 파도를 가르며 미끄러지듯 헤엄치는 남방큰돌고래 지느러미가 수면 위로 보일 때마다, “와~ 몇 마리야?”하는 탄성이 쏟아졌다. 어린 남방큰돌고래가 머리 들고 수면 위로 높이 점프할라치면 이구동성으로 “어머 저것 좀 봐, 너무 귀여워~”하며 즐거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그곳에 자주 나타난다고는 하지만 그 시간에 거기만 가면 누구나, 당연하게 남방큰돌고래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평소 좋은 일 많이 하고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다. 그 덕에 혹여 남방큰돌고래를 보게 된다면, 그를 영접한 기운으로 앞으로도 많은 행운이 따를 거라 믿으며 겸손하게 기뻐하면 될 터다. 설령 못 보더라도, 아쉽지만 기분 나빠할 정도는 아니다. '역시 남방큰돌고래가 자신을 쉽게 보여주지 않은 신비스러운 존재구나!'하며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 사실 남방큰돌고래를 못 봤더라도, 한 시간 이상을 청정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대자연의 신비를 꿈꿨으니 그것만으로 돈 안 들고도 해양치유가 된 셈이지 않은가? 제주에는 이렇듯 돈 안 드는 치유 자연자원이 많다. 산이 그렇고, 바다가 특히 그렇다. 바다에 가서 멍하고 있다 돌아오면 자연적으로 해양치유가 된다. 감귤이나 구상나무·왕벚나무 등이 제주를 대표하는 식물이라면 남방큰돌고래는 바다 보물이다. 국제 멸종위기종인 남방큰돌고래는 또 다른 제주 상징물이자 소중한 자연치유자원이다. 이런 남방큰돌고래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계기로 더 관심을 끌었다. 이 드라마 방영 이후 서귀포시 대정읍 해안마을은 명소가 됐다. 드라마에서 우영우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제주도 서귀포 대정읍에 가면 삼팔이·춘삼이·복순이가 어린 돌고래들과 함께 헤엄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수족관에 붙잡혀 돌고래쇼를 하다가 대법원 판결 때문에 제주 바다로 돌아간 남방큰돌고래들입니다. 언젠가는 꼭 보러 갈 겁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방큰돌고래는 정확한 종 분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비슷한 종인 큰돌고래로 잘못 알려지곤 했다. 특히 어디에 어떻게 사는지, 무엇을 먹는지, 몇 마리가 있는지 등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국립수산과학원 조사 결과 지난 16년간 식별한 제주 연안 남방큰돌고래는 120여 마리로 확인됐다. 제주 남방큰돌고래는 수명이 40~50여 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배 쪽에 검은 반점이 많아지고 배 쪽에 분홍빛을 띠는 게 특징이다. 매우 친화력 있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성체는 몸길이 2.6m, 몸무게 220∼230kg 정도다. 12개월의 임신 기간을 통해 한 마리의 새끼를 낳아 기른다. 갓 태어난 새끼는 몸길이 1∼1.5m, 몸무게 20∼23㎏ 정도. 제주도를 비롯해 인도양과 서태평양의 열대 및 온대 해역 연안에 주로 서식한다. 2012년 10월 당시 국토해양부는 멸종위기에 놓인 남방큰돌고래를 보호 대상 해양생물로 지정, 공연 등 영리 목적의 포획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제주도 사람들은 예로부터 돌고래를 신성시했다. 살아있는 채로 다른 어류와 섞여 잡히더라도 절대 죽이지 않았다. 제주도 해녀들은 돌고래를 가리켜 ᄀᆞᆷ새기, ᄀᆞᆷ수기, 곰새기, 수애기, 수어기, 수해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제주에는 “감새기 올 때 궂인 것 하나 조친다(돌고래 올 때 상어가 따라온다)”, “웨ᄀᆞᆷ새기 노는 딘 가지 말라(외톨이 돌고래 노는 데는 상어가 나타나므로 가지 말라)”라는 속담이 있다. 돌고래 뒤를 따라다니는 상어가 해녀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었으므로 돌고래가 나타나면 작업을 중지하고 경계해야 했다는 의미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에 등장 제주 돌고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5권에 나온다. 조선 선조 때 성리학자인 유희춘(1513∼1577)은 전라도 수군의 조운(漕運) 폐단을 아뢰면서 “신이 삼가 살피건대 제주에는 강돈(돌고래)이 사슴으로 변해 그 생산이 끝이 없고 그 지방에는 호표(호랑이와 표범)나 시랑(승냥이와 이리)이 없어 사슴과 노루가 번성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원담을 사랑하는 남방큰돌고래 19세기 이전 제주에서는 연안에 전통 돌 그물인 원담(石堤)을 쌓아 어로 작업을 했다. 원담은 자연지형과 물때를 이용해 만든 제주의 전통 고기잡이 시설이다. 돌로 담을 쌓고 밀물이 들어오면 물을 가두었다가 밀물 때 바닷물과 함께 들어왔다가 썰물 때 원담 안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남아 있던 멸치나 숭어를 ‘족바지’(뜰채) 혹은 ‘당망’으로 건져 올렸다. 남방큰돌고래는 이런 숭어나 멸치를 아주 좋아한다. 원담은 작게는 수 m, 크게는 수십m 크기로 둥그런 모양으로 만든다. 요즘도 가끔 원담에 들어오는 남방큰돌고래는 왕성한 먹이활동을 한다. 바닷물이 빠지면서 숭어나 넙치 등 먹잇감이 갇혀 나가지 못하는 생리를 잘 알아 수시로 들어온다. 바닷속 사정을 훤히 아는 이 남방큰돌고래가 원담에 들어오면 최소 한 달 이상 머문다. 원담 안에서 남방큰돌고래는 조석간만에 맞춰 움직인다. 물이 많이 빠졌을 때는 활동반경이 물이 고이는 한 곳으로 줄어들고 한 방향으로 천천히 유영한다. 바닷물이 만조일 때에는 커진 웅덩이에 따라 활동반경도 넓어지면 넙치를 잡아먹기도 한다. 그러다가 원담 안에 먹이가 떨어지면 만조를 이용하여 넓은 바다로 나간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특보를 역임하고,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을 지냈다. 천사나래 주간활동센터 시설장을 맡아 일하며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학기 중에는 제주한라대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오달진 근대제주』(2019), 『오달진 제주, 민요로 흐르다』(2021), 『제주의 화전생활사』(2022) 등이 있다.
장영덕(張永德), 낡은 옷을 입고 때 묻은 얼굴로 분장한 후 도적에게 구걸해 온가족이 소란을 피하다 거지를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며 코웃음 치는 사인도 있지만 긴급한 상황에서 거지 모양으로 분장하여 재앙을 피해간 사인도 있다. 『송사·장영덕전(張永德傳)』의 기록은 이렇다. 장영덕, 자는 포일(抱一), 병주(幷州) 양곡(陽曲) 사람으로 부친 장영(張穎)은 안주(安州) 방어사를 지냈다. 장영덕이 4세 때, 모친 마(馬) 씨가 이혼 당하자 조모가 부양하였다. 계모 유(劉) 씨는 효부로 유명하였다. 시위(侍衛) 관리를 시작한 주조(周祖)는 장영과 가까이 지내며 딸을 장영덕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다. 장영덕이 모친과 함께 송주(宋州)로 처자를 맞이하러 갈 때에는 도적떼가 도처에서 출몰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장영덕은 낡은 옷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흙을 발라서 더럽힌 후 골목길에 머물다가 도적이 나타나면 그들 앞에 나아가 구걸하였다. 상대방은 적선하지도 않고 “이곳은 거지들을 먹여 살리는 비전원(悲田院)이다.”라고 말하며, 소동도 일으키지 않고 떠나갔다. 그렇게 온가족이 재난을 면했다. 기지가 뛰어나다 할 밖에. 당시 상황은 ‘거지와 어울리면 조상의 명성을 더럽힌다’는 모욕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는 시기였다. 무훈(武訓), 구걸해 자금을 모아 의학(義學)을 일으키다 청나라 도광 18년 10월 19일, 즉 1838년 12월 4일, 산동 당읍(堂邑, 현 요성聊城 서쪽)현 무가장(武家莊)의 가난한 농민 무종우(武宗禹) 집안에서 가문의 일곱 번째 항렬의 아이, 무칠(武七)이 태어났다. 그가 바로 구걸하며 자금을 모아 의학1)을 일으킨, 중국근대사상 ‘광세(曠世)기인’이라 불리는 무훈(武訓)이다. 무칠은 본래 사림에 속하지 않은 어린 거지였다. 출신은 학자 가문도 아니요 땅 파먹는 농민세가였다. 부모 이외에 시집간 누나 1명, 형 무양(武讓)이 있었다. 무칠이 5살 때, 부친이 죽었고 흉년도 들었다. 나이가 조금 많은 형은 혼자 밖에서 살길을 찾아 나섰다. 무칠은 모친 최(崔) 씨와 함께 곳곳으로 구걸하고 다니며 지냈다. 음식을 구걸해 오면 나쁜 것은 골라 자신이 먹었고 좋은 것은 모친에게 주었다. 어떤 때에는 노래를 불러 모친을 기쁘게 해드렸다. 거지였으니 공부할 돈이 없었다. 그래도 공부하고자 하는 갈망은 억제할 수 없었다. 구걸할 때에 학당에서 책을 읽는 낭랑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무칠은 저절로 걸음을 멈추어 자리를 뜨지 않고 주의 깊게 들었다. 마을 아이들이 등교하거나 하교할 때 부러운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한참을 뒤따라가곤 하였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질책과 혐오가 뒤따랐다. 어느 날, 무칠은 갑자기 공부하고 싶은 간절한 바람을 억제하지 못하고 학당에 뛰어들어 선생에게 글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하였다. 결과는? 계척과 욕설이 날아왔고 학동들의 비웃음만 들었다. 마음에 상처 입은 무칠은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 모친에게 말했다. “다른 집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데 저는 왜 학교에 가지 못하나요?” 최 씨는 눈물을 머금고 아들을 안위하며 말했다. “우리 집은 가난하여 먹을 밥도 없는데 학교에 갈 돈이 어디 있다는 말이냐? 학교에 가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 법이란다! 불쌍한 녀석, 터무니없는 생각, 다시는 하지 말거라.” 어쩔 수 없이 무칠은 매일 타구봉(打狗棒)과 낡은 바구니를 들고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대문을 두드리며 구걸하였다. 7세가 됐을 때 모친마저 세상을 뜨자 마음 착한 백모(伯母)가 거두어들여 부양하였다. 백모의 집안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구걸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처지까지는 아니었다. 무칠은 2년간 잠시나마 거지 생활을 끝낼 수 있었다. 어린이는 천진무구하지 않던가. 무칠은 구걸하러 다니지 않으면 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있다고 여겼다. 9살 때에 무칠은 결국 마음속 갈망을 참지 못하여 대담하게 백모에게 학교에 가겠다는 생각을 말했다. “책은 가난한 아이가 읽는 게 아니다. 나중에 커서 머슴살이 하면서 먹고 살 생각이나 하거라!” 백모의 처참한 대답은 무칠을 다시 절망 속에 빠뜨렸다. 공부할 수 없다! 어찌 할 것인가. 그저 모진 운명을 탓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다. 거듭 몇 번이고 글을 알지 못하는 고통을 겪으니, 의학을 일으켜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강열한 의지를 품게 되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허황되다 싶은 망상은 끝내 실현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의학(義學), 청나라 때 정규 지방학교에 접근하긴 어려운 일반 민중을 위하여 설치한 지방의 초급학교다. 지방관의 주도하에 주로 지방 유지들의 출연에 의해 설립됐으므로 의학이라 한다. 강희(康熙) 41년(1702) 숭문문(崇文門) 밖에 설립한 것이 최초다. 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아래 전국적으로 세워짐으로써 명나라 말기 이후 쇠퇴해오던 사학(社學)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의학과 사학은 행정적으로는 유사하게 취급되었다. 빈한한 학생을 위해 일반 농촌지역에 설립된 의학 말고도, 소수민족 교화를 위한 변방의 의학도 있었다. 지배민족인 만주족의 가난한 계층을 위한 팔기의학(八旗義學)도 있었다. 명청 시기의 사학, 의학에 의해 교육이 지역적, 계층적으로 확대되었다. 의무교육은 아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게메 양! 경 해시민 얼마나 좋으쿠과?"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That's right. How nice would it be to do that?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속담에 한 사람이 높은 벼슬에 오르면 그 딸린 식구도 권세를 얻는다〔계견승천(鷄犬升天)〕라고 하였다. 외척으로 얻은 파벌관계, 종족 관념은 중국문화 전통 속에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왔고 깊이 뿌리 박혀 있다. 그런데 신사들은 그 친척과 친우, 벗이 거지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가문의 명예를 잃고 조상을 욕되게 하는 데에는 방법이 없다. 소자첨〔蘇子瞻, 소식(蘇軾)〕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천하의 현사를 두루 아끼었다고 전한다. 스스로 “위로는 옥황상제를 곁에서 도울 수 있고 아래로는 비전원(悲田院)의 거지도 곁에서 도울 수 있다”라고 자부하였다. 벗이 거지라 할지라도 결국 벗은 벗이다. 상국(相國)의 증손자, 시를 지어 구걸하다 청나라 때에 상국 문공공(文恭公) 왕욱령(王頊齡)의 증손, 즉 왕유문(王幼文) 원외의 손자가 시가지를 돌아다니며 걸식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가 구걸할 때에는 연화락(蓮花落)1)을 부르지 않고 시를 지었다. 점포 사람들 모두 그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늘 그에게 많은 돈을 보시하였다. 그의 부모가 그를 집안에 가둬두기도 하고 묶어두기도 했지만 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도망쳐서는 늘 하던 대로 걸식하였다. 밤에는 시내의 돌 위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나중에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본래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 현귀한 가문 출신이 기꺼이 걸식을 행하며 즐거워했으니, 가풍을 훼손하고 가문을 욕되게 했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 어찌할 것인가, 본인이 좋아서 그러한 것인데. 황실(皇室) 노태야(老太爺), 개방(丐幇)에 가입하다 청나라 광서 중엽에, 수도 남성(南城) 난광(暖廣)에 살던 거지 무리 중에 황조 종실 출신 노태야가 한 명 있었다. 걸식을 달갑게 여겼다. 때때로 창포, 마괘자를 입은 귀인이 다가와 안부를 전하고 돈을 전달하였다. 노태야는 성격이 좋지 않았다. 아무 때나 타인과 싸움했다. 난광 관원이 사람을 시켜 포박하려하니 노태야가 말했다. “너희가 나를 묶는 것은 쉬울 것이다. 그러나 나를 놓아주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이 짐짓 화난 체하며 말했다. “포박하는 것으로 그칠 줄 아느냐, 곤장을 때릴 것이다.” 당시 곤장을 치려면 포박을 풀어야 했다. 포박을 풀 때 노태야의 바지 위에 황대(黃帶)가 둘려있었다. 선례에 따르면 종인부(宗人府) 이외에 다른 관원은 종실 사람에게 형벌을 내릴 수 없었다. “가시오. 곤장도 때리지 않을 것이오.” 어쩔 수 없이 풀어주었다. 현귀 종인 중에 거지 무리에 가입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거지가 됐어도 여전히 종친 특권을 향유하고 있었던 모양이고. 일반인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특별한 거지였다. 친척과 친구 중에 거지가 있으면 가문의 명예를 손상시키기도 했으나, 사인 중에도 거지와 벗을 맺은 경우도 있었다. 청나라 때 산동 내양(萊陽)에 풍아한 사인 강학재(姜學在)가 있었다. 자는 실절(實節)이요, 황제 근신의 둘째아들이다. 그는 동정동산(洞庭東山)을 유람하면서 돈이 있는 사람들과는 교류하지 않았다. 상양승사(相羊僧寺)에서 기념으로 절구시를 벽에 쓴 거지를 초청한 후 상좌에 앉혀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며 함께 술을 마셨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거지는 강학재의 손은 잡고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나의 지기입니다.” 강학재는 기뻐서 이후에도 자주 그와 담론하였다. 나누지 않은 이야기가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만났다. 사찰 스님이 거지를 무시하여 떠나라고 하자, 거지는 스님의 뺨을 한 때 때린 후 떠나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강학재가 일부러 그 거지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강학재가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고 비난했으나, 강학재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바로 ‘아래로는 비전원(悲田院)의 거지도 곁에서 도울 수 있다’고 한 소동파와 같은 기개다. 제왕장상, 사인학자 모두 거지 출신도 있고 거지로 전락한 부류도 있다. 그 친척이나 친구도 예외는 없다. 거지와 친구를 맺기도 하고 거지를 상좌에 앉히고 교류하기도 하였다. 송나라 원나라 이래로 거지 집단이 점차 추락하여 본뜻이 변질된 이후에도, 곤궁해져 거지로 전락하거나 자의적으로 거지가 된 현재(賢才) 은사(隱士)가 적지 않았다. 1) 몇 사람이 간단히 분장하고 대나무 판을 치면서 노래하는 통속적인 가곡이다. 보통 노래의 매 단락마다 ‘蓮花落, 落蓮花’라고 메기는 소리를 붙인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희재(韓熙載), 기방에서 구걸하다 한희재(韓熙載), 자는 숙언(叔言), 오대(五代) 때 유주(濰州) 북해(北海) 사람으로 후당 장종 이존욱(李存勖)의 동광(同光, 923~926) 연간에 진사였다. 그의 부친 한광사(韓光嗣)가 명종에게 피살되자 강을 건너 남당에 의탁하였다. 세종 때에 병부상서를 지냈다. 포용력이 있었고 비굴한 바가 없었다. 해고를 당해도 시종 절기를 잃지 않았다. 문장을 잘 써서, 서현(徐鉉)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큰돈을 주고서라도 문장을 사려고 하는 사인과 승려, 도사들이 많았다. 이런 아사도 의외로 기원에 가서 걸식하는 것을 놀이로 삼았다. 가기(歌妓) 100여 명을 한꺼번에 사서 하루 종일 가기와 함께 뒤섞여 놀기도 하였다. 낡은 옷을 입고 짚신을 신어 맹인 예인처럼 분장하고서는 홀로 거문고 타면서, 문아한 문객에게 박자판을 들게 하고는 기방에 가서 걸식하는 것을 즐겁고 유쾌하다고 여겼다. 송나라 때 소동파(蘇東坡)가 친우 보각(寶覺)이 낡은 승복을 주자, 감사의 뜻을 표하며 시를 읊었다. “아픈 몸에는 옥대 걸치기도 벅찬 일인데, 불민하여 화살촉 같은 기봉에 떨어지도다. 기생집에서 술이나 얻어먹을 물건으로, 운산 선승의 옛 가사와 바꾸었도다.”1) 바로 한희재의 풍류 일사를 전고로 사용해 쓴 시이다. 이처럼 당시 풍속과 맞지 않는 심리적 변태행위는 대체로 일시적으로 처한 상황이 좋지 않은 고민에서 비롯된, 모든 것을 하찮게 대하고 제때에 즐기려는 심리와 연관이 있다. 송나라 사람 황조영(黃朝英)은 『정강상소잡기(靖康緗素雜記)』에서 평가하였다. “한의재는 본래 고밀(高密) 사람이다. 후주가 즉위 후 북인을 심히 의심하여 독주로 독살당한 자가 많았다. 한희재는 두려워 마음 가는 대로 솔직하게 행동하면서 예법을 준수하지 않았다.” 송나라 사람 주밀(周密)도 『계신잡식(癸辛雜識)』에서 평했다. “후인은 화야연도(畵夜宴圖)로 조롱했지만 그 정서는 슬프기 짝이 없다.” 사림에 거처하는 사람을 보면 풍아하고 맑으며 고아하지만, 역시 위험하고 고생스러워 고충이나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다. 북송 영종 조서(趙曙) 치평(治平, 1064~1067) 때의 전중어사 전기(錢覬)는 왕안석을 따르는 손창령(孫昌齡)을 비판했다가 수주(秀州)로 쫓겨났다. 집안이 가난하고 모친이 나이가 들어 친척과 친구에게 음식은 구걸했으나 의연하여 귀양살이 하는 관리의 형색이 없었다. 사인의 절기를 잃지 않은, 사림이 찬양하는 풍아한 일이었다. 그래서 소동파는 증시를 써서 “오부(烏府) 선생은 쇠로 간을 만들었나”라고 읊으면서 ‘철간어사(鐵肝御史)’라는 명칭이 붙었다. 그런데 한희재와 비교하면 후련하지 못한 억압된 심리가 생겨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한희재보다 유쾌하지 않다. 한희재는 행위가 방종하여 세속 예법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반면 전기는 예전과 다름없이 도덕군자라는 가식적인 면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