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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12)
질곡의 역사 겪은 한국인 ... 응어리 풀어야 신바람 나
맺힌 것 견디지 못하는 걸까 ... 탄핵정국 속 섬뜩한 저주 오가
선 넘는 빨갱이·간첩 논란 ... 망상 실행에 옮기면 곤란

‘세계의 심장부’라는 뉴욕시에서 불과 1시간 남짓 떨어진 부촌 롱아일랜드에 세상과의 모든 연결망이 단절되는 재앙이 덮치지만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무언가 심각한 사고가 터진 게 분명한데 통신 자체가 끊겼으니 무슨 영문인지 알 도리가 없고, 불안감만 가중된다.

 

 

그때 하늘에서 눈처럼 ‘삐라’가 쏟아진다. 알 수 없는 아랍어로 쓰인 단 한 줄은 ‘미국에 죽음을(Death to America)’이라는 구호다. 국적을 불문하고 미국에 원한 맺힌 모든 이슬람 국가에서 표준화된 실제 반미(反美) 구호다. 

워낙 간결하고도 강렬해서인지 9·11 테러 이후 많은 미국인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구호다. 이 구호가 적힌 삐라를 받아든 아만다의 가족들과 마을 주민들은 마른침을 삼킨다. 9·11 테러의 재현을 예감한다.

이 구호의 기원은 1979년 테헤란 미국대사관 인질사태 때 미 대사관을 포위한 이란 군중이 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모든 반미 집회에서 ‘개회선언문’처럼 자리매김했다. 흥미로운 건 반미 선동 선봉에 섰던 당시 국가최고지도자 호메이니의 태도다.

명색이 성직자였던 그는 군중집회에서는 이 저주의 구호를 허용했지만 라디오나 TV 방송에선 금지했다. 어떤 이유로든지 누군가에게 ‘죽음의 저주’를 내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명예롭지는 못한 짓이다.

그런데 이란은 이 살벌한 저주의 구호를 자신들이 만들어낸 게 아니라고 항변한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반미 군중집회에서 김일성이 처음 사용한 것을 차용했다는 게 이란 지도자들의 공식적인 해명이다.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은 주민들의 결속을 위해 미국에게 온갖 저주를 퍼부어댔다. 그래서 온갖 저주의 구호가 북한의 모든 거리와 건물을 뒤덮었다. 그런데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죽음을!’ 정도는 점잖은 편이었고, 최상급의 저주는 ‘미제국주의자들의 각(角)을 뜨자!’였다고 한다. 인류가 고안한 최악의 야만적인 형벌이라는 ‘능지처참(陵遲處斬)’을 그렇게 표현한 듯하다.

실제로 한국인의 ‘저주력(力)’은 ‘벼락 맞아 뒈질 놈’부터 ‘오살(五殺)할 놈(다섯 토막으로 찢어죽일 놈)’ ‘육시(戮屍)랄 놈(죽여 놓고 다시 목을 자를 놈)’까지 참으로 직관적으로 살벌하다. 저주도 그 정도는 해줘야 맺힌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모양이다. 
 

 

이어령 선생의 「푸는 문화, 신바람의 문화(2023년)」라는 책으로 접하는 선생 특유의 통찰력이 흥미롭다. 우리 문화는 맺히고 응어리진 것들이 많아 그것을 풀어야 하는 문화이고, 그래야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는 민족이라고 한다. 소위 ‘해원(解寃)’의 문화다. 우리는 ‘분풀이’ ‘한풀이’ ‘살풀이’ 등등 온갖 풀어야만 할 것들이 많다.

유난히 가슴에 응어리질 일들이 많은 억압과 질곡의 역사를 살아와서인지, 아니면 유난히 맺힌 것은 견딜 수 없는 민족성인지는 알 수 없다. 가끔은 술 퍼마시고 노래방에서 목청껏 노래라도 불러 재껴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는 것도 해원의 민족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탄핵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저주를 쏟아붓는다. 맺힌 것 많아서인지 살벌하기만 하다. 대통령에게 발부된 체포영장을 법원이 승인했다고 ‘판사 참수(斬首)’라는 저주를 외치던 대통령 지지자들이 구속영장까지 떨어지자 급기야 정말 판사를 붙잡아 참수하려고 했는지 법원에 난입해서 모두 때려 부수고 ‘전부 죽여라’ 외치면서 판사실로 돌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언론에서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태라고들 하는데 전대미문은 아니다. 이미 2021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을 도둑맞았다고 그의 지지자들이 미국 의사당을 점거하는 사태가 있었다. 똑같은 ‘극우’의 난동인데 그 무지막지한 미국 극우도 ‘바이든 참수’ 같은 저주를 퍼붓지는 않았다. 

이란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국에 죽음을’이라는 저주의 구호를 외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미국에 풀지 못한 ‘응어리’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미국은 1953년 이란의 석유를 착취하기 위해 배후조종한 쿠데타를 통해 이란 국민들이 가장 사랑했던 모사덱(Mossaddegh) 총리 정권을 붕괴시키고 팔레비 독재왕정을 세워 이란을 미국의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1988년에는 이란 민항기를 페르시아만에서 작전 중이던 미국 순양함 빈센스(Vinceness)호가 전투기로 오인, 미사일로 격추해서 승객 290명을 몰살시켰다. 하지만 미국은 빈센스호 함장을 처벌하지 않고 되레 훈장을 수여했다. 이란이 미국에 한恨 맺힌 저주를 퍼부을 만하다.
 

 

계엄과 탄핵정국 한복판에서 서로에게 퍼붓는 저주가 우리답게 유난히 살벌한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빨갱이/공산세력/간첩’이란 말이 나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세계에서 10번째 부강한 자본주의 사회를 틀어쥐고 있다는 빨갱이와 공산세력이 어디에 있는지도 누구인지도 도무지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하다.

‘빨갱이 판사’를 참수하겠노라고 법원까지 뒤집어버리는 그분들의 망상이 그래서 딱하다. 2021년 미국 의사당에 난입했던 정신줄 놓은 극우세력 170명이 징역 17년~2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라는데 우리는 어찌 될지 궁금하다. 망상은 자유겠지만 망상을 실행에 옮기면 곤란해진다.

만에 하나 ‘계엄성애자’ 대통령이 헌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든, 다른 누군가가 다음 대통령이 되든 모두의 응어리진 마음들을 풀어줘 이런 불행한 광기와 망상의 난동이 더 이상 없기를 소망한다. 그럴 마음도 복안도 자신도 없는 사람들은 감히 나서지도 않기를 또한 소망한다. 그리하여 조금은 신바람 나는 세상이 되기를 또한 소망한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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