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마무리는 뜻밖에도 아만다(줄리아 로버츠 분)의 13살짜리 딸 로즈가 담당한다. 영화 내내 말수도 적고 부모에게 순종적인 착하고 예쁘장한 여자아이다. 당시 최고 흥행 드라마였던 ‘프렌즈(Friends)’에 과몰입 현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 또래 아이들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하면서도 왠지 조금은 독특한 아이다.
![영화 속 딸 로즈는 몰감성의 인간을 보여주는 듯하다.[사진|더스쿠프 포토]](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311/art_17419112324224_f801bc.jpg)
어른들이 모두 패닉 상태에 빠지는 재난 상황에서도 로즈는 무표정하고 감정의 동요도 없고 공포도 느끼지 않는 듯하다. 거의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모습이다. 그런데 영화 마지막에 로즈가 보여주는 그 ‘해탈’의 정체가 드러난다.
재난 상황에서 아만다와 클레이(에단 호크 분) 부부가 집주인 조지와 근심스러운 대화를 나눈다. ‘근처 어딘가에 누군가 재난에 대비한 시설과 준비를 해놓은 집이 있다’는 카더라 통신 같은 이야기를 나눈다.
로즈가 무표정하게 그 대화를 듣고 있다. 다음날 로즈가 실종된다. 어른들의 대화에서 엿들은 ‘그 집’에 가면 혹시 드라마 프렌즈의 최종회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무 말 없이 ‘가출’해버린 것이다. 감독이 부각하는 로즈는 소위 ‘알파 세대(Generation Alpha·2010년 이후 출생자)’다.
사회학자들은 ‘디지털 원어민(Digital Natives)’이자 ‘인공지능(AI) 세대’인 알파 세대들에게서는 아날로그 세상의 인간감성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로즈의 엄마인 아만다는 ‘개인주의’가 특성이라는 밀레니얼 세대다.
아만다의 인간 혐오도 인간의 감성이지만 로즈에게는 그런 혐오의 감성조차 없다. 개인주의적인 밀레니얼 세대는 알파 세대에 이르러서는 아예 ‘몰沒인간’이거나 ‘탈脫인간’의 방향으로 진화한다. 로즈는 가족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무관심하고 무신경하다. 아만다는 인간에게 ‘악플’이라도 날리지만 로즈는 아예 ‘무플’이다.
악플보다 무서운 것이 무플이다. 로즈는 가족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관심을 끊은 채 오직 자신이 욕망하는 프렌즈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 집’을 찾아 나선다. 모두가 공포에 질려 전전긍긍하는 재난 상황도 로즈에게는 프렌즈만 볼 수 있다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홀로 숲속을 탐험한 끝에 로즈는 마침내 그 집을 발견한다. 과연 핵폭탄이 떨어져도 견딜 만한 ‘안전가옥’이다. 무슨 사연인지 집 주인은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로즈는 가족도 그 안전가옥에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은 1도 없다.
![비상계엄 후 아무일도 없었다는 대통령의 생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더스쿠프|뉴시스]](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311/art_17419112319412_bbf590.jpg)
그 집에 비축된 식량으로 혼자 식사한다. 여전히 무표정하다. 그리고 지하로 내려간다. 핵폭발도 견딜 수 있는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선 방에서 마침내 유일한 ‘타깃’이었던 프렌즈 녹화 테이프를 로보캅처럼 찾아낸다.
TV에 테이프를 넣고 다가앉아 프렌즈의 세계로 빠져든다. 여전히 무표정하다. 프렌즈 최종회만 볼 수 있다면 로즈에게는 가족이 모두 사라지고 인류가 멸망한다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프렌즈의 경쾌한 주제곡 멜로디가 흐르면서 영화는 끝난다. 아마도 에스마일 감독은 관객들에게 인류 멸망을 재촉하는 최후의 인간상으로 로즈의 섬뜩한 행태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쯤 되면 로즈는 거의 ‘안드로이드(Android)’급이다. 인간(andro)의 형상을 닮은(eidos) 기계(인공지능)다.
아닌 밤에 홍두깨 식으로 느닷없고 황당한 비상계엄령을 선포해서 탄핵 소추된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나와 “비상계엄령을 내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없던 일로 치자”고 한다. 대통령의 안드로이드 같은 사유체계는 갈수록 그 끝을 가늠조차하기 어려워진다.
그 황당한 비상계엄으로 말미암아 대통령의 사람들인 수많은 관료와 장군들은 인생을 송두리째 날릴 위기에 몰렸고, 온 나라와 국민들이 혼돈 속에 빠졌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대통령직을 계속 수행하겠다고 한다.
안드로이드에 가까운 알파 세대 13살짜리 소녀 로즈처럼 섬뜩할 정도로 몰인간적이거나 탈인간적이다. 로즈가 프렌즈만 볼 수 있다면 세상이 뒤집어져도 상관없는 것처럼,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측근들이 모두 감방에 가고 나라에 망조(亡兆)가 들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영화로도 여러 차례 만들어진 독일 작가 레마르크(Erich Maria Lemarque)의 불후의 반전(反戰)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1929년」의 마지막 페이지는 독자들의 머리를 때린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와 독일은 북부 프랑스 ‘서부전선’에서 서로 불과 몇 백미터(m) 남짓의 땅을 더 빼앗겠다고 혹은 빼앗기지 않겠다고 사생결단의 참호전을 벌이면서 300만명이 죽어갔다.
![권력자들이란 본래 안드로이드 같은 것이어서 그들에게 국민의 생명과 재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311/art_17419112316289_eb236a.jpg)
1918년 어느 날도 교착상태에 빠진 채 무의미한 포격과 돌격이 무한반복된다. 그날 소설의 주인공도 참호 속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는다. 그런데 그날 독일 베를린 사령부의 일지에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단 한 줄만 기록된다.
베를린 사령부에 포진한 안드로이드 같은 권력자들에게 서부전선이 무너지지 않는 한 하루에 수백 수천명의 독일 젊은이들이 죽어가도 아무 일 없었던 하루로 입력된다. 권력자들이란 본래 안드로이드 같은 것이어서 그들에게 국민의 생명과 재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안드로이드 대통령실 일지에도 비상계엄을 발령한 2024년 12월 3일은 ‘오늘은 아무 일 없었음’으로 기록됐는지도 모르겠다. 수백수천의 젊은이들이 서부전선에서 포탄에 갈가리 찢겨 나간 날도 전쟁에 미친 권력자들에게는 ‘서부전선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로 인식될 뿐이라는 레마르크(Lemarque)의 1929년 고발문학이 전세계에 전쟁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듯이, 온 나라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고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안드로이드 같은 대통령의 정보 처리가 정치를 혐오하게 한다.
법원의 구속취소 결정과 검찰의 즉시항고 포기로 온 나라가 더욱 어지러워진 오늘. 대통령은 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