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법장치가 고장나 ‘인공 뇌’가 사라진 초대형 유조선이 항구가 아닌 휴양지 백사장에 올라온 사건을 신호탄으로 영화 속 ‘초연결(hyper connectivity) 사회’는 붕괴하기 시작한다. 테슬라 공장에서 수백대의 하얀색 테슬라 자동차들이 뇌 없이 ‘자율적’으로 뛰쳐나와 뇌 없는 질주 끝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추돌해 고속도로를 막아버린다. 뇌 없는 테슬라들이 재난을 피해 뉴욕으로 돌아가려는 아만다(줄리아 로버츠 분) 가족의 피난길까지 막아버린다.
무뇌의 자율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샘 에스마일 감독은 무책임한 자율주행 타령으로 돈벌이하는 일론 머스크가 어지간히 못마땅한 모양이다. 이제 지구는 다 파먹고 다 망가졌으니 지구 환경 지킬 생각 말고 자기 회사 ‘스페이스 X’의 우주선을 타고 화성 파먹으러 떠나자는 머스크가 만드는 테슬라를 지구종말의 상징처럼 배치한다.
땅에서는 뇌 없는 머스크의 테슬라들이 발작을 일으키고, 하늘에서는 아마도 출발할 때는 있었던 뇌가 운항 중에 사라져버린 무뇌 여객기가 ‘자율적’으로 공항이 아닌 해변에 좌표 찍고 머리부터 착륙해버린다.
백사장을 시체들이 뒤덮는다. 해변에 나뒹구는 시체 중에 기장의 모습도 보이는 것으로 짐작했을 때 뇌가 멈춰버린 여객기는 그러지 말라는 기장의 말도 거부한 모양이다. 무뇌들은 누구의 말도 안 듣는다.
인터넷은 물론, TV와 전화까지 먹통이 돼버린 세상에서 유일한 통신사는 ‘카더라 통신’이다. 무뇌 테슬라들이 탈출로까지 막아버려 롱 아일랜드 휴양지에 갇힌 주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카더라 통신을 주고받으며 불안만 가중된다. 클레이(에단 호크 분)가 용기를 내서 차를 몰고 나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에 나선다.
두리번거리며 운전하는 클레이 앞에 하늘에서 ‘삐라’가 눈처럼 쏟아진다. 차를 멈추고 한장 주워보니 알 수 없는 아랍어가 적힌 ‘삐라’다. 이를 들고 돌아온 클레이는 아랍어를 읽을 줄 아는 주민을 찾는다. 다행히 그런 사람이 있다. 그 주민은 해당 아랍어가 “‘미국에 죽음을’이라는 뜻 같다”고 말한다. 썩 믿음직스럽지는 못하고 믿거나 말거나다.
모두 이 모든 사태가 ‘이슬람’의 공격인 듯하다고 짐작하는데, 또 다른 주민은 어디선가 한국어로 ‘미국에게 죽음을’이라고 쓰인 삐라를 봤다며 새로운 카더라 통신을 전한다. 천조국 미국에 악마화한 공포의 대상으로 이슬람과 함께 ‘김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등장하니 보는 마음이 복잡해진다.
감독은 우리가 근거도 없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신뢰하는 초연결 사회는 이처럼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취약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이 사이버 테러를 당하고 있다고 짐작만 할 뿐, 누가, 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공격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감독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가 더욱 공포감을 준다. 9·11 테러처럼 ‘아날로그적’으로 비행기를 몰고 세계무역센터를 들이박고, 100층짜리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욱 두려운 일이다.
12월 3일 밤 전 국민이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 쯤으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대통령의 ‘비상계엄 포고’를 접했다. 흔한 ‘타임 슬립’ 드라마의 기발한 장면처럼 느껴졌던 순간이기도 하다.
평양 금수산 궁전을 점령하고 김정은이나 체포해야 할 ‘스타워즈(Star Wars)’의 악당 ‘다스 베이더’ 복장을 한 대한민국 최정예 공수부대가 헬기 타고 난데없이 국회의원 체포하겠다고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난입하는 모습도 봤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의 윈도 PC에 이어 블루 스크린이 뜨는 ‘블루 스크린 쇼크’를 경험하고 있다. 초연결 사회 붕괴의 상징이 ‘블루 스크린’이라면, 비상계엄령은 민주주의의 붕괴를 상징한다. 영화 속에서 초연결 사회가 무너지고 인터넷 화면이 텅 빈 블루스크린이 돼버린 것처럼, 12월 3일 밤 이후 우리 민주주의는 한순간 붕괴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믿어라 했던 민주주의 시스템이라는 게 사실은 초연결 사회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부실하고 취약하기 짝이 없으며 언제든지 붕괴할 수 있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 놓은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을 맡겨놓았던 우리 대통령이 가끔 왠지 무능, 무지, 무도. 무모, 무례해 보인다고 수군거렸는데, 혹시 무상무념은 아니었는지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이 설명가능하다. 생각이나 철학이 의심스러운 사람도 국가최고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게 민주주의라는 부실한 시스템이다.
영화 속에서 항법장치가 고장 나 뇌가 없는 유조선이 태연하게 백사장으로 저벅저벅 걸어 올라오고, 여객들을 가득 태운 뇌 없는 여객기가 공항 활주로가 아닌 백사장에 고꾸라지는 것처럼 대통령이란 사람이 ‘반국가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겠다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안타까운 건 이 사태를 이미 ‘12·3 쿠데타’로 규정했음에도 그 주모자들이 스스로 내려오지 않거나 그 추종자들을 끌어내리지 않는다면 쉽게 단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역시 우리 ‘민주주의 시스템’의 모습이다. 그만큼 속 터지게 부실하고 불안정한 것이 민주주의 시스템이다.
‘초연결’이든 ‘민주주의’든 모든 시스템이라는 것은 전지전능한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것이기에 당연히 부실하고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슬프지만 우리 모두 결코 믿을 수 없는 시스템들을 믿어야 하는 딱한 세상에 살고 있다.
대규모 정전사태가 발생하면 으레 혼란 통에 뭐 하나라도 날로 주워 먹겠다고 상점으로 몰려가는 하이에나들이 있기 마련이다. 민주주의의 대규모 정전이 발생한 사태 속에서도 ‘이참에 뭐 좀 챙길 게 있을까’ 하고 머리와 눈알을 굴려가면서 헌법과 민주주의 시스템의 이름으로 깨알 같은 헛소리를 진지하고 엄숙하게 늘어놓으며 부지런 떠는 하이에나 같은 ‘정치쟁이’들도 숱하다. 이런 모습이 참담함에 참담함을 더한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