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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조커(5)

아서(Arthur)가 출근하는 곳은 어릿광대 인력사무소다. 직장동료들을 만나는 장소라기보단 인력시장에서 일감을 기다리는 대합실에 가깝다. 자주 보는 사이지만 “Hi” 한마디 외엔 달리 섞을 말이 없다. 복잡한 도시는 사람으로 넘쳐나지만 아서에겐 아무도 없다. 그래서 더 외롭다. ‘생리적 욕구’나 ‘안전 욕구’보다 양보하기 어려운 게 사회적 욕구라는 점을 감안하면 위험한 징후다.

 

 

집에 돌아왔을 때 아서를 기다리는 건 침대에 몸져누운 홀어머니뿐이다. 불행하게도 아들의 따뜻한 저녁을 해놓고 기다리는 ‘엄마’가 아니다. 오히려 아서가 챙겨야 하는 ‘짐’이다. 아서는 퇴근해서 돌아와 기계적으로 그다지 사랑스럽지 않은 반려견에게 개밥 깡통을 하나 따서 놓아주듯, 어머니 침대에 저녁식판을 가져다놓고 옆에 앉아 멍하니 TV를 본다.

 

하루 종일 혼자 빈집에서 TV만 보던 ‘엄마’는 아서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뜬금없는’ 화제만 던진다. 건성으로 대답하기도 지친다. 죽도록 외롭다. 얼핏 아서의 나이는 족히 40쯤 돼 보이지만, 아내와 자식도 없고, 아내가 있어본 적도 없는 듯하다. 언감생심 아내나 연인은 고사하고 ‘여자’ 하나 없다. 칙칙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자’와 어떻게 어떻게 ‘관계’를 맺어보지만, 그것도 그뿐 ‘연인’도 ‘친구’도 아니라는 것을 이내 깨닫는다. 참담하도록 외롭다.

 

1940년대 사회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가 제시한 ‘욕구 5단계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의 욕구는 생리적 욕구→안전 욕구→사회적 욕구→존중 욕구→자아실현 욕구로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멈추지 않는다. 배고픔을 면하면 안전이 걱정되고, 안전을 확보했다 싶으면 사람과의 관계에 목마르고, 사랑을 얻었다 싶으면 남들로부터 존경받고 싶어진다.

 

 

남들로부터 인정과 존경까지 받으면, 드디어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자아’에 대한 블랙홀 같은 번민에 빠진다. 도무지 만족하고 행복할 ‘틈’이 없다. 아서는 입에 풀칠 정도는 하고 어찌어찌 비바람 막아줄 허름한 아파트 한채도 있으니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는 대강 충족된 듯하다. 하지만 그는 금세 무시무시한 계단과 마주친다. ‘사회적 욕구’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없다. 아서에게 그 고통은 배고픔이나 노숙보다 쓰라리다.

 

배고프고 집이 없어 자살하지는 않지만, 외로우면 자살한다. 우리도 1950년대 1960년대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에 자살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지금처럼 먹고살 만한 시절에 들어서면서는 하루에 수십명씩, 그것도 청년들이 스스로 삶을 포기한다. ‘사회적 욕구’의 결핍은 그만큼 고통스러운 것이다.

 

아서는 폭주 기관차같이 거침없는 살인행각을 시작하면서, 어릿광대 인력사무소에서 자신을 기만했던 동료를 ‘처단’한다. 그러나 난쟁이 동료는 살려보낸다. 자신을 죽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는 난쟁이에게 아서는 “너는 이 세상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고 말한다. 아서의 삶은 자신의 주변에서 자신에게 해코지만 안 해도 ‘친구’로 인정할 만큼 스산한 것이다. 무척이나 슬픈 장면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1대 총선이 끝났다. 여야의 승패를 놓고 원인 분석이 쏟아진다. “국민이 개돼지인 줄 아느냐?”는 말이 이번 총선 과정에서 이곳저곳에서 들렸던 듯하다. 산업화 세력은 국민들에게 매슬로 식으로 말하자면 생리적 욕구와 안전욕구가 대강 충족된 “등 따습고 배부르면 된 거 아니냐?”고 묻고 “앞으로도 우리가 너희들을 계속 등 따습고 배부르게 해주겠다”고 제안한 듯하다.

 

여기에 국민들은 “우리가 개돼지냐?”고 대답한 듯하다. 먹고사는 것도 물론 중요하고 신체와 재산의 안전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게 됐고, 이제는 모두 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만인 ‘개돼지’가 아닌 ‘인간적인 삶’을 욕구한다. 인간의 ‘사회적 욕구’의 결핍은 어쩌면 ‘생리적 욕구’나 ‘안전 욕구’보다 더욱 참을 수도 양보할 수도 없는 욕구일지도 모르겠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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