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숨가쁘게 돌아가는 ‘고담’시에서 아서는 혼자는 끼니도 해결 못하는 홀어머니와 허름하고 쇠락한 아파트에서 단둘이 살아간다. 무인도와 같은 삶이다. 어머니가 어느날 “사람들이 어느 시장 후보가 참 좋다고 하더라”고 아서에게 말한다. 아서는 ‘누가 그러더냐? 엄마하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느냐?’며 시큰둥해 한다.
어머니는 “TV에서 그러더라”고 방어한다. 딱한 장면이다. 아서가 하는 일이라곤 일용직 광고홍보맨을 파견하는 사무실에서 소개해주는 업소나 행사장에 찾아가 ‘광대’ 분장을 하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는 게 전부다. 그런 아서의 초라한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의 투명인간에 가깝다.
영화는 우울한 투명인간 아서가 그에게 어울릴 법한 허름한 보건소 사무실에서 권태로워 보이는 의사에게 우울증을 호소하며 처방약을 늘려줄 것을 부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의사는 아서의 부탁이 영 마뜩지 않은 표정이다. 쓰레기 수거 예산도 부족해서 쓰레기 대란이 일어난 마당에 ‘공짜약’ 타먹는 ‘취약계층’ 환자가 한정된 시 예산으로 구입해야 하는 우울증 약을 더 달라 하니 못마땅할 수밖에 없겠다.
고담시 보건소는 애초에 아서 같은 환자들의 ‘우울증’을 고쳐줄 마음도 계획도 없다. 다만 아서의 우울증이 사회파괴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만 ‘관리’해 줄 뿐이다. 아서가 너무나 우울해서 죽어버린다고 해도 개의치 않을 듯하다. 그런 아서의 고질적이고 심각한 ‘우울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기적이 발생한다. 아서는 사무실에서 해고당하고 광대 분장을 한 채 우울하게 귀가하던 중, 고담시의 인적 드문 심야 지하철에서 고담시 소외된 계층의 ‘공공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증권맨’ 3명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살한다.
당연히 고담시는 발칵 뒤집힌다. 2008년 금융위기 때처럼 탐욕스러운 월가 금융사의 농간에 집과 전 재산을 날리고 길거리로 내몰린 소외계층은 발칵 뒤집힌다. 수많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내가 조커다’고 외치는 것처럼 조커의 가면을 만들어 쓰고 거리에 나타난다. 반면에 속이 뜨끔한 ‘가진 자’들은 불안해서 또 발칵 뒤집힌다.
아서는 집에 돌아와 ‘지하철 광대 총격 살인사건’으로 뒤덮인 뉴스를 유심히 살핀다. 보통 살인범이라면 자신이 저지른 범죄로 세상이 뒤집히면 극도로 불안해질 텐데, 아서는 반대로 점점 생기가 돈다. 형사들의 수사가 턱밑까지 조여오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아서는 살아오면서 한번도 누구의 특별한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 한순간 세상이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 못견뎌하고 온갖 추측을 쏟아낸다. 아서는 난생처음 그토록 목말라했던 ‘자존감’과 ‘살아 있음’을 느낀다. 더 이상 우울하지 않다.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는 대신 오히려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한다. 토크쇼에 출연하러 가면서 가장 정성 들여 광대 화장을 하고, 가장 화려한 정장을 차려입는다. 긴 계단을 내려가며 기쁨과 자긍심으로 가득 찬 ‘아서의 댄스’를 선보인다. 그리고 토크쇼 생방송에서 자신이 바로 지하철 증권맨 살인자임을 ‘커밍 아웃’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악플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무플’이라고도 한다. 아서도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는 것을 절감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는 남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는 ‘인정욕구(Thymos)’라고 파악한다. ‘양지’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음지’에서라도 인정받기를 원한다. 언젠가 청소년들의 ‘장래 희망’ 중에서 ‘조폭 보스’가 상위권에 오른 적이 있다고 한다. ‘양지’에서 공부로 인정받을 길이 막히면 조롱당하거나 투명인간 취급받느니 차라리 ‘음지’의 세계에서라도 인정받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이다.
익명성 뒤에 모습을 감춘 채 벌이는 ‘패악’과 막말, 욕설이 도를 넘나든다. ‘무플’보다는 ‘악플’이 차라리 나아서 그러는지도 모르겠고, ‘음지’에서라도 관심받고 그 ‘악마성’이라도 인정받고 싶어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무엇이든 아서의 모습처럼 측은하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