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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인생의 제3장은 해녀로 열고 싶은 소망

 

이상하게도 물질 수업을 할 때마다 간혹 오영수의 소설 ‘갯마을’의 주인공인 해순(海順)이를 떠올리게 된다.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바닷바람에 그을리고 조개껍질을 만지작거리면서 갯냄새 속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제주에서 원정물질을 떠나 부산 근처인 기장에서 물질을 하다가 결혼을 해서 해순이를 낳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않자 혼자서 물질로 딸을 키웠다.

 

그 딸이 열아홉 되던 해에 시집을 보내고 나서, 그녀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고향인 제주도로 떠나버린다.

 

해녀의 인생도 모전여전으로 대물림되는 것일까? 해순이의 남편도 원양어선을 타고 고등어잡이를 나갔다가 그만 풍랑을 만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스물셋의 청상인 그녀는 재혼을 하게 되고, 산골 마을에서 콩밭을 매다가 바다가 보고 싶어서 산으로 마구 올라간다.

 

수숫대가 미역발 같고 콩밭이 바다처럼 보이는 해순이를 두고 동네 사람들은 매구혼이 들었다며 수군댄다. 결국 바다귀신을 쫓아내야 제정신이 돌아온다며 무당이 굿을 하는 사이, 그녀는 마을을 빠져나와 갯마을로 달려간다. 때마침 멸치떼가 들어와서 비릿한 갯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가는 갯가에 서서, 그녀는 퍼뜩 하니 제정신이 든다.

 

해순이처럼 나도 상군 해녀인 어머니를 따라 바다에서 물장구 치고 보말을 잡으면서 물질을 배웠다. 12살이 되자 어머니는 태왁과 물옷(소중이), 수경 등속을 챙겨서 동네에서 몇 안 되는 애기좀수의 대열에 끼워주셨다. 중문동 주상절리의 동쪽에 펼쳐져 있는 대포 바당이 우리들의 놀이터이자 일터였다.

 

그곳에서 나는 16살까지 물질을 배웠다. 바당밭의 지도를 거의 외울 정도로 우리는 마을 동쪽의 큰엿도에서 서쪽의 지삿개(주상절리)의 지경을 넘나들며 해녀의 기량을 익혔다. 그때는 보말은 물론 소라와 오분작이 흔했고, 운수 좋은 날에는 문어와 전복도 잡을 수 있었다.

 

우리는 대포바당에서 내노라 하는 일등 애기좀수가 되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좋은 물질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물질은 사람이 할 게 못 된다’며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칠성판을 등에 지고 목숨을 내놓고 하는 게 물질이라면서, 어머니는 당신 세대로 끝내야할 직업이라 하셨다.

 

하지만, 나의 물질에 대한 향수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쓸쓸하거나 서러움이 밀려올 때면, 마치 산골에 갇힌 해순이처럼 바다가 그리워졌다. ‘상군 해녀인 어머니의 절반 정도만 살아도 이 정도 인생사는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물질이 하고 싶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물질에 대한 그리움은 마치 지병처럼 깊어갔다. 얼마나 물질이 하고 싶은지, 수영장에서 자유형을 하다가도 불쑥 잠수를 하고 들어가 바닥을 기었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 해녀병 때문에 바다가 마당인 짐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런데 해녀들이 물질을 하는 모양을 무시로 보게 되니, 물질이 더욱 더 하고 싶어졌다. 그 이룰 수 없는 꿈 때문에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바다에 들어가서 정강이를 적시며 보말도 잡아보고 미역도 캐보지만, 물 밑으로 잠수해 들어갈 수 없으니, 그저 애만 더 탈 뿐이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드디어 법환좀녀마을 해녀학교에 입학하던 날, 해녀 선생님의 만담과 노래를 들으면서 그와 같이 해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억센 기질과 정겨운 익살이 도시생활에 찌든 내 마음에 유쾌한 치유감을 주었다. 범섬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의 짠 맛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29명이 6조로 나뉘어 각각 해녀 선생님의 지도하에 물질수업을 배웠다. 그야말로 도제식 수업처럼, 선생님의 물질 시연을 관찰하고 따라하고 교정받는 식의 실습이었다. 실습 둘째 날, 선생님은 나에게 ‘니는 우리랑 같이 물질을 해도 작업이 되겠다’는 덕담을 해주셨다.

 

물질을 실습하는 동안에도 나는 소라를 잡고 성게를 잡아야만 실감이 났다. 그냥 하는 연습은 도무지 신이 나지 않았다. 다만 태왁을 짚고 호∼이 하는 숨비 소리를 내지르면서 수평선을 바라볼 때는 가슴 속이 다 시원해졌다. 수평 선 너머에서 나는 하염없이 바다를 유영하는 제주해녀가 되었다.

 

천상, 나는 해녀를 직업으로 삼아야만 하는 진짜 제주여자인 듯싶다. 하지만, 정작 물질을 너나없이 잘 하는 우리 흑조의 혜연, 현경, 소영이는 모두가 육지 출신들이다. 젊고 예뻐서, 신세대 해녀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모델들이다. 이들이 물질을 좋아하는 건, 그야말로 운명적이지 싶다.

 

이 물의 여신들을 보고 있노라면, 해녀는 타고나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어쩌면 우리 해녀학교 1기생들은 모두가 타고난 해녀들일 게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주말마다 비행기를 타면서 법환바다로 달려올 수 있단 말인가.

 

내일은 대망의 졸업식이다. 80시간의 해녀수업을 회고해 본다. 제주해녀가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려면 지속가능성이 담보되어야 한다던 해녀박물관의 수업이 생각난다. 70∼80대가 대부분을 이루는 우리 해녀 삼춘들의 이 세대가 끝나버리면, 제주해녀의 역사가 교과서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으리라.

 

그러면 제주해녀는 명맥이 끊기고, 그야말로 죽은 유산이 되어 그 빛이 금세 바래버릴 것이다. 이 점에서라도, 우리의 해녀 꿈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리라.

 

문득, 교장선생님과 해녀선생님들의 열정이 가슴 뜨겁게 솟구쳐 오른다. 이 분들과 내 생의 끝자락을 함께 잇대고 싶다. 그 억척스런 삶의 자세와 부드러운 정을 마음껏 느끼며, 인생의 후반부를 사람 냄새 풍기면서 보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내 가지 않은 이 길을 조심스레 다시 걸어가 보고 싶다.

 

이제는 제주 해녀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시간이다. 갯마을의 해순이가 아니라 법환마을의 해녀학교 1기생이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때다.

 

졸업식을 시작으로 인턴십이 열리기를 소망하며, 내 어머니의 물질을 사랑하리라. 내 인생의 제 3장은 해녀로 열고 싶다.

 

새 날이다. 어서 해녀의 꿈을 꾸자. 하늘이여, 나의 이 꿈을 이루어주소서, 내 생의 마지막 장은 제주 해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했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 2기를 수료, 다시 시작하는 해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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