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정옥/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 어머니가 편찮으시다. 요양원의 주간 보호 버스를 타러 나가다 넘어져서 다리를 크게 다치셨다. 대퇴부 골절이라니, 얼마나 아프셨을까? 올해 나이 95세. 올 겨울을 우리와 함께 무사히 보내게 해달라는 기도가 일상이 되었다. 오늘도 대문 앞에 나와서 망연자실 바다를 바라보시는 어머니. 수척해진 얼굴 위로 저물어가는 햇살이 슬그머니 내려앉는다. 오늘 따라 어머니의 안색이 몹시도 쓸쓸하다. “날이 볽암시냐, 어두웜시냐(밝고 있느냐, 어둡고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어머니의 음성이 파도소리에 묻혀서 사그라진다. “날 더 볽으민 이 고추, 종택이 어멍한테 갖다 주라이!” 하는 어머니 손바닥에서 붉은빛 도는 고추 대여섯 개가 시들거린다. 며칠 동안 손안에서 애지중지 주물러진 모양새다. 종택이 어멍은 어머니의 조카다. 갈치 잡으러 갔다가 태풍으로 사라진 남편의 시신을 한평생 가슴에다 끌어안고 살았다. 종택이 아방은 마을에서 일등 가는 인물이었다. 생김이나 배움 뿐 아니라 성격과 재주까지도. 세 살 된 딸과 유복자로 낳은 아들을 물질로 키우면서, 그녀는 남몰래 술을 홀짝
나이 50에 새로운 직장을 찾아 서울로 떠나야 했다. 그것은 어쩌면 17세에 육지로 원정물질을 떠났던 내 어머니와 비슷한 행로였다. 새로운 경험에 대한 호기심,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삶에 대한 책임감이 가슴을 짓누르는 여정이었으니까. 서울 생활은 좀처럼 친숙해지지가 않았다. 마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하였다. 거미줄처럼 복잡한 지하철, 하늘을 가리는 마천루, 복잡한 명동과 화려한 강남 거리를 당당하게 헤쳐 가는 사람들이 그토록 생소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 전에 그 도시로부터 쫓겨난 내 할아버지의 심경이 나에게 투영되어 은밀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돌, 바람처럼 대자연에 익숙한 제주여자다. 나의 할아버지인 송암공 허손(許愻)은 고려말에 대제학의 자리에 있다가, 조선이 건국될 때 제주도로 귀양 오신 분이다. 그 바람에 나는 입도 24세 손, 제주에 들어온 지 600년을 훌쩍 넘긴 제주인이 되었다. 요컨대 제주의 DNA가 뼛속까지 녹아 있는 원주민이란 얘기다. 그 때문에 그렇게도 서울과 궁합이 맞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서울살이가 그
이쯤에서 정말 정직해지고 싶은 것은 은연중에 간과되어진 우리만의 불편스런 진실이다. 제주해녀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목전에서도 우리는 자명하게 예고된 해녀할망들의 안전사고를 차단할 수 없는 걸까? 한 해에도 열다섯 명 씩 작업 현장에서 스러지는 세계 유산이라면 정녕 인류의 유산으로서 지속적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건가? 어렸을 적 우리 동네에서도 해녀들의 조업 중 사망사고는 잊을 만하면 발생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였다. 하루는 물질 잘하기로 소문난 상군 해녀가 커다란 전복을 떼다가 그만 물숨을 먹고 말았다. 곧 결혼하기로 되어 있던 그녀의 약혼자는 온 동네가 잠기도록 목을 놓아 통곡했다. 오열하는 그를 부둥켜안고서 마을 사람들도 함께 눈이 붉도록 울었다. 그 슬픔은 사람들 가슴속에 깊숙하게 스며들어서 오래토록 바다로부터의 아픈 기별을 막아주는 기도가 되었다. 해녀들은 서로의 슬픔을 보면서 바다를 조심스레 대했고, 그로 인해 사고는 한동안 동네 바다에서 멀리 떠나갔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녀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한다. 슬픔에 잠겼던 마을 사람들의 눈빛과 죽음 앞에 엄숙했던 어른들의 표정도. 해녀를 어머니로 둔 자식들의 제 1 걱정
이 점에서 2017년 1월 1일 새벽 0시20분(한국시각)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무형유산위) 회의의 심의에서 ‘제주 해녀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공식 등재된 점은 제주해녀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낭보이지 않을 수 없다. 이로써 ‘제주 해녀문화’는 한국의 19번째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되었다. 문화재청에 의하면 무형유산위가 ‘제주 해녀문화’의 등재를 확정하게 된 기본토대는 ‘지역의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하고, 자연친화적으로 지속가능한 환경을 유지해왔으며, 관련 지식과 기술이 공동체를 통해 전승된다’는 점에 있다. 사실 전 세계적으로 희소가치가 있는 제주 해녀들의 고유한 공동체 문화를 보존하고 전승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제주도에서는 2011년부터 제주해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해 왔다. 지금까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현황을 보면 2015년말 기준, 전 세계적으로 119개국 342건이 등재돼 있다. 우리나라는 종묘제례, 강릉단오제, 처용무, 제주도의 칠머리당 영등굿 등 18건이 등재돼 있다. 여기
사실 보목바다는 비교적 오염이 많은 편이다. 서귀포시 동쪽을 담당하는 동부하수처리장이 마을 동편에 들어서 있다. 이곳의 바다는 더 이상 해산물을 채취할 수 없는 오폐수지대다. 게다가 제법 규모가 큰 양식장이 세 개나 있다. 양식장의 사료 찌꺼기와 항생제 등이 섞인 배출수가 연안바다를 오염시키는 주역이다. 400여개가 넘는 양식장들이 제주섬 전체를 둘러서서 오염물을 바다로 내보내는 실황을 상상해 보라. 실제로 그 하류에 서식하는 소라들을 관찰해 보면, 미끈거리는 오물들을 온통 뒤집어쓰고 숨조차 쉬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다. 때로는 껍데기에 뾰족뾰족 솟은 살들이 다 닳아서 대머리처럼 매끈거리기도 한다. 이러한 대머리 소라는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기형들이다.미역이나 청각에도 끈적거리는 오물들이 달라붙어서 도무지 먹을 수가 없다. 보말들은 전신에 오물덩어리인 혹들을 붙이고 있어서 식용은커녕 만지기도 끔찍하다. 설상가상으로 마을 중심을 흐르는 하천에서 흘러들어온 민물이 간간이 소라를 폐사시키기도 한다. 이곳은 수경이 아롱거려서 물질하기도 불편하고, 물이 차가워서 소라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어장의 사각지대다. 어디 그뿐인가. 포구를 중심으로 해서 성창이나 갯
제주도 속담에 ‘보목동 강아지는 눈이 오면 짖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기온이 따뜻하단 얘기다. 겨울에도 여간해서는 눈이 내리지 않으니, 강아지 생애에 몇 번이나 눈을 목격해 볼 것인가? 그러니 어쩌다가 눈가루라도 날리면 ‘이 무슨 난린가’ 싶어서 요란하게 짖어대는 것이리라. 이렇게 따뜻한 겨울을 지낸 보목동 감귤은 차가운 바닷바람에 잘 절어져서 새콤함과 달콤함이 천상의 궁합을 이룬다. 게다가 껍질이 단단하게 여물어서 저장도 그만인 탓에 한 번 먹어본 사람들은 단골을 자처한다. 그래서 보목동은 감귤수확이 12월에 집중된다. 조금이라도 햇볕과 바람을 더 쬐어서 단맛이 속살 깊은 곳까지 스며들게 하려는 연유다. 그러므로 1월이 되면 보목동 바다는 해녀들의 소라채취로 부산해진다. 겨울 기온이 제주의 다른 지역보다 2∼3도 높은 곳이라 눈이 내리는 날에도 해녀들은 바다로 나간다. 어쩌면 눈 내리는 날의 물질은 비장해서 더 아름다운 풍경이기도 하다. 섶섬을 배경으로 해서 감귤색 태왁들이 점점이 흩어지면 은은한 평화로움마저 느껴진다. 내게는 봄이나 여름보다 한층 더 물질이 그리워지는 때다. 망실이가 미어지게 잡은 소
해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 우리는 해녀축제의 일원으로 공식적인 초대를 받게 되었다. 2015년 10월 3일, 해녀학교 졸업생으로서 첫 번째 참가한 제 8회 해녀축제는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제주해녀박물관에서 열렸다. 우리는 아침 8시에 열리는 식전행사, ‘신명나는 해녀 퍼레이드’에 참가하기 위해 아침 일찍 서귀포를 떠났다. 세화리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길었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참이니 이왕이면 해안도로를 따라 천천히 유람하면서 가기로 하였다. 50년이 넘도록 물질을 해 온 어머니는 93세란 나이가 무색하도록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해녀들을 위해서 도지사가 특별히 차려놓은 잔치자리에 간다는 소리에, 어머니는 ‘해녀가 무엇을 했다고, 그 높은 지사님이 우리를 부르시냐.’ 면서 은근히 기뻐하셨다. “어머니, 이 세상에서 해녀는 가장 훌륭한 어머니세요!”라고 소리치는 나의 등 뒤에서, ‘나는 자식들 고생시킨 죄밖에 없다’시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내 옆에 앉아 있던 강원장이 어머니를 돌아보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 “제주도 어머니들은 다 똑같으시네요.
영화를 찍는 사이에 겹치기로 TV에 출연하는 호사가 생겼다. KBS ‘다큐멘터리 3일’이라는 프로그램이 해녀학교 졸업생들의 인턴십 취재를 제안해 온 것이다. 제주해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제고하고, 법환 해녀학교를 전국적으로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이 점을 받아들인 학교가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독려해서 3 팀을 선정하였다. 먼저 대한민국에 아침을 알리는 일출봉과 가까워서 자연스럽게 이목을 끌 수 있는 성산읍 신풍리의 인턴 3인방이 뽑혔다. 이들은 입학 때부터 활달하고 씩씩해서 어촌계가 키우는 차세대 해녀로 알려진 인재들이었다. 토박이 신순이가 육지에서 온 향규와 미현이를 보듬고서 우정을 자랑하는 드림팀이기도 하였다. 특히 유명 미대를 나와서 바다를 그리며 물질을 배워가는 미현이의 물질담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만 하였다. 그리고 남원에 있는 망장포에서 최연소 해녀 인턴으로 영입된 소현이가 빼어난 미모와 실력으로 이목을 끌었다. 스쿠버 다이빙으로 단련된 소영이는 벌써 프로해녀의 기질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그녀는 해녀학교에서 나와 같이 흙조를 이룰 때에도 발군의 실력을 빛내던 스타였다. 게다가 한 동네에 사는 해남(남자해녀)이 소현
해녀학교를 졸업했지만, 졸업장에 남아 있는 온기가 우리를 학교 주변으로 모여들게 했다. 학교가 워낙 아름다운 범 섬 앞에 위치해 있어서 경치가 그만이었다. 범 섬은 멀리서 보면 큰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북쪽으로 급경사의 깎아지른 듯 한 해식애를 뚫고 일명 호랑이 콧구멍‘이라 불리는 쌍둥이굴이 있다. 하지만 해녀할망들은 제주도를 창조한 설문대할망이 한라산을 베개 삼고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워서 오백 아들을 낳을 때마다 두 발로 걷어차서 뚫어진 굴이라 믿는다. 어쨌든 이 섬이 있어서 더 신비스런 해녀학교 앞바다는 제주도의 그 어느 곳에서 이런 풍경을 찾아볼 수 있을까 싶게 아름다운 곳이다. 게다가 학교에는 추억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우리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여느 카페처럼 아늑하고 다정스런 구석이 많은데다가 커피가 공짜였다. 우리는 교실에 모여서 담소를 나누다가 의기가 투합하면 실습장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졸업생에게 주어지는 50% 할인 특전은 다른 체험객들과 구별되는 만족감과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미안한 얘기지만, 그 자부심의 근저에는 홈그라운드가 안겨주는 우월감이 출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환경과
해녀학교에서의 물질수업은 조별로 이루어진다. ‘흙조’라 이름 붙여진 우리 조는 5명으로 구성되었다. 나를 빼고는 모두 20∼30대 젊은 해녀들이다. 스쿠버 다이버를 남편으로 둔 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물질을 처음 배우는 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물질의 기량이 다르게 나타난다. ‘물질도 타고 나는 법’이라는 해녀 선생님의 말씀처럼 저마다 소질과 역량이 다른 셈이다. 잘 하는 친구는 선생님이 잠수법을 가르쳐 주자마자 ‘척 하면 삼천리’처럼 물속에 들어가서 돌멩이를 건져 올린다. 반면에 잘 못하는 친구는 아무리 반복해서 가르쳐 주어도 물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태왁 주위에서 맴돈다. 애저녁에 겁을 집어 먹고서 감히 머리를 물속으로 집어넣지 못한다. 물을 먹을까봐 머리를 쳐들면서 용을 쓰다가는 오히려 장난스럽게 달려드는 파도의 물세례에 연거푸 물을 먹고 만다. 하푸하푸 하면서 물 위에서 퐁당대다가 용감하게 물속으로 들어가는가 싶으면 어느새 금방 물위로 솟구쳐 오른다. 오죽하면 선생님이 어깨를 붙잡고서 물속으로 함께 들어가 주실까. 그래도 안 되는 친구는 돌멩이가 가득 들어 있는 망
해녀학교에서 물질실습을 할 때 선생님으로부터 가장 먼저 듣는 말은 ‘혼자서 물에 들지 말라’는 당부이다. 물질은 절대로 혼자 하면 안 되는 공동 작업이며 단체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습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도 우선 조를 짜고 조장을 뽑아서 물질조직을 갖췄음은 물론이다. 물질의 속성이 위험을 내재한 것인 만큼 적어도 두 세 명이 함께 물질을 하면서 서로의 안전을 살피기 위한 규칙이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바당밭을 누비면서 한눈팔 겨를 없이 물질을 하더라도 옆에서 물질하는 동료의 움직임을 은연중에 살펴야 한다. 혹여 숨비질해 들어간 후 한참이나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생겼는지 반드시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물건을 잡다가 발이 그물에 걸리거나 손이 바위틈에 끼이는 경우가 있을 수 있어서다. 일단 함께 바다에 들어갔으면 서로를 지켜볼 수 있는 거리에서 물질을 하다가 가급적 비슷한 시간에 나와야 한다. 공동운명인 것이다. 또한 둘 셋이 함께 물질을 하는 것은 커다란 전복이나 문어, 다금바리 등을 잡는 상황에서 즉각적인 수눌음(협력)을 가능케 하는 준비태세이기도 하다. 소라나 전복을 잡다가 물숨을 먹어서 익사하는 경우가
제주해녀의 삶과 정신은 특히 여성 지도자들에게 크나큰 도전이 되었다. 2012년 5월, 제주를 방문한 울산시 여성정책위원들을 대상으로 ‘제주해녀의 특성에 내재된 여성정책의 과제’를 주제로 특강을 하게 되면서부터 제주지역 여성단체와 경영인, 기업계와 경제단체, 대학생, 북한이탈주민 등에게 제주해녀를 소개할 기회들이 생겼다. 이들과 강의를 통해 가슴으로 공감하게 된 것은 해녀들의 물질에 대해 체휼하고 공감하는 정도가 남성들과 색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여성들은 공통적으로 ‘제주해녀의 억척스러움이 어디서 나오는가?’에 대해 더 강하게 반응을 보였다. 현상으로 드러난 물질의 상황이나 결과보다도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여성들의 처지에 더 애가 쓰이는 눈치였다. 가장 강렬한 반응은 해녀들의 출산 문화에서 몇 차례의 놀라움과 충격으로 나타났다. 우선 제주인의 생활문화를 대변하는 속담 중에서 ‘똘 나민 도새기 잡앙 잔치허곡, 아들 나민 조름팍 찬다(딸 낳으면 돼지 잡아서 잔치하고, 아들 나면 엉덩이를 찬다)’는 말에서 모두들 눈이 뚱그레졌다. 우리나라의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