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가 세계를 품었다. 유네스코에 의해 당당히 ‘제주해녀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제주와 대한민국의 쾌거다. 하지만 해녀는 아직도 우리의 시선에선 그저 물질이나 하며 생계를 꾸린 제주의 독특한 전통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엄연히 삶이 있고, 애환이 깃든 가족·가정사가 있으며 저승길 문턱을 오가며 가슴에 파묻은 눈물이 있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심연의 바다에서 제주사(史)를 일궈온 해녀의 삶, 그리고 그 인생사 이야기들을 연속기획연재 형식으로 허정옥 교수가 풀어낸다.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서귀포 법환해녀학교 과정을 마치고 그의 어머니가 해왔던 해녀의 삶을 오롯이 되살리고자 스스로도 물에 뛰어들고 있다. / 편집자 주 |
밤바르에서 잡아 온 물건을 파는 일은 그것을 잡는 일보다 분명히 쉬운 일이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한밤중에 바다로 나가서 손발을 적셔가며 소라, 해삼, 문어 등을 잡는 일이란 지금 와서 생각해 보아도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물건을 구덕에 짊어지고서 대문을 나설 때부터 온 몸과 맘이 오그라들었다. 비록 어머니가 정해준 곳으로 가서 물건을 넘기고 적당히 값을 흥정하면 되는 일이지만, 가는 길에 혹여 같은 반 애들이라도 만나게 될까봐 내심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우리는 막 사춘기에 접어들어서 조그만 일에도 얼굴이 붉어지는 계집아이들이었다. 중문으로 올라가서 신작로를 걸을 때는 중학생인 언니가 그렇게도 마음에 걸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서 터벅터벅 걷는 언니의 어깨가 한없이 무거워 보였다.
제일 먼저 들르는 곳은 천제여관, 다음이 미락식당, 그 다음이 천제연에 줄지어 있는 식당들이었다. 첫 번째 관문인 천제여관이 잘 풀리면 이상스레 그 다음 집들도 순조롭게 열렸다. 천제여관은 얼굴이 창백해서 어딘가 아파보이는 아주머니가 주인이었다. 표정도 그다지 밝은 편이 아니어서 괜스레 눈치가 보이는 게 가슴을 졸이게 하였다. 어쨌든 이곳에서 물건이 좀 팔려야 거리에서 난전을 펼치지 않아도 되었다. 여관과 식당에서 팔다가 어지간히 남은 것들은 중문 오일장 입구에 앉아서 기약 없는 행인들에게 소매로 팔아야 했다.
다음은 천제여관이 뜯기던 날,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건물을 바라보면서 가슴으로 그려본 글이다. 그렇게 대단해 보였던 건물이, 이제 와서 다시 보니 그다지 크지도 높지도 않은 실체다. 어쩌면 인생이란 저마다의 시각에서 자기 앞을 바라보며 살 길을 도모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인지도. 그래서 우리는 그 때 그렇게도 삶이 각박하고 버거웠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내놓는 밤바르 물건들을 무표정하게 쳐다보던 아주머니의 얼굴이 사라지는 여관 저편에서 희미하게 떠올랐다. 문득 ‘조금만 더 따뜻하게 대해주었으면 좋았을텐데...’ 싶던 아주머니의 얼굴이 가슴 저리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아주머니도 그때는 어린 내가 알 수 없던 인생의 슬픔이나 고통을 견디며 고군분투 하며 살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한 생각의 나래를 펼쳐서 천제여관과 아주머니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려보았다. 그리고 ‘내 가슴에 불을 지핀 그 겨울의 온정’이란 제목으로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에게 보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은 밝은 세상을 열어가는 문예지가 되고 싶다는 어느 잡지의 이름이었다. 문득 그 글이 생각나서 찾아보았는데, 그 때 그 시절의 일들이 추억 속에서 한 편의 아름다운 풍경화로 되살아났다.
다음은 내 초등학교 시절, 밤바르 한 물건들을 짊어지고서 무거운 마음으로 서성거렸던 상상 속 천제여관의 일화다.
‘천제여관이 사라지는 데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목격한 철거 현장 앞에 서서, 나는 이제 막 무너져 내리려는 여관 건물의 마지막 모습을 뚫어져라 가슴 졸이며 쳐다보고 있었다. 누군가에 이끌려서 바로 그 시간 그 자리에 예정된 목격자로 선 것처럼. 그리고 누군가 내 옆에 함께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순간, 건물은 형체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가슴 한 구석으로 서늘한 바람이 스며들고, 슬픔과 같은 정체 모를 감정이 온 몸을 휘감아 돌았다. 끝내 내 눈에서는 눈물이 빙그르 돌다가 떨어지고, 여관집 아주머니의 가냘팠던 실루엣이 공사장 저 편으로 희미하게 사라졌다. 서귀포 중문동에 위치한 이 건물은 사실상 중문동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고급스런 집이었다. 학교 선생님들이 처음 부임해서 잠시 머무르던 방도 이곳이었고, 천제연 폭포를 구경하기 위해 온 관광객들이 하룻밤 묵었다 가는 장소도 이 여관이었다.
나도 이 근사한 여관집의 높다란 문턱을 자주 넘나들던 때가 있었다. 남의 밭을 병작하는 농사와 해녀 물질로 생계를 유지해 오던 부모님은 2남7여를 공부시키느라 늘 빚에 쪼들리셨다. 얼마나 살아내기가 힘들었으면 살을 에이는 겨울밤에 바다로 나가서 밤바르를 다하셨을까?
밤바르란 썰물이 유난히 잘 나가는 겨울 새벽에 횃불을 들고 바다에 나가 소라, 해삼, 문어, 오분작 등을 채취하는 일이다. 낮에는 사람 키만큼 깊었던 물이 새벽녘에는 종아리 정도로 낮아지는데, 그러면 마치 고구마를 캐내듯이 해산물을 쉽게 채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잡은 해산물을 파는 일이었다. 겨울이라도 낮에는 보리밭이나 유채밭의 김을 매야 했던 어머니는 이 과제를 중학생인 언니와 초등학생인 나에게 일임하셨다. 우리는 가급적 해산물이 싱싱할 때 팔아 치워야 했으므로, 아침 일찍부터 무거운 구덕(대나무로 만들어진 바구니)을 짊어지고서 헐레벌떡 관광객들이 많이 모여드는 중문으로 올라갔다.
무거운 해산물 바구니를 헉헉거리면서 등에 지고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은 천제여관이었다. 중학생인 언니는 대문밖에 서 있고, 나는 구덕을 허리에 끼고서 낑낑대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여관집 아주머니는 얼굴이 유난히 하얗고 몸매가 가냘픈 여인이었다. 어디가 아픈지 별로 웃지를 않았고 말수도 거의 없었다. 씩씩거리면서 구덕을 부엌문 앞에 내려놓으면, 아주머니는 내용물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해삼이나 소라 등속을 사주곤 했는데, 품질을 탓하거나 값을 깎는 법이 없었다. 가끔 가다가 물건을 살펴보기만 할 때는, ‘요즘은 손님이 별로 안 들어서 먹을 사람이 없다’ 하시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와 나 사이에는 둘만의 암호가 있었다. 천제여관을 나오면서 구덕을 오른편에 들면 장사에 성공한 것이고, 왼편에 들면 실패한 것이다. 장사에 실패한 날은 천제여관을 지나 천제연 폭포의 몇 군데 음식점을 더 거쳐야 했다. 간혹 재수가 없는 날은 버스를 타고 서귀포까지 가서 원정행상을 벌이기도 하였다.
서귀포 매일시장의 한복판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의 온정에 기대어서 물건이 팔리기를 기다렸다. 김연대 시인이 상인 일기에서 묘사한 것처럼, 메뚜기 이마에 앉아서라도 전(廛)은 펴야하는 입장이었다. 손님이 없으면 별이라도 세고 구구단이라도 외워야 한다. 그런 날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픈 다리나 허기진 배보다 쑥스러워서 빨개진 언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더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었다.
어느 날인가, 밤새 내린 눈으로 도로가 유난히 미끄러웠다. 게다가 천제여관은 언덕배기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어서 우리는 거의 기다시피 하면서 올라갔다. 간신히 여관 앞에 이르러 언니로부터 구덕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막 대문을 넘어서려는 순간, 아뿔싸, 뒷발이 문턱에 걸려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구덕은 저만치 나가떨어지고, 그때껏 살아 있었는지, 문어가 꿈틀대고 해삼들은 둥글둥글 마당을 굴러다녔다.
다리를 다쳤는지 일어서기가 매우 힘든데도, 나는 얼른 손을 뻗어 그것들을 주우려고 버둥거렸다. 그런데 무릎이 깨졌는지, 새하얀 마당위로 핏방울이 발갛게 번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그만 고꾸라지면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내 비명소리에 아주머니가 마당으로 뛰쳐나왔고, 나는 와∼앙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언가 대단한 슬픔이나 아픔이 있는 사람처럼 나는 가슴을 후벼 파듯 서러운 목소리로 흐느끼며 울었다. 나도 알 수 없는 울음의 이유를 알겠다는 듯이, 아주머니는 나를 덥석 껴안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울지 말거라, 얘야. 걱정 말아라, 아가야, 오늘은 저것들을 내가 모두 사주마. 실은 오늘밤이 바로 우리 집 양반 제삿날이란다. 눈 때문에 반찬 걱정을 했는데, 네 덕분에 오히려 진수성찬을 차리게 되었구나.” 아주머니의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땅바닥에 흩어진 해산물을 모두 사준다 하니, 무릎이 터져서 피가 흘러나오는 게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고 말았다.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질 정도로 뜨거운 덩어리가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지금도 가끔 삶이 버겁고 힘들게 느껴질 땐, 따뜻했던 그 겨울의 온정을 생각하곤 한다. 화사한 모습으로 해맑게 웃으면서, “아가야! 괜찮다. 내가 다 사줄게” 하던 그 온화한 얼굴의 미소가. 하아얀 얼굴의 가녀린 실루엣이 떠올라서 가슴 한 구석이 시리도록 아리다. 그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서, 지금은 하늘 저편 어디에선가 지아비와 함께 행복하게 사시려나.
배고프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드라마가 내 가슴속의 자리를 이토록 크게 차지하는 것은,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더욱 더 그립기 때문이다. 이 좋은 사람들이 세상살이를 함께 한다면, 가난도 힘이 되고 아픔도 꿈이 되리라. 그러니 될 수 있는 한 우리들은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되자고 손가락이라도 걸어볼 일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차가운 겨울바람을 훈훈하게 만드는 남풍처럼 살아가는 거다. 겨울 같은 세상을 봄처럼 녹여주는 온정이 남아 있는 한, 이 사회는 그런대로 살만하겠거니 싶다. 아, 나는 지금, 밤바르 하던 추운 바다와 그것을 팔러다니던 거리를 회상하며, 가슴이 따뜻했던 사람들이 못내 그리워서 한숨짓는다. 무너진 천제여관 앞에 홀로 서서(가슴이 따뜻한 사람들, 2003년 제2집).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과 경영학을 공부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직을 수행했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 2기를 수료했고, 법환좀녀마을해녀학교 1기를 졸업했다. 보목마을에서 4개월간 해녀 인턴십을 마친 후 서귀포수협 조합원이 되었다. 마을어촌계에서 기존 해녀들이 조합원으로 받아주어야 정식 해녀가 될 수 있어, 지금은 그 날을 꿈꾸고 기다리면서 글로써 해녀를 그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