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가 세계를 품었다. 유네스코에 의해 당당히 ‘제주해녀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제주와 대한민국의 쾌거다. 하지만 해녀는 아직도 우리의 시선에선 그저 물질이나 하며 생계를 꾸린 제주의 독특한 전통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엄연히 삶이 있고, 애환이 깃든 가족·가정사가 있으며 저승길 문턱을 오가며 가슴에 파묻은 눈물이 있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심연의 바다에서 제주사(史)를 일궈온 해녀의 삶, 그리고 그 인생사 이야기들을 연속기획연재 형식으로 허정옥 교수가 풀어낸다.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서귀포 법환해녀학교 과정을 마치고 그의 어머니가 해왔던 해녀의 삶을 오롯이 되살리고자 스스로도 물에 뛰어들고 있다. / 편집자 주 |
내 어머니 김성춘씨는 올해로 94세다. 1923년 3월에 서귀포시 대포동에서 태어났다. 대포(大浦)는 큰 포구여서 제주어로는 ‘큰갯물’이라 불린다. 당시의 해변마을 여자 아이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예닐곱 살부터 바다로 나가 물장구를 치면서 물질을 배웠다. 12살에 애기좀수가 되었고, 17살에 육지물질을 다녀오면서 상군이 되었다. 노동이 가능한 생애의 거반을 바다에서 보냈다. 그야말로 ‘물 우이 삼년, 물 아래 삼년(물 위에 삼년, 물 아래 삼년)’이란 제주속담을 방불케 하는 삶이었다.
이하에서는 어머니를 화자인 ‘나’로 하여 ‘우리 어멍이 살아온 바당(우리 어머니가 살아온 바다)’을 묘사하고자 한다. ‘내가 학교 마당만 제대로 밟았으면 너희들 선생은 했을 거라’는 어머니의 독백은 헛소리가 아니다. 어머니는 오빠들 몰래 숨어서 다닌 며칠간의 야학으로도 한글을 더듬을 줄 아는 학구파다. 어머니 연배에 이름을 쓸 줄 알고 숫자를 읽을 수 있는 제주 여자들이 얼마나 될까?
아기좀수, “아방을 촞아보젠 숨비질”
해녀가 되고 싶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목이 메도록 찾아 돌아다니는 아버지를 내가 직접 찾아보고 싶었다.
나는 6살에 함경환 사건으로 아버지를 여의었다. 함경환은 일제시대에 제주~시모노세키~오사카를 운항하던 부정기 여객선이다. 여객선은 제주시 산지항을 출항해서 조천∼김녕~성산포~표선~서귀포~모슬포~고산~한림~애월 등 제주도를 한 바퀴 돌면서 승객을 태웠다. 승객들은 주로 일본으로 돈 벌러 가는 노동자들이었다. 제주에서 오사카까지 48시간이 걸리는 뱃길이었다. 기항지 항구에 접안시설이 부족한 경우에는 종선(풍선)으로 승객을 실어 내렸다. 중문에서는 대포 포구에서 멀리 떨어진 자장코지 앞바다에 정박해서 승객을 기다렸다.
1928년 1월 28일, 50명의 중문면 주민을 태운 종선이 기우뚱거리며 함경환에 접안해서 막 승선시키려는 순간, 갑자기 돌풍이 휘몰아쳐서 배를 뒤집고 말았다. 다행히 내 아버지 김광용씨는 43세의 건장한 몸이라 헤엄을 쳐서 배에 오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기를 업은 채 살려달라고 허우적대는 게 아닌가. 그들을 구하려고 다시 뛰어든 순간, 집채만 한 파도가 그만 연속적으로 덮쳐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모두를 집어삼키고 나서 거품을 머금은 바다는 거짓말처럼 얌전해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영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건장하고 잘생기고 앞길이 창창한 우리 동네 일등 가는 대장부가. 이 어이없는 사고로 32명의 목숨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대포마을은 온 동네가 장례식장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서 바닷가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돈을 벌어다가 밭도 사고, 집도 짓고, 막내딸 고무신도 사온다’며, ‘3년만 일하고 봄이 되면 돌아와서 밭갈쇠를 산다’고 집을 나선 남편이었다.
일가친척들도 모두 발 벗고 나서서 대포바다뿐만 아니라 동쪽으로 월평과 강정, 서쪽으로 중문과 예래 바다까지 몇날며칠을 수색하다시피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어디에도 흔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신발 한 짝, 헝겊 한 조각, 아니 머리털 하나라도 아버지의 증거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래야 관에다 그 실체를 넣고서 장례를 치를 것이 아닌가? 그 와중에도 배가 고파서 우는 내 손을 붙잡고서 8살짜리 오빠는 떠들썩한 이웃집 장례에 가서 밥을 얻어 먹였다. 뜻밖의 밥과 고기를 먹으며 좋아하는 나를 보고, “더 먹어라, 이 설운 아기들아. 하영 하영(많이많이) 먹으라!” 면서 동네 사람들도 눈물을 훔쳤다. 배부른 차에 떡까지 한 아름을 싸서 안겨주니, ‘매일이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고두고 가슴을 치게 만든 철없는 욕심이었다.
끝내 아버지의 흔적을 아무것도 찾지 못한 어머니는 빈상여로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 없다’며 통곡하는 어머니 대신에 아들들이 아버지가 입던 옷으로 시신의 모양을 만들어 관에다 넣었다. 상여를 매고 장지로 떠나는 사람들 속에서 어머니는 짝 잃은 백학처럼 고음으로 울부짖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는 동네에 장례가 나면, ‘누구는 복도 많아서 저렇게 시신을 두고 영장을 하는가’며 상여가 나가는 행렬을 외면하였다.
태풍이 불거나 폭풍이 몰아치기만 하면, 거품이 이는 바다로 나가서 아버지의 흔적을 찾고 또 찾았다. 한숨과 설움으로 지내던 어머니는 화병으로 드러누워 오래토록 아팠다. 그렇게 부지런하고 억척스럽기로 소문난 어머니가 이따금 모든 일을 팽개치고서 하루 종일 바닷가를 헤매고 다녔다. 망연자실 수평선을 바라보며 넋을 놓은 모습은 마치 망부석처럼 죽어 있는 하나의 돌이었다.
어머니가 물질을 못하였던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해안가 마을에선 웬만하면 고망좀수라도 하면서 반찬거리를 잡아다 먹는 게 배고프던 시절의 상책이었다. 오죽하면 ‘삼월 보름 물찌에 하우장 각시 책갑 졍 얼른다(삼월 보름 무수기에는 선비 부인이 책갑을 지고 나댄다)’는 속담이 다 있으랴. 음력 3월 보름날은 일 년 중 썰물이 가장 잘 나가는 날이라서 누구라도 집안에 앉아 있을 수 없을 만큼 해산물의 수확이 좋았다.
그러므로 오랜만에 태왁을 지고서 고망물질이라도 해보려고 나서는 여자들로 온 동네가 들썩거린다. 그 바람에 선비 부인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책갑을 지고 덩달아 어정거린단 얘기다. 그런데 어머니는 무수기에조차도 바다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물질도 타고 나는 법이라서, 어쩌면 체질적으로 숨비질이 맞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어떤 이는 어머니가 부잣집 딸이라서 시집올 때 큰 돌랭이(밭뙈기)를 가지고 왔을 정도니, ‘친정에서 아마 물질을 못하게 했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물질은 워낙에 위험한 일이라서 중산간 마을이나 해변에서도 벌어먹을 밭이 있는 사람들은 ‘사람이 할 게 못 된다’고 생각하였다.
어쨌든 어머니가 물질을 못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만약에 어머니가 해녀였다면, 날이면 날마다 아버지를 찾아서 바다 속을 헤매었으리라. 그러다가 죽은 사람이 어디 한 둘이던가. 그렇게 물질 잘 하기로 소문난 달문이 각시도 아무도 몰래 저승길로 이끌리어 가지 않았는가.
서울서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이 꿈에 나타나서 “어머니, 제발 바당에랑 가지 맙서예, 큰 일 납니다”라면서 사정을 할 때,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꿈같지 않게 생생한 아들의 우는 얼굴이 숭시(불길한 기운) 같다’면서도 태왁을 지고 털레털레 바당으로 가더니만, 말 그대로 큰일을 당하고 말았다. 어떻게 상군 중의 상군인 그녀가 바다 밑에 맥없이 가라앉아서 이유 없이 물숨(물속에서 물건을 잡으려고 애쓰다가 자신의 숨이 다하는 순간 먹게 되는 숨)을 먹는단 말인가?
전복을 떼던 흔적이나 소라를 잡던 시늉, 문어와 다투던 자국도 없이 그저 얌전하게 눈을 감고 앉아서 말이다. 어쩌면 우리 어머니는 일부러라도 아버지를 따라서 저승까지 헤엄쳐 갔을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어머니는 오래 살지 못하였다. 남편이 없는 세상을 혼자서 버텨내기가 너무나 버거웠던 모양이다. 내가 시집가는 것도 못 본채 어느 날 ‘질끈’ 하고 눈을 감더니 다시는 뜨지를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다가 그렇게도 좋았다. 눈만 뜨면 바다로 달려갈 정도로 바다가 마냥 좋기만 하였다. 그것은 마치 바람난 처녀가 설레는 가슴으로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과도 같았다. 아마도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내 고무신을 사러 가시다가 바다에서 사라졌다는 아버지가 그렇게도 보고 싶었는지도. 아니면 어떤 본능적인 끼와도 같은 것이어서 타고난 춤꾼이나 소리꾼처럼 물질을 타고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스스로 물질을 익혔다. 처음에는 얕은 물에서 돌을 줍거나 풀을 뜯어 올렸다. 눈을 감거나 맨눈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깊은 데로 내려가 보말을 잡기 시작했다. 조쿠제기(자잘한 소라), 바르(오분작) 등을 잡으면서 ‘아기좀수’라 불렸다. 열 살이 되자 이웃집 춘자어멍이 태왁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물질도 못하는 언니가 무명천에 검은 물을 들여서 지어준 속곳(소중이)을 입었다.
드디어 족은 안경을 쓰고, 머리에는 수건을 졸라맸다. 마침내 소라도 잡고 문어도 잡는 곳좀수가 되었다. 나는 마치 수에기(돌고래)처럼 대포바다를 샅샅이 누비면서 물질기량을 익혔다. 대포 해안은 주로 파랑(波浪)에 의해 만들어진 해식애(海蝕崖)가 발달해 있다. 해식애는 파도의 침식에 의해 형성된 바닷가의 절벽으로, ‘주상절리’가 그 전형이다. 대포 사람들은 이곳을 ‘지삿개’라 부른다. 관광지로 유명해지면서 ‘대포․중문 주상절리’가 되었다. 하지만 일대의 논밭은 대부분 대포의 경작지다. 속칭 너배기(넓은 들)인 이곳은 대포마을의 식량 주산지였다.
너배기 바닷일, 그리고 달려간 지삿개 물질
나는 너배기에서 밭일을 하다가 물때가 되면 지삿개로 내달렸다. 그곳은 수심이 깊고 파도가 세서 상군잠수들이 물질하는 바다다. 깊은 만큼 전복과 소라도 아주 크고 많았다. 때로는 집어삼킬 듯 달려드는 파도를 등에 업고서 검푸른 바다 속으로 하염없이 들어갔다. 보이지 않는 바다 속은 보이는 육지와 지형이 비슷해서, 물속에는 주상절리와 같은 암석들과 엉덕(움푹 파인 굴)이 많았다. 엉덕은 고개를 디밀기가 겁날 정도로 음침하다. 혹시 들어갔다가 발이 걸릴 것도 같고, 숨이 다해서 올라오다가 머리를 부딪칠 듯도 하였다.
사람들이 위험하다는 그곳을 나는 겁도 없이 들어가 보고, 살펴보고, 이리저리 만져도 보곤 하였다. 간혹 전복이나 문둥구제기(왕소라)를 발견하는 머정(운)도 있었다. 문둥구제기는 껍데기에 산호나 해초가 붙어 있어서 물속에서는 마치 돌처럼 보인다. 웬일인지 돌트멍(구멍)마다 크고 작은 소라들이 잔뜩 붙어 있어서 혹시나 하고 살펴보면 십중팔구 문둥구제기가 대장처럼 버티고 있다.
엉덕에는 가끔 커다란 수퉁이 전복이 출현하기도 하였다. 얼마나 힘이 세던지 비창으로 아무리 케네도 떨어지지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비창을 꽂아둔 채 나왔다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다시 들어가기를 몇 차례 하면서 온 힘을 다해 떼어냈다. 그런 나를 보고서 어른들은 ‘그러다가 재수 없이 시체라도 보면 어쩔거냐’면서 조심시키곤 하였다. 실은 전복을 무리하게 떼다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들이 있어서 주의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면 오히려 행운이 아닌가’ 생각하며 겁을 먹지 않았다. 주상절리는 아버지를 삼켜버린 자장코지와 너무도 가까운 바다였다. 턱없는 상상이었다.
이따금 수에기(돌고래)를 만나면 같이 바다를 휘젓고 다녔다. 어른들은 ‘배알로 배알로!’ 하면서 쫓아내라는데, 녀석들은 내가 ‘배알로’ 하면 오히려 허연 배를 보이면서 장난을 쳐왔다. 해녀들은 보자마자 쫓아내기 바쁜 그것들이 내게는 일부러 찾아온 벗인 듯이 정겨웠다. 마치 술래잡기 놀이라도 하듯이 수에기들이 따라다닐 때는, ‘아버지가 수에기가 되어 찾아 왔다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공상이었다.
바다는 그렇게 아버지의 넓은 가슴이 되어 나를 안아주고 키워주고 도와주었다. 바다에만 가면 외로움도, 서러움도, 고달픔도 썰물처럼 밀려났다. 아, 바다는 내 아버지의 집,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나의 첫사랑이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했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 2기를 수료, 다시 시작하는 해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