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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의 제주해녀와 삶(10)] 풀빵 장수 각시가 꿈이었던 어린 시절

 제주해녀가 세계를 품었다. 유네스코에 의해 당당히 ‘제주해녀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제주와 대한민국의 쾌거다. 하지만 해녀는 아직도 우리의 시선에선 그저 물질이나 하며 생계를 꾸린 제주의 독특한 전통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엄연히 삶이 있고, 애환이 깃든 가족·가정사가 있으며 저승길 문턱을 오가며 가슴에 파묻은 눈물이 있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심연의 바다에서 제주사(史)를 일궈온 해녀의 삶, 그리고 그 인생사 이야기들을 연속기획연재 형식으로 허정옥 교수가 풀어낸다.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서귀포 법환해녀학교 과정을 마치고 그의 어머니가 해왔던 해녀의 삶을 오롯이 되살리고자 스스로도 물에 뛰어들고 있다. / 편집자 주

 

속옷만 입고 바다에 뛰어들 수 있는 여름철이 되면 우리는 물때에 맞춰서 바다로 내달렸다. 어머니는 우리가 외우기 쉽게 ‘바당물은 보름 여섯, 그믐 여섯’이라고 일러주셨다. 음력으로 보름과 그믐이 여섯물이니, 이를 기준으로 썰물이 잘 나가는 일곱물, 여덞물, 아홉물, 열물까지 보말바당이 넉넉히 바닥을 드러낸다. 음력을 잘 모르는 우리는 보름달을 기준으로 물때를 가늠할 수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물때와 상관없이 심심하면 바다로 달려가서 놀다가 의기가 투합하면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바당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우리가 방학하는 7∼8월에는 일곱물이나 여덟물에 바다 반쪽이 다 마를 정도로 썰물이 잘 빠진다. 해가 중천에 떠올라서 머리가 뜨거울 쯤이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집밖으로 뛰쳐나온다. 알루미늄 낭푼이에 보리밥과 된장, 물외(제주도 오이)를 점심으로 싸들고서 말이다.

 

먼저 나온 아이들이 친구 집으로 달려가서 이름을 부른다. “춘자야, 바당 가게!” 그렇게 모여든 춘자, 순자, 정자, 춘옥, 순옥, 정옥이 들이 줄줄이 큰갯물로 달려간다. 아직 썰물이 빠져나가지 않은 포구에는 조업을 나가지 못한 배들이 성창에 묶여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모처럼 호기를 맞은 우리는 배의 닻줄을 잡아 흔들어서 배를 깨운다.

 

 

마치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어깨를 흔들며 ‘하하’ 거리는 배의 등허리에 올라타서 닻줄을 붙잡고 신나게 미끄러진다. 아직 수영이 서투른 아이들에겐 닻줄을 잡고 팔다리를 흔드는 것이 헤엄치기의 연습이 되었다. 사실, 어른들이 있으면 “계집아이들은 저리 가라”고 큰 소리로 쫓아낼 게 분명한 일이었다. 혹여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배 앞에서 우리가 얼쩡거리기라도 하면 “재수 없게 여자아이들이 어디를!” 하고 호통을 듣는 게 보통이니까.

 

닻줄을 잡고 노는 동안 썰물이 좀 더 빠져나가면 우리는 ‘누가 먼저 물속으로 숨비질해 들어가서 돌멩이를 주워오나’ 하는 경주를 하였다. 물속에서 ‘누가 더 오래 숨을 참는지’ 하는 내기는 애기상군을 판가름하는 기준이었다. 언제나 이 게임에선 춘자가 1등을 했다. 우리가 숨이 다 해서 “하푸 하푸” 하면서 야단법석 물위로 튀어 오른 지 한참이 지나서야 춘자는 물위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마치 어른들의 숨비소리 마냥 “후∼우우” 하는 휘파람 소리를 내질렀다.

 

역시 물질은 타고나는 것인가? “춘자는 물 소굽에서 이녁 혼자 고메기를 솖앙 먹엉 나왐신고라(춘자는 물 속에서 자기 혼자 고메기를 삶아 먹고 나오는가봐)” 하면서 놀리면, 여보란 듯이 촘고매기가 들어 있는 주먹을 펴보였다. “아니라, 혼자 먹진 안 해서, 야네들 이추룩 배롱배롱 눈치 보멍 배렴잖아(얘네들 이렇게 말똥말똥 눈치 보면서 보고 있잖아)!” 아하, 우리는 목적 없이 물속에서 하나 둘 세면서 숨을 참는 동안, 춘자는 부지런히 고매기를 잡았던 것이다. 하나라도 더 잡아보려고 부지런히 용을 쓰는 것, 그게 바로 더 버티기와 1등의 비결이었음에랴. 누가 춘자에게만 그 비법을 가르쳐주었을까?

 

춘자의 고매기를 보고 난 우리는, “야, 우리도 고매기 잡으러 가게!” 하면서 물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어느새 홀쭉해진 서로의 배를 쳐다보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시락을 놓아둔 그늘케(큰 바위 밑에 그늘이 생긴 자리)로 달려갔다.

 

보리밥에 된장을 찍어 바른 물외가 전부이지만, 배고픈 우리에겐 지상 최고의 성찬이었다. 누구의 밥이 더 나을 것도, 누구의 반찬이 더 좋을 것도 없는 도시락은, 모두에게 하나같이 맛있는 점심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밥이 더 맛있다’고, 밥도 나눠 먹고 된장도 바꿔먹고 물외도 갈라 먹었다. 가끔 마농지(마늘 장아찌)나 반치지(파초 장아찌)를 싸온 애들은 인기가 짱이었다. 된장밖에 못 가져 온 애들에게 짭짤한 장아찌는 무한 나눔이 가능한 반찬이었므로. 마농지 하나면 밥 한 그릇이라도 다 먹을 수 있도록, 그것은 껍질을 벗기면 다시 껍질이 나오고 또 나오는 화수분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때 그 도시락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경험한 최고의 점심이다. 시장이 반찬이었고, 한없는 허기가 밥도둑이었다. 아니, 뜨뜻하게 데워진 온돌 바위에 걸터앉아,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 위로 뜨거운 햇살을 받으면서, 파아란 하늘과 하아얀 뭉게구름을 양산 삼고, 가없는 수평선과 무심한 돛단배를 감상하며,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을 음악 삼아, 그저 마음껏 밥을 퍼먹는 천진난만함이 지상에서 가장 즐거운 식사를 만들어 준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해서 고매기를 잡고, 보말을 잡고, 소라를 잡으면서 아이들은 바다를 익히고, 물질을 배우고, 물건을 알아갔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러는 바다를 떠나고 더러는 아기좀수가 되었다. 12∼13세쯤 되어 태왁과 망실이, 소중이에 물안경을 갖추고서 제법 해녀처럼 바다를 누비고 다니는 아이들을 아기좀수라 부른다. 아기좀수는 소라와 오분작, 머정이 좋으면 작은 전복과 문어도 잡을 줄 아는 기량의 어린 해녀다.

 

일단 아기좀수쯤 되면, 바당이 그저 놀이터가 아니라 물건을 잡아서 용돈을 버는 일터가 된다. 우리는 밭에서 김을 매고 고구마를 캐듯이 미역새를 뜯고 소라를 잡았다. 미역새는 3∼4월 미역철에 마치 어린 미역처럼 바위에 붙어 있는 해조류다.

 

미역보다 색깔이 더 짙은 편인데, 미역처럼 크게 자라지는 않는다. 바다의 봄나물이라고나 할까. 미역은 ‘허채’라는 공동작업 전까지는 채취가 금지된 물건이므로 사람들은 미역새를 캐다가 국거리로 삼았다. 자리젓 국물을 넣고 끓이면 특유의 구수한 냄새와 얼큰한 맛이 입맛을 돋운다. 특히 할머니들이 ‘베지그랑허다(느끼함, 얼큰함, 담백함이 조합되어 이미 배가 부른 듯한 만족감을 주는 맛)’라면서 조밥과 함께 즐겨 드시는 음식이다.

 

 

우리는 물때마다 미역새를 뜯어다가 잘 말려서 중문장에 올라가 팔았다. 중문오일장에는 어머니들이 주로 곡식류를 사고파는 쌀 시장 옆에 아이들이 미역새나 톳, 몸 등 해조류와 꽁나물(달래), 냉이, 쑥 등 산나물을 파는 장소가 있었다. ‘아이들 장’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어머니가 지정해 준 자리에 앉아서 차롱착(대나무로 넙적하게 만들어진 작은 바구니)에 미역새를 적당히 담아 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삼춘, 미역새 삽서. 대포바당에서 우리가 손으로 직접 캔 거난 하영 드리쿠다게!(많이 드릴께요)”라고 호객도 하였다.

 

혹여 손님이 다가와서 구경이라도 할라 치면 얼른 한 두 줌을 덤으로 붙이면서 환심을 샀다. 사실 바당 것은 공짜라서 내가 별 자본을 들이지 않고 그저 채취한 것이므로 거저 퍼줘도 되는 물건이었다. 어머니의 조언대로 값싸게 빨리 팔아치우고서 바다로 나가 다시 캐는 게 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장사였다.

 

미역새는 해안마을 여자아이들 사이에 인기 있는 용돈벌이였다. 우리들은 산과 들에 야생으로 돋아나 있는 꽁마늘(달래)을 캐다가 중간상에게 넘기기도 하고 주넹이(지네)를 잡아서 약재상에 팔기도 했다. 이상하게 꽁마늘은 바닷가 모래땅에 자라는 것이 키도 더 크고 뿌리째 뽑아내기도 좋았다. 아마도 이 사실을 바당에 다니지 않는 얘들은 몰랐을 것이다.

 

주넹이는 소먹이는 남자아이들이 들판에서 크고 작은 돌덩이를 일으켜서 그 안에 숨어 있는 녀석들을 붙잡아 파는 용돈벌이 수단이었다. 운 좋게도 돌덩이를 하나 굴렸는데 그 안에서 두 마리가 한꺼번에 기어 나오면, “쌍장!”이라고 외치면서 인증 샷을 날렸다. 그래야 잠깐 딴 데로 가더라도 소속이 분명하니 자기 것이 되었다.

 

딸부자인 우리 집의 대표선수로서 이따금 나도 소먹이에 끼게 되면, 사내아이들과 함께 주넹이 잡이에 열을 올렸다. 쌍장을 만나는 순간의 그 짜릿한 흥분이라니....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징그러운 지네들이 그때는 왜 그렇게 반갑고도 귀엽게 보였던지. 굳이 계산을 해보자면 주넹이가 가장 비싸게 팔리는 상품이었고, 다음이 꽁마늘, 미역새 순이었다.

 

하지만 나는 욕심껏 캐다가 마음껏 베풀 수 있는 미역새가 젤로 좋았다. 미역새는 손발을 흙에 묻히지 않고, 여기저기 찾아서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깨끗하고 상큼한 게 말리면 가벼워서 보관이나 운송도 쉬웠다. 부지런만 하면 바다에 널어지게 많아서 박리다매 상품으론 그만이었다. 아니, 바다 냄새가 물씬거리는 미역새는 언제 보아도 기분 좋은 바다의 선물이었다.

 

아, 그 미역새가 이제는 거의 시장에서 볼 수 없는 비매품이 되고 말았다. 줄미역(양식 미역)이 나오면서부터 돌미역 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해녀들의 미역허채도 사라져버렸으니, 구태여 누가 미역새를 캐다가 팔려고 할 것인가? 어쨌든 아기 좀수 시절, 우리들의 물질담에서 빠질 수 없는 미역새의 추억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아도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소박함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줄 미역 시대. 이때를 어찌 잊을 수 있을 건가? 언니와 나는 때마침 마을의 새마을지도자였던 아버지가 어촌의 신사업으로 시작한 미역양식업에 판매원으로 동원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사업이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는 법이어서, 대포마을의 첫 번째 미역양식도 거의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

 

조류가 세서 미역포자가 설치된 밧줄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거나 수온이 높아서 싹이 자라다 녹아버리거나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만 완전한 실패는 아니어서 종자 값 정도 건질 만큼 미역이 일부 자라주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배를 타고 나가서 호미로 베어온 미역을 짊어지고, 모슬포·중문·서귀포 오일장을 찾아다니며 팔았다.

 

우리가 장바닥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미역을 파는 사이, 마음이 바쁜 어머니는 아예 미역을 짊어지고 가가호호 대문을 두드리면서 팔았다. 틀림없이 어머니는 사람들이 달라는 가격에 원하는 분량만큼 듬뿍듬뿍 내주셨을 것이다. 어머니의 판매 방식은 저가주의(低價主義)에다 ‘시간 또한 금이다’라는 철학이 가미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가급적 빨리 팔아치우고서 남은 시간만큼 일해서 벌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돌아오면 우리도 팔다 남은 미역을 짊어지고 집집을 돌아다니며 달라는 대로 넘겼다.

 

미역을 모두 팔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우리에게 용돈으로 100원씩을 나눠주셨다. 손님들에게 파는 미역 한 단의 값이었다. 풀빵을 한 봉지씩 사먹을 수 있는 금액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물질시간에 쫓겨서 바쁘게 서두르는 어머니의 기세에 풀빵은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우리는 꼬깃꼬깃한 일당을 호주머니 깊숙이 집어넣고 먼지를 휘날리는 시외버스에 앉아서 낯선 풍경으로 배고픔을 참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태왁구덕을 짊어지고서 헐레벌떡 바다로 내달리는 어머니. 점심도 굶은 채 차가운 바다로 몸을 던질 그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식은 밥을 앞에 놓고 숟가락만 달각거렸다. 언니의 축 처진 어깨가 만만해 보이는지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기세 좋게 앉았다.

 

기회를 보다가 이때다 싶으면 점심을 해결해 볼 심산이리라. 녀석은 주제넘게도 자리젓을 좋아한다. 언감생심, 안 될 일이다. 우리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 아닌가. 얼른 숟가락을 들어서 경고음을 날린다. “파리, 그냥 갈래, 맞고 갈래?” 우울해 보이던 언니가 피식 하고 웃는다.

 

그 바람에 파리는 날아가고, 솔기 터진 자리에 구멍이 돋보인다. 언니의 스웨터가 오늘따라 더 낡아 보인다. “언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옷 장수 각시. 예쁜 옷을 실컷 입을 수 있으니까! 너는?” “풀빵 장수 각시. 풀빵을 실컷 먹어보고 싶어서!” 바로 그 때 중학생인 언니가 큰 소리로 끼어들었다. “이 바보들아, 사장한테 시집을 가야 돈을 물쓰듯 쓰지!”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솟구쳐 오른다. 풀빵 장수 각시가 내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니.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과 경영학을 공부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직을 수행했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 2기를 수료했고, 법환좀녀마을해녀학교 1기를 졸업했다. 보목마을에서 4개월간 해녀 인턴십을 마친 후 서귀포수협 조합원이 되었다. 마을어촌계에서 기존 해녀들이 조합원으로 받아주어야 정식 해녀가 될 수 있어, 지금은 그 날을 꿈꾸고 기다리면서 글로써 해녀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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