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여름이면 전국의 경제인들이 제주로 모여들어서 피서와 공부를 즐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 카피처럼, 제주는 부부동반 기업인들이 육지를 떠나서 해외에서처럼 여름휴가를 보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해 온 사람들이니 그냥 ‘놀멍, 쉬멍’ 지내도 좋으련만, 부득불 놀기 전에 공부를 하는 것이 여름철 제주에선 기업인들의 휴가문화가 되었다. 어쨌든 제주에서는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능률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표준협회, 인간개발연구원 등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단체들이 하나같이 공부를 한 후에야 어깨를 펴고서 레저 활동으로 들어가는 게 관행이다.
이들의 스케줄은 대부분 아침 7시 조찬부터 점심때까지 세미나와 특강 형식의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산과 바다로 레저나 문화 행사를 떠나는 것이다. 전경련도 예외는 아니어서, 2010년 7월 31일에는 문화탐방을 떠나기 전, 나에게 제주문화에 대한 강의를 요청해 왔다. 이들과 3년 정도 포럼을 함께 하면서 사회를 맡아 진행하는 동안 틈틈이 제주도 이야기를 맛보인 때문이었다.
제목을 ‘제주해녀의 삶과 사랑’으로 띄워놓고 시작된 강의는 처음부터 반응이 뜨거웠다. 7월의 열기가 강의실까지 침투해 들어온 탓도 있었지만, 김종두 시인의 ‘제주여인 6’으로 시작된 첫 번째 슬라이드가 청중들의 심금을 세차게 흔들어 놓았다.
‘조밥 먹으멍 조냥허곡, 물질허멍 조냥허곡, 설운 애기 키우잰 이 고생허멍 살았수게. 어두룩헐 때 일어낭 물항 고득 물질어 나뒁 솖아 낸 보리밥 혼 직 뜨는둥 마는둥
갈중이 걸치멍 빌레왓으로 내돌아십주. 불뱉 더위에 나앉앙 혼나절 지신검질 매당 보믄 4.3소태 때 죽은 아방 생각남니께. 눈멜라지게 살아온 시상 생각허민 칭원호고 칭원헙주만 지내븐 일이라 잊엉 살아점수다. 조식 호나 믿엉 살아 온 이 질긴 목심.
아- 제주 여인의 삶이여.(조밥 먹으면서 절약하고, 물질하면서 절약하고, 서럽게 태어난 자식 키우려고 이 고생하면서 살았습니다. 어스름할 때 일어나서 물항아리 가득 물 길어다 놔두고 삶아낸 보리밥 한 숟갈 뜨는 둥 마는 둥 갈옷을 걸치면서 자갈밭으로 내달렸습니다. 불볕더위에 나가 앉아서 한나절 많이 자란 잡초를 매다보면 4.3사태 때 죽은 남편 생각나지요. 눈이 쑥 들어가게 살아온 세상 생각하면 가슴 아프고 가슴 아프지만 겪어버린 일이라 잊고서 살아집니다. 자식 하나 믿고서 살아온 이 질긴 목숨. 아-제주 여인의 삶이여.)
처음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도 방언에 외국어를 대하듯이 눈이 뚱그래지던 이들이, 제주여인들의 세상살이를 재해석해 듣고는 눈시울을 붉히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적인 조냥(절약) 정신과 전대미문의 근면성, 불멸의 자식애 등이 모두 제주여인들의 세상살이를 충격적으로 전해주었지만, 이들의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역시 해녀들이 숨비질하는 바당밭이었다.
제주해녀들은 동이 터오르는 새벽 어스름에 밭으로 달려가서 김을 매다가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바당밭으로 다시 내달려서 소라를 잡는다. 그리고 물질이 끝난 후에는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밭으로 돌아가서 중단했던 작업을 계속한다. 이러한 해녀의 하루 생활이 서울 사람들 눈에는 불가사이로 비쳐지는 중노동의 실태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정년도 은퇴도 없이 움직일 수 있는 한 물질을 계속하는 할망해녀들의 직업정신과 자기 몸통만한 문어나 광어를 맨손으로 잡아채는 용감성, 집채만 한 파도를 등지고서 바다 속으로 잠수해 들어가는 작업근성, 남자 둘이서 낑낑대며 들어주는 미역 망실이를 너끈히 등에 지고서 만면에 웃음을 날리는 억척스런 근로행위 들이다.
게다가 어느 틈에 연구개발을 통해 천으로 된 작업복(소중이)을 고무소재로 바꾸어 작업 시간과 능률을 두세 배 증가시키고, 지붕위에 올려서 키운 콕(박) 대신에 스티로폼으로 소재를 바꿔서 태왁의 내구성과 견고성을 몇 배로 향상시켜 온 기업가정신은 신기할 정도의 경영혁신 사례로 인식되었다. 더욱이 하얀색 스티로폼 태왁을 주황색 칼라 태왁으로 바꿔서 숨비질 후에 얼른 태왁의 소재를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먼 거리에서도 조업 상황을 식별할 수 있게 한 점은 작업현장의 생산성과 안전성을 높이는 창조적 아이디어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갈채를 받은 장면은 해녀들이 1966년 한라문화제 행사의 하나로 잠수경연대회를 하는 장면이었다. 물소중이를 입고서 마치 1000미터 장거리 달리기에 참가한 선수들이 트랙을 도는 것처럼 나란히 줄지어서 물 위를 헤엄쳐 가는 모습은, 1등을 거머쥐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는 경주이기보다 운동회의 퍼레이드 마냥 즐겁고 재밌는 분위기였다.
이 해녀 경연대회는 2007년도에 다시 부활되어 해녀들이 정해진 시간 동안 채취한 해산물을 무게로 달아서 우수 해녀를 가리는 형식으로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대회를 통해 현직해녀의 물질 기량을 증진하고 사기를 북돋울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물질을 알려서 신규 해녀들을 입문시키는 마케팅효과가 기업인들에게는 놀라운 현장경영의 성공사례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해녀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제고함으로써 후계자 양성이 활성화되어 이후로 해녀의 수가 급증하게 된 이벤트 효과에 대해서는 특별한 감탄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사실 제주해녀는 1970년도 들어 1만 4천명을 웃돌 정도로 그 수가 현저히 증가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 해녀들의 후계자 양성 과정과 교육훈련 정신은 경영학 교과서가 강조하는 성공하는 기업들의 경영혁신 사례로 인식되었다. 아무리 창업주가 경영을 특출하게 수행해서 기업을 창대하게 일으켜 놓더라도 2세가 후계자로 철저하게 육성되지 못하면 기업의 지속가능성이 담보되지 못하는 게 경제계의 현실이다.
실제로 기업인들의 경영세계에서는 신제품 개발이나 신시장 개척을 통한 기업의 성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2세에 대한 후계자 수업이다. 대기업의 전문경영인의 경우에도 후계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주가가 요동치지 않는가? 이 점에서 제주 해녀들이 아기좀수들을 위해 일찍부터 아기바당을 지정해 주고, 물질 활동을 끊임없이 격려하며, 어느 정도 물질기량이 되었다 싶으면 육지로 원정물질을 나갈 때 동반해서 물질의 진수를 경험시키는 풍습이 직업세계의 교육훈련을 능가하는 것으로 갈채를 유발했다.
하기야 제주해녀는 1970년대에 뉴욕타임즈가 인정한 것처럼 ‘특별한 도구 없이 맨 몸으로 용감하게 잠수해서 고소득을 올리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기술의 다이버’가 아닌가. 이들의 경쟁력이 지속적인 신기술개발과 후계자 양성을 통한 노하우의 전승에 있음을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인들이 간파하고 감탄함은 어쩌면 경영세계에서는 당연한 고수들끼리의 통찰이요 예의가 아닐까?
더욱이 아내 혹은 자녀들과 함께 연수에 참가한 기업인들에게는 자기의 입장과 심정을 은연중 가족들에게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가업이 대를 이어서 후대가 더욱 번창하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했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 2기를 수료, 다시 시작하는 해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