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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 물싸움의 끝은 파국일까? 동반전진일까?

제주엔 2개의 물공장이 있다. 한 곳은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있고, 또 한 곳은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있다. 조천읍 교래리에 있는 공장은 제주도 산하 지방공기업인 제주지방개발공사가 가동하는 공장이다. 또 한 곳은 한진그룹 계열사인 민간기업 (주)한국공항이 운영하는 곳이다. 한 곳에선 ‘제주삼다수’란 브랜드의 생수를 만들고, 또 다른 곳에선 과거 ‘제주광천수’란 이름에서 지금 ‘한진제주퓨어워터’로 이름을 바꾼 생수를 만든다.

 

교래리 공장은 1996년 문을 열었고, 가시리 공장은 그보다 앞서 12년 전인 1984년 문을 열었다. 제주시와 서귀포시란 주소만 놓고 보면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생각되지만 현장에 가 보면 바로 이웃이다. 교래리 공장이 해발 420m고, 가시리가 해발 320m로 100m 차이가 날 뿐 두 공장 간 평면거리는 사실 1km 남짓이다.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지하에서 끌어올리는 물 자체도 같은 수맥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두 곳의 물공장은 운명적으로 신분이 다르게 태어났다.

 

 

가시리 물공장의 탄생은 지금 생각해보면 작고한 고(故) 조중훈 회장의 혜안을 짐작케 한다. 1980년대 국내에서 어느 누가 지하수를 페트(PET)병에 담아 상품으로 만들어 낼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일찌감치 주력사인 대한한공을 통해 제주노선에 항공기를 투입, 기내서비스 음료로 제주광천수를 선보이던 기업이기에 떠오를 수 있는 아이디어다. 물론 그룹 창업주인 조 회장은 우리가 다 아는 글로벌 기업인 아니었던가? 월남전을 거치며 기업의 몸집을 키웠고, 혈혈단신 전 세계 항공노선을 확장하며 세계를 누비고 다녔던 조 회장이기에 ‘제주물’의 미래가치를 알아챌 눈도 누구보다 정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교래리 물공장은 당시로선 제주가 낳은 ‘스타급’ 도지사를 만나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6공의 황태자’로 불린 박철언 전 체육부 장관에게 찍혀 쫓기듯 미국으로 떠났던 농림수산부의 고위관료였던 그는 그렇게 보낸 1년여의 미국체류 시절 ‘물’을 만났다. 1991년 그의 미국 체류 때 그가 찾아간 슈퍼에서 사람들이 물을 사먹는 모습을 보고 그는 가슴이 벅차 올랐던 것이다. “제주의 지하자원을 세계의 상품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그의 희망과 비전은 그가 YS정부 시절 관선 제주도지사로 부임하면서 현실화됐다. 그가 바로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다.

 

두 사람 모두 지금 우리로선 생각할 수 없는 범주의 일을 벌였고, 우리가 보지 못한 걸 보는 눈을 가졌다. 미래를 보는 탁월한 식견은 이 글을 쓰는 이로서도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부분이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꼬였다. 민간기업의 총사령관 격인 그룹 회장과 제주도민의 대표자인 제주도지사가 갈 방향은 사실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그룹 회장으로선 기업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블루골드’에 대해 확실한 보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당장은 아니라도 먼 미래에 기업을 튼튼히 받칠 원자재라고 보았을 것이다. 60·70년대 눈에 불을 켜고 한반도에서 찾아내려던 ‘석유지하자원’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이란 짐작도 있었을 것이다. 그 점에서 무려 28년 전 제주에서 확보한 지하수 취수 및 생수제조 허가에 따른 권리는 기업의 입장에선 지금 봐도 매우 잘한 일이다.

 

반면 ‘공기업 발 제주생수 상품화’를 착안한 도지사로선 아무나 펑펑 뽑아 쓰는 부존자원이 아니라 제주 후손들의 행복까지 담보할 수 있는 공익자원이 돼야 했다. 공익실현을 전제로 한 공기업을 제외, 제주의 지하수를 사적 이윤추구의 대상으로 가는 걸 좌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역시 미국과 중동 지역에서 특정 기업이 석유시추·채유권을 갖고 돈벌이를 하는 걸 보며 제주의 지하수는 미리 공익적 채수·상품화에만 한정하는 것으로 규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야 향후 다른 기업이 권한을 달라고 요구해도 막을 명분이 생긴다.

 

이렇게 어긋난 운명은 우리가 잘 아는 ‘물분쟁’으로 충돌했다. 조 회장은 제주개발특별법에 새 조항까지 만들어 공기업만 제주의 지하수를 시판할 수 있도록 한 신 전 지사의 지하수 취수허가 조건 처분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연히 신 전 지사는 그렇지 않을 경우 공익추구에 한정한 제주생수 시판의 이익을 사기업에 넘겨줘야 할 판이기에 재임시절 물러설 수 없었다.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16년 전부터 벌어졌던 행정심판과 행정소송은 “사기업의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제한해선 안된다”는 법원의 결정으로 한진그룹의 승리로 끝났다. 수년 전 대법원의 최종 확정판결도 비슷한 논리다. 하지만 눈여겨 볼 대목도 있다. 당시의 판결을 잘 읽어보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부존자원 보호를 위한 지하수 취수량 증량 등에 대한 도지사의 허가권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물을 뽑아서 어떻게 쓰는 것 까지 간섭해선 안 되지만 뽑아 올리는 양은 도지사의 통제권 안에 있다”는 소리다.

 

법적 논란에 대한 최종판단을 놓고 보면 한진그룹으로선 승리했지만 승리한 게 아니고, 제주도로선 패배했지만 패배한 게 아니다. 그 이유 때문에 한진그룹은 지금처럼 계열사 소비용과 기내음료 제공 등의 영역을 벗어나 제주지하수를 이용한 사업영역 확대를 하고 싶어도 쉽지가 않다. 그러고자 하면 당장 지금의 허가량 보다 물을 더 뽑아 올려야 하는데 제주도의 관문과 도의회의 ‘동의’절차 관문까지 뚫어야 한다. 제주에 상주하는 한진그룹 계열사의 임직원들은 그래서 지금의 사업내용을 바꾸고 싶을 때만 되면 입이 바짝 마른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가 최근 <제이누리>에 연재 중인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한진 창업주인 고 조중훈 회장으로부터 정치자금과 도지사 선거자금 제의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16년 전인 1996년의 일이다. 그리고 그 자금의 출처도 “한진 창업주가 정부와의 로비로 항공료를 인상하게 되면 비자금이 생기게 되고, 그런 정도의 돈은 거기서 뚝 떼줄 수 있다”고 발언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런 일을 공개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엔 “고 조 회장이 생수시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당시 그룹임원이 도의회에 출석해 공언까지 해놓고도 매해마다 지하수 취수량 증량을 요청하는 등 생수시판을 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지속하고 있는 걸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라도 고인의 뜻을 받들고, 도민과의 약속을 지켜 기업윤리를 회복하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분노할 일이다. 생수시판을 위한 법적 분쟁과정에서 지사를 회유하고자 정치자금을 제의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더 가관은 그 자금의 출처다. 당시 매해마다 반복되는 항공료 인상으로 뭍나들이도 쉼지 않았던 제주도민들의 주머니 돈이 비자금으로 세탁돼 정치자금으로 둔갑했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격앙된 반응을 보이는 도민들이 많다. 일부 도민들은 “신 전지사가 돈을 받지 않았다면 그 자금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갔을까?”란 의혹의 시선도 보낸다.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진실이야 언젠가 밝혀질 것으로 본다. 철저히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진실규명이 과거를 들춰 서로를 좌절시키려는 방향으로 가선 곤란하다. 그보단 진실규명 후 새로운 전진의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바람이다.

 

“만약 이랬더라면...”. 지난 과거이고, 역사가 된 일이기에 가정법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제주의 ‘물’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도 역사는 만들어지고 있고, 아직 종결된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가정은 아직 유효하다.

 

 

그래서 의문을 가져본다. 만약 그 시절 한진그룹이 제주도와 법정까지 가는 소송을 거치지 않고 제주도와 전략적 제휴를 탐색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시설과 규모면에서 현재의 제주지방개발공사 공장보다 소규모인데다 어차피 매해마다 취수량 증량을 놓고 힘겹고 버거운 씨름을 하느니 차라리 공장을 지방공기업에 넘기는 것이다. 그리고 전 세계의 항공거점을 확보한 그룹의 특장점을 살려 제주생수의 ‘해외판권’을 얻는 게 어떤가란 물음이다. 벌써 국내시판 물량이 딸려 공장을 더 넓히고 싶은 제주도 산하 제주개발공사의 입장에선 새 공장을 돈 들여 짓느니 있는 공장을 인수하는게 더 낫지 않은가? ‘제주삼다수’의 국내유통망 문제도 최근 법정싸움으로 가는 등 시끄럽지만 요지는 그만큼 이익이 크다는 것이니 ‘해외유통권’을 확보하는게 나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블루골드’를 진작에 알아챈 선대회장의 뜻을 받들어 세계적인 명품생수를 해외에 보급하는 글로벌 기업이 될 수 있다. 새로운 날개를 다는 게 한진그룹이 된다. '제주삼다수'의 해외수출과 마케팅 전략을 고민하는 제주지방개발공사로선 전세계 항공노선을 갖춘 한진그룹 이상의 전략적 파트너를 만나기도 어렵다.

 

더욱이 기왕 하는 일이니 ‘세계적 브랜드’로 키우는 공동전선에 나서는 것이다. 생수분야 세계적 1위 브랜드인 프랑스의 에비앙이 하루 8천톤을 생산하고 있는데 우리라고 못할 것 없다는 생각도 든다. 오히려 여러 기관의 품질평가에서 제주삼다수는 에비앙을 압도하고도 모자람이 없다. ‘제주삼다수’의 공장을 넓혀 생산설비를 더 갖춰 취수량을 하루 1만톤까지 끌어올리면 ‘제주삼다수’가 국내 먹는샘물 1위 브랜드가 아니라 세계 1위 브랜드로 도약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교래리와 가시리는 ‘세계적인 물산업 전진기지’가 되는 것이다. 윈-윈과 상생은 이 지점이다. 제주도민의 공익도 실현하고, 한진그룹의 사업도 성장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하수자원 고갈을 우려하는 시각이 있다. 여기서 충분히 거론할 사안은 아니지만 정치적으로 이런 논리를 들이대는 세력의 입장이 아니라면 이해될 구석이 있다. 그 시절부터 취재해 왔고, 나름 여러 기관의 자료를 탐독하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교래리와 가시리에서 뽑아 올리는 물은 지하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수역이다. 바다로 빠지는 물을 나꿔채 뽑아 올렸다고 해서 고인 물이 사라지지 않는다. 더욱이 지금껏 그 많은 물을 뽑아 올렸지만 그 지하수 취수대의 수위가 달라졌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러니 제주도와 한진그룹 간 동반성장과 전략적 제휴에 걸림돌도 아니다. 오히려 두 운명체는 ‘물 만난 행운’이 될 수도 있다. ‘뜬금 없는 소리’로 치부하면 답답하다. 미안하게도 이런 구상은 그 동안 ‘물전쟁’을 벌였던 양 측의 실무와 핵심선에서 나온 얘기를 새로이 종합해 본 것이다. 오랜 시간 벌여온 분쟁의 근원적 해결책을 찾으려는 숙고의 산물이다.

 

아쉬움이 있다면 이런 ‘그랜드 디자인’을 할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혜안을 가졌던 한진그룹의 창업주는 세상을 떠났고, 신구범 전 지사는 말 그대로 ‘전직’이지 ‘현직’이 아니다. 누가 분쟁의 막을 내리고 새로운 전진의 막을 올릴 수 있을까? 도의회가 ‘의결보류’하듯 제주도가 생각을 멈추고, 한진그룹이 지금의 타성에 머무른다면 얻을 수 있는 답이 무엇일까? 결국 돌아오는 건 서로 ‘불편한 답’이다.

 

‘물’ 탓에 다툰 한진그룹과 제주도의 인연은 ‘물’ 덕에 함께 행운을 움켜쥐는 인연이 될 지도 모른다. 교래리 시대와 가시리 시대를 열었던 물 공장의 두 주역은 이제 새로운 전진의 시대를 열어갈 새로운 리더십을 기다리고 있다. ‘제주의 물’에 대한 사랑은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두 사람 모두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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