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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칼럼]구럼비, 지슬, 더갤러리가 던진 질문···제주도 문화정책의 현주소

<장면1>
꼭 1년 전의 일이다. 지난해 3월7일 서귀포시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현장이 주무대. ‘구럼비’가 이날의 뉴스 키워드다.

 

구럼비바위는 길이 1.2km에 너비가 150m나 되는 거대한 바위였다. 검은색의 용암너럭바위는 한 덩어리로 강정마을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세계적으로도 희귀지형이다. 게다가 그 바위의 한 켠에선 용천수가 솟아나 국내 유일의 바위습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붉은발말똥게·맹꽁이·층층고랭이 같은 멸종 위기종들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주특별자치도법에 따라 절대보전지구로 지정됐다.

 

강정마을 주민들은 구럼비바위 한 켠에서 나오던 용천수를 ‘할망(할머니)물’이라 불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가 마시면 아이가 생기고, 아픈 아이가 마시면 낫는다고 여겨지던 신성한 물이다.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정한수이기도 했다.

 

 

그 구럼비바위는 그날 눈앞에서 뭉개졌다. 산산히 부서졌다. 제주 해군기지 공사부지가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2011년 11월부터 시험발파와 본발파를 위한 자료보완 등의 사전작업이 진행돼 왔고, 그날이 바로 그 마무리였다. 무려 44톤의 폭약이 바로 그날로부터 수일 간에 걸쳐 구럼비 바위를 형체도 없이 망가뜨렸다.

 

“해군과 제주도가 윈윈할 수 있는 비법이 있다”고 내세우며 당선된 제주도정 책임자는 사실 이날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수년간의 논란을 끌어왔고, 구럼비 바위를 절대보전지구에서 지정해제한 절차가 위법적이었다란 법률적 견해가 많았지만 그 구럼비바위는 그렇게 영영 우리 곁을 떠났다.

 

<장면2>
지난해 11월15일. 제주도의회 문화관광위원회가 제주영상위원회(위원장 우근민 도지사)를 대상으로 한 행정사무감사 현장.

 

자리에 앉은 임원식 영상위 부위원장에게 이선화(새누리당 비례) 의원은 핏대를 올렸다. 그는 “9년째 그 자리에 앉아 계신 분으로서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 의원은 사실 분노하고 있었다. 바로 한달여 전 제주의 영화인들이 어렵사리 만든 독립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4관왕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는 소식을 들어 박수를 쳤지만 뒤늦게 저간의 사정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의원은 “고작 2500만원의 예산을 지원해주고 <지슬>의 성공을 여러분의 공으로 가져가려 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사실 그 시절 막판 작업에 한창이던 영화제작팀 <자파리필름>은 허덕이고 있었다. 배우들이 ‘노개런티’나 다름 없이 나섰지만 그래도 제작비용은 2억5000만원이 필요했다. 그 돈은 4·3평화재단에서 받은 1000만원과 텀블벅 후원 1400만원에 나머지는 도민 각자의 성금과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펀드(ACF)의 장편독립영화 지원펀드로 해결했다.

 

 

거의 무일푼으로 시작한 영화인들이 필요했던 돈 가운데 딱 10%를 제주도가 얹어준 것이다. 이 의원은 “배고픈 영화인들에게 2500만원을 지원해 준 것이 최대치라고 생각하는 제주영상위원회의 인식수준이 부끄럽지 않냐”고 질타했다.

 

자리에 앉은 임 부위원장은 “제작비 지원만이 아니라 촬영할 때도 여러 기자재를 지원했다. 영화제작 초반에 시나리오와 촬영지에 대한 자문도 했다”고 답변했다.

 

영화는 그런 제주도의 인색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최고의 독립영화제로 불리는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인 심사위원 대상에 이어 프랑스 브졸아시아국제영화제에서도 대상을 차지했다. 한국영화가 선댄스영화제뿐 아니라 브졸영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것은 <지슬>이 처음이다. 물론 지난 1일 제주에서 개봉한 <지슬>은 연일 매진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오멸 감독은 “영화를 제작하며, 힘겨운 나날을 보내면서 제주도정이 이렇게 인색하고 야속할 수 있는가를 곱씹었다. 정말 기꺼이 힘을 보태준 도민들이 없었다면 영화는 세상의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영상위원회는 이달 5일 크랭크인하는 SF휴먼코미디 영화 <썬더맨>의 제작비 1억5천만원을 투자했다. 물론 촬영장소 섭외와 촬영장비 등도 지원한다.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는 이가 ‘제주출신’이란 게 그나마 위안이다.

 

<장면3>
6일 오전 9시 서귀포시 중문관광단지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앞.

 

‘더 갤러리-카사 델 아구아’(더 갤러리)가 현장이다. 혹이나 이 건물을 아직 모르는 이도 있기에 설명이 필요하다. 더 갤러리는 제주컨벤션센터(ICC) 앵커호텔의 홍보관이자 모델하우스다. 2008년 8월28일 가설건축물로 지어졌다. 앵커호텔은 2007년 기공에 들어가 내년이면 완공될 예정이다.

 

하지만 그 건물엔 세계적 명장의 숨결이 담겨 있다. 앵커호텔과 더 갤러리는 세계적인 건축가 리카르도 레고레타(1931~2011)가 설계했다. 그가 죽기 전 남긴 유작이다. 맥시코 출신의 레고레타는 전 세계 곳곳에 지역적인 요소와 보편적인 예술 감각을 섞어낸 건축물(작품)을 60여개 남겼다. 사람이 편해야 좋은 건물이라는 지론을 고집했다.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 건축상 심사위원을 지내는 한편 전미건축가협회 금메달, 국제건축가연맹(UIA)상을 받았다.

 

‘카사 델 아구아’(Casa del Agua·물의 집)로 명명된 더 갤러리는 작가가 제주의 태양과 흙, 물을 꼼꼼히 살피고 연구한 건축 작품이다. 이국적인 색감과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제주의 자연에 속해 있는 듯 설계됐다. 해외 건축가들은 ‘이 집은 땅에 본래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런 뜻이 담긴 모델하우스 ‘더 갤러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델하우스’라 불릴 정도였다. 작가가 타계하기 전 아시아에 남긴 2개의 작품 중에 내부공간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었다. 나머지는 일본에 있는 개인 주택이다. 때문에 건축학도나 건축물에 관심이 많은 이들 사이에선 견학 필수코스로도 이용됐다. 물론 영화 '건축학개론'이 히트치면서 이 모델하우스는 더 빛이 났다.

 

 

그러나 바로 6일 오전의 일로 이 건물은 형체 없이 사라졌다. “불법 가설건축물이기에 철거는 불가피하다"는 입장과 "엄연히 문화유산이기에 보존해야 한다"는 지리한 논쟁의 끝에 나온 결론이다.

 

서귀포시 공무원들과 용역직원들이 현장으로 갔고, 그들은 ‘행정대집행’ 공문을 내세우고 굴삭기를 동원해 여지 없이 건물을 부쉈다. 굴삭기의 내리치는 힘으로 유리창이 깡그리 무너지듯 ‘세계적 문화유산을 지키자’던 사람들의 마음도 그렇게 무너졌다. 현장을 찾은 한 도의원은 분노하다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부서졌다. 그렇게 무너져 갔다. 제주의 한과 역사를 담으려던 독립영화인들의 외침은 그렇게 외로웠다. 그저 ‘우는 애 달래듯’ 받은 푼돈이 고작이었다.

 

‘세계가 찾는 제주, 세계로 가는 제주’가 지금 도정이 내세운 슬로건이다. 굳이 ‘세계’까지 운운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한국수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다. 더욱이 과거 제주도의 수준도 이것보단 훨씬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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