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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난자 추모위, 43년 전 최악 해난사고 유족찾기 착수 ... 추모사업 본격화

 

43년 전 제주항에서 출항, 전남 여수 앞바다 침몰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남영호 유가족을 찾고 있다. 제주 서귀포시와 남영호 조난자추모위원회(위원장 원정상)가 수소문의 주인공이다.

 

서귀포시가 지난해 11월 26일 추모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올해 남영호 조난자와 유족에 대한 위령·위로사업을 본격 추진키로 한 가운데 가장 먼저 유가족찾기에 나섰다.

 

남영호 사건은 지난 1970년 12월 14일 338명의 승객과 209톤의 감귤 등 화물을 싣고 서귀포항을 출발한 남영호가 15일 새벽 2시5분경 여수 소리도 26마일 인근 해상에서 침몰해 승객 323명이 사망한 최악의 해상사고로 기록된 조난 사건이다. (현재 사망인원도 정확치 않다. 해난심판원 자료를 토대로 한 국가기록원 자료는 당시 조난사망인원을 323명으로, 당시 사고조사 당국이 밝힌 조난자 명단은 318명으로, 1982년 세워진 위령탑은 사밍인원을 319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망인원 역시 재조사 대상이다)

 

사고를 계기로 교통부는 선박안전운항지침을 새로 마련, 각 지방해운국에 시달했고, 서귀항은 이 사건후 개항장으로 승격돼 해운행정이 미칠 수 있는 조치가 이뤄지게 됐다.

남영호 사건 조난 위령탑은 당초 1971년 3월 서귀포항에 건립되었지만, 항만 확장공사로 1982년 9월 서귀포시 상효동 1510-1번지로 옮겨지며 기억속에서 점점 사라져 왔다.

 

시는 그동안 추모위원회를 중심으로 지난해 12월15일 위령제를 개최하고 위령제 행사시 참석했던 소수의 유족들과 간담회를 갖는 등 위령사업을 시작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다수의 유족을 찾지 못해 유족들의 의견수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시는 남영호 조난자와 연고가 있는 시민들의 제보와 협조를 당부하고 있다.

 

서귀포시와 추모위원회는 국가기록원에 소장돼 있는 당시 해난심판위원회 재결록을 근거로 당시 조난자 명단 318명에 대해 정리, 읍면동을 통해 유족들을 파악하고 있지만 작업이 녹록치 않은 상태다.

 

원정상 추모위원장은 "남영호 조난자 위령사업은 최악의 해상 조난사건으로 다수의 서귀포시민들이 명을 달리한 한 맺힌 사건이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잊혀져가고 있어 늦게나마 유족들의 의견을 모아 제대로 추모사업을 하려고 한다"며 “희생자들의 혼이 영면할 수 있도록 조난자 유족들을 찾는데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제보전화는 서귀포시청 기획예산과(064-760-2191~7번)로 하면 된다. [제이누리=양성철 기자]

 

 

남영호(南榮號) 침몰 사건은? = 서귀포항에서 출항한 부산~제주 정기여객선인 남영호가 1970년 12월15일 침몰한 사건이다.

 

남영호는 중량 362톤, 길이 43m, 폭 7.2m, 시속 15노트, 정원 302명이 승선 가능한 철선이다. 1968년 3월5일 서귀포~성산포~부산 간 노선을 첫 취항했고, 매달 10회씩 정기적으로 왕복 운항하던 정기 여객선이었다.

 

남영호는 1970년 12월14일 오후 5시쯤 서귀항에서 승객 210명과 연말 성수기용 감귤을 싣고 출항했다. 또 성산항에서 승객 121명과 화물을 더 싣고 밤 8시10분쯤 부산을 향해 나섰다. 선박회사 측은 3개의 화물창고가 모두 감귤 상자로 채워지자 선적이 금지된 앞 하창(荷倉) 덮개 위에 감귤 400여 상자를 더 쌓아 실었고, 중간 갑판 위에도 감귤 500여 상자를 쌓아 실어 서귀항을 출항할 때부터 이미 선체 중심이 15도쯤 기울었다. 만재흘수선(滿載吃水線)이 물속에 잠겨 복원력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성산항에 도착하자 다시 화물을 더 실었던 것이다.

 

사고는 남영호가 성산항을 떠난 지 5시간 25분이 지난 새벽 1시20분쯤 전라북도 상일도 동남 28마일 해상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 갑자기 심한 바람이 남영호 우현 선체에 몰아쳤다. 때문에 갑판 위에 쌓아 놓은 감귤 상자가 갑판 좌현측으로 허물어졌다. 순간 중심을 잃은 선체가 좌현으로 넘어지면서 선체가 기울면서 중심을 잃고 침몰하기 시작했다. 남영호는 이에 정상 속도인 15마일을 10마일로 줄여 계속 항진하려 했으나, 결국 전라남도 여수시 소리도 인근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사망자는 319명이었고 생존자는 12명에 불과했다. 건국 이래 최악의 해난사고로 기록됐다. 이 사고로 임검 경찰관 4명이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되고 서귀포경찰서장이 입건되는 결과를 낳았다

 

사고가 발생하자 긴급구조신호(SOS)를 타전했으나 해상 부근 어느 무선국에서도 이 조난 신호를 포착하지 못했다.

 

당시 이 남영호는 정원이 290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승객 311명과 선원 20명 등 331명을 태워 정원보다 41명이나 초과했다. 게다가 남영호가 출항하기 전날까지 폭풍주의보가 발효돼 4일간 제주 지역에 묶여 있던 승객과 감귤 등 화물 400톤 이상을 무리하게 실은 것으로 밝혀졌다.

 

사고는 1차적으로 하중을 감당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당시 항해 10일 전에 서귀포~부산 항로에 경험이 부족한 을종 2등 항해사(지금의 5급 항해사) 면허를 가진 자가 선장임무를 맡은 것도 참사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또 낙후된 선박 시설과 기관, 무선시설도 침몰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아울러 감독기관의 감독소홀도 참사를 부른 요인으로 보고 있다.

 

사고 뒤 서귀포항 남영호가 떠났던 자리에는 위령탑이 세워졌고 1982년 서귀포항 임항도로 개설로 인해 서귀포시 돈내코 법성사 인근(서귀포시 영천동)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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