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후 1시쯤 제주시 아라동의 한 마을.
마을 입구에 우뚝 선 바위에 새겨진 이름은 '앙끄레마을'. 그 바위를 지나자 한눈에 고급스러운 단독주택들이 펼쳐졌다. 저마다 다른 모습인 주택들은 잔디가 잇는 마당에 주차장을 갖춘 여느 타운하우스 풍경이다. 흔히들 꿈꾸는 '전원주택의 로망'이 자리한 곳이다.
평온과 평화가 자리한 듯한 마을이다. 하지만 이 마을 주민들은 최근 분노감에 휩싸였다.
마을 앞 왕복 2차선 도로에는 '마을 안 동물화장장 결사반대'라는 현수막들이 걸려있었다. 전원생활을 꿈꾸던 이 마을,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이 치열한 분쟁의 주인공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어떻게 동물화장장이 들어서는데 인근 주민들 동의도 없이 건설된다는게 말이 되는거냐"
앙끄레마을 주민 한모씨는 그동안 참아온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한마디로 꿈꾸던 보금자리에서의 삶이 무너질 위기란 것이다. 그는 "불과 300m 이내에 요양병원과 3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동물화장시설이 들어서면 화장 냄새, 소음, 미세먼지 등으로 주거 환경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민들의 분노는 이 마을과 불과 300m 거리 민간 동물장묘시설이 들어설 계획 때문이다.
지난달 제주시청에 제출된 건축허가신고서엔 제주시 아라동 제주대 사거리 서쪽 한북로 부근 오등동 37 등 4필지에 연면적 589.98㎡, 지상 2층 규모의 동물장묘시설(화장시설) 건물을 짓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추진하는 공공 장묘시설과는 별개다. 사설 장묘시설이 추진되는 첫 사례다.
앙끄레마을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둔 바로 옆 소란마을 주민들은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었고, 불과 며칠 전에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이 곳에 동물화장시설이 들어서면 우리 동네 환경은 엉망이 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현행 동물보호법은 20호 이상의 인가 밀집 지역과 학교, 그 밖에 공중이 수시로 집합하는 시설 또는 장소로부터 300m 이내에는 동물 장묘시설 설치를 제한한다. 다만 제주도지사나 시장의 판단에 따라 건축허가도 가능하다.
제주시는 아직 정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건축과와 축산과, 환경과 등 관계부서 의견을 수렴하는 등 검토하고 최종 결정을 내린다는 방침이다.
제주시 관계자는 "민간에서 추진하는 것이기에 주민동의와 설명회는 의무 사항이 아닌데다 위법 사항이 없을 경우 허가를 해줘야 하는 상황"이라며 "현재 건축허가를 검토하는 중이다. 이격 거리 기준 등을 확인한 후 민원인들에게 답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김씨는 "우리도 엄연히 쾌적한 주거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화장시설이 들어서면 우린 그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하지만 시청은 우리 목소리를 아예 듣지 않는다"고 분개했다.
주민들은 제주시청에 두 번 진정서를 제출했다. 앙끄레마을과 소란마을 주민 72명의 반대 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제주시장과의 면담도 요청한 상태다.
그러나 제주시청은 "부서별 회의를 진행한 결과를 토대로 시장에게 보고하고, 시장이 주민과 면담을 진행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지를 판단하겠다"는 답변을 내놨다.
일부 주민들은 오영훈 도지사에 대해서도 의혹의 시선을 돌렸다. "민간 동물화장장 건설 추진이 선거시절 내건 민선 8기 도정이 공약을 실현하려는 의도"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실제 오영훈 지사는 지난 5월 4일 열린 제4회 2024 제주 반려동물 문화축제에 참석, 개막식에서 “선진 반려문화 확산을 통해 사람과 동물이 행복한 제주 조성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2025년 반려동물 장묘시설을 본격 가동하는 등 동물복지 정책을 차질 없이 진행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이번 동물장묘시설 추진과정도 '의혹 투성이'라고 보고 있다.
소란마을 주민 김씨는 "동물화장장을 유치하고자 하는 업체들이 많을 것이다. 공개 입찰과 공개경쟁을 통해 가장 적합한 입지를 선택해야 한다"며 "공개 입찰을 통해 입지 조건을 다 검토하고, 민원이 적고 장래 제주시 발전에 큰 무리가 없는 곳을 선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주민의견 수렴과정의 생략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앙끄레마을과 소란마을은 행정구역상 아라동이란 이유로 아예 설명회 대상에서 배제됐기 때문이다. "직접 영향을 받는 곳인데도 아예 무시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설명회는 건설예정지와 같은 행정구역이라는 이유로 오등동 주민들만 대상으로 열렸다. "직접 피해가 우려되지 않는 오등동 주민들 동의만 받아 허가를 신청해도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는 게 말이 안된다"는 주장이다.
설명회가 없었기에 당연히 동물화장장 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란 정보는 아예 없었다.
앙끄레마을 주민 한씨는 "제주시청에서는 개인의 건축허가신청이어서 사업내용을 알려줄 의무가 없다고 했다"며 "주민들의 의견이 끝내 묵살된다면 행정소송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
동물장묘시설 예정지에서 100m 남짓 거리 아라요양병원은 다소 생각이 달랐다.
이 병원 앞에도 동물화장장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그러나 이 병원 이유근 원장은 다른 뜻을 내비쳤다. 그는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면 반대하겠지만, 법에 문제가 없다면 반대하지 않는다"며 "저만의 철학도 있는지라 그 철학에 반하지 않기에 반대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병원 앞 반대 현수막은 "주민들의 요청에 의한 것이지 병원이 반대입장을 내는 건 아니"란 것이다.
이 원장은 "화장장이 아직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분진이나 냄새등을 문제 삼는 게 문제다. 처음부터 반대하기 보다 건립과정에서의 문제, 향후 냄새와 분진에 대한 예방책 등 논의들을 하면서 사업을 추진한다면 마을의 발전에도 이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화장장이 무조건 혐오시설이라고 반대하는 것 보다 제주시와 민간화장장업체, 주민들이 함께 모여 협력해 간다면 이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건축예정지 주변도 문제다. 가스업체의 저장소와 충전소 등 시설도 두루 있다. 동물화장장 예정지 바로 옆엔 상당한 규모의 SK가스 충전·판매소가 영업 중이다.
인근 토지주들은 동물 화장 시 열기와 불을 사용해야 하는데, 바로 옆에 가스시설이 있어 위험하다는 걱정을 표명했다. 한 토지주는 "화장장은 고열을 사용해 열처리를 해야 하는 시설인데, 어떤 안전 대책이나 설명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근 토지주들은 지난 9일 제주시를 항의 방문해 민간 동물장묘시설 설치를 불허할 것을 요구했다.
건축허가 신청서를 낸 민간 동물장묘시설 업체의 얘기는 들어볼 수 없었다. 여러 문제점에 대해 의견을 들어보려 했지만 만남은 거절됐다. 연락처를 전달했지만 연락도 닿지 않았다.
제주시를 통해 들은 업체 관계자의 답변은 간단했다. "제주시가 아직 본 사업에 대해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은 상황에서 업체가 먼저 이 문제에 대해 답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향후 제주시와 협력해 인근 주민들의 우려를 해소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것뿐이었다.
제주시 관계자는 "다수의 민원이 발생했고, 인근 주민들이 시장과의 면담을 요청해 지난 12일 진행했다"며 "시장 면담 후 부서별로 면밀히 검토해 주민들에게 다시 한 번 답하겠다"고 말했다. [제이누리=김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