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을 역이용하는 사람들 필자는 일찍이 제주 전통문화의 키워드를 돌, 바람, 여자, 말, 가뭄을 상징으로 삼아서 ‘석다(石多), 풍다(風多), 여다(女多), 마다(馬多), 한다(旱多)’의 섬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 다섯 개의 상징적 개념으로 제주를 보게 되면 생산 문화적인 의미가 쉽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 중 석다(石多)는 현대 지질학적인 개념으로 생각지 않더라도 전통사회에 수많은 기록에서 보듯이 제주가 돌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척박(瘠薄)’하다 라고 했다. “척박(瘠薄):땅이 가물어서 기름지지 못함”을 말한다. 화산섬이기 때문에 검은 색 화산회토가 대부분이고 “이 땅(제주)에는 바위와 돌이 널려 있어, 흙이 덮인 것이 몇 치 뿐이다.” “토질이 푸석푸석하고 메말라 밭을 개간 하려면 반드시 소나 말을 몰고 와서 밭을 밟아주어야 한다(밭ᄇᆞᆯ리기).” 그래서 사람들은 적어도 계속 농사를 지으려면 거름을 얻기 위해서 소나 말무리를 밭담 안에 몰아넣어 며칠을 가두어서 그들의 분뇨를 거름이 되게끔 밭 여기저기에 남기도록 했다. 이를 ‘바령’이라고 한다. 그렇게 바령한 밭은 기름지고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는 것이다. 삶은 생각보다 모질고 사람은 의외로 지혜롭다. 돌로 된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야속한 땅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식량을 구하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여성들은 바다로 나가 ‘ᄌᆞᆷ네(潛女)’가 되었고, 남자들은 배를 타거나 목도일을 해야만 했고 수자리를 서거나 진상의 곁꾼으로 동원됐다. 18세기초 이형상 목사 때에 여성들이 많은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염집(서민가) 여성들은 용천(湧泉)에서 물을 길어오는 일, 곡식을 베는 일, 땔나무를 마련하는 일, 나무통으로 물을 나를 때에도 등짐을 지지 않는다. 제주에서는 물건을 나를 때에도 머리에 이고 다니지 않는데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다치기 때문에 등짐을 지고 땅을 보면서 걸어야 한다. 18세기 초 당시 제주 여인들의 복장들도 반나체나 다름없었다. 여인들은 삼으로 엮은 줄을 허리에 돌려 두르고 몇 자(尺)의 굵은 베를 바늘로 꿰매고는 그 삼줄 앞면에 매달아 오로지 음부(陰部) 만을 가려서 옷과 치마를 벗고 몸뚱이와 볼기짝을 드러내 다님으로 보기가 매우 참담했다. 유교 원리주의자였던 이형상 목사의 눈에 비친 제주 여성의 일상에서의 그 모습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여인들에게 수치스러움을 알게 하여 급기야 영을 내려 꼴 사나운 그런 패션을 금지시켰다. 이형상은 「제주 풍속(土風)」 이라는 시에서 제주 풍속의 전모를 말하고 있다. 섬은 이름난 곳이어서 땅은 더욱 그윽한데 문재(文才)는 모자라도 무재(武才)는 뛰어나다네 휘파람으로 소를 몰아 밭을 모두 밟아줘야 하고 절구 찧을 때도 사투리로 함께 노래하네 여인이 물 긷고 물질하지만 남자는 반대로 한가하다네 백성들 가난하여도 사치에 들떠 있어 기이한 풍속이로세 사계절 가죽옷 입고 있어 풍정(風情)이 야박한데도 누가 헤진 옷에 잠방이 입은 사람 근심을 알아주랴. 많으면 많은 것을 이용하게 되므로 결국 그것이 부족하기에 이른다. 인구의 증가는 생산도 늘게 하지만 소비도 따라서 늘게 한다. 생산수단의 진보는 문명의 길을 따라서 온다. 농업중심의 조선시대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전답의 상태에 집중되었는데 농업 생산력의 증가와 농지의 안정적인 확보가 관건이었다. 이는 안정적인 수취제도에 목적이 있었다. ◇ 국가의 운영자금 전세(田稅) 이형상 목사 재임 시절의 밭의 등급은 하중(下中)이었다. 그 밭은 흙이 검고 부풀어 오른다. 그래서 곡식 씨는 마땅히 기장, 피, 산도, 차조, 콩, 보리, 메밀, 사탕수수 등을 심어야 하는데 특히 사탕수수는 맛이 달고 무성하게 자라는 것으로 보아 섬의 토질에 잘 맞았다. 논은 매우 적어서 대정현에 약간이 논이 있으며, 정의현에는 매우 적고, 제주목에는 더 적다. 1702년(숙종 28)의 제주의 전답은 3,357목(結), 33짐(負), 9뭇(束)이고, 정의현 전답은 140목, 32짐, 5뭇이며, 대정현 전답은 149목 91짐 4뭇이었다. 삼(參)은 잘 자라지 않았고, 면(綿)은 매우 귀해서 대정현에 목화(木花, 멘네)를 심은 자가 있었는데 솜털이 성글어서 옷 만드는데 좋지 않았다. 또 산림에 널린 것이 뽕나무이지만, 섬사람들이 누에를 치고 길쌈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으므로 이형상이 삼읍에 재배법을 알아듣도록 가르쳤다. 그렇다면 전답과 관련해서 공납을 대신하여 소위 새로운 조세법, 즉 대동법에 대해서 알아보자. 조선의 조세체계는 근본적으로 조용조(租庸調) 체계였다. 즉 토지가 있으면 조(租)가 있어 전답에 부과하여 곡물로 징수하는데 이를 전세라고 한다. 몸이 있으면 용(庸)이 있어 사람에게 부과하여 요역을 징발하고, 호(戶)가 있으면 조(調)가 있어 집에 공물을 징수하였다. 특히 전세는 국가를 경영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근본이 되는 세금이기 때문에 상세(常稅)라고 했다. 즉 전세는 나라의 경상비인 녹봉과 군사비 등의 지출을 위한 세금이었기 때문에 국초부터 그 과세 체계를 법으로 제정하여 철저히 관리했다. 전세가 무엇보다도 쓰임새가 중요하기 때문에 조세 규모도 컸고, 토지면적 조사에 그만큼 민감하게 반응했다. 조선의 토지제도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결부제(結負制)인데 토지파악과 조세 부과의 기준이 되어 결(結:목) 부(負:짐), 속(束:뭇), 파(把:줌)의 단위로 측정했다. 전세 부과 원칙은 9등연분법(九等年分法)과 전분6등법(田分六等法)을 시대에 따라 채택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전국적으로 170 만결에 달하던 토지 면적이 왜란 후에는 3분의 1로 줄어서 54만 결 밖에 안 되었다. 당장 조세 수입에 비상이 걸렸다. 이에 토지의 개간을 장려하고 양전(量田)을 실시한 결과 숙종(1674~1720) 때에는 토지 면적이 140만 결로 증대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조세 수입은 그에 상응하여 늘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왕자·옹주 등에게 준 궁방전(宮房田)이나 관청·군영 소속의 둔전(屯田:주둔한 군사들에게 군량을 지급키 위해 마련한 밭)과 같은 면세지(免稅地)가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또 중앙의 세도가인 권신(權臣)이나 지방의 토호들의 토지 점유가 늘어난 것도 같은 이유가 되었다. 이와 같은 문제로 인해 조세의 감소에 대한 대비책이 긴급히 필요하게 되었다. 조세 수익의 부족은 국가 재정의 위기가 되었으므로 이미 임진왜란 이전부터 일부에서 주장해오던 공납(貢納)을 미곡(쌀과 곡식)으로 바치게 하는 수미법(收米法) 이 다시 논의 되면서 급기야 시행되기에 이른다. 1608년 광해군의 즉위년에 영의정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의 주장에 따라서 먼저 경기도에서 시행되었고, 인조 원년(1623)에는 강원도에 실시되었다. 그리고 효종(1649~1659) 때인 효종 2년(1651) 1월에 김육(金堉, 1580~1658)은 영의정에 오를 수 있었고, 이에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더욱이 김육은 효종의 총애가 커지면서 김육의 손녀(차남 김우명의 딸)를 세자빈으로 세울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외척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쥘 수 있었다. 대동법은 김육이 사망한 한참 뒤인 1708년(숙종 34)에 드디어 전국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다. 대동법이란 대동미(大同米)라는 명칭 아래 밭(田) 1결에 대하여 미(米) 12말(斗) 씩 징수하게 되었는데 이를 혹은 포(大同布)나 돈(大同錢)으로 납부할 수 있게도 하였고 이를 관할하는 관청이라고 하여 선혜청(宣惠廳)을 두었다. 이 대동법이 시행된 후에도 필요에 따라 농민들로부터 공물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원칙적으로 공납제도는 폐지되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대동법이란 ‘ᄂᆞᆷ의 대동’ 이라는 말이 있듯이 원래 경기 삼남에는 1결에 쌀 12말을, 양전(量田)이 되지 않은 읍에는 4말을 더하며, 영동(대관령 동쪽)·영서(대관령 서쪽)에는 2말을 더하고, 그리고 해서(황해도)에는 상정법(詳定法)을 시행하여 15말을 거두니, 이를 통틀어 ‘대동(大同)’이라 하였다. 이형상의 저서인 『남환박물(南宦博物)』 「부역(賦役)」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당시 제주 세법의 윤곽을 알 수 있다. “세법이 바르지 않다. 당초 경계를 지을 때 이미 측량하지 않았다. 곧 올해의 세금도 적게 내었다. 묵힌 밭과 재해를 입은 것을 제외하고, 결(結)에 따라 거두어 들인다. 전세(田稅)는 매 짐(負)마다 쌀과 콩은 1되 5홉이고, 산미(山米)와 전미(田米)는 곧 7홉 5작이다. 이른바 대동(大同)이라고 하는 것은 위아래 할 것 없이 남정(男丁)들을 뽑아 한 사람에게 전미 5되를 매긴다. 이밖에 결역(結役)은 없다. 표고버석과 백랍(白蠟)은 군병(軍兵)에게서 받고, 미역과 전복, 물고기, 게 등은 포한(鮑漢:포작인)에게서 받는다. 무릇 여러 역역(力役:요역;노동력)과 땔나무, ᄎᆞᆯ(꼴), 꿩(산촌의 남자에게), 닭(해안의 남자에게)들의 물품은 모두 백성들에게 부담 지운다.” ◇ 제주도 보물 그림첩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탐라순력도』는 지금으로부터 320년 전의 제주의 군사, 관방, 지리, 풍속 등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기록화다. 이 『탐라순력도』는 당시 제주 목사였던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이 1702년(숙종 28) 3월 제주목사로 도임하여, 같은 해 10월 29일부터 11월 20일까지 22일 동안 제주 전역을 순력하였는데, 이 때 제주의 화공(畵工) 김남길(金南吉)을 시켜 기록화로 그 과정을 상세하게 남겼다. <탐라순력도>는 제주도 지도 1면, 순력 장면 40면, 서문 2면 등으로 1703년 8월에 완성되었다. 이 기록화는 320년 전 제주의 문화와 풍물, 관방을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첩으로 시사, 강사, 사후, 시회, 조점, 점마, 전최, 배잔, 양로, 공마, 감귤봉진, 시취, 구마, 수렵, 방록, 풍악, 범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도첩은 1979년 병와 이형상 저작들과 함께 일괄 보물 제625호로 지정되었으며, 제주시가 1998년 이형상의 후손으로부터 원본을 입수하여 현재 국립제주박물관에 위탁 소장하고 있다. 이 『탐라순력도』는 18세기 실경산수의 사실적인 단계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첩이다. 『탐라순력도』는 기록화의 일종으로 우리나라에 이런 이름으로 전해오는 그림으로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 “순력(巡歷)이란, 매번 봄과 가을에 절제사가 직접 방어의 실태와 군민의 풍속을 살피는 것(每番春秋節制使親審防禦形正及軍民風俗謂之巡歷)”이라고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변방에 부임하는 수령이 제주도 방어체계인 3성(城) 9진(鎭)의 군기(軍器)와 군사들의 실태를 점검하는 그림으로, 제목, 순력 그림, 좌목 등 3단 구성으로 제작된 기록화이자 실용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3단 구성의 이전 사례로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계회도(契會圖)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며, 다시 이 3단 구성 방식은 「제주도문자도」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탐라순력도』 서문을 쓴 선비가 오노인(吳老) 필(筆)이라고 했으나 1703년 5월 19일 오시복(吳始復)의 간찰에 “말씀한 서(序)를 쓰려고 하니 요즈음 기분 나쁜 생각이 들어 붓을 잡을 틈이 없었는데 조금 기다리면 며칠 사이에 즉시 그에 부응하려합니다만, 인편으로 즉시 드리지 못하여 깊이 탄식하고 있습니다.”라는 편지글이 있으므로 오노인(吳老)이 감산 유배인 오시복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순력 행사는 이형상 목사 이전에 이미 제주 목사 이원진(李元鎭, 1594~?), 제주안핵겸순무어사 이증(李增,1628~1686) 등이 정기적으로 군사를 점검하기 위해 순력을 다녔는데 변방 제주의 3성 9진 체계를 중심으로 군민(軍民)을 점검했었다. ◇ 최초로 몰골법으로 그린 돌담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성을 지키려고 쌓은 돌담을 성담이라고 한다. 세 읍성과 아홉 진성이 이에 해당한다. 「관방도(關防圖)」에 나오는 성담들은 대개가 계화(界畫)로 그려졌다. 계화법이란 자를 이용하여 정밀하게 사물(성곽)의 윤곽선을 그리는 회화 기법으로 건물, 누각, 성벽 등을 그릴 때 주로 사용한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에서는 계화법으로 그리는 곳이 「제주전최(濟州殿最)」 나 「감귤봉진(柑橘封進)」 등의 기와집이나 담장, 그리고 여러 진(鎭)에 소속된 봉수대나 연대의 돌담을 직선으로 그릴 때 사용하고 있다. 특히 「제주전최(濟州殿最)」의 성담은 직사각형 모양의 장대석 돌을 하나씩 엇갈리게 3단으로 쌓고 있으며, 목관아(濟州牧官衙) 사고석 담장에도 적용하고 있는데 담장에 쌓은 돌은 사각형의 현무암을 백회를 바른 후 조적(造積)하였다. 관청의 담장은 경계구분이 주된 목적일 것이며, 또 각 관청이 업무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 시각적인 차단을 하여 관청의 고유 기능을 보호하도록 하는 역할이 있다. 그러나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 나오는 3성 9진의 성담들은 모두 오히려 자유로운 곡선으로 선묘를 하고 있는데 그 3단의 돌담을 나타내는 선묘는 그냥 손으로 프리하게 그려서 성담을 두르고는 3개의 선으로 된 성담 바로 위에 성가퀴를 요철(凹凸) 모양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귤림풍악(橘林風樂)」의 돌담은 사뭇 다르다. 과수원을 보호하기 위해 밖으로는 돌담을 둘렀으며 그 안에는 크게 자란 대나무가 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직선으로 높이 자란 대나무 사이로 방풍용 돌담을 쌓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과원 방풍용 돌담을 축성(築城)이라고 한다. 축성은 말 그대로 성처럼 쌓은 것이고, 그것의 목적은 오로지 바람을 보호하는 것이다. 축성은 겹담으로써 일종의 잣벡담과 같은 모양이면서 견고하게 쌓고 있다. 축성을 그린 기법으로는 몰골법을 적용하여 단번에 붓에 묻은 먹의 농도와 번지는 것만으로 물체를 표현하는 동양화 기법이다. 붓을 한 번에 눌러 단번에 형태를 나타낸다. 축성을 표현하려고 농도를 조절한 모습이 역력하다. 몰골법으로 돌담을 그린 최초의 그림이 「귤림풍악(橘林風樂)」 대나무 뒤에 숨어있다. 돌담 그림을 최초로 그린 화가는 김남길이다. 그가 제주의 화공인지 아니면 공재 윤두서의 제자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1703년 이형상의 명을 받아서 기록화를 그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김왕직, 『한국건축용어사전』, 동녘, 2007. 오기수, 『대동법』, 보림, 2019. 이형상, 『남환박물』, 이상규, 오창명 역주, 푸른역사, 2009, 이형상, 『탐라록』, 이진영 역주, 제주특별자치도민속자연사박물관, 2020, 李基白, 『韓國史新論-新修版』, 一潮閣, 1990,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강의』, 한ᄋᆞᆯ아카데미, 1991.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단 맛을 내는 물질을 감미료라고 한다. 감미료는 한자에서 유래한 용어로 달 감(甘), 맛 미(味), 재료를 뜻하는 료(料)로 이루어진 단 맛을 내는 원료라는 뜻이다. 한자를 잘 모르는 세대에게 감미, 고미, 신미, 산미, 조미가 무슨 뜻인지 물어보면 감미(甘味)는 감칠 맛, 고미(苦味)는 고소한 맛, 신미(辛味)는 신 맛, 산미(酸味)는 산뜻한 맛, 조미(調味)는 조화로운 맛이라는 기상천외한 대답을 듣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때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사자성어가 ‘쓴 것이 다하고 단 것이 온다’라는 뜻이고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옴’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알려주면 달 감(甘)과 쓸 고(苦)를 바로 이해한다. 또한 매울 신(辛), O라면의 예를 들어 주면 신미(辛味)가 매운 맛임을, 식초의 시큼한 맛을 내는 것이 초산이므로 산미(酸味)는 신 맛임을 깨닫게 된다. MSG 처럼 감칠 맛을 내는 물질이 조미료(調味料)라는 것은 이미 소비자들이 잘 알고 있다. 최근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대체 감미료인 아스파탐을 발암가능 물질인 2B군으로 선정하여 소비자들의 걱정이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설탕, 과당, 포도당을 대체하는 대체 감미료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어떻게 현명하게 활용할 지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단 맛은 인간이 가장 선호하는 맛으로 단 맛을 내는 물질은 대부분 인체에서 에너지를 만드는 중요한 영양소이기 때문에 인간이 좋아하게 된 것이다. 못 먹던 시절에는 손님이 왔을 때 설탕물 한 사발을 내어주는 것이 흔한 일이었고, 커피에도 대부분 설탕을 넣어서 먹었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하고 먹거리가 넘쳐나는 현 시대에는 오히려 과도한 당의 섭취가 대사증후군, 비만, 당뇨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당은 우리 몸의 주된 에너지원인 탄수화물의 일종이다.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탄수화물인 전분은 수천개의 포도당이 주렁주렁 연결되어 있는 다당체로 소화 효소에 의해 포도당으로 분해된 후 소장에서 흡수되어 혈액을 통해 세포로 이동을 한다. 밥에 있는 전분은 소화되어 최종 포도당으로 분해되기 때문에 밥(전분)을 먹건 직접 포도당을 섭취하건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포도당은 직접 흡수되어 혈당을 바로 올리지만 전분은 포도당으로 분해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혈당을 천천히 올린다. 혈당지수는 음식을 섭취한 후 혈당이 얼마나 빨리 올라가는지를 나타내는 수치인데 혈당지수가 높은 식품은 당뇨병에 좋지 않다. 현미에 있는 전분은 거친 섬유소가 같이 섞여 있어 포도당으로 느리게 분해되므로 혈당지수가 낮은 반면에 흰 쌀밥의 전분은 빨리 포도당으로 분해되어 흡수되므로 혈당지수가 높다. 따라서 비만과 당뇨가 걱정이라면 소화 흡수가 느린 현미나 잡곡을 먹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와 반대로 에너지가 부족한 환자나 기력이 없을 때는 전분이 빨리 분해되도록 밥보다는 죽을 먹는 편이 낫고, 심지어는 포도당을 직접 수액으로 혈관에 주사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설탕은 포도당과 과당이 결합된 이당류로 사탕수수나 사탕무로부터 정제하여 만들고 과자나 빵을 비롯한 다양한 식품에 사용된다. 설탕은 소화계를 거치는 동안 포도당과 과당으로 분해되어 소장에서 흡수된다. 당연히 설탕 또한 우리 몸에서 에너지를 만드는데 사용되지만 과도한 설탕의 섭취는 당뇨병, 비만과 충치의 발생을 높인다. 특히 음료에 많이 사용되는 과당은 탄수화물 중에 단맛이 가장 강한 물질로 자연에서는 주로 과일에 존재한다. 현재는 옥수수 전분을 포도당으로 분해한 뒤 이를 과당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을 통해 액상과당의 형태로 대량 생산된다. 과일에 들어 있는 과당은 함량이 높지 않고 식이섬유, 비타민, 무기질도 같이 들어 있어 먹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음료를 통한 액상과당의 과잉 섭취는 체중 증가와 비만의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지방간이나 고지혈증을 초래할 수 있고 당뇨의 위험을 높일 수 있다. 따라서 음료수 대신 물을 마시는 것이 건강에 좋고 꼭 음료수나 주스를 마시고 싶다면 당을 첨가하지 않은 제품을 고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때 무가당이라고 표시가 되어있는 제품을 찾는 경우가 있는데, 무가당 표시는 ‘당을 더 첨가하지 않았다’는 뜻이지 ‘당이 없다’라는 것은 아니다. 무가당 주스는 당을 인위적으로 더 넣지는 않았지만 원래 원료(오렌지, 포도 등)가 가지고 있던 당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당뇨나 비만이 걱정인 경우에는 영양정보에 표시되어 있는 당류의 함량을 확인한 뒤 주의해서 마셔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단맛을 좋아하지만 당의 과다 섭취가 야기하는 건강 문제 때문에 그 대안으로 다양한 대체 감미료를 애용하고 있다. 자연 유래의 대체 감미료로는 스테비오사이드(스테비아 추출물)가 많이 사용되는데 남아메리카가 원산자인 스테비아라는 국화과 식물의 잎으로부터 추출하여 얻는다. 스테비아는 설탕의 200~300배 정도의 단맛을 내고 자연에서 얻었기 때문에 과잉 섭취가 아니라면 대체로 안전하다고 보고 있다. 농업에도 활용되어 스테비오사이드를 토양에 뿌려 재배한 토마토는 단맛이 강하고 칼로리도 낮아 소비자들이 많이 찾고 있다. 껌, 과자 등의 제품에 많이 사용되는 자일리톨은 원래 식물에 소량 존재하지만 상업적 사용을 위해 발효나 화학반응을 통해 대량 생산된다. 자일리톨은 청량감이 강한 시원한 단맛을 내며 설탕에 비해 60% 정도의 칼로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대체 감미료로 많이 사용된다. 다만 자일리톨의 과도한 섭취는 위장장애나 복통, 설사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최근 아스파탐이 발암 가능 물질인 2B군으로 분류되면서 소비자들이 우려가 커지자 식품업계에서는 아스파탐을 천연 감미료인 알룰로스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알룰로스는 몇 종의 식물에 자연적으로 소량 존재하는 물질로 효소를 사용하여 대량 생산한다. 알룰로스는 설탕 단맛의 70% 정도이고 칼로리가 설탕의 약 1/10 수준으로 체중과 혈당 조절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알룰로스의 과잉 섭취는 복부 불편함과 복통, 설사를 유발할 수 있다. 자연에 존재하지 않던 물질을 화학적인 방법으로 합성한 인공 감미료는 단맛이 설탕보다 수백배 이상 강하고 칼로리도 거의 없기 때문에 대체 감미료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화학 합성 감미료로 많이 사용되는 물질로는 아스파탐, 수크랄로스, 아세설팜칼륨 등이 있다. 아스파탐은 설탕의 200배 단맛을 내고 칼로리도 낮기 때문에 제로 음료에 많이 사용되어 왔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아스파탐을 발암 가능 물질 2B군으로 분류하였지만 1일 섭취허용량은 기존 그대로 유지하였고 우리나라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도 일정 용량의 섭취는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고 발표하였다. 아스파탐을 대신하여 제로 음료에 많이 사용되는 인공 감미료에는 수크랄로스와 아세설팜칼륨이 있다. 수크랄로스는 설탕을 원료로 화학반응을 통해 만들어지는 물질로 설탕의 600배 단맛을 내고 칼로리가 없어 대체당으로 식품 산업에서 많이 활용된다. 아세설팜칼륨은 화학 합성으로 만들고 설탕의 200배 단맛에 칼로리가 없어 과자, 아이스크림, 음료 등에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인공감미료는 화학적인 방법으로 손쉽게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단맛이 설탕보다 수백배 강하기 때문에 소량 사용되어 경제적으로도 이득이 된다. 즉 설탕 600 그램을 넣어야 하는 음료에 수크랄로스는 1 그램만 넣어도 같은 강도의 단맛을 내기 때문에 소량 사용으로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어 원재료비에 대한 부담이 크게 낮아진다. 또한 칼로리가 없기 때문에 비만이나 당뇨가 걱정인 소비자들에게는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일부 연구에서 이러한 인공 감미료의 인체 유해성에 대한 논란이 있고, 과다 섭취에 대해서는 경고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낮은 섭취량으로는 인체에 악영향을 미칠 위험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대체 감미료는 극소량의 사용으로도 설탕보다 강한 단 맛을 낼 수 있고, 단 맛이 강한 음료를 칼로리 걱정 없이 마실 수 있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세계보건기구(WHO)는 인공 감미료의 단 맛에 길들여질 경우 단 것을 더 찾게 되어 오히려 비만, 당뇨병,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도를 증가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즉 인공 감미료의 강한 단맛에 노출될수록 단 음식을 더 탐닉하게 되고 식욕이 증가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매번 같은 얘기지만 뭐든지 과잉 섭취하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다. 특히 화학적으로 만들어진 물질은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다. 평소의 일반적인 식생활만으로도 당을 충분히 섭취하고 있기 때문에 가급적 당이 들어 있는 음료는 마시지 않는 편이 좋겠다. 음료 대신에 물을 마시고 차나 커피를 마시더라도 당을 첨가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음료를 마실 때 당이 첨가되지는 않은 것을 우선적으로 고르고, 영양정보 표시를 잘 살펴 가급적 당류 함량이 낮은 제품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음료수는 마시고 싶은데 비만이나 당뇨가 걱정이라면 당 대신 대체당이 들어 있는 무칼로리(무열량) 또는 저칼로리 음료를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제로 음료라도 습관적으로 많이 마시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김동청 교수는? = 연세대 생화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대학원 생화학과 이학석사 및 서울대 대학원 농화학과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상㈜ 중앙연구소 선임연구원, 순천제일대 조교수, 영국 캠브리지대 방문연구원, 성균관대 기초과학연구소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청운대 인천캠퍼스 화학생명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식품기술사 자격도 갖고 있다.
삶의 에메랄드 눈… - 마르제타 샤트로(Marjeta Shatro)-라파즈(Rrapaj) 삶에 목마른 눈은 바닷물 색깔이에요 그들은 지평선을 삼켜버리지요 태양의 무형 경계를 만져보세요 일상의 덧없음을 넘어서기 위해 그들은 세기의 외침을 들어요 바람의 메아리와 함께 찾아오는 공기를 가르는 새들의 부리 사이로 망각에 덮인 낡은 흔적 위에 현재를 재건하려면 녹슨 수갑으로 시대의 아픔을 조여주는 그건 폭풍우와 함께 갔어요 인내의 목표에 대하여 생각의 불꽃을 찾고 찾으려면 운명의 무작위 교차점에서 거룩한 신앙의 상징물 속에 얼어붙은 미스터리를 명료하고 명확하게 하려고 알 수 없는 내일의 비밀문자처럼 파도의 멜로디 아래 천둥소리로 거품을 만드는 Emerald eyes of Life... (By Marjeta Rrapaj) Eyes thirsty for life With the colors of the waters They devour the horizon Touch the intangible borders of the Sun To rise above the ephemerality of the everyday They hear the cries of the centuries That come with the echoes of the wind Through beaks of birds tearing the air To rebuild the present On the traces of the old Covered in oblivion With rust cuffs That tighten the pains of the times That went with a storm On the goals of patience To seek and find the flame of thought At random intersections of fate Frozen in icons of the holy faith For clarification and clarification of mysteries Like unknown hieroglyphs of tomorrow Under the melody of the waves foaming with thunder ◆ 마르제타 샤트로(Marjeta Shatro)-라파즈(Rrapaj) = 1974년 지로카스트라(Gjirokastra)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현대 알바니아 시인 중 한 명으로 지로카스트라(Gjirokastra)대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티라나대(University of Tirana)에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녀는 8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출판된 시집은 2권이다. 시집 1권은 영어와 스페인어로 출판됐다. 최신 권은 알바니아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 5개 언어로 출판됐다. 그녀의 시는 상상과 현실이 혼합돼 있다. 그녀는 2019년 시집 베스타(Vesta)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Alphonso G. Newcomer Poetry Train 상을 받았으며 불가리아 시 축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 강병철 작가 = 1993년 제주문인협회가 주최하는 소설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2016년 『시문학』에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2012년 제주대에서 국제정치전공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주대학교 평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인터넷 신문 ‘제주인뉴스’ 대표이사, (사)이어도연구회 연구실장 및 연구이사, 충남대 국방연구소 연구교수, 제주국제대 특임교수,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제주통일교육센터 사무처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평화협력연구원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제33대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인권위원이며 국제펜투옥작가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제34대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인권위원으로 재선임됐다. 국제펜투옥작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신장위구르 자치구역의 대표적인 위구르족 작가 중의 한 명인 누르무헴메트 야신(Nurmuhemmet Yasin)의 「야생 비둘기(WILD PIGEON)」를 번역 『펜 문학 겨울호』(2009)에 소개했다. 2022년에는 베트남 신문에 시 ‘나비의 꿈’이 소개됐다. ‘이어도문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이어도를 소재로 한 단편소설 ‘이어도로 간 어머니’로 월간 ‘문학세계’에서 주관한 ‘제11회 문학세계 문학상’ 소설부문 대상을 받았다. 한국시문학문인회에서 주관하는 제19회 ‘푸른시학상’을 수상했다. 강병철 박사의 시와 단편소설은 베트남, 그리스, 중국 등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돼 소개되고 있다. 최근엔 중국의 계간 문학지 《국제시가번역(国际诗歌翻译)》에도 강 작가의 시 두편이 소개되었다.
"놀랬니?" "응, 예뻐서!" ☞ 오동명은? =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역사소설 <불멸의 제국> 소설 <소원이 성취되는 정원> 소설 <장군어미귀향가>등을 냈다. 4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풀어내고 있다.
변호사로서 법정에 출석하여 재판을 진행하는 송무가 주된 업무이기는 하나, 경우에 따라서는 돈을 받아내는 집행 업무를 맡기도 한다. 민사소송은 국가기관인 법원을 통하여 사적 분쟁에 대한 공적인 판단인 판결문을 받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데, 판결문을 받는 그 자체로 목적을 달성하는 소송도 있지만 후속단계가 필요한 경우가 상당히 많다. 예컨대, 누군가에게 빌려준 돈을 받는 것이 목적이라면, 장기간의 민사소송이 끝나 승소 판결을 받았다고 해도 이제 머나먼 여정의 절반 정도 온 셈이다. 판결문은 “피고는 원고에게 돈을 지급하라”는 내용 등이 기재되어 있는 서류이지, 판결문 그 자체가 돈은 아니다. 판결문을 들고 금융기관에 가서 직접 돈으로 바꿀 수도 없다. 그래서 필요한 단계가 그 판결문을 이용해서 실제로 돈을 받아내는 집행, 또는 추심이라고 부르는 절차이다. 집행 절차도 재판만큼이나 오랜 기간이 걸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집행의 시작은 판결문과 집행문, 확정증명원 등의 필요서류를 발급받는 것이다. 이로서 집행을 위한 기본적인 준비는 한 셈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떻게 집행할 것인가. 채무자의 주소를 알고 있다면 우선 주소지의 부동산등기부를 떼어 본다. 만약 주소지가 채무자의 소유로 되어 있고, 저당권 등의 별다른 제한물권이 없는 경우라면 주소지에 대하여 강제경매를 신청하면 된다. 거래할 때 계좌이체 방식으로 하여 채무자가 사용한 은행을 알고 있다면, 그 은행의 채무자 계좌에 압류를 시도할 수 있다. 채무자가 영업하는 사업장이 있다면, 사업장의 집기류나 임대보증금에 대하여 집행도 검토한다. 채무자가 직업을 가지고 있고, 직장을 알고 있다면, 급여나 퇴직금에 압류를 한다. 만약 채무자의 재산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는 경우라면, 합법적인 방식으로는 재산명시제도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이는 법원을 통하여 채무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채권자에게 공개하게 하는 제도인데, 개인적으로 그 실효성은 낮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간도 상당히 오래 걸린다. 그나마 의미 있는 제도는 재산조회인데, 재산명시제도를 밟고 나서 요건을 갖추어야 재산조회 허가를 받을 수 있다. 재산조회를 하게 되면, 채권자는 법원을 통하여 관공서나 금융기관에 보관된 채무자의 부동산이나 계좌내역 등의 정보를 회신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쯤까지 오면 채무자는 재산이 없는 것으로 파악되거나, 주변으로부터 채무자가 파산이나 회생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될 확률이 상당히 높다. 더욱이 빌려준 돈이 억 단위에 이르면 채무자는 이미 자력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돈을 빌려주면서 미리 공증을 받아두는 것은 어떠할까. 상담을 하다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공증을 받아두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공증은 판결문을 받는 절차를 간소화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는 담보의 효력은 없다. 극단적으로는 아무리 공증을 받아두어도 채무자 자신에게 재산이 없으면, 실제로 집행하여 돈을 받아낼 수 없다. 그렇기에 공증을 받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증을 받으면서 연대보증인 등 채무자를 대신하여 돈을 갚아줄 인적보증을 세우게 하든지, 채무자나 보증인의 부동산에 저당권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연대보증인도 불안하다. 연대보증인도 나중에는 재산이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동산을 담보로 잡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게까지 하기 어려운 상황의 사람이라면,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이 낫다. 아무리 이자를 높게 쳐준다고 해도, 급한 사정을 호소해도 거절하라. 돈도 잃고, 사람도 잃게 된다. 돈을 빌려줄 때는 은행처럼 보수적으로 하기를 조언한다. 은행은 기본적으로 담보가 없으면 돈을 빌려 주지 않는다. 신용대출의 경우에도 기존 거래에 따라 쌓인 신용이나 직업, 수입 등의 변제가능성을 보면서 빌려주지, 처음 거래하는 고객에게 고액의 대출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용대출이 가능한 금액도 적다. 예외적으로 변호사나 의사 등의 전문직 종사자에게는 다소 고액의 신용대출이 이루어지기는 하나, 이조차도 ‘자격증’을 담보로 잡은 것이라 생각한다. 빌려줄 땐 서서 빌려주고, 받을 땐 엎드려서 받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빌려준 돈을 돌려받을 때에는 고생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확실한 담보를 받아두면 고생을 덜 하게 된다. /한동명 법무법인 더바로 변호사
하늘에서 춤추는 소녀 - 사긴 베르키날리에바(Sagyn Berkinalieva) 그래, 난 남자의 말을 믿었어요. 그리고 나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너의 차갑고 검은 눈을 너무나 동경했는데, 하지만 나는 당신의 시야 너머에 있는 사랑을 찾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나를 연약한 영혼으로 생각하며, 남자의 존경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 왜 그렇게 당신은 사랑스러운 역할을 했나요? 그렇다면 나를 헐뜯도록 버려두십시오. 이 일방적인 사랑은 나를 화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성을 잃고 미쳐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 예, 그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나를 다시 사랑해 달라고 애원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나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이 내 가치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참된 재판관은 전능자이에요. 당신에 대한 회한 없이 잘 살게요. 그리고 내 시가 호평을 받는다면 키르기스스탄에 영광과 명성을 가져다주겠습니다. 나는 굽히지 않는 전사입니다. 나는 피해자와 가깝다고 믿습니다. Girl dancing in the sky Yes, I let myself trust in the words of men And I became an object of derision. I so admired your cold, dark eyes then, But I was looking for love beyond your vision. Maybe you thought of me as a feeble soul, Unworthy of a man’s admiration. So why did you play such a loving role Then abandon me to denigration. This one-way love won’t drive me mad; I won’t lose my head and go insane. I can’t live without you – yes, that’s bad. But I won’t beg you to caress me again. I’ll do my best to sustain my dignity. How can the ignorant know my value? The one true judge is the Almighty I’ll live well with no regrets for you. And if my poetry earns acclaim I’ll bring Kyrgystan glory and fame. I am an unbowed warrior, me. I believe I’m close to vic ◆ 사긴 베르키날리에바(Sagyn Berkinalieva)= 1974년 키르기스스탄에서 태어났으며 2014년에 키르기스스탄 작가연맹에 가입했다. 키르기스스탄 작가연맹 회원, 중앙아시아 작가 연합 및 유라시아 창작 길드 회원이며 북미작가연맹 키르기스스탄 지부장이다. 오페라 클래식 작품에 관심이 많아 가끔 오페라를 부르며 무대에서 공연했으며 시낭송가이기도 하다. 사람의 본질과 내면세계를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매우 특별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시집으로 ‘Girl Dancing in the Sky(하늘에서 춤추는 소녀)’ ‘A leaf covered with dust(먼지로 뒤덮인 나뭇잎)’, ‘Z Dancing in the Sky(하늘에서 춤추는 Z)" 등이 있다. ☞ 강병철 작가 = 1993년 제주문인협회가 주최하는 소설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2016년 『시문학』에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2012년 제주대에서 국제정치전공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주대학교 평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인터넷 신문 ‘제주인뉴스’ 대표이사, (사)이어도연구회 연구실장 및 연구이사, 충남대 국방연구소 연구교수, 제주국제대 특임교수,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제주통일교육센터 사무처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평화협력연구원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제33대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인권위원이며 국제펜투옥작가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제34대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인권위원으로 재선임됐다. 국제펜투옥작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신장위구르 자치구역의 대표적인 위구르족 작가 중의 한 명인 누르무헴메트 야신(Nurmuhemmet Yasin)의 「야생 비둘기(WILD PIGEON)」를 번역 『펜 문학 겨울호』(2009)에 소개했다. 2022년에는 베트남 신문에 시 ‘나비의 꿈’이 소개됐다. ‘이어도문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이어도를 소재로 한 단편소설 ‘이어도로 간 어머니’로 월간 ‘문학세계’에서 주관한 ‘제11회 문학세계 문학상’ 소설부문 대상을 받았다. 한국시문학문인회에서 주관하는 제19회 ‘푸른시학상’을 수상했다. 강병철 박사의 시와 단편소설은 베트남, 그리스, 중국 등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돼 소개되고 있다. 최근엔 중국의 계간 문학지 《국제시가번역(国际诗歌翻译)》에도 강 작가의 시 두편이 소개되었다.
◆ 점괘(漸卦) 점(漸)은 점차, 차츰차츰 뜻이다. 사람이 끊임없이 자신을 끌어올려 향상시키려 하는 것을 비유한다. 특히 자신의 도덕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향상은, 단번에 이룰 수 없다. 차례대로 첨차 나아가야 한다.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실어주는 것(厚德載物)’을 배워야 한다. 부단하게 자아를 향상시켜 목표를 실현하여야 한다. 조급하게 무모하게 돌진(突進), 분별없이 나아가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 전환기 때마다 난관에 부딪치지만 이외의 높은 곳까지 문명의 불꽃을 향상시켜서 신기원을 창출하였다. 거대한 전환기는 조그마한 변화에서 기원하였다. 하찮아서 말할 가치도 없는, 보잘 것 없는 기점에서 무한한 노정을 이끌어내어 다양하면서도 찬란한 역사를 엮어왔다. 기점이 만사만물을 배태했다고 말할 수 있다. 기점이 무궁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고 무한한 희망을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에 발단만 보유한다면 모든 것은 공허하다. 다시, 완전한 기점은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 뚜렷하고 명백하게 착실하고 성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밟아가면서 탐색하지 않는다면 어찌 내일의 찬란함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인생길에서 기점이 낮은 것은 대수롭지 않다. 순서에 따라 차츰차츰 진행하고 조금도 느슨하게 하지 않고 끝까지 견지해 나가며 세월이 쌓이듯이 날을 거듭해 나간다면 결국에는 낮은 곳에서 이상적인 피안으로 올라갈 수 있다. 『주역』은 말한다. “점(漸)은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이 길하니, 곧음이 이롭다.” 무슨 말인가? 여성이 시집갈 때 혼례 예절에 따라 순차로 행하는 것과 같이 일을 순서 있게 점차로 진행해 나가면 된다. 군자가 높은 산에 있는 나무가 점점 커다랗게 성장하는 상황을 보면서 덕행을 수양하고 사회의 풍모와 예절, 관습을 개선시켜 나간다. 일을 할 때 순서대로 점차 진행하여야 한다. 너무 조급하면 왕왕 서두르게 되고 일을 그르친다. 속히 이루려 하면 도리어 이루지 못한다. 결국 아무런 수확이 없게 된다. 끊임없이 자아를 향상시키려면 목표를 정하고 순서대로 점차 진행하듯 일을 해나가면 된다. 목적 달성에 급급하지만 않는다면 마침내 성공하게 될 것이다. 순서대로 차례차례 일을 진행하고 견실하게 일을 해나가려면 조급한 심리를 벗어나야 한다. 조급함에 대처하는 첫 걸음은 자신을 아는 것이다. 정확하게 자신을 평가하여야 한다. 주위에 능력 있고 뜻이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타인은 자신처럼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자. 어떻게 되든 간에 두각을 나타내려고만 하지 않으면 된다. 간절히 원하고 바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그것은 지향점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이 필요하고 기회도 주어져야 한다. 좋은 운이 있다하여도 결코 조급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목표를 너무 높게 잡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일이 진선진미(盡善盡美)하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목표를 너무 높이 잡는 것을 피하려거든 모든 일이 진선진미하기를 바라지 마라. 첫째, 간명, 아담, 안정, 질서정연한 환경을 마련하여 정신적 긴장, 우울, 심리적 압박을 완화시키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조를 선택해 방을 장식하자. 아름다운 시로 장식해도 좋다. 풍경화도 좋다. 서정적이 음악이 흘러나와도 좋다. 둘째, 일하는 데에 질을 강구하자. 너무 숫자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개인의 정력과 능력은 한계가 있다. 지나치게 욕심 부리면 감당해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 감당할 수도 없으면서 욕심만 내면 왕왕 마음이 번거롭고 정신이 산란해진다. 바빠서 이리 뛰고 저리 뛰다보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게 된다. 급하게 이루려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순서 있게 일을 처리하여야 한다. 한 가지 일을 정확하게 완성하는 것이 용두사미로 끝나는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것보다 훨씬 좋다. 셋째, 구체적이 일을 안배할 때에는 여지를 남겨두자. 예를 들어 3일이면 끝낼 수 있는 일이 있다할 때 4일이란 여유의 시간을 안배해 보자. 그 사이에 다른 일이 생길지는 모르지만 바빠서 두서없이 일을 처리하다 조급해지는 경우는 없게 된다. 오후 2시까지 처리가 가능한 일을 상대에게 승낙할 때에도 오후 3시까지 할 수 있다 얘기해 보자.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는 있겠으나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여 난처한 지경에 빠지지는 않게 된다. 이외에 고독을 즐겨라. 적막함을 이겨내라. 현대인은 대부분 화려함을 쫓고 번화한 것을 즐긴다. 적막함이나 고독을 참지 못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창조적인 업무, 대대로 전해지는 명작은 대부분 적막한 환경, 고독 속에서 완성되었다.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은 『민중의 적』에서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란 고독하고 혼자 사는 인간이다.” 성공한 사람 대부분은 장기적인 이익을 중시한다. 단기적인 향유를 버리고 큰 이익을 위하여 종사한다. 그런 일은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우면서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게 대부분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야기다.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에서, 유일하게 멀쩡히 남은 황궁아파트로 생존자들이 모이며 시작한다. 아파트 주민과 생존자들의 갈등이 생기고, 주민 중에서도 ‘자가주민’과 ‘전세주민’을 나누며 사회의 궂은 면을 보여준다. 영화 내용 중 법률적 쟁점이 되는 줄거리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대지진 발생 후 기온이 영하 26도까지 이르는 이상저온 현상이 발생하고, 생존자들이 혹한을 피해 황궁아파트로 몰려든다. 생존자들은 아파트 복도, 공동현관에서 생활하다가, 한 생존자가 아파트 호수를 차지하기 위해 아파트 주민을 찌른 뒤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일을 계기로 아파트 주민은 주민회의를 통해 생존자들을 추방하기로 하고 물리력을 행사하여 추방한다. 시간이 지나고, 추방된 생존자들은 진열을 갖춰 황궁아파트로 진격하고 주민들을 살해한 뒤 아파트를 차지한다. 대지진 발생 직후, 아파트 주민이 아닌 생존자들이 아파트로 들어가도 괜찮은 것일까? 매정하지만, 어찌 됐든 타인의 주거지로 허락 없이 들어갔으니 주거침입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닐까? 형법에는 영화에서처럼 현존하는 위난을 피하기 위한 행위가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않는다는 원칙, ‘긴급피난’이 있다. 긴급피난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위법성이 조각되어 처벌하지 않는다. 외부인들이 혹한을 피해 아파트에 무단 침입한 것은 현존하는 위난을 피하기 위한 행위임은 분명해 보인다. 작품에서 아파트 침입의 방법을 제외하고는 혹한을 피할 방법이 없어 보이고, 아파트 침입으로 보호되는 이익(생존자들의 생명)과 침해(아파트 주민들이 주거의 평온)를 비교해보면 보호되는 이익이 질적으로 우위에 있으므로 침입행위에 상당한 이유가 있다. 따라서 생존자들은 주거침입이라는 행위를 하였으나, 위법성이 조각되어 주거침입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아파트 주민들이 외부인들을 추방하는 행위는 어떠한가. 아파트 외부는 영하 26도이며, 아파트 외에 혹한을 피할 장소는 없어 보인다. 결국, 이들을 추방하면 외부인들은 사망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러한 사정을 알면서도 외부인을 추방하였으니 살인죄가 될 것인가. 아니면 외부인들을 ‘죽이기 위해서’ 추방한 것은 아니므로 살인죄가 성립하지 않을 것인가?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그 유명한 ‘미필적 고의’다. 아파트 주민들이 외부인들을 추방하면서, 자신들의 행위로 인해 외부인들이 사망할 가능성을 인식하였고, 그러한 위험을 용인하는 의사로 추방한 것이면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추방행위와 외부인들의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문제 될 수 있겠는데, 양자 사이의 시간적 근접성, 추방 당시 외부인의 건강상태 등 구체적 사안에 따라 달리 판단될 것이다. 외부인들이 아파트로 돌진하며 주민들을 살해하고 아파트를 차지한 것은 어떤가. 여전히 긴급피난으로 의율되어 살인죄의 죄책을 면할 수 있을까. 주민들에 대한 살인으로 침해되는 이익(생명)과 보호되는 이익(생명)이 질적으로 동등하므로 긴급피난의 상당한 이유가 결여되어, 살인죄의 죄책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형사법 관점에서 영화를 살펴보았으나, 당연하게도 법률 쟁점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아니다. 영화는 재난에 대응하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주고 관객에게 어떤 선택을 할지 묻는다. 외부인을 바퀴벌레라 칭하며 ‘방역’을 해야 한다는 아파트 주민, 반대로 외부인을 몰래 숨겨주는 주민, 아무런 조건 없이 다친 주인공을 도와주는 사람, 다른 사람들을 약탈하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사람 등을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처벌은 법의 문제이지만 법 이전에 인간에게 다가오는 건 도덕과 양심이다. ☞김대현은? = 제주도 감사위원회, 법무법인 현답에서 근무하다 제주에서 개업했다. 대한변호사협회 대의원, 대법원 국선변호인, 헌법재판소 국선대리인, 제주지방법원 국선변호인 등으로 활동 중이다.
◆ 간괘(艮卦) 간(艮)은 정지 뜻이다. 행동하여야 할 때에는 행동하여야 하고 행동하지 않아야 할 때는 잘 멈춰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해야 할 말은 하여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말아야 한다. 손도 무겁고 입도 무겁고 행동도 무거워야 한다. 적당한 정도, 범위를 지키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중국의 가장 오래된 중용의 도에서 강구하는 것은 ‘합적(合適)’이다. ‘꼭 알맞다’ 의미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이 말은 참 좋다. 어떤 일을 하든 간에 불편불의(不偏不倚)1)하여야 한다. 행동하여야 할 때는 행동하여야 하고 행동하지 않아야 할 때는 정지하여야 한다. 『주역』은 말한다. “간(艮)은 그침이다. 때가 그칠만하면 그치고 때가 다닐만하면 다녀서, 움직임과 고요함이 그 때를 잃지 않음이, 그 도리가 빛남이니, 그 그쳐야 함에 그침은 그 자리에 그치기 때문이다. 위와 아래가 적으로 대응하여 서로 함께하지 않기에 이러므로 그 몸을 얻지 못하며 그 뜰을 다녀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여 허물이 없다.” 간(艮)은 정지, 그치다 뜻이다. 멈춰야 할 때 멈춰야 한다. 행동하여야 할 때 행동하여야 한다. 행동과 정지 모두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가야할 길은 넓고도 밝다. 간(艮)이 말하는 정지는 멈춰야 할 장소에서 멈추는 것이다. 그래서 말한다. “그의 전신(前身)을 볼 수 없으면 정원에서 걷는 것과 같다. 둘씩 등을 지고 있어 타인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이런 경지에 다다르면 해를 입지 않는다.” 1951년 6월, 중국은 외교부 부부장 이극농(李克農), 교관화(喬冠華) 일행을 한국으로 보내 정전 담판을 벌이게 했다. 떠나기 전에 주은래(周恩來)가 담판을 짓는 일에 대하여 전면적인 지시를 내렸다. 그러면서 소식(蘇軾)의 말을 인용하며 총결하였다. “가야할 곳으로 가고 멈추지 않으면 안 될 곳에 가서는 멈춰야 한다.”2) 소식은 「답사민사서(答謝民師書)」에서 사민사의 문장을 평하면서 말했다. “당신이 내게 보여준 서신, 시부와 잡문을 숙독했습니다. 대체적으로 구름이 떠가고 물이 흘러가는 듯이 처음부터 정해진 바탕이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고 가야할 곳으로 가고 멈추지 않으면 안 될 곳에 가서는 멈춥니다.” 사민사의 문장을 칭찬하고 있다. 벌여놓아야 할 곳에서는 강렬하게 묘사하고 일필휘지했으며 간략하게 묘사해야할 곳에서는 먹을 아끼기를 금같이 하고 적당한 정도에서 그치고 있다는 말이다. 하늘에 떠도는 구름과 흐르는 물처럼 다른 힘에 거스르지 않고 자연 그대로 유유히 움직이며 아주 통쾌하다는 뜻이다. “움직여야 하면 움직이라.” “멈춰야 하면 멈춰라.” 종합적인 목표, 형세의 변화, 허락된 조건에 근거해서 시세를 잘 살피어 거동과 진퇴를 확정하는 것이 관건이다. “움직여야만 할 때 움직이면”, 목적 없이 맹목적으로 행동하지 않게 되고 ; “멈춰야 할 때 멈추면”, 무원칙적으로 끌려가거나 양보하지 않게 된다. 종합적인 목표를 실현하는 데에 이익이 되느냐에 따라 진퇴를 판단하는 표준에 의거해 모든 결정을 하게 된다. 마치 이와 같다 : 품격은 3등급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부류와 마지막 부류는 모두 극단과 부도덕이다. 가운데에 있는 것이 도덕 혹은 우월성이다. 비겁함과 무모함 사이에 있는 것이 용기다; 인색과 사치 사이에 있는 것이 관대함이다; 비굴과 교만 사이에 있는 것이 겸허, 신중이다; 괴팍함과 익살 사이에 있는 것이 유머다; 우유부단과 충동, 고집 사이에 있는 것이 극기, 자제다……. 그렇기에 윤리 혹은 행위에 있어 ‘합당’은 수학이나 공학 중의 ‘합당’과 다름이 없다. 그 뜻은 정확, 적합이다. 가장 효과적으로 가장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용(中庸)은 결코 수학의 등비중항이 아니다. 정확한 계산을 도출해내는 양단의 평균값도 아니다. 중용은 환경에 따라, 좌우의 여러 가지 상황이 변화에 따라 변한다. 성숙되면서도 유연성 있는 이성이 있어야만 자기에게 발현된다. 물욕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고 지나치게 검소한 사람도 있다. 무절제 하게 금전을 낭비하는 사람도 있고 털 한 가닥도 안 뽑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사람도 있다. 이 모두 정상적인 삶의 길이 아니다. 손과 같다고나 할까. 시종일관 주먹을 꽉 쥐고 있거나 손바닥을 펼쳐만 있는 것 모두 옳지 않다. 주먹을 쥐기도 하고 손바닥을 펴기도 하는 것이 정상이다. 마찬가지로 적당할 때 멈춰야 한다. 불편불의(不偏不倚)하여야 한다. 이것이 중용의 길이다. 어떻게 하면 일상생활에서 ‘중용의 길’을 실천할 수 있을까? “멈출 때 멈추고 행할 때 행할” 수 있을까?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 너무 힘들게 일하지 말자. 살면서 일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함에 있어서는 당연히 부지런하여야 하지만 너무 자신에게 가혹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를 처리하는 부분에 있어서 그늘을 남기게 되어서 오래할 수 없고 오랫동안 견지하며 견뎌낼 수 없다. 둘째, 즐기더라도 과하지 말자. 사람에게 물질생활이 없을 수 없다. 그렇다고 과하게 오욕(五欲)의 즐거움에 흥청거려서는 안 된다. 끝도 없이 낭비하면 큰 해를 입는다. “물질의 노예가 된다.” 물질이 너무 풍부하여도 어떤 때에는 부담이 되기도 한다. 복덕인연(福德因緣)3)은 천천히 향유하여야 한다. 과도하게 해서는 안 된다. 셋째, 사람을 대하는 데에 너무 박하게 하지 말자. 사람을 대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관대, 너그러움이다. 상대를 고려하여야 한다. 더욱이 주관자가 되어 “자신처럼 대하라.” “관용으로 남을 대하고 자기에게는 엄격하라.” 사람을 가혹하게 대하거나 지나치게 방임하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 평상시에 우리는 일하는 데에 적당한 정도, 범위 내에서 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중(中)’이다. 이른바 “멈출 때 멈추고 행할 때 행하는” 것이다. 중용의 길은 사실 불교의 ‘중도(中道)’와 닮았다. 같은 뜻이란 말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너무 왼쪽으로 치우치지도 말고 오른쪽으로 경도되지 말라는 의미에서 상통한다는 말이다. 너무 팽팽하지도 너무 이완되지도 말아야 한다. 시시각각 적당한 정도와 범위를 생각해야 한다. 일을 할 때마다 적당과 합당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고 일을 순조롭게 이룰 수 있고 대나무를 그리기 전에 마음속에는 이미 대나무의 형상이 있는 것처럼 일하기 전에 전반적으로 고려할 수 있게 된다. ***** 艮卦 ䷳ : 간위산(艮爲山) 간(艮: ☶)상 간(艮: ☶)하 「단전」에서 말하였다:간(艮)은 그침이다. 때가 그칠만하면 그치고 때가 다닐만하면 다녀서, 움직임과 고요함이 그 때를 잃지 않음이, 그 도리가 빛남이니 그 그쳐야 함에 그침은 그 자리에 그치기 때문이다. 위와 아래가 적으로 대응하여 서로 함께하지 않기에 이러므로 그 몸을 얻지 못하며 그 뜰을 다녀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여 허물이 없다.(彖曰,艮止也.時止則止,時行則行,動靜不失其時,其道光明,艮其止,止其所也.上下敵應,不相與也,是以,不獲其身,行其庭,不見其人,无咎也.) [傳] 간괘(艮卦)는 「서괘전」에 “진(震)은 움직임이다. 모든 것이 끝까지 움직일 수 없어 그치게 되므로 간(艮)으로 받는 것이니, 간은 그침[지(止)]이다”라고 하였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서로 맞물리니 움직이면 고요하고 고요하면 움직이게 되지만, 어느 것도 늘 움직이기만 하는 이치는 없으므로 간괘가 진괘 다음인 것이다. 간(艮)이 그침[지(止)]임에도 지(止)라고 하지 않는 것은, 간(艮)이 산(山)의 상(象)으로서 안정되고 무거우며 단단하고 차있다[안중견실(安重堅實)]는 뜻이 있어서 지(止)의 의미만으로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건괘와 곤괘가 세 번째 사귀어 간괘를 이루니, 양효 하나가 음효 둘 위에 있다. 양(陽)은 움직여 위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위에 다 이르면 그치게 되고, 음(陰)은 고요함이어서, 위는 그치고 아래는 고요하므로 간(艮)이 된다. 그렇다면 축(畜)의 그침[지(止)]과는 어떻게 다른가? 축의 그침은 억눌러 저지하는 뜻으로 힘으로 그치게 하는 것이고, 간(艮)의 그침은 편안하게 그친다는 의미이니 그 그쳐야 할 자리에 그치는 것이다. 1) 불편불의(不偏不倚), 한편에 치우치지도 아니하고 기대지 않는다. 중용(中庸)의 중(中)에 대한 뜻을 풀이한 말이다. 주자(朱子)는 말했다. “치우치지 않고 기대지 않아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용(庸)은 평상(平常)한 것이다.”(不偏不倚,無過不及之謂中,庸平常也.)(『中庸章句』) 2) 행운유수(行雲流水), ‘하늘에 떠가는 구름과 쉬지 않고 흐르는 물’이라는 뜻으로, ① ‘일정한 본질이 없이 각양각색으로 변화함’을 이르는 말. ② 나아가서는 ‘조금도 집착함이 없이 사물에 호응하여 행동하는 것’을 비유. ③ 또한 ‘속세에서 떠나 초연한 심경(心境)에 있는 것’을 나타내는 말. ④ ‘일의 처리에 막힘이 없거나 마음씨가 시원시원함’을 비유하기도 한다. (「답사민사서(答謝民師書)」. “行雲流水,初無定質”에서 비롯된 말이며 행각승(行脚僧)을 운수(雲水)라고 일컫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송대(宋代) 시인 소식은 사민사(謝民師)라는 친구의 작품을 칭찬하였다. “그대의 글은 마치 구름이 떠가고 물이 흘러가는 듯 처음부터 정해진 바탕이 없다. 그러나 언제고 가야할 곳으로 가고 멈추지 않아서는 안 될 곳에 가서는 멈춘다.”(大略如行雲流水,初無定質,但常行於所當行,常止於所不可不止.)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작풍(作風)을 가리킨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문학을 평했다. “내 글은 마치 만 톤이나 저장되어 있는 샘물의 원천과 같아서 땅을 가리지 않고 솟아나와 평지에서도 도도하고 세차게 흘러 하루에 천리를 흘러가기에 어렵지 않다. 산이나 바위를 만나면 물건에 따라 형체를 이루나 알 수 없다.”(吾文如萬斛泉源,不擇地皆可出,在平地滔滔汩汩,雖一日千里無難.及其與山石曲折,隨物賦形,而不可知也.所可知者,常行於所當行,常止於不可不止,如是而已矣.甚他雖吾亦不能知也.(『蘇軾文集』卷66「自評文一」)) 3) 『잡아함경(雜阿含經)』에 목련존자가 제석천에게 말했다. “먼저 선법(善法)을 닦아 그 복덕의 인연으로 이 수승한 과보를 얻는다.”(先修善法,福德因緣,成此妙果]) 『현우경(賢愚經)』에는 부처님께서 말하셨다. “이전에 내가 닦은 선근 복덕에 의하여 수승한 과보를 얻는다.”(吾今如是,由先修福,今獲妙果)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 섬에 온 선교사 제주에 사진이 등장하게 된 것은 서양 열강 세력에 의해서였다. 선교사들이 신도들이나 송별 기념촬영한 것, 풍속을 소재로 삼은 것, 중요 인물의 초상 사진과 중요 사건을 찍은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 사진가 역할도 한 것이다. 그들은 먼저 선교를 통해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서구 자본주의 문명을 이식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사실상 자본주의 제국을 위해서 시장을 넓히려는 식민지의 다른 전략도 있었다. 일찍이 동인도 회사에서 보았던 것처럼 열강들이 동쪽으로 온 까닭은 지난 우리 역사가 말해주었듯이 새로운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1846년 영국은 청나라 개항장마다 한 척의 포함(砲艦)을 배치할 권리를 얻어냈다. 선교사가 현지에서 어려움을 당했을 때 신속하게 무장 함대를 보내어 무력으로 외교 문제를 처리하고자 한 것이다. 또 ‘바다의 안전’을 이유로 함대를 맨 먼저 파견한 나라도 영국이었다. 뒤이어 프랑스와 미국이 따라 들어왔다. 선교사들이 개항장에서 포교권을 얻은 뒤에는 현지인처럼 옷을 입고 현지어를 쓰면서 전국으로 포교를 확대하고자 했다. 선교사들은 겉으로 미신을 믿고 있는 야만의 땅을 개척하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그들이 현지에서 얻은 정보들을 영국과 프랑스 등의 영사들에게 제공해주었다. 그들 선교사의 배후에는 자국의 정부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선교사들은 '제국주의 첨병'이 된 적이 있었다. “종교가 오고 나면 군대가 온다”라는 말은 19세기 동양을 빗대고 한 말이었다. 선교사들을 부정적으로 본 역사적 사실들이 있는데, 때로 선교사는 전쟁 구실을 만들어준 긍정적인 존재이자, 동시에 말썽을 일으켜 일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신도들로 인해 현지 사회로부터 반서양·반외세의 기운이 일어나면서 통상에 방해되는 부정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기독교 포교 과정에서 선교사들이 현지 사회와 여러 가지 갈등을 일으킨 것을 청나라에서는 ‘교안(敎案)’이라고 불렀다. 제주도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광무 2년(1898)으로 색달리 사람 양 베드로, 신 아오스딩, 그리고 보성리 사람 강 도비아와 김생원이었다. 이들은 당시 조선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에게 제주에 선교사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했다. 그래서 1899년 5월 프랑스 신부 빼이네(裵嘉祿)와 우리나라 신부 김원영(金元永)이 입도하여 제주읍에 근거지를 두고 포교를 시작하다가, 빼이네 신부는 건강을 이유로 제주를 떠나고, 1900년 그 후임으로 라크루(具瑪瑟) 신부가 왔다. 이들은 포교를 나누어 제주읍 안에서는 라크루 신부가, 홍로(烘爐, 서귀포) 지역에는 김원영 신부가 포교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1년 후 김원영 신부가 다른 곳으로 가고, 뭇세(文濟萬) 신부가 왔다. 조선 정부는 외국인 신부들을 특별히 우대하고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특권은 후에 이를 도 넘게 호도(糊塗)한 신도들이 많은 문제들을 유발하면서 급기야 민중 봉기로 이어졌다. 2. '도롱이를 입은 농부(farmer Clad in a Straw Raincort)'(1890) '도롱이를 입은 농부((farmer Clad in a Straw Raincort)'(1890)는 당시 손에는 긴 나무 지팡이를 짚고, 모자를 쓰고 새(茅)로 엮은 우장(雨裝)을 걸쳐 나막신을 신었는데 원시적인 제주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사진 촬영 연대로 보면, 지금으로부터 123년전 제주도의 삶의 리얼리티를 보여주고 있다. 누가 찍은 사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집처가 미국이나 유럽 등 해외에서 수집된 사진 중 일부이다. 이 사진은 제주도 현지인을 연출한 사진으로 빛의 방향을 감안하여 촬영각을 정확하게 조절하면서 모델의 시선과 위치, 초가배경의 자연스러운 각도, 화면의 비례, 노출 감도가 계산된 전문가의 사진임을 알 수 있다. 도롱이(Straw Raincoat)를 입은 농부 뒤에는 초가가 있는데 초가를 지을 때 벽으로 쌓는 담을 축담이라고 한다. 이 축담은 돌을 한 줄 쌓고는 진흙을 올리고 다시 한 줄을 쌓는 식의 방법으로 조적(造積) 한다. 이 축담은 두 가지 기능을 하는데 집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고 물을 막기 위해 진흙을 이용하고 있으며, 또 집과 지붕의 지지대 역할로써 견고해야 하는 건축의 특성을 감안한 것이다. 축담에 바르는 흙은 찰흙으로 ‘ᄎᆞᆫ헉’, 'ᄎᆞ녁'이라고 발음하는데, 모슬포에서는 찰기가 좋은 신평리나 무릉 2리 인향동의 흙을 선호했다. 먼저 이 찰흙을 마차에 싣고 와서 마당에 둥그렇게 깔고 가운데를 중심으로 물이 고르게 먹을 수 있도록 연못처럼 만들어가면서 점점 펴가고 끝 부분에 이르러 물이 새지 않도록 끝 둑처럼 올리면 물이 천천히 스며든다. 어느 정도 흙이 물을 먹으면 자른 산듸짚나 보리짚을 섞어서 발로 계속 밟아주어야 한다. 흙을 많이 쓸 경우 소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골고루 밟아서 어느 정도 찰기가 나오면 그 흙을 담돌과 함께 사용한다. 사실 이런 축담은 그 자체가 생태건축이다. 돌집이 그렇듯 여름에는 시원하기도 하고 겨울에는 포근하다. 흙은 사계절 습기도 잘 먹어서 공기를 조절하기 때문에 생활하기가 쾌적하다. 자연재를 이용한 건축이므로 환경적으로 풍토적인 조건에 잘 어울린다. 초가의 건축재료가 돌, 나무, 흙이 전부이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럽지만, 화재에 취약한 것이 큰 흠이다. 또 돌과 흙으로 된 재료이고 보니 베록(벼룩), 게염지(개미), 주넹이·지냉이(지내), 게우리(지렁이), 두메기(풍뎅이), 집읏은 돌뱅이(민달팽이) 등 버렝이(벌레)들과 구렝이(구렁이) 독다귀(도마뱀), 중이·줭이(쥐) 등이 자주 나다닌다. 초가에는 ᄎᆞᆷ생이(참새)가 살고, 처마에는 제비가 집 짓는다. 특히 집 안팎으로 흙을 발랐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게 되면 외벽의 흙은 보수를 해야 한다. 비가 많이 와서 축담에 비가 내리치면 바른 흙이 씻겨나가기 때문이다. 이를 '헉 ᄇᆞᆯ른다(흙 바른다)'라고 한다. 3.'제주도(濟州島) 산저포(山底浦), Sanjeopo Harbor in Cheju Island'(1890) 사진 두 장이 있다. 썰물 때의 산저포(산지포)와 밀 물 때의 산지포가 그것이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부감시(俯瞰視) 각인데 반대편 높은 언덕에서 찍은 것으로 생각된다. 산지천 하류에 위치한 산지포는 하류를 중심으로 돛배(帆船)들이 모여있다. 산지천은 바다와 바로 연결돼 있어 조수 간만의 차이를 심하게 받는 지형이다. 썰물이 되면 건천(乾川)으로 변했다가 밀물 때면 바다와 하나가 된다. 배들은 주로 썰물에는 발이 묶여서 꼼짝하지 못하고, 밀물이 돼야 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 정박한 돛배는 주로 삼각 선수(船首)에 두 돛짜리 당도리배들인데 그 사이에 뱃머리가 평평하게 덧판을 대거나 반원의 나무를 덧댄 덕판배도 끼어있다. 산지포 마을은 마치 활대와 같은 타원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돌담들은 외담으로 쌓아 강한 바닷 바람을 막기 위해 처마를 가릴 수 있게 쌓았다. 초가 지붕은 격자모양으로 촘촘히 묶여 있으며, 집집마다 연료용으로 ‘노람지’를 두른 지들커(떌감) ‘눌’들이 보인다. 포구 반대편 해안에서는 하역을 하고 있는 듯 배에 천막을 친 당도리배가 있었는데 밀물이 되자 그 배가 이동을 한 듯 보이지 않는다. 산지천 서쪽은 지금의 탑동 해변인데 매립되기 전에 까만 먹돌로 유명했다. 산지포는 큰 배들이 들어오기에는 수심이 얕고 포구가 좁아 일제 강점기가 돼야 본격적인 산지항 축항공사를 하게 되었다. 1926년 10월 일제는 약 30만원을 투자하여 제1기 공사로 연장 310m 서부두 방파제를 구축하기 시작, 1929년 3월에 준공하는 계획을 세우고, 또 부대시설을 만들기 위해서 약 5000평의 매립사업까지 병행하였다. 항만 공사는 계속 제2기, 제3기까지 총 120만원을 투입하였고, 이후 동부두일대 1만3594평을 매립하고 서부두 쪽으로 다시 510m의 방파제 공사를 추가로 모두 3차례의 계획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자연 지형이 열악했던 산지항은 1926년 인공항으로 계획되어 18척의 수심을 메우려면 엄청난 돌이 필요했는데 바다를 메울 돌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급기야 돌을 캘 석산(石山)으로 주정공장 가까운 돌 언덕이 채석 현장으로 지정되었고, 돌을 캘 노동자들을 모집하여 이북 출신들이 채택되었다. 돌을 다루는 일은 숙련된 노동자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산지항 공사에 선정된 노동자들은 함경북도 청진 출신들인데 마침 청진항 공사가 마무리된 차에 돌일은 무척 힘들지만 다른 일보다 일당이 좋아 제주도 서부두 방파제 현장으로 급거(急遽) 내려왔다. 변변한 장비도 없던 때라 오로지 목도에 의지해야만 했던 채석 운반 작업을 순수 인력으로 시행하는 것은 대단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일에는 변통(變通)이 있기 마련이어서 오로지 경험밖에 없는 이들은 지난 세월의 역량을 믿기로 했다. 이때 이들이 운반 방식은 ‘청진팔(淸津八)목도’였다. 긴 나무에 묶은 돌을 중앙에 걸고는 앞쪽에 4인, 뒤쪽에 4인 모두 팔명이 1조가 돼 동시에 목 뒤 어깨에 걸고 리듬에 따라 돌이 흔들리지 않도록 수평을 잡으면서 영차~영차~ 라는 구령에 맞춰 걸어가야 한다. 모두 8인의 힘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이 그들의 터득한 요령이었다. 누군가가 잔꾀를 부리게 되면 돌의 기울기가 한 쪽으로 쏠려서 돌에 깔리는 큰 사고를 당할 수가 있다. 8인 모두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운반하는 것이 숙련된 그들만의 노하우였다. 이렇게 하루 종일 일한 대가는 3원, 당시 쌀 한 가마 가격이 5원이었으니 힘들지만 큰돈이었다. 연이은 공사로 인해 석산으로도 부족하자 일제가 눈독들인 돌은 바로 제주성을 쌓은 성돌이었다. 일제는 이 돌들을 실어다가 서부두와 축항 공사 밑돌로 삼았는데 8·15 해방이 되자 일제의 항만공사 계획은 미로에 빠졌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계속 그 성돌을 실어 나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홍순만, 2014). 산지천 항만개발 재개는 박정희에 의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해서 진행될 수 있었다. 4.'제주도(濟州島) 도사 입구(島司 入口), Etrance Islahd Office Cheju Island', (1900) 이 사진은 제주성 남문루였던 정원루(定遠樓)이다. 남문루(南門樓)는 1512년(중종7) 제주목사였던 김석철(金錫哲, 1556~?)이 새로 건립했다. "제주성 남문에는 옛 누각이 있었는데 허물어서 거기에 새로 정원루를 지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김석철이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제포·부산포의 항거왜인(恒居倭人)들이 대마도주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서 삼포왜란을 일으키자 그는 즉각 조정에 보고하고 중앙 군사와 협심하여 신속히 왜인들을 진압함으로써 주위로부터 무재(武才)를 인정 받아 변방 외적에 대비케 하기 위해서 제주목사로 전출시켰다. 그는 변방 제주의 방어에 힘을 기울여 군비를 정비하면서 낡은 정원루를 신축하여 해이한 기강을 바로 세웠던 것이다. 제주성에는 3대문이 있었는데 남쪽 성문은 정원루로 남문로터리 북쪽 옛 MBC자리에 있었다. 서쪽 성문은 진서루(鎭西樓)로 무근성 입구 부근이며, 동쪽 성문은 연상루(延祥樓)로 동문 파출소 서북쪽에 있었다. 남문인 정원루는 성벽을 뚫어 놓은 개구부(開口部) 상부(上部)가 열려 있는 성문이며 이를 개거식(開据式)이라고 한다. 이런 형태의 성문은 오가는 사람들을 문루에서 쉽게 살필 수 있는 장점이 있어서 출입구와 망루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 할 수 있다. 지붕은 팔작 지붕이며, 성담은 현무암 다겹담으로, 외부 마감돌은 귀물림 방식으로 쌓았다. 특이한 것은 바닥에 현무암을 자연스럽게 판석으로 이용하여 비올 때를 대비하고 있는데 큰 틈새가 곳곳에 보인다. 이런 개거식 문루(門樓)는 목관아 동헌으로 들어가는 정문에도 있다. 이름은 포정문(布政門). 2층 문루로써 1층에는 사람들이 지나 다니고,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아침과 저녁 성문을 여닫을 때 알리는 역할을 했다. 원래 이 문루는 진해루(鎭海樓)라고 부르다가 1699년(숙종25) 목사 남지훈(南至薰)이 개건하면서 탐라포정사(耽羅布政司)라고 고쳐 부르면서 이후 포정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문루는 일제 강점기 초까지 남아 있었다가 일제가 도청 청사를 건립하면서 철거해 버렸다. 지붕은 팔작 지붕이고 1층에는 비에 오래 견디도록 둥근 돌기둥 8개로 받치고 있으며, 2층 누각에는 나무로 기둥을 연결하였다. 오른쪽에 하마비가 세워져 있고 옆으로 이어서 좌어청(左衙聽) 영나졸방(營羅卒房)이 길게 돌집으로 쌓은 후 그 위에 붉은 색 기와를 얹었다. 사진의 제일 큰 장점은 시간의 기록에 있다. 사람은 가도 사진은 남는 법이라서 한 시절의 영화(榮華)라도 글보다는 이미지로 남는 것이 더 솔직하고 정확할 것이다. 사진이 대중화된 오늘에는 이미지가 둥둥 떠다닐 정도로 범람하고 있다. 각자의 모습, 시대의 역동적인 파노라마가 우리의 꿈 속에까지 어른 거릴 정도다. 그러나 결국 이 마져 모두 언젠가는 다 사라질 것이다. 자연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가와시마 신 外, 『 동아시아근현대통사』,책과함께, 2017.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우리배 용어사전』, 2020. 김원모·정성길 엮음, 『사진으로 본 백년 전의 한국』, 가톨릭출판사, 1997. 김봉옥, 『증보 제주통사』, 도서출판 세림, 2000. 朴用厚, 『濟州方言硏究』, 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1988. 좌승훈, 『제주땅 의미찾기, 포구』, 나라출판, 1996. 홍순만, 『사연따라 七百里』, 제주문화원, 2014. 후에다 코오이치로오 外, 『濟州島의 경제』, 濟州愚堂圖書館, 1999.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그림자 속의 손 - 마리엘라 코르데로(Mariela Cordero) 그림자 속에 있는 손 무자비하고 애무의 왕국에서 추방되어 교류를 모르지 친밀감을 쌓거나 기도하는 이 손은 파열하지 살육의 퍼덕거림으로 그것의 움직임은 천하고 물결치지 학살당한 시체로 그것은 정밀하게 피부 아래를 찢어 상처를 세례 하네 그리고 선을 그리지 강철의 손가락으로 단지 당신에게 주기를 원하지! 흉터를 The hand in the shadow. There is a hand in the shadow devoid of clemency expelled from the empire of caresses it does not know the trade of building closeness or prayers. This hand bursts with the flutter of slaughter, its movements foul the waves of the assaulted body. It tears with precision the submissive skin, baptizes the wound and draws a line with his steel finger. Only wants to give you the scar. ◆ 마리엘라 코르데로(Mariela Cordero) = 1985년생으로 베네수엘라 발렌시아 출신으로 변호사, 시인, 작가, 번역가 및 시각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의 시는 여러 국제 선집에 실렸으며 Third Prize of Poetry Alejandra Pizarnik Argentina (2014). First Prize in the II Iberoamerican Poetry Contest Euler Granda, Ecuador (2015). Second Prize of Poetry Concorso Letterario Internazionale Bilingüe Tracceperlameta Edizioni, Italy (2015) Award Micropoems in Spanish of the III contest TRANSPalabr@RTE 2015. First Place in International Poetry Contest #AniversarioPoetasHispanos mention literary quality, Spain (2016). Finalist Aco Karamanow International Poetry Prize, Macedonia (2022) Rahim Karim World Literary Prize (2022) 등의 문학상을 받았다. 시집 El cuerpo de la duda Editorial Publicarte, Caracas, Venezuela(2013) 및 Transfigurar es un país que amas(Editorial Dos Islas, Miami, United States(2020)를 출간했다. 여러 국제 문학 회의에 참여했는데 프린스턴 축제, Parque Chas 국제 시축제, Bitola Literary Remembrance 국제 시 축제, Xochimilco, X Iberoamerican Festival of Fusagusagá 콜롬비아 국제 시 축제 등에 참가했다. 그녀의 시는 힌디어, 체코어, 에스토니아어, 세르비아어, 쇼나어, 우즈벡어, 루마니아어, 마케도니아어, 한국어, 히브리어, 벵골어, 영어, 아랍어, 중국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등으로 번역됐다. ☞ 강병철 작가 = 1993년 제주문인협회가 주최하는 소설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2016년 『시문학』에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2012년 제주대에서 국제정치전공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주대학교 평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인터넷 신문 ‘제주인뉴스’ 대표이사, (사)이어도연구회 연구실장 및 연구이사, 충남대 국방연구소 연구교수, 제주국제대 특임교수,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제주통일교육센터 사무처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평화협력연구원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제33대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인권위원이며 국제펜투옥작가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제34대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인권위원으로 재선임됐다. 국제펜투옥작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신장위구르 자치구역의 대표적인 위구르족 작가 중의 한 명인 누르무헴메트 야신(Nurmuhemmet Yasin)의 「야생 비둘기(WILD PIGEON)」를 번역 『펜 문학 겨울호』(2009)에 소개했다. 2022년에는 베트남 신문에 시 ‘나비의 꿈’이 소개됐다. ‘이어도문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이어도를 소재로 한 단편소설 ‘이어도로 간 어머니’로 월간 ‘문학세계’에서 주관한 ‘제11회 문학세계 문학상’ 소설부문 대상을 받았다. 한국시문학문인회에서 주관하는 제19회 ‘푸른시학상’을 수상했다. 강병철 박사의 시와 단편소설은 베트남, 그리스, 중국 등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돼 소개되고 있다. 최근엔 중국의 계간 문학지 《국제시가번역(国际诗歌翻译)》에도 강 작가의 시 두편이 소개되었다.
"널 보고싶어도 눈을 뜰 수가 없잖아, 웃어봐!" "웃은건데..." ☞ 오동명은? =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역사소설 <불멸의 제국> 소설 <소원이 성취되는 정원> 소설 <장군어미귀향가>등을 냈다. 4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풀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