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464년 전 발행된 『북사(北史)』에 '탐모라국에는 노루・사슴 등이 많으며 백제에 부용(附庸)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옛 기록들에 보면 '한라산에는 호랑이나 표범, 곰, 이리와 같은 사나운 짐승은 물론 여우와 토끼도 없으며, 날짐승에는 황새, 까치, 부엉이가 없고 산중에는 기괴한 새들이 보인다.'고 했다. 조선시대 진상으로 바쳤던 짐승으로는 사슴, 돼지, 해달(海獺)이 있다. 한라산에 사슴과 고라니가 멸종된 후에 노루만이 남아 있다. 지금 우리 호모사피엔스는 지구 생태계 최대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으며 그가 경영하는 환경은 너무나 악화돼 있다. 이미 오래 전에 인류세라는 불안한 시대가 열리면서 여섯 번째 대멸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서기 1600년대에 지구상에서 멸종된 포유류 수는 약 60여종이나 되었고, 이들 중 대부분이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사라졌다. 한라산의 사슴은 19세기에 자취를 감췄으며 한반도에서는 20세기초에 그 사슴이 멸종되었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상(印象)은 하나의 관념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상상력의 동물이어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거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유토피아가 없으면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s)를 만드는 것처럼. 사슴이 있었기에 백록이 나오고 ‘백록을 타고 다니는 신선〔白鹿仙人〕’이 등장하면서 백록담이라는 이름이 전해지게 되었다. 물론 조선시대에 알려진 이야기이다. 사슴, 산에서 가장 온순한 야생동물 옛날 우리나라에 살던 사슴은 모두 다섯 가지였다고 한다. 사슴과의 고라니(Hydropotes inermis argyropus), 노루(Capreolus capreolus), 대륙사슴, 붉은 사슴 등 네 종과 사향노루과의 사향노루(Moschus moschiferus) 한 종이다. 우리나라에는 사슴과의 고라니가 많고, 현재 한라산에는 사슴은 없으며 노루가 뛰놀고 있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동짓달에 사슴의 뿔이 빠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청나라 5대 황제 강희제(康熙帝, 재위:1662~1722)는 사슴이 5월에 뿔이 빠지는 것을 보고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슴 종류를 잡아 동산에서 기르며 시험해 보았는데, 고라니만 뿔이 빠졌다. 고라니는 사슴 등속으로 꼬리가 길다. 그래서 시험 결과를 근거로 「월령(月令)을 고치려다가 그만 두었는데 이때부터 사슴과 고라니의 구별이 분명해졌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슴이 있는 줄만 알고 다른 종류가 있는 줄은 몰랐다.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나오는 말이다. 물론 『예기(禮記)』의 기록은 강희제가 생각한 것처럼 잘못되지는 않았다. 고라니를 제외한 사슴과에 속하는 종의 수컷은 뿔이 있다. 한국과 중국 동북부에 분포하는 고라니는 뿔이 없는 대신에 커다란 송곳니가 있다. 사슴의 뿔은 소나 염소와 달리 번식 주기에 따라 매번 새로 생겨나고 떨어지며 일반적으로 늦은 봄에 새뿔이 생긴다고 한다. 처음 생긴 뿔의 겉면을 혈관이 발달된 해면질(海綿質) 조직이 감싸고 있어서 그것을 벨벳(velvet)이라고 하는데, 이때 자른 뿔을 한방에서는 녹용(鹿茸)이라고 한다. 시간이 갈수록 뿔은 커지고 단단해지면서 사슴은 나무에 문질러서 벨벳을 제거한다. 이렇게 완성된 뿔은 번식기에 수컷이 암컷을 유혹하거나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수컷 사이에 다툼에 이용된다고 한다. 번식기 이후 뿔은 머리에서 떨어지는데 종에 따라 뿔이 떨어지는 시기가 다르다. 사실 동짓달에 빠지는 종이 있고, 5월에 빠지는 종도 있으므로 『예기(禮記)』의 언급은 틀리지 않았지만 다만 고라니는 뿔이 없고 글에서 처럼 꼬리가 길지 않다. 궤자(麂子)는 고라니를 말한다. 충청도 홍주(洪州)에 궤자도(麂子島)라는 곳이 있었는데 고라니를 기르던 섬이었고 17세기에 녹도(鹿島)는 사슴 국영목장으로 이용되었다. 사슴류의 수급이 불안하여 만든 조치였다. 고라니는 노루와 흡사하지만 약간 작고 고기는 무척 맛이 좋다고 한다. 또 가죽은 매우 질겨 신을 만들면 좋다고 하여 옛날 사람들은 다른 짐승 가죽으로 신발을 만든 뒤 고라니 가죽으로 만든 신발이라고 속여 팔 정도였다(김홍식・정종우:2014). 사슴과 사람은 역사적으로 오래된 관계였다. 신석기 유적에서는 종종 사슴 이빨, 사슴뿔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들의 사냥감으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사슴은 번식이 빠르고 수초(水草)를 좋아해서 그들의 생활 환경이 사람과 가까워 언제라도 쉽게 잡을 수 있는 동물이었다. 성질이 온순하고 인간을 해할 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했던 야생동물이다. 그래서 고대부터 사슴의 가죽, 뿔, 뼈, 고기 등은 사람의 생존에 크게 기여했다. 사슴뿔은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훌륭한 장식품이 되고 있다. 하지만 농경사회에서의 사슴은 애써 가꾼 밭 농사일을 방치는 괘씸한 동물로 여겨져 수렵의 대상이 되었다. 오히려 사슴이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은 그것이 말안장, 신발, 깔게, 활손잡이 등 고급 생활자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백록담에서 흰 사슴을 타고 물 먹이는 사슴테우리 신선 지금의 한라산에는 노루 밖에 없지만, 옛날 사슴이 많아서 장졸(將卒)을 동원하여 사냥을 하고 그것을 공물로 바치기도 했으며, 시인 묵객들은 신선사상과 관련 지어서 흰 사슴을 탄 신선에 대해 노래했다. 사실 신선 사상은 우리들 인간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고픈 욕망에서 나온 유토피아적 발상이다. 그만큼 현실에는 소유하고 잇는 것들이 소중하고 귀해서 두고두고 그것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은 사람 마음을 그리 깊게 알아주지 못한다. “삶이란 그것을 귀중히 한다고 해서 존속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몸이란 그것을 사랑한다고 해서 두터이 건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을 귀중히 여겨도 그렇지 않으며, 그것을 천대하여도 또한 그렇지가 않다. 자연히 생존하고 자연히 죽으며, 자연히 건강해지고 자연히 박약(薄弱)해지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 자라는 것은 증가하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짧아지는 것은 손실이 아니다. 사람의 계산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열자(列子)』는 말한다. 1463년(세조 9) 2월 제주(濟州)에서 한 마리 흰 사슴을 바쳤다. 흰 사슴은 무척 희귀하여 세상에서는 신선이 타고 다니는 영물(靈物)로 여겼다. 신선과 백록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말에는 “노자(老子)가 흰 사슴(白鹿)을 타고 내려와 이모(李母)를 통해 태어났다”라거나, “선인(仙人) 한중(閑中)이 흰 사슴이 끄는 수레〔白鹿車〕를 타고 다녔다”는 기록 등이 전해온다. 사슴은 학과 더불어 십장생 중 하나로 수천 년을 사는 장생(長生)의 영물(靈物)이다. 사슴은 천년을 살면 청록(靑鹿)이 되고 500년을 더 살면 백록(白鹿)이 되고, 다시 500년을 더 살면 흑록(黑鹿)이 되는데 검은 사슴은 뼈도 검어 이를 얻으면 불로장생한다고 기뻐했다. 실제로 18세기에 그려진 옛지도에는 백록담 가운데에서 흰사슴을 타고 윤노리 나무 회초리를 든 신선이 한가하게 사슴 무리에게 물을 먹이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신선은 ᄆᆞᆯ테우리처럼 사슴테우리인 셈이다. 백록담은 바람이 불면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좌측 물가에 활을 들고 매복한 응큼한 사냥꾼이 사슴을 노리고 금방 화살을 쏠 기세다. 백록담의 신선 그림 소재는 18세기 두 개의 옛지도에서 패턴이 비슷하게 그려진 것으로 보아 당시에 백록 전설에 대한 정형화된 스토리텔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77년(선조 10)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는 과거에 급제하자 당시 제주목사였던 아버지 임진(林晋)에게 문안 인사차 제주에 왔다가 섬을 둘러보고 「남명소승(南冥小乘)」이라는 글을 남겼다. 백호는 1578년 2월 12일 구름이 짙게 끼어서 한라산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영실 존자암에 머물고 있었을 때 노승(老僧)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여름밤에는 사슴이 못가로 내려와 물을 마시곤 합니다. 근래에 산척(山尺:사냥꾼)이 활을 가지고 못가에 엎드려 엿보니 사슴이 떼로 몰려와서 그 수효가 백 마리인지 천 마리인지 셀 수 없는 지경인데 그 중 한 마리가 제일 웅장하며 털빛도 흰빛을 띠었습니다. 이 사슴의 등 위에는 백발노옹이 타고 있었지요. 산척은 놀랍고 괴히 여겨 감히 활을 쏘지 못하다가 뒤에 처진 사슴 한 마리를 쏘아 잡았습니다. 이윽고 노옹이 사슴 떼를 점검하는 것 같더니 한가락 휘파람을 불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답니다.” 이 이야기는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도 실렸고, 백호 임제로부터 282년이 지나 1860년 우암(寓庵) 남구명(南九明)의 저서에 약간 변형돼 전해온다. 이처럼 제주의 신선은 한라산에 백록 무리와 함께 살고 있다. 백록담의 옛 이름은 백록홍(白鹿泓). 이름에 못이 높은 곳에 있어 맑고 깊다는 의미가 있다. 맑은 것은 백색의 순수한 이미지로서 숭고함이 있고 깊다는 것은 그윽하고 심오하다는 표현에 걸맞다. 또 백록담 북쪽 가에는 가뭄이면 비오기를 기원하던 ‘도우단(禱雨檀)’이 있는데 아마도 옛 산신단(山神壇) 자리라고 유추할 수 있겠다. 거기서 조선 초기까지 실제로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겨울 추위에 자주 동사(凍死)하자 해발 400고지 아래 현재의 산천단으로 제사를 옮겼다. 백록담은 하나의 커다란 솥모양의 연못이다. 신선은 백록을 타고 마치 사슴들을 말떼처럼 몰고 와 그곳에서 물을 먹이곤 했다. 백록 신선은 수염이 길고 윤노리 회초리를 들고 있으며 휘파람을 잘 분다. 하나의 전설은 꿈결같은 신비주의를 만들어냈고 후세 사람들은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는다. 그러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할 우리가 오늘 지구 재난의 위기 앞에서 놓인 것은 무위자연이라는 인간의 길을 잊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시작도 자연이었기에 끝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자연스런 귀향풀이가 될 것이다. 흰 사슴은 보기가 귀한 만큼 매우 상서롭게 여겨져 자연 상태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동물이 아니었다. 동물의 피부, 털 눈동자에서 나타나는 짙고 어두운 색은 멜라닌이라는 색소 탓이다. 멜라닌은 티로시나아제(tyrosinase)라는 효소에 의해 합성되는데 일부 개체들에서 티로시나아제 유전자가 결핍된 경우가 있다. 이런 현상을 백피증(Leukoderma), 또는 백색증(白色症)이라하고 유전자에 의해 다음 세대로 유전되는 질환이다. 이 백피증은 자연 상태에 있는 동물 집단에서 보기가 쉽지 않은데 포식동물의 눈에 잘 띄어 생존이 어렵기 때문이다. 19세기 한라산 사슴의 멸종 우리나라에서 사슴 그림이 맨 처음 나오는 것은 5세기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와 춤무덤의 수렵도에서이다. 제주의 사슴 그림은 옛 <제주지도>와 <탐라순력도><관덕정> 대들보에 사슴에 대한 그림이 그려졌다. 제주에서는 사슴류를 록(鹿:사슴), 궤자(麂子:고라니), 미록(麋鹿:큰사슴), 장(獐:노루)으로 부르고, 특히 사서(史書)에서는 “궤자(麂子)와 미록(麋鹿)은 제주에서만 살고, 가죽이 세밀하여 질기어 가죽신을 지을만 하다”고 했다. 사슴을 진상할 때 크기를 구분하여 대록(大鹿)·중록(中鹿)·소록(小鹿)으로 나누었는데 해마다 사슴가죽(鹿皮)과 사슴꼬리(鹿尾), 사슴혀(鹿舌)를 공물로 바치기 위해 사슴류까지 모조리 잡다보니 사슴류가 귀해졌다. 중종 14년(1519) 6월 13일 “무릇 산물(産物:사슴가죽)이 예와 지금은 다르니, 대록비(大鹿皮) 및 녹포(鹿脯:말린 사슴고기) 등의 물품을 지금부터는 줄이고 다만 제주(濟州)의 세 고을(제주, 대정, 정의)로 하여금 대신 공상(貢上)하게 하기 바랍니다”.라는 대책이 나오기도 했지만 일곱 개 도(道)는 줄여졌지만 제주만은 그대로 진상이 유지되었다. 1571년(선조4) 영암(靈巖)ㆍ강진(康津)ㆍ해남(海南) 세 고을에는 녹미(鹿尾)ㆍ녹설(鹿舌)ㆍ쾌포(快脯)가 생산되지 않으니 노루와 사슴이 많이 생산되는 제주도로 정해졌다. 또 1625년(인조 3년) 2월 28일에는 전라감사가 공물(貢物)의 기한이 넘어도 소식이 없자 믿을 만한 군관을 제주로 들여보내 숙마피(熟馬皮:성숙한 말가죽) 50장, 대록비(大鹿皮)・중록비(中鹿皮)・소록비(小鹿皮) 각 10장 등의 것을 전라감사에게 다시 독촉하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17세기 중엽 제주목사 이원진의 『탐라지(耽羅志』에 의하면, 제주목에서는 사슴가죽을 관(官)에 바치는 사람인 ‘추록(追鹿)’ 15명에게 20개월 이상 부임한 사또의 몫으로 중·소록비(中・小鹿皮) 52령(令)과 사슴꼬리(鹿尾) 62개, 사슴혀(鹿舌) 64개를 진상하고, 또 왕의 삼명일(탄생일, 동지, 설날)에 활에 매는 노루가죽(結弓獐皮) 60령을 나누어 진상케 하여 그 댓가로는 물품을 나누어 받았다. 그리고 제주목 내수사 노비들은 신역(身役:군역, 노역) 대신, 중록비(中鹿皮) 40령을 진상하고, 공조(工曹)의 몫으로 고라니 가죽(麂子) 2령을 바친다. 대정현에서는 내수사 노비의 신공(身貢:신역)으로 중록비(中鹿皮) 5령을 진상한다. 정의현에서는 공조의 몫으로 고라니 가죽 1령을 진상했다. 1703년 10월 11일 제주목사 이형상은 두 현감과 감목관과 같이 진상할 물품을 채우기 위해서 마군(馬軍) 200명, 보졸(步卒:보병) 400여명, 포수 1백 20명을 동원하여 사슴 177마리, 노루 101마리와 그 외 멧돼지 11마리, 꿩 22마리를 잡았다. 가히 하루 만에 한라산 야생동물들과 전쟁을 벌여서 1백 20명에 달하는 포수들에 의해서 동물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로부터 66년이 지나서 영조는 1769년 8월 9일, 탐라에서 진공하는 사슴꼬리(鹿尾)만 진상하는 것을 멈췄다. 임금이 말하기를, "꼬리[尾]가 60조(條)이면 몸통 또한 60인데 만약 1년에 두 번 진공할 경우 사슴[鹿]은 장차 1백 20마리가 될 것이니, 알지 못하겠지만 본도(本島:제주도)에 전례가 있었는가?“라고 묻고 있다. 그러나 사실 있었다. 이보다 많은 전례가 바로 제주목사 이형상 때였던 것이다. 영조가 전국 사슴의 남획을 보고 급기야 심각성을 깨달았지만, 그러나 이후의 사슴 사냥을 멈추지는 않았다. 평역미로 내는 세금 대신 사슴으로 대체해주는 바람에 더욱더 사슴의 멸종을 부추긴 것이다. 여전히 1780년대 후반에도 목사가 임지에 도착했을 때 바치는 공물 가운데 궤자(麂子:고라니)와 장피(獐皮:노루가죽)가 있었으며, 또 체임할 때는 진상물품으로 녹피(鹿皮), 녹미(鹿尾), 녹설(鹿舌)이 있었고, 내수사(內需司)에 중간 크기의 뿔이 있는 사슴〔中角鹿皮〕을 바쳤으며, 공조에는 다시 고라니와 노루 가죽을 따로 바쳤다. 예나 지금이나 한번 시행된 제도는 여간 바꾸기가 쉽지 않은데 세금이란 것은 늘면 늘었지 결코 줄지는 않았다. 그래서 제주 목사로 탐관오리가 오면 세금 항목이 고무줄처럼 늘었다가 공정한 명관(明官)이 오면 늘어난 세금 혁파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1814년(순조14) 5월 28일 제주어사 이재수는 제주에서 진상(進上)하는 말안장용 장피(獐皮) 50여 령(領)·녹피(鹿皮) 20여 령을 아병(牙兵)에게 곡물 대신 해마다 사슴으로 바치게 하자 너나없이 사슴을 남획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슴으로 받는 세금 가격을 헐값으로 쳐주는 바람에, 징수하지 않는 해에는 녹피가 1004~5백령이고, 달피(獺皮:수달가죽)는 300여 령이나 되어서 사슴과 수달이 멸종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제주어사는 크게 우려했다. 머지않아 이재수 어사의 염려는 사실이 되었고 그 후 한라산에는 사슴의 울음소리도, 신선의 이야기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 한라산에 사슴이 보이지 않는 것은 자연 스스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조선시대 과다한 진상 때문에 일어난 인재였다. 한라산에 사슴이 사라지면서 신화와 함께 장수신앙이라는 신비주의도 역사의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김동진, 『조선의 생태환경사』, 푸른 역사, 2017. 김홍식・정종우,『조선동물기』, 서해문집, 2014. 葛洪, 『神仙傳』, 李民樹 譯, 明文堂, 1994. 金尙憲, 『南槎錄』, 洪琪杓 譯注, 濟州文化院, 2008. 金千亨, 『耽羅史料文獻集』 , 도서출판 디딤돌, 2004. 金惠右・高時洪, 『高麗史耽羅錄』, 제주문화, 1994. 리영순, 『우리 문화의 상징세계』, 푸른 역사, 2006. 엘리자베스 콜버트, 『여섯 번째 대멸종』, 김보영 옮김, 쌤엔파커스, 2022. 프란츠 M. 무케티츠 지음, 『멸종, 사라진 것들』, 두행숙 옮김, 들녘, 2005. 『備邊司謄錄』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列子』 『濟州邑誌』 『耽羅志』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 정괘 정(井)은 물을 깃는 곳이다. 우물 속에는 감천이 쏟아난다. 사람에게 마실 물을 제공한다. 사람이 가장 목마를 때에 물 한 모금을 얻는 것은, 눈 속에 탄을 보내는 것과 같아 영원히 잊지 못한다. 우리는 인재가 부족할 때 갈증이 나서 물을 찾듯 현인을 찾는다. 인재가 우리를 위해 재부를 만들어 낼 때 용솟는 샘물로 보답하여야 한다.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1) 남에게서 은혜를 입으면 갑절로 갚아야 한다. 경영자가 됐을 때 어떻게 하여야 할까? 우물(井)은 옛날에 물을 깃는 곳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맹자』에서 정전법을 설명하면서 정방형의 전지를 정(井)자 형태로 9구역으로 나누었다. 둘레 8구역은 사전(私田)이고 중간에 1구역은 공전과 택지였다. 그곳에 우물을 파서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마법(司馬法)』에서는 4곳 정전(井田)을 합쳐서 1읍(邑)이라 했다. 모든 읍의 사람은 우물에서 물을 길었다. 우물은 교역 장소가 됐다. 옛 사람이 ‘시정(市井)’이라 했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사람을 쓰고 현인을 쓰는 일을 우물(井)을 가지고 비유하였다. 인재는 첫째 자원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공통된 인식이다. 시장경제 발전에 따라 각종 경쟁은 본질적으로 인재의 경쟁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높은 소양을 가진 인재 가 있느냐에 따라 뛰어난 경쟁력을 가지게 된다. 인재를 쫓으려면 인재가 찾아오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현인을 구해야 한다. 삼고초려 하여서라도 현사를 놓쳐서는 안 된다. 목이 말랐을 때 우물곁에 가서 급히 용기를 찾아 물을 깃는 것과 다름없어야 한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회사가 연구원을 창립할 때에 우수한 인재가 부족하였다. 맬런대학 레스터(Lester)교수는 여러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빌 게이츠는 그런 인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주동적으로 ‘출격’해 그를 찾아갔다. 반년 동안 ‘성가시게 군’ 끝에 레스터는 마침내 빌 게이츠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레스터가 발포제처럼 마이크로소프트 회사에 가입한 후 많은 컴퓨터 업계의 엘리트 인재를 ‘쫓아 다녔다.’ 예전 연구원 원장 장아근(張亞勤)도 피곤함을 모른 채 ‘인재를 쫓아다녀’, ‘IBM의 아버지’라 불리는 허봉웅(許峰雄)박사를 ‘쫓아가서’ 자기 팀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세계적 명성을 가진 연구원 50여 명을 망라한 최상위 인재 120명을 모집하였다. 바로 그런 ‘인재를 쫓아다니는’ 바통은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인재를 쫓아다니는’ 방식과 ‘인재를 끌어들이는’ 방식은 인재를 모집하는 방법에 속하기는 하지만 인재를 구하는 마음가짐과 행태에 있어서는 다르다. 특히 우수한 인재를 구하는 데에 한시도 참을 수 없다면 유비, 소하(蕭何)가 했었던 것처럼, 현재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모든 방법을 동원해 ‘쫓아다니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쫓아다녀도’ 상대가 허락하지 않으면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과 같은 열의가 있어야 한다. 인재를 구하는 데에 절박함과 성실함이 있어야 한다. ‘인재를 쫓아다니는’ 것과 동시에 알맞은 시스템과 환경을 갖춰야 한다. 인재의 잠재력을 완전히 펼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개방적이면서 막힘이 없는 교류,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관용적 분위기, 끊임없이 협력할 수 있는 단체정신이 있어야 인재가 마음 편하게 ‘평생 기억할 수 있는 큰일’을 이룰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해 낼 수 있다. 각 분야의 인재에게 ‘흔들림 없는 후방 지원’, ‘막강한 뒷받침’이 되어서 모든 가능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인재가 과감하게 시도하고 돌입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당신은 ‘오동나무’ 위에 있는 ‘봉황’이 유쾌하게 당신 곁에 머물 것이며 회사도 오랫동안 번창할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기업가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는 사람과 기업 성공의 관계에 대하여 말했다. “현대화 생산기술과 기업 관리는 일본 기업이 전진하는 두 바퀴다. 인재는 두 바퀴의 축이다.” 바퀴는 있으되 바퀴축이 없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기업이 사람이다.” 기업을 경영하려면 사람을 붙잡아야 한다. 기업이 최상의 상품을 생산하려면 일류 인재가 있어야 한다. 유명 상표를 창출해 내려면 기업가가 중심이 되고, 전문 인력이 주체가 되며, 뒤지지 않는 직원의 골간이 되는 훌륭한 인재를 중심으로 하는 종합적인 시스템을 만들어서 총체적 효능과 장점을 발휘하여야 한다. 1)滴水之恩,涌泉相报.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사랑인가? - 로돌포 자모라 코리아 (Rodolfo Zamora Corea) 그는 태어나고 웃었다. 그는 놀라움으로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고, 어머니의 미소가 그를 반겼다. 고통을 사랑으로 바꾸는 연금술은? 그가 배운 첫 번째 교훈이 될까? 암흑 물질에서 잃어버린 단어, 삶의 미로 속에서, 사랑? 돌을 자르는 신출내기 석공, 그의 망토에 잔해를 흩뿌리며 자신의 손에 의식불명의 상처, 그의 눈을 쓰레기로 채우고, 두 눈은 붉게 물들고, 두 눈에 눈물을 채우고 그러나 옆에서 그는 참을성을 느낀다. 분노하지 않고, 동반자와 교사: 그의 형제, 그에게 돌을 다듬는 법을 가르치고 까칠한 면에서 보호하고, 앞치마로 그를 가리고,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사랑인가? 그는 눈을 피하지 않는다 손을 뻗는 사람에게서, 오고 가는 영혼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빵 한 조각을 달라는 사람, 한때 사과나무가 서 있던 정원 가운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사랑인가? 사나운 키메라와 매일 싸우고, 절대이성을 믿는 자를 불태운다 자유가 사랑과 같다고 믿는 것이 아닐까? 용의 다리로 공격하는 동일한 키메라를 감지한 것일까? , 그는 자신의 마음에 확신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계속 싸운다. 내가 알고 싶은 신사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사랑인가? 입가에는 항상 미소가 그려져 있고, 기다리지 않고 베푸는 그의 손에는 노래가 있고, 그는 별에서 그의 얼굴에 붙어오는 산들바람을 느끼고, 용서의 꿀을 먹고, 주저하지 않고 벌거벗은 사람을 셔츠로 가리고, 그의 형제자매를 그렇게 인식한다. 현명한 아르테미스의 머리를 빗겨주고 그리고 전부를 인식하고 하나로 사랑한다. 위대한 불멸자처럼.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사랑인가? 내가 알고 싶은 하나님 내 안에 자석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로를 거부하는 나의 두 반대 극, 하지만 서로에게 강하게 끌린다. 망치의 힘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고 그의 팔, 내 안 깊숙이 끌을 찔러넣어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사랑인가? 대답해줘! IS THIS WHAT THEY CALL LOVE? (By Rodolfo Zamora Corea) He was born and smiled. He discovered a new world with amazement, his mother's smile greeted him, What alchemy transforms pain into love? Will it be the first lesson he learned? the lost word in dark matter, in the maze of life, love? The fledgling stonemason who cuts his stone, spattering his cloak with rubble, wounding unconscious, his own hand, filling his eyes with scum, turning them red, filling them with tears, but by his side he feels patient; without anger, the companion and teacher: his brother, to teach him how to shape his stone, protecting it from the stubble, covering him with his apron, Is this what they call love? He doesn't avert his eyes of the man who stretches out his hand, among the souls that come and go, who extends his hand asking for a piece of bread, Among the garden where once stood an apple tree, Is this what they call love? fight daily with the fierce chimera, that burns the man who believes in absolute reason Could it be that you believe that freedom is the same as love? Could it be that he senses the same chimera that strikes with his dragon legs? , He keeps fighting because he believes that his heart has its own conviction, Gentlemen I want to know: Is this what they call love? He, on his lips, always has a smile drawn, in his hands that give without waiting he has a song, He feels his breeze on his face from the stars, and feeds on the honey of forgiveness, without hesitation he covers the naked with his shirt, recognizes his siblings as such combs the hair of wise Artemis, And recognize THE ALL and love as one, like the great immortal. Is this what they call love? God I want to know Why am I feeling a magnet inside of me? my two opposite poles repudiating each other, but powerfully attracted to each other, with the force of a sledgehammer, with the strength of God, and his arm, Plunging a chisel deep inside of me Is this what they call love? Answer please! ◆ 로돌포 자모라 코리아 (Rodolfo Zamora Corea) = 1966년 2월 14일 니카라과에서 태어나 코스타리카에 기반을 둔 작가이자 시인이다. 그의 시는 다른 세계 언어 중에서 베트남어, 아랍어, 영어, 이탈리아어, 루마니아어로 번역되었다. 전 세계 50개 이상의 국가에서 10개 이상의 문학 작품과 수십 개의 국제적 선집에 게재되었는데 아시아, 유럽, 호주, 아프리카 및 미국을 포함한 미주 지역의 주요 문학 선집으로 출판되었다. 그의 작품은 스탠퍼드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예일 대학교, 뉴멕시코 대학교, 뉴욕 대학교 등의 가상 도서관과 미합중국 의회 도서관 가상 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다. ☞ 강병철 작가 = 1993년 제주문인협회가 주최하는 소설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2016년 『시문학』에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2012년 제주대에서 국제정치전공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주대학교 평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인터넷 신문 ‘제주인뉴스’ 대표이사, (사)이어도연구회 연구실장 및 연구이사, 충남대 국방연구소 연구교수, 제주국제대 특임교수,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제주통일교육센터 사무처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평화협력연구원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제33대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인권위원이며 국제펜투옥작가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제34대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인권위원으로 재선임됐다. 국제펜투옥작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신장위구르 자치구역의 대표적인 위구르족 작가 중의 한 명인 누르무헴메트 야신(Nurmuhemmet Yasin)의 「야생 비둘기(WILD PIGEON)」를 번역 『펜 문학 겨울호』(2009)에 소개했다. 2022년에는 베트남 신문에 시 ‘나비의 꿈’이 소개됐다. ‘이어도문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이어도를 소재로 한 단편소설 ‘이어도로 간 어머니’로 월간 ‘문학세계’에서 주관한 ‘제11회 문학세계 문학상’ 소설부문 대상을 받았다. 한국시문학문인회에서 주관하는 제19회 ‘푸른시학상’을 수상했다. 강병철 박사의 시와 단편소설은 베트남, 그리스, 중국 등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돼 소개되고 있다. 최근엔 중국의 계간 문학지 《국제시가번역(国际诗歌翻译)》에도 강 작가의 시 두편이 소개되었다.
"우린 으르렁 화만 내네." "난 너랑 입맞추는 건데?" ☞ 오동명은? =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역사소설 <불멸의 제국> 소설 <소원이 성취되는 정원> 소설 <장군어미귀향가>등을 냈다. 4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풀어내고 있다.
국선변호인으로 활동하면서 가장 안타까울 때가 있다. 정신질환의 영향으로 범죄를 저지른 경우다. 정신질환의 종류만큼이나 범죄유형도 다양하다.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행인에게 시비를 걸기도 하고, 신의 계시라며 타인이 거주하는 주거지로 들어가 물건을 가지고 나오기도 한다. 자신을 위협하는 내용의 환청에 시달리다가 자동차, 벽, 공중화장실 등에 마구잡이로 낙서해버리기도 하고, 국가기관이 자신을 미행하고 도청한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주변 이웃들을 의심하다가 폭행까지 하게 된다. 비정신질환자가 보기에는 그저 망상이고 환청이지만, 그들에게는 실존하는 위협이다. 혼자서는 헤어나올 수도 없고 귀를 틀어막아도 들리는 괴로움 속에서 나름의 해결방법을 찾다가 결국 범죄에까지 이른다. 정신질환자가 피고인인 사건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사건 해결을 위한 협조가 요원하다는 점이다. 의뢰인을 만나 사건에 대하여 묻더라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 늘어놓고, 증상이 심한 경우에는 변호인을 자신의 인식 속 위협요소와 ‘같은 한패’로 생각해 욕설을 하기도 한다. 욕 듣는 것이야 대수롭지 않게 지나갈 수 있으나, 의뢰인을 설득하는 과정이 어렵다. 피고인의 변호인이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의뢰인이 적절한 치료를 받아 그들이 매 순간 겪을 고통이 조금이나마 줄어들고, 무고한 피해자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병원 진료(정신감정)를 받아보자고 권유해도 대부분은 거절한다. 자신은 정신질환자가 아닌데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정신질환자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정신질환 치료에는 무의미한 교도소 수감 대신 치료감호(병원과 같은 치료감호시설에서 치료를 받도록 하는 처분)를 통해 치료를 해보자고 해도 역시나 마찬가지다. 피고인이 병원 진료 및 치료감호를 원하지 않는다면 변호인으로서는 그 의사에 반하는 소송행위를 할 수는 없다. 그런 이유로 어르고 달래가며 병원 진료를 받도록 설득한다. 피고인을 어렵게 설득하더라도 다시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정신감정을 신청하더라도 법원은 기각결정을 할 수 있다. 대부분 소송절차 지연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주 내의 정신감정 기관은 이미 예약이 가득 차 있어, 정신감정을 위해 수개월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법원은 꼭 정신감정을 해야 할 중범죄 위주로 정신감정 신청을 허가한다. 그만큼 정신감정 기관이 부족한 실정이다. 치료감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내 치료감호 기관은 공주치료감호소가 유일하다. 의사 1인당 담당 환자 수도 평균 157명에 달한다. 정신건강복지법에 따른 정신과 전문의 1인당 적정 환자 수 60명을 아득히 넘긴 수치다. 정신질환이 치료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환청과 망상 속에서 고통을 겪다가 ‘나름의 해결방법’을 반복할 것이고 그만큼 무고한 피해자는 계속 발생할 것이다. 피고인이 정신질환자인 경우 재범방지를 위해서라도 치료에 더욱 방점을 두어야 하는 이유고, 정신질환 범죄자 진료 및 치료를 위한 인프라를 확충해야 하는 이유다. ☞김대현은? = 제주도 감사위원회, 법무법인 현답에서 근무하다 제주에서 개업했다. 대한변호사협회 대의원, 대법원 국선변호인, 헌법재판소 국선대리인, 제주지방법원 국선변호인 등으로 활동 중이다.
악비(岳飛)는 『만강홍(滿江紅)』에서 읊었다. “크게 품은 뜻, 오랑캐의 살로 주린 배를 채우고, 담소하며 흉노(匈奴)의 피를 잔에 담아 마시고 나면, 그때서야 안심하고 머리를 숙이리라. 옛 산하 그렇게 다 찾은 후에 천자 궁에 배알하리라.”1) 영락한 때에는 눈물을 가슴에 묻어두고 흐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시시각각 자기 목표를 향하여 계속 나아가야 한다. 『주역』은 말한다 : 곤란한 시기에 시련을 견디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웃으며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 웃으면서 인생을 보는 것은 태연하면서도 담백한 마음의 경지로, 삶의 모든 것을 웃으며 보아야 한다! 득실이 있고 공과가 있으며 즐거움과 슬픔, 행복과 고통이 있겠으나,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이 탄연하게 웃으라. 우리 인생은 울음소리에서 시작되었다. 인생의 길은 울퉁불퉁 평단하지 못하다. 쟁취해야만 수확이 생긴다. 분투해야만 비로소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우리의 감정은 풍부하다. 인정과 사랑의 길에서 자신을 제어하여야 한다. 자신을 확실하게 파악해야만 한다. 우정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당신의 마음으로 쉽게 오지 않는 행복한 생활을 체득하여야 한다. 인생은 창조성이 넘쳐난다. 당신의 두 손으로, 당신의 노력으로, 당신의 재능으로, 당신의 노동으로 창조하여야 한다. 우리의 삶은 아름답다. 당신의 삶이 행복하든 고통스럽든, 당신의 사업이 성공하든 잠시 좌절을 맛보든, 심혈을 기울여 온몸으로 그 삶을 감지하시라. 아침에 일어나면 꽃이 향기롭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저녁이 되면 바람이 서늘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몸을 보드라운 저녁 바람 속에 넣어보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왜 웃으면서 삶을 바라봐야 하는가? 우리 삶은 너무나 많은 괴로움과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는 걸어가야 할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좌절과 고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얻은 바가 있고 성공했거들랑 잠시 웃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자. 잃어버렸거나 실패했을 때 태연하게 웃자. 웃으면서 보내버리자. 길은 우리 발아래에 있다. 행복은 우리 손 안에 있다. 웃으면서 인생을 바라보자. 웃으면서 삶의 모든 것을 대면하자. 감정의 세계에서 생활의 진리를 깨달아 보자. 웃음으로 우리 생활을 가득 채워보자. 우리 웃는 얼굴로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꾸며보자. ***** 困卦 ䷮ : 택수곤(澤水困) 태괘(兌卦: ☱)상 감괘(坎卦: ☵)하 곤(困)은 형통하고 곧으니, 대인이라서 길하고 허물이 없으니, 말을 해도 믿지 않으리라./ 곤(困)은 형통하고 곧은 대인이라서 길하고 허물이 없으니, 말을 해도 믿지 않으리라.(困,亨貞大人吉无咎,有言不信.) 「상전」에서 말하였다 : 못에 물이 없는 것이 곤괘이니, 군자가 그것을 보고서 명을 지극히 하여 뜻을 이룬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 못에 물이 없는 것이 곤괘이니, 군자는 그것을 보고서 목숨을 바쳐서 뜻을 이룬다.(象曰,澤无水困,君子以,致命遂志.) (초육) 어두운 골짜기로 들어가서 삼년이 지나도 만나보지 못한다.(入于幽谷,三歲不覿.) [傳] 곤괘(困卦䷮)는 「서괘전」에 “올라가고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피곤하므로 곤괘로 받았다”라고 하였다. ‘승(升)’은 아래에서 올라가는 것이니, 아래에서 위로 오름은 힘써 나아감이니,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피곤하다. 그러므로 승괘(升卦)의 뒤에 곤괘(困卦)로써 받았으니, 곤(困)은 피곤하다는 뜻이다. 괘는 태괘(兌卦☱)가 위에 있고 감괘(坎卦☵)가 아래에 있다. 물이 못 위에 있으면 못 가운데 물이 있는 것이다. 마침내 못의 아래에 있으니 못이 말라 물이 없는 상으로 어렵고 모자라다는 뜻이 된다. 태괘가 음으로 위에 있고 감괘가 양으로 아래에 있으며, 상육이 두 양의 위에 있고 구이가 두 음의 가운데 빠져 있다. 모두 부드러운 음이 굳센 양을 가린 것이다. 이 때문에 곤괘가 된다. 군자가 소인에게 가림을 당하는 것이 곤궁한 때이다. 1) 怒髮衝冠,憑闌處,瀟瀟雨歇.擡望眼,仰天長嘯,壯懷激烈.三十功名塵與土,八千里路雲和月.莫等閒,白了少年頭,空悲切.靖康恥,猶未雪,臣子恨,何時滅.駕長車踏破,賀蘭山缺.壯志飢餐胡虜肉,笑談渴飮匈奴血.待從頭,收拾舊山河,朝天闕. (慷慨하여 怒한 머리털 치솟아 冠을 찌르는데, 난간에 기대섰노라니 세차게 내리던 비 그치는구나.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휘파람 부나니, 壯烈한 마음 激하게 솟구치누나. 나이 삼십에 세운 功名 보잘것없으나, 팔천 리 길 구름과 달빛 아래 전전했노라. 젊음을 헛되이 보내고 백발이 되고 나서, 부질없이 슬퍼하지 말아야 하리라. 靖康의 恥辱 아직 씻지 못했으니, 이 신하의 恨은, 어느 때나 없어질꼬. 兵車를 몰고 달려가서 깨부수리라, 賀蘭山의 관문을. 壯快히 오랑캐의 살로 주린 배를 채우고, 談笑하며 흉노의 피로 마른 목을 축이리라. 옛 山河를 모두 되찾은 후에, 天子를 배알하리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치, 된장, 간장, 식초, 젓갈, 빵, 요거트와 같은 발효식품은 우리에게 너무 친숙하다. 술도 발효로 만들어진다고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의외로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 발효란 무엇인가? 발효는 미생물을 이용하여 사람에게 유용한 물질을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즉 발효는 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이로우냐 해로우냐를 보는 것이다. 미생물의 입장에서 보면 발효나 부패나 다를 바 없다. 우리가 밥을 먹고 변을 보듯이 미생물이 먹이를 먹고 부산물을 만드는데 이것이 인간에게 이로우면 발효, 해로우면 부패가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롭다는 것은 우리가 식품으로 먹을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도 포함한다. 예를 들면 술은 건강에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인간이 좋아하는 물질이기에 술 만드는 과정은 발효이고, 퇴비는 먹을 수 없지만 농사 지을 때 도움이 되기 때문에 퇴비를 만드는 과정도 발효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자주 먹는 발효식품들은 발효 과정에서 미생물이 만들어낸 물질, 발효 후에 남아 있는 원료와 미생물을 한꺼번에 같이 먹는 것이다. 요거트는 우유를 원료로 하여 유산균을 발효시킨 것이지만 우리가 유산균만을 따로 분리해서 먹지는 않는다. 만약 유산균만 따로 분리하여 제품화하면 프로바이오틱스가 될 것이다. 우리 민족 고유의 발효식품인 김치, 된장, 간장, 젓갈 등도 발효 후 특별한 분리 과정 없이 전체를 식품으로 섭취한다. 그런데 미생물을 이용하여 발효 과정을 거친 후 우리가 목적하는 물질을 분리ㆍ정제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우리가 조미료로 널리 사용하고 있는 MSG(글루탐산나트륨, 아미노산의 일종)가 대표적인 예이다. MSG의 경우, 기업에서는 발효조미료 ‘OO’이라고 광고하지만, 소비자 단체에서는 화학조미료라고 얘기한다. 이는 MSG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고 있는 발효식품과는 다른 사용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MSG가 사탕수수 부산물인 당밀을 원료로 하여 미생물 발효로 생산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발효 후에 배양액을 그대로 말려서 포장하여 시판한다면 김치나 된장과 같은 발효식품이 되겠지만 색도 거무튀튀하고 발효 찌꺼기와 미생물도 섞여 있어서 감칠맛이 나는 조미료로는 쓸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배양액으로부터 MSG만 순수하게 분리ㆍ정제하는 공정을 거치는데 이때 화학적인 방법이 일부 사용된다. 기업에서는 미생물을 이용하는 발효 공정을 강조하고, 소비자단체에서는 화학적 방법이 사용되는 회수 공정에 주안점을 두기 때문에 발효조미료다 화학조미료다 서로 주장하는 이중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의약품 중에 세균을 죽이는데 사용되는 항생제 발효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항생물질인 페니실린은 푸른곰팡이를 발효시켜 생산하는데 의약품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순수하게 분리ㆍ정제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미생물을 포함한 발효 산물 전체를 식품으로 이용하는 발효식품에 초점을 맞춰 좀 더 얘기해 보고자 한다. 발효식품은 패스트푸드와 차별화되는 슬로우푸드로 각광을 받고 있다. 옛날에는 보관하기 어려운 농수산물에 소금을 뿌려 발효시켜 놓으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는데 큰 의미를 두었다. 그러나 냉장 유통, 저장 등의 기술이 발전하면서 최근에는 발효식품의 저장성 보다는 기능성이 부각되고 있다. 일단 발효식품은 발효 과정에서 미생물이 우리가 소화하기 어려운 성분들을 흡수하기 좋은 상태로 분해해주기 때문에 영양소의 소화ㆍ흡수율이 증가한다. 예를 들어 콩보다는 된장이, 이보다는 간장이 발효 과정에서 미생물이 콩 단백질을 펩타이드와 아미노산으로 더 많이 분해해주기 때문에 소화 흡수가 잘 된다. 요거트도 유산균이 소화가 어려운 유당을 분해해주기 때문에 우유가 잘 맞지 않는 사람에게도 좋은 식품이 된다. 또한 발효식품은 발효 전보다 우리 건강에 도움을 주는 생리활성 성분이 증가하는 경우가 많다. 된장, 청국장의 경우 발효 과정을 거치는 동안 심혈관계 질환 예방 및 항돌연변이 효과와 항산화 활성이 강화된다는 보고가 있고, 요거트도 유산균 발효 과정에서 유해균을 죽이는 물질을 만들어낸다. 발효식품의 또 다른 이점으로는 발효 과정에서 우리 몸에 도움이 되는 유익균들이 증가한다. 유산균 발효 산물인 김치와 요거트를 먹음으로써 장 건강에 도움을 주는 유산균도 같이 섭취하게 된다. 이외에도 장시간의 발효 과정을 거치는 동안 미생물에 의해 농산물의 잔류 농약이 제거되는 사례도 있다. 그렇다면 발효식품을 무조건 많이 먹는 것이 좋을까? 발효식품이 큰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고유의 발효식품에는 단점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나트륨 함량이 높다는 것이다. 채소, 콩, 어패류 등에 유해 미생물이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억제하기 위해서 소금을 뿌려 발효를 시키게 된다. 또한 발효가 너무 빨리 일어나지 않도록 소금의 첨가량으로 발효 속도를 조절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기온이 따뜻한 남부 지방으로 갈수록 김치와 젓갈의 염도가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제주의 젓갈과 김치도 염도가 높은 편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정한 하루 권장량보다 나트륨을 2배 이상 많이 먹고 있어서 고혈압, 심혈관계 질환 등의 대사성 질환의 위험에 크게 노출되어 있다. 그렇기에 나트륨 섭취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 현재는 냉장ㆍ발효 기술이 발달하여 굳이 소금을 많이 쓰지 않더라도 저온에서 발효를 시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기업이나 생산자도 저염 제품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또한 우리 고유의 발효식품이 한가지 미생물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해 미생물이 혼입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기업이나 생산자들은 유익한 종균을 확보하고 발효 과정을 표준화함으로써 항상 안전하고 균일한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제공해야 할 것이다. 발효식품은 먹는다는 것,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넘어서 그 나라 또는 지역 고유의 문화가 같이 녹아있다. 우리 제주에도 많은 발효식품이 계승되어 왔고 육지와는 다른 발효 방법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중 특히 차별화된다고 여겨지는 세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제주는 논 농사가 어렵기 때문에 술도 쌀을 이용하지 않고 밭 곡식인 좁쌀을 원료로 하여 제주 고유의 오메기술이 만들어졌다. 또한 아열대 및 온대 해역에 서식하는 자리돔을 이용하여 자리젓을 담가 먹어왔는데 이 또한 제주 특유의 기후와 해양 조건에 따른 것이다. 제주가 어렵던 시절에 밥알 한 톨도 귀하게 여겨 찬밥이 생기거나 쉬더라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누룩과 물을 섞어 발효로 만드는 쉰다리는 제주 사람의 애환이 스며 있는 발효식품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발효식품들은 단지 먹는 대상이 아니라 제주의 역사와 문화가 같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마땅히 계승ㆍ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적인 제조법은 반드시 이어져야 하겠지만, 한편에서는 현대인의 입맛에 맞고 위생적이면서 균일한 제품을 만드는 노력도 같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김동청 교수는? = 연세대 생화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대학원 생화학과 이학석사 및 서울대 대학원 농화학과 농학박사를 취득했다. 대상㈜ 중앙연구소 선임연구원, 순천제일대 조교수, 영국 캠브리지대 방문연구원, 성균관대 기초과학연구소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청운대 인천캠퍼스 화학생명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식품기술사 자격도 갖고 있다.
그리움 - 에드워드 하렌츠(Eduard Harents) 색의 그림자가 낮의 상처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마주친 꿈의 고요함을 걷고 있다... 꽃은 고통의 비밀이다; 내면을 돌아보는 미소이다. 자손은 죄를 부른다. 기도의 개인적인 붕대를 넘어서 나무의 자기 부인은 밤의 손가락들처럼 밝고 따뜻하다. 나는 얼어붙고 있다… 당신의 이름. Yearning (By Eduard Harents) The shadow of color is scaling the scars of day; walking the serenity of an encountered dream… The flower is the secret of pain; an introspective smile. The scion names the sin. Beyond personal bandages of prayer, the self-denial of a tree is as much brightas warm are the hands of night. I am freezing… your name. ◆ 에드워드 하렌츠(Eduard Harents) = 예레반 주립대 동양학부와 카이로대 아랍어 문화 센터를 졸업했다. 그는 10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수많은 아르메니아 및 외국 정기 간행물과 선집에 시 작품들이 게재됐다. 역사상 가장 많은 시가 번역된 아르메니아 시인으로, 그의 작품은 7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다. 2007년, 2009년, 2011년, 2013년에는 최우수 시 작품과 최우수 번역상 후보에 올랐고, 2013년에는 『무기력한 각성』으로 최우수 젊은 시인상을 받았다. 2015년과 2019년 시 부문 국제 문학상, 2020년 파노라마 국제 문학상(인도-이탈리아)을 받았다. ☞ 강병철 작가 = 1993년 제주문인협회가 주최하는 소설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2016년 『시문학』에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2012년 제주대에서 국제정치전공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주대학교 평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인터넷 신문 ‘제주인뉴스’ 대표이사, (사)이어도연구회 연구실장 및 연구이사, 충남대 국방연구소 연구교수, 제주국제대 특임교수,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제주통일교육센터 사무처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평화협력연구원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제33대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인권위원이며 국제펜투옥작가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제34대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인권위원으로 재선임됐다. 국제펜투옥작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신장위구르 자치구역의 대표적인 위구르족 작가 중의 한 명인 누르무헴메트 야신(Nurmuhemmet Yasin)의 「야생 비둘기(WILD PIGEON)」를 번역 『펜 문학 겨울호』(2009)에 소개했다. 2022년에는 베트남 신문에 시 ‘나비의 꿈’이 소개됐다. ‘이어도문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이어도를 소재로 한 단편소설 ‘이어도로 간 어머니’로 월간 ‘문학세계’에서 주관한 ‘제11회 문학세계 문학상’ 소설부문 대상을 받았다. 한국시문학문인회에서 주관하는 제19회 ‘푸른시학상’을 수상했다. 강병철 박사의 시와 단편소설은 베트남, 그리스, 중국 등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돼 소개되고 있다. 최근엔 중국의 계간 문학지 《국제시가번역(国际诗歌翻译)》에도 강 작가의 시 두편이 소개되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12조 제4항,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다만, 형사피고인이 스스로 변호인을 구할 수 없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가 변호인을 붙인다. 우리나라 헌법에서는 형사피고인에게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보장한다. 헌법상 명시된 권리 중 하나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변호인을 선임할 수 없는 피고인을 위하여, 국선변호인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피의자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경우, 피의자에게 변호인이 없다면 법원에서 직권으로 국선변호인을 선임한다. 사실, 구속은 인간의 기본권 중 하나인 신체적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피의자가 구속되었을 정도라면,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상황이 대부분이다. 본인이 구속될 만큼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피의자는 어떻게든 구속을 면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한다. 여기저기 융통할 수 있는 자금을 모두 동원하여 유명한 형사전문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상대적으로 가벼운 수준의 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이 구속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타인을 해하였거나, 공공의 안녕을 저해하는 그런 범죄가 아니라, 음식대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사기범죄, 편의점 내의 물품 절취를 내용으로 하는 절도범죄 등. 높은 확률로 국선변호인이 선임된다. 저지른 범죄가 중대하지는 않지만, 일정한 주거지가 없어서, 사회적 유대관계를 확인할 수 없어서, 같은 형태의 범죄를 여러 차례 저질러서, 또 다른 피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인신 구속을 해야만 하는 경우이다. 이런 사건의 국선변호인으로 지정되어 기록을 검토하면, 피고인은 이미 동종 전과로 수감 생활을 수차례 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경우도 상당하다. 참 감정이 복잡하다. 이런 피고인에게는 억울한 사정도, 가벼운 처벌을 원하는 간절함도 찾아보기 어렵다. 특별한 범죄 동기라고 할 만한 사정도 없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진지한 반성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형사 절차에 대하여는 오히려 변호인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내심 ‘교도소를 숙식 제공 시설이라고 여기나’라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 이런 괘씸한 사람이 있는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소모되는 비용과 행정력 낭비가 과연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 들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평소와 같이, 약간은 느슨한 태도로 맡게 된 국선 사건이었다. 사무적인 태도로 변호인의견서에 들어갈 정상관계를 물어보던 중, 피고인이 자조적으로 뱉은 한 마디가 강렬했다.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지만, 처음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경위부터 시작하여 전과자로 팍팍하게 살아가는 현실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는 도무지 건조하게 듣기 힘들었다. 가족 한 명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전과자가 되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변호인의 역할은 어디까지일까. 그 결론은 쉽게 내릴 수 없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저 피고인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변호인의견서에 꾹꾹 담아 눌러썼다. 일단 당장 변호인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다만, 이 사건 이후 피고인을 대하는 태도에 나름의 변화가 생겼다. 직접 표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속으로나마 진심 어린 바람을 전하는 것이다. ‘이번 형사재판이 당신의 인생에 마지막 형사재판이 되기를, 이번 수감 생활에서는 출소 후 어떻게 이 사회에 어떻게 적응하여야 하는지 제대로 배울 수 있기를, 그래서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이용혁은? = 제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변호사. 변호사시험 합격 후 제주도청 특별자치법무담당관실에서 3년간 근무하며 경험을 쌓은 뒤 제주지방법원 사거리에서 개업했다. 대한변협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제주지방법원, 대법원, 헌법재판소, 제주도 지방노동위원회, 제주도교육청 행정심판위원회의 국선변호인/국선대리인 역할을 수행하며 공익활동에 힘쓰고 있다. 이외에도 제주지검 청원심의회 등 각종 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도민로스쿨 특별강연과 제주도 공무원을 위한 특강에도 힘쓰며 지역발전에도 이바지하고자 노력 중이다.
"닮음은 비슷함과 다른데 ..." "비슷함은 얼렁뚱땅에 더 가깝지." ☞ 오동명은? =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역사소설 <불멸의 제국> 소설 <소원이 성취되는 정원> 소설 <장군어미귀향가>등을 냈다. 4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풀어내고 있다.
2023년 6월 25일은 어느덧 김택화 화백의 서거 17주기를 맞는 날이다. 참으로 세월의 빠른 흐름에 무상함을 느끼는 시간, 먼저 떠나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그가 제주에 남긴 예술혼을 다시 새겨보는 자리를 마련하고 한다. 김택화는 천성이 화가라는 이름에 걸 맞는 인물이었다. 제주에서는 ‘택화화실’, ‘택화풍’이라고 그를 지칭하던 대명사가 있어 그의 스타일을 대변했었다. 언제라도 떠오르는 그의 첫 인상은 그림이 곧 그였다는 생각이다. 아담한 키에 평소 챙이 없는 모자를 즐겨 쓰고 말을 매우 적게 하면서 빙긋 웃기만 하는 스타일은 모르는 누가 봐도 딱 첫 눈에 화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 스타일은 환경이 만드는 것이다. 몰두하는 일의 깊이가 클수록 그것의 그림자가 덧씌워지는 법이니까. 우리는 그것을 ‘한 몸 되기’라고 하며 그 사람이 풍기는 인상으로 남는다. 인상은 자주 대하는 대상의 영향을 받아서 점점 그것을 다루는 행위자의 특성을 갖게 된다. 김택화는 ‘처음이 많은 화가’이다. 사람들은 ‘처음이 많은 화가’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할 것이다. 처음이란 시작, 기원처럼 시간적 의미로서의 출발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원이란 ‘원인의 이유를 설명하는 발단’이 되거나 무엇인가 ‘설명하기에 충분한 시작’이라는 의미가 있다. 화가에게 행위나 사건의 시작이란, 어떤 의도한 주제를 첫 번째로 수행하는 것, 미술활동을 말하는데 화가라면 당연하게 창작에 대한 발표, 즉 전시 행위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특정 장소성과 함께 시간성의 의미를 포함하게 된다. 김택화에게 ‘처음’의 의미는 제주인이라는 특정 장소성(고향)에 기반하면서 처음의 시간성(언제)이 어디서,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졌느냐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지금의 의미는 그 처음이 주는 의미와는 다르겠지만 화단이 형성되지 못한 초기 제주의 상황으로 볼 때 이런 처음의 의미는 미술사적인 맥락에서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누가, 무엇을, 어디서, 시작했는가? 제주미술인으로서 김택화가 처음 시도한 미술활동을 네 가지를 정리하면, 제주 극장 간판을 공동(김택화, 고영만)으로 처음, 제주 추상화가로서 처음, 상품 디자인을 처음, 올레를 그린 화가로 처음인 것이다. 1) 현대극장 성길사한(징기스칸) 간판 중학생으론 처음 1950년대 한국전쟁기에 김택화는 오현중학교를 다녔고, 고영만은 제주중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로 지내면서 사라봉, 용두암 등 제주시 곳곳에 스케치를 다녔다. 당시만 해도 배고픈 시절에 중학생에게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둘은 마침 현대극장으로부터 극장간판을 그려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귀한 시대였고 약간의 수고비를 준다는 말에 둘은 솔깃하여 합작으로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영화 포스터의 내용은 ‘성길사한’, 곧 징기스칸이었다. 먼저 고영만이 징기스칸의 얼굴과 싸움 장면을 그리면, 김택화는 남겨둔 빈 공간에 새로 글씨로 크게 ‘성길사한’이라고 썼다. 두 사람은 거의 하루 종일 그려서 약간의 돈을 받으면 주변에 있는 중국식 찐빵을 맛나게 사먹었다. 중학생이 극장 간판을 그리게 된 것은 간판을 그리던 육지 사람이 어떤 사정으로 인해 자리에 없자 대용으로 급하게 극장간판을 그리게 된 것이다. 사람에게 이별은 언제나 있다. 만남과 헤어짐은 경우를 달리해서 반복될 뿐 그것을 거부하지는 못한다. 김택화가 서울로 떠나기 전인 1957년 8월 14일부터 20일까지 고영만에게 만날 날을 기약하면서 둘은 일주일간 제주시 오아시스 다방에서 2인전을 열었다. 2) 제주 추상화가로서 처음, 멍 때리는 추상화 <작품 7> 고영만은 중학교를 졸업하여 제주 사범학교로 진학하고, 김택화는 형님이 체신청에서 근무하는 서울로 가서 전보 배달로 고학을 하며 홍익대학교에 입학했다. 누구보다 부지런했던 김택화는 아침 일찍 다른 학생들이 등교 하기 전에 늘 뎃생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학생이었다. 1962년 22세의 김택화는 대학교 2학년생이었다. 당시 국전은 11회를 맞았는데 김택화가 추상화 작품 <작품 7>을 출품하여 특선을 받은 것이다. 당시의 회화부문 특선은 모두 23명이었고 이들에게서 대상과 문교부장관상이 가려지는 구조였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이 23명의 특선자 중에는 제주와 연관된 사람들이 있었다. 김택화의 스승 홍종명, 현재 저지 현대미술관에 전시관이 마련돼 있는 박광진, 전 제주대 교수 강길원이 그들이다. 11회전 심사위원은 15명, 이들 중 김환기, 박수근, 장리석 등이 속해 있었다. 1962년의 미술계 이슈는 매우 뜨거웠다. 무엇보다도 당시 진보적인 종합지 『사상계』에서 국전을 새롭게 재조명한 것이었다. 이름하여 국전 ‘선외선’이다. 이 국전 ‘선외선’은 1949년부터 시작된 국전의 공정성을 재점검하기 위해 박정희 군사쿠데타 이듬 해인 1962년 국전 11회부터 처음 시작한 것이다. 이전 국전 10회전을 넘기면서 온갖 비리가 노출돼 세상에서는 미술계에 대한 불신 풍조가 팽배하자, 그것의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상징적으로 수상작을 제대로 평가해보자고 마련한 심사였다. 이 심사는 미술계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사상계』에서 내세운 심사위원은 5명이었는데 국전 심사위원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조각가 백문기, 서양화가 박서보, 미술평론가 이경성, 동양화가 박래현, 서양화가 김영주 등이 그들이다. 심사 방식은 이들 5명이 각자 자신이 볼 때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작품 1점을 골라 평을 하는 것이었다. 국전 11회전에 출품된 작품을 ‘심사위원들이 내가 좋아하는 작품’으로 선정하여 국전 ‘선외선’으로 『사상계』에 화보를 싣는 것이다. 김택화의 <작품 7>은 심사위원 박서보에게 채택되어 작품 추천평을 받을 수 있었다. “김택화의 <작품 7>을 나는 기꺼이 추천한다. 흔히 빠지기 쉬운 추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의 핵을 이루는 것은 바로 멍한 점, 이것이 그의 예술내용을 형성한다. 외향적 발산보다는 내향적 집념형. 하나 흠이 있다면 긴박감이 허술하다고나 할까. 22세의 작품치고는 그 세계가 놀랄만큼 성숙하다"라고 추천사를 썼다. 김택화의 <작품 7>은 뜨거운 추상이라고 하여 서정적인 추상을 말하는 것이다. 짙은 갈옷의 색이 화산암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화면 중심을 비켜 위와 옆으로 약간 치우쳐 어두운 색으로 덧나듯 굵은 선이 흐르고 중간 상하로 그어진 선 사이로 발색된 노란계열의 색이 은은하다. 이 작품은 매우 차분하여 굳은 화산 대지로도 보이고 완고하고 뚝심있게 묵시(默視)로써 세상을 보는 듯하다. 무거운 기운이 내려앉아서 우리에게 불편한 마음을 전해준다. 제주로부터 전해지는 암울한 마음이 오래도록 응고된 채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시에 가난에 허덕이던 그의 삶도 역시 그렇고. 3) 그라(래)픽 디자인전 처음, 한라산 소주 라벨디자인을 해 김택화는 국전 11회전 특선 이후 낙향하여 제주에서 몇 번의 전시를 가졌다. 1963년 7월 뉴욕 다방에서 개인전을 연 후 이듬해 7월에는 다시 춘홍다방에서 개인전을, 그리고 1965년 8월 제주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그라픽 디자인전’을 길다방에서 열수 있었다. 아마도 서울 생활의 영향으로 상표 디자인에도 관심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몇 안 되는 향토 기업 가운데 대표적인 주식회사로는 한라산 소주가 있었다. 당시 소주는 24도 짜리와 21도 짜리 희석식 맑은 술을 팔았다. 한라산 소주의 그림은 남쪽에서 본 한라산으로 머리에 흰눈이 쌓인 모습이었고 그 흰눈 때문에 하늘은 더욱 파랗게 보였다. 겨울이면 그 술병이 춥게 느껴지고 더운 여름에는 시원하게 느껴지는데 술을 마셔서 취기가 오를 수록 그 술병의 디자인은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몸이 열이나 더워지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시원한 느낌을 주어 소주를 더 마실 수 있었다. 사람들은 한라산 술병을 보면서 원시적이랄까, 마치 북한 술병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1994년 필자는 김택화 화백과 함께 지인 4명이서 세종갤러리 전시 오픈을 마치고 시민회관 동쪽 작은 주막에서 한라산 소주를 마신 적이 있었다. 그때 김택화 화백이 한라산 디자인 라벨(label)에 대해 말해주어 나는 그제서야 한라산 라벨 디자인이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번은 한라산 소주 회사에서 푸른 색 라벨 대신 연두색 디자인에 금색 글씨로 디자인을 바꾼 적이 있었다. 기억하기로는 1년도 안 돼 다시 김택화 디자인 라벨로 컴백하여 오늘에 이른다. 소문에 의하면 소주 소비량이 연두색 라벨이 파란색 디자인만 못하다는 것이었다. 취할수록 시원한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4) 올레를 그린 화가로서 처음 변화란 과거를 잃어버리는 것의 시작이고, 정체(停滯)란 미래가 없는 것을 말함이다. 변화나 정체 모두 출발은 현실에서 시작되니 현재를 밟고 선 우리에게 이 둘다 변화이자 멈춤으로써 방식이 다른 것일 뿐이다. 하나는 있던 것을 지워버리고 기억에 남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있던 것 위에 쌓아서 새로 경험해야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쁜지는 기억과 경험에서 익숙한 것들 먼저 떠오를 것이다. 지난 것은 아름답게 느껴지고 다가오는 것은 신선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무상함과 기대는 가는 방향이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것이다. 모든 기대도 끝내 무상하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올레는 초가 건축의 한 구조이다. 원래는 마소 관리, 바람 막음, 경계 구분, 구조의 ᄀᆞᆸ가름을 위한 것이다. 올레는 새로운 이름으로 제주도 전역의 길로 거듭났다. 2007년 첫 코스를 개통한 이래 5년 여 만인 2012년 마지막 21코스를 완성했다. 모든 것은 가지를 벋는다. 변화의 물결을 막을 수 없지만 또 막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새로 만들어지지만 그것도 시간이 가면 자연스럽게 정착되고 사라진다. 결국 시간이 그것을 정리하기 때문이다. 제주 전역이 올레가 된 지금, 1965년 김택화는 제주에 귀향하면서부터 구상으로 방향을 바꾼 뒤 1978년까지는 인물이나 정물, 부분적으로 배와 풍경, 절경을 많이 그렸으나 1979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제주도 전체로 작품의 장소와 소재를 넓혀 나갔다. 그후 아름다운 제주 풍광에 홀려 제주도 전역을 캔버스에 담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른 지금은 본의 아니게 그때 그린 그의 그림들이 최초로 올레를 그린 작품이 되었다. 마을 길, 집올레, 초가, 오름, 해안, 포구,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모든 절경 지점이 그의 작품의 대상이 되었다. 현재 김택화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작품들 앞에 서면, 보는 사람이 마치 올렛길을 걷다 잠시 멈추어 서서 마을 안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것도 40~50년전 옛 올렛길을 말이다. 길은 길을 따라가고 가다가 멈출 곳인 폭낭을 바로 돌아 마을의 집올레로 들어가면 아침의 강렬한 햇살에 깨어나는 제주의 마을과 초가를 볼 수 있다. 다시 햇살은 마을을 넘어 잠녀들과 함께 해안으로 가서 바다의 여(礖)에게 말을 건다. 햇살은 다시 포구를 비추면서 아침에 바다에서 들어온 배를 따스하게 비춘다. 특히 제주시 애월읍 상가리 올레는 제주의 폭낭, 초가와 올레를 기록화로 삼을 수 있을 만큼 많이 그렸다. 폭낭, 눌, 돌담, 배, 사구(沙丘), 해변, 파도, 마을길, 정주석, 초가, 폭설과 잔설, 바다 용암들, 구름과 바람마져 그에게 소중한 제주의 풍경이었고, 그것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 시간과 때를 맞춰서 모두 새롭게 태어난다. 풍토의 새로움은 화가의 독창성을 부추긴다. 1984년 6월 동인미술관에서 지난 한 해 동안 그린 작품들을 모아 마련한 열 번째 개인전에서 그는 고백처럼 자신의 심경을 말하고 있다. “이곳 고향 산천 속에서 살아온 제가 그동안 무수히 스쳐지나 다니면서도 미쳐 느껴 볼 수 없었던 그 소박하고 사랑스러운 아름다움들을 손이 닿는데로 마음이 가는데로 표현해 보았습니다만 다니면 다닐수록, 그리면 그릴수록 조그마하게만 생각되어지던 섬 덩어리가 이토록 거대하고 무한한 것의 놀라움에 가슴설레일 뿐입니다.” 김택화는 작은 섬으로 알았던 제주가 거대한 우주처럼 무한한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크고 작은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참새에게는 독수리가 크고 개미에게는 참새가 큰 것처럼 크기란 존재자의 규모에 대한 체적(體積)으로 느끼는 비례일 뿐이다. 작다고 생각할 때는 작아보여도 크다고 인식하게 되면, 또 그것을 바라보는 당사자의 시선은 확장된다. 공간이 작다고해도 그 공간을 확장해서 해석할 수 있는 눈이 열려있다면 그 공간은 무한대와 다름 없을 것이다. 김택화는 작은 것에서 대우주를 보는 눈을 가진 화가였다. 자연이 회귀하는 것처럼 올레의 화가도 추상화에서 구상화로 돌아왔다가 만년에는 또 다시 구상화가 점점 해체의 길을 가면서 공간이 생략되고 사라지는 감멸기법(減滅技法)을 추구했다. 마치 화면이 지워지면서 실제 공간으로 연결되는 느낌이 되도록 점점 사라지는 작업을 하던 김택화 자신도 스스로 자연으로 돌아갔다. 2006년 6월 25일의 일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김택화= 1940년 용담 2동 출신으로 제주북교, 오현중, 서울 동북고, 홍익대 미대 회화과를 중퇴했다. 1962년 홍익대 2학년 때 국전 11회에 국전 특선을 하고 1964년 추상화 그룹 ‘오리진 회화협회’ 창립 맴버로 활동했다. 홍익대 미대 2학년 때 학비문제로 중퇴하여 부득불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1965년 제주에 내려와서 구상으로 작업을 바꾸었다. 귀향 직후 신성여고 미술교사와 1974년부터 줄곧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출강했다. 한국미술협회 제주지회장, 제주예총지부장, 제주도립미술관 건립추진준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함덕에 김택화미술관이 있다. 제주도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공립 김택화미술관을 추진중에 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 곤괘(困卦) 곤(困)은 빈곤(貧困), 초라하게 되다, 영락(零落)하다 뜻이다. 피곤할 때는 충분하게 쉬면 된다. 빈곤할 때에는 패기가 있어야 한다. 곤란을 당했을 때는 열심히 공부하여야 한다. 어찌 할 도리가 없을 때 와신상담하여야 한다. 인생을 웃으며 살아야 한다. 곤궁해져 영락하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구덩이가 많으면 곤궁해진다. 어려워지기 때문에 곤궁해지는 것이다. 어찌 할 수 없다. 올랐으나 그치지 않으면 궁해진다. 이것은 좋아지지만 곤궁해지는 것이다. 물극필반1)이다. 곤(困)은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한다. 쓰러진다. 영락이다. 『주역』은 말한다 : 당신이 곤궁해졌을 때 재난을 당하지 않고 싶고 막힘없이 통하고 싶으면, 반드시 냉정하게 대하여야 한다. 몸은 영락했지만 스스로 그 안에서 여전히 기쁨을 느껴야 한다. 마음이 불타는 듯 초초해서는 안 된다. 자기의 이상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 와신상담하여야 한다. 중정(中正)의 원칙을 견지하여야 한다. 2천 년 전에 장강 하류에 2개의 국가가 있었다. 오(吳)와 월(越)이다. 둘은 상대를 정복하려고 자기 국가를 부강 시키려 노력하였다. 회계(會稽) 전투에서 월나라가 패한다. 월왕 구천(句踐)은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오왕 부차(夫差)에게 강화를 구할 방법밖에 없었다. 부인과 함께 오나라에 가서 오왕의 노복이 되겠다고 했다. 오나라 대신들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는 월나라를 멸해야 된다고 권했다. 승리에 취한 오왕은 교만해져서 여러 건의를 듣지 않고 구천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구천 부부는 오나라에서 조악한 포의를 입고 돌집에 살면서 오왕의 말을 기르기도 하고 쌀을 찧고 맷돌질도 하면서 굴욕의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오나라에서 3년을 견디고 나서야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귀국한 후에 월왕 구천은 원수를 갚고 원한을 풀려는 각오를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낮에는 친히 나가 밭을 갈고 저녁에는 섶나무 위에서 잠을 잤다. 방에 담낭도 하나 걸어놓았다. 자신에게 회계전투에서 패배한 치욕을 잊지 않도록 밥을 먹을 때마다 쓰디 쓴 담낭의 맛을 봤다. 20여 년을 노력해 월나라는 강국이 됐다. 그때서야 출병해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고심하며 스스로 분발시키고 와신상담해, 10년은 인구를 늘리고 10년을 훈육하였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1년, 2년, 아니 10년을 기다릴 수 있다! 고심하며 분발시키고 와신상담한다면 시간은 영원히 당신이 가지고 있는 왕자다운 풍모를 덮을 수 없다. 승리하려는 갈망을 절대 없앨 수 없다! “봉황의 열반, 불속에 뛰어들어 거듭 태어난다.”2) 봉황은 오백 년에 한 번씩 인간 세상의 모든 나쁜 것들을 가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 아름답게 삶을 끝내고 인간 세상을 상서로움과 행복으로 바꾸어 준다. 봉황은 아라비아 신화에 나오는 불사조로 500년마다 향나무 가지에 불붙여 자신을 불사른 후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그렇기에 봉황이 자신을 불사른 후, 불속의 고통을 견뎌내고 더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거듭난다. 거듭 태어난 봉황이 불속에서 날개를 치며 하늘을 날 때 그 찬란한 빛이 비추는 것이 어찌 우리 두 눈뿐이겠는가? 그것은 잔혹한 아름다움이다. 희망의 아름다움이다. 1) 물극필반(物極必反), 사물의 전개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한다는 뜻이다. 흥망성쇠는 반복하는 것이므로 어떤 일을 할 때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세강필약(勢强必弱, 세력이 강성하면 반드시 약해지기 마련이다)과 연결해, ‘물극필반,세필강약’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도덕경》에 나오는 물장즉노(物壯則老, 만물은 장성했다가는 쇠퇴하기 마련이다)와 같은 의미다. 2) 鳳凰涅槃,浴火重生.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