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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무형유산 정동벌립장 홍양숙 "빛깔에 매료됐다"
"운명과도 같은 만남" … 한국인 물론 외국인도 좋아해

 

제주는 갓과 망건, 탕건 등 옛날 벼슬아치들이 쓰던 모자인 '관모'(冠帽)를 만들던 주산지였다.

 

'모자의 나라'로 불렸던 우리나라에서 신분 높은 양반들만 모자를 쓰진 않았다.

 

관모의 주산지 제주에선 백성들을 위해 어떤 모자를 만들었을까.

 

제주 사람들이 일을 하며 즐겨 썼던 모자인 '정동벌립'을 만들어 최근 제주도 무형유산 정동벌립장에 지정되며 장인(匠人)의 반열에 오른 홍양숙(63) 정동벌립장 보유자를 만났다.

 

◇ 기적·운명과도 같은 만남 '정동벌립'

 

"정동벌립과의 만남은 정말 저를 살린 '기적',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어요."

 

홍양숙 장인과 정동벌립과의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1977년 가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에 살던 17살 홍 장인은 어렸을 적 걸린 결핵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장기간 집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친구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어른들은 밭일하러 나간 텅 빈 마을에서 집에 남아 있는 사람은 홍 장인과 인근에 살던 큰아버지뿐이었다.

 

 

홍 장인의 큰아버지는 1986년 제1대 제주도 무형유산 정동벌립장으로 인정받았던 고(故) 홍만년(1910∼1998) 선생이었다.

 

정동벌립은 테우리('목동'을 뜻하는 제주어) 또는 농부들이 일할 때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제주도 고유의 향토문화유산이다.

 

제주도 내 일부 지역에서는 '정당벌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정동벌립은 댕댕이덩굴인 '정동'(정당)이라는 식물 줄기를 햇빛에 고이 말린 뒤 꼼꼼히 엮어 만든 모자다.

 

정동벌립은 패랭이와 비슷한 모양이지만 질감이 더 부드러우면서도 질겨 비를 피하거나 햇볕을 가리는 용도 외에도 말이나 소를 방목하면서 수풀에 얼굴이 스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했다. 척박한 제주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제주인의 아픔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전통유산이다.

 

옛날 정동벌립을 상투 틀던 머리에 걸쳐서 갓처럼 쓰고 다니기도 해서 '정동갓'이라 부르기도 했다.

 

당시 고 홍만년 선생은 시대가 변하면서 전통 정동벌립 수요가 줄자 현대적으로 개량한 관광 상품 모자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늘 창가에 앉아 정동모자를 짰던 큰아버지 홍만년 선생은 텅 빈 동네에서 의지할 곳 없던 홍 장인에게 큰 위안이 됐다.

 

더구나 마당에 널어둔 초록빛 정동줄기 다발이 하루가 다르게 정감 어린 갈색빛으로 변해가는 모습에 10대의 홍 장인은 순식간에 매료됐다.

 

 

홍 장인은 "모든 나무 식물이 똑 같은것 같지만, 매일 다른 모습으로 인사를 하거든요. 정동줄기가 해를 보고 밤이슬 맞으며 하루하루 갈빛으로 변하는데 저는 그 안에 저만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색이 보인다"고 말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아름다운 빛"에 반해 홍 장인은 자신도 한번 만들어보겠다고 말했고, 큰아버지는 선뜻 재료를 넘겨주었다.

 

마치 등하교 하듯 큰아버지댁에 가서 한줄, 한줄 정동줄을 엮으며 잡념은 눈 녹듯 사라졌고 아픈 줄도 모른 채 작업에 빠져들었다.

 

처음엔 반대하던 어머니도 홍 장인이 정동으로 모자, 바구니 등을 짜면서 건강이 차츰 좋아지자 손수 고운 정동줄을 채취해오며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돼 주었다.

 

2년간 부지런히 배우며 실력도 늘고 자신감이 생긴 홍 장인이 19살 무렵이었다.

 

그는 제주민속박물관에서 유리관 안에 전시된 전통 정동벌립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정동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현대식 관광 상품 모자보다 조상들이 쓰던 정동벌립이 모양과 빛깔이 훨씬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모양과 설명을 꼼꼼히 기록한 필기 노트와 우연한 기회에 실제로 만져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뒤 혼자서 실패를 거듭하며 흉내낸 끝에 1979년 말 비로소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를 완성해냈다.

 

미처 정동벌립 제작기법을 가르쳐줄 생각을 하지 못했던 큰아버지도 깜짝 놀랄 만한 완성품이었다.

 

이때부터 홍 장인은 큰아버지로부터 정동벌립 제작을 집중적으로 배울 수 있었고, 이후 국내 각종 공모전을 휩쓸었고 2006년 정동공예 '대한명인'에 선정됐다.

 

그리고 제2대 정동벌립장인 6촌 오빠 홍달표 선생에 이어 올해 입문 47년 만에 제3대 제주도 무형유산 정동벌립장 기능보유자가 됐다.

 

 

◇ "30년 후에 또 찾는다…매력은 편안함과 빛깔"

 

정동줄기를 엮어 만드는 제주의 전통모자 정동벌립은 관모를 짜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우선 재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중산간 일대에서 자라는 정동을 쓰는데 제주 전역에서 이뤄진 개발로 인해 자생지가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10여년 전부터 밭에서 정동을 직접 재배하고 있지만, 야생에서 자라는 자연 그대로의 정동을 키워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 제초제를 뿌려버린다거나 비가 많이 내려 풍수해를 입으면 쭉쭉 뻗어나간 질 좋은 정동줄기를 얻어낼 수 없다.

 

홍 장인은 "정동줄이 제게는 금보다 더 소중하다"며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정동벌립을 만들다 남은 자투리도 함부로 허비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어렵사리 재료를 구했다면 바로 제작에 들어간다.

 

 

정동벌립 제작은 다소 복잡하다.

 

가마귀방석과 돌레떡(절벤) 짜기, 망 짜기, 천 짜기, 바위돌림 등 크게 5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가마귀방석'은 정동벌립 제작의 첫 공정으로 모자를 썼을 때 정수리 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돌레떡은 가마귀방석을 엮은 다음 망과 연결되는 모자 위쪽 평평한 부분을 일컫는다. 돌레떡 또는 절벤이라고도 하는데 이 명칭은 돌레떡·절편 모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머리가 쏙 들어가는 부분은 '망', 햇빛을 가려 주는 넓은 챙은 '천'이라 부르고 천의 끝부분을 마무리 하는 것이 '바위돌림'이다.

 

하나의 정교한 정동벌립을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정성은 엄청나다.

 

홍 장인은 "외부 생활을 하지 않고 하루 17∼19시간 정말 '미쳤다'고 할 정도로 정동을 짜던 때가 있었다"며 "이렇게 25일가량을 짜야 최상품 정동벌립이 하나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렇게 매일 만들다 보면) 손톱이 성할 날이 없고, 매일 시꺼먼 테이프를 손에 붙이고 하니까 병원 원장님이 저보고 '무슨 일을 하냐'고 되물었다"며 "연골이 다 닳아 손가락 뼈마디 나이가 80대 수준의 심각한 상황이라고 주의를 줄 정도"라고 말했다.

 

장인이 생각하는 정동벌립의 매력은 무엇일까.

 

홍 장인은 "정동벌립을 써 본 사람들은 똑같이 느낀다"며 "30년 전에 가져가신 분이 지금 와서 또 찾는 이유는 모자를 써도 답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정동벌립을 쓰고 땀은 날지언정 가볍고 착용감이 좋아 머리가 답답하지 않다. 그래서 저는 이 모자를 '숨 쉬는 모자'라고 말한다"고 했다.

 

이어 "또 다른 매력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정동이 주는 빛깔. 외국인도 자연이 주는 그대로의 빛깔 그 자연스러움에 매료된다"고 강조했다.

 

장인의 반열에 올랐지만 끊임없이 전통의 맥을 이어가기 위한 고민과 노력의 끈을 놓지 않는다.


홍 장인은 "정동벌립은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화도 가능해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전통을 잇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강좌를 진행하고 가르쳐야 하지만 재료 수급에 어려움이 있다"며 "개인이 정동을 재배해 재료를 공급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단순한 물질적 지원이 아닌 제주도 차원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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