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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목축문화 상징 말테우리, 말관리·밭농사에 중요 역할
마지막 말테우리 고태오 옹 "어려움 있어도 참고 견뎌낼 뿐"

 

제주 목축문화를 복원하기 위한 제1회 제주마 입목 및 문화축제가 한창이다.

 

천연기념물 제주 조랑말(제주마)을 소재로 한 축제로 27∼28일 이틀간 제주시 봉개동 개오리오름 일대 제주마 방목지에서 열리고 있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라'라는 옛말처럼 '말'은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 중 하나다.

 

마찬가지로 조랑말을 키우며 삶을 이어간 말테우리는 제주 목축문화의 상징이다.

 

말테우리를 비롯한 제주 목축문화를 두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밭농사에 없어선 안 될 말테우리

 

조선후기 제주 문인 이한우(1818∼1881)는 제주의 열 가지 빼어난 경관을 정리해 '영주십경'(瀛州十景)이라 일컬었다.

 

이 중 마지막 제10경이 '고수목마'(古藪牧馬)다.

 

한라산 중턱이나 너른 초원에서 말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는 모습을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중 하나로 꼽은 것이다.

 

20세기 초 이를 바탕으로 춘원(春園) 정재민(鄭在民)은 '영주십경도'(瀛洲十景圖)를 그려 병풍으로 만들었다.

 

그림을 보면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는 5필의 말과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생각에 잠긴 말테우리의 모습이 들어온다.

 

그림 우측 상단의 글귀는 '말'(馬)을 '산속의 사슴'(山中鹿)이라 적고 있어 마치 한라산 백록담 전설 속 하얀 사슴(白鹿)을, 말테우리는 백록을 타고 다니는 신선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말테우리'는 말을 돌보는 사람으로, 목동 또는 말몰이꾼을 뜻하는 제주어다.

 

산속에서 유유자적 자유롭게 말을 관리하는 모습이 언뜻 신선놀음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 하는 일은 절대 녹록지 않다.

 

소는 말에 비해 동작이 느리기 때문에 비교적 돌보기가 쉬웠지만, 말은 동작이 빠르고 너른 들판에서 자유롭게 달리려는 습성이 강해 잘 못 하면 한라산으로 달아나 야생마가 되기도 하는 등 매우 다루기 힘들었다.

 

말테우리는 이렇듯 일반 사람들이 다루기 어려운 말을 대신 관리하며 날이 좋으나 궂으나 말 떼를 몰아 좋은 목초지를 찾아다니며 풀을 먹이고 병든 말은 없는지 새끼를 낳으려는 말은 없는지 수시로 살폈다.

 

 

특히 말테우리들은 연자방아를 돌리고 밭을 밟는 등 농사를 지을 때마다 마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바람이 많이 부는 제주에서는 밭농사를 지을 때 뿌린 씨앗들이 흙 속에 잘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밭을 고르게 밟아줘야만 했다.

 

강한 바람에 흙과 씨앗이 날려 농사를 망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때마다 말테우리가 수십 마리의 말들을 이끌고 다니며 밭을 밟아줬다.

 

또 밭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말과 소를 밭에 몰아넣어 분뇨를 받아 거름이 되게하기도 했다. 이를 제주말로 '바령한다'고 하고 그 밭을 '바령팟'(바령밭)이라 했다.

 

이렇듯 중요한 임무를 띤 탓에 밭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서로 앞다퉈 말테우리를 데려가려고 맛난 음식을 제공하며 극진히 대접하는 등 한바탕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타지역에서 주로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모습과는 다른 독특한 제주의 모습이다.

 

그러나 자동차가 많아지고 다양한 농사용 기계가 등장하면서 말테우리들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수입이 줄어들어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말테우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결국 말테우리는 제주에서 자취를 감췄다.

 

동화책으로 그려지며 사람들에게 알려진 제주의 마지막 남은 말테우리 고태오 할아버지도 여러 해 전 우리 곁을 떠났다.

 

 

◇ 마지막 말테우리의 삶

 

"어이어 러러러러∼ 와와와∼ 어어어!"

 

갑오년(甲午年) 말의 해를 앞둔 지난 2013년 12월 19일 만난 고태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주문을 외듯 '말테우리 노래'를 부르자 말들이 고개를 들고 귀를 쫑긋 세우더니 하나둘씩 할아버지 곁으로 모여들었다.

 

20여 마리의 말들은 마치 최면에 걸리기라도 한 듯 할아버지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걸음을 옮기며 순한 양 떼처럼 이리저리 이동했다.

 

할아버지의 노랫소리는 강력한 주술처럼 말들을 다룰 수 있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단조로운 소리처럼 들렸지만, 할아버지가 말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채널이자 일종의 '언어'였다.

 

고 할아버지는 4대째 이어온 제주의 마지막 말테우리였다.

 

오름과 드넓은 초원지대가 펼쳐진 제주시 구좌읍에서 태어난 고 할아버지는 말 장사를 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쉽게 말과 친해질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홉 남매 중 유독 말을 좋아해 일곱 살 때부터 말을 몰며 집안일을 거들기도 하는 등 열 살이 넘자 자연스럽게 말테우리로 성장했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던 그는 열네살 무렵 돈을 벌려고 목포로 건너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쉼 없이 일을 한끝에 말 한 마리를 살 수 있을 만큼의 돈 3천원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가 3년간의 객지 생활을 마치고 제주에서 다시 말테우리의 삶으로 돌아온 그때 해방이 됐다.

 

조국을 되찾았지만 이내 4·3의 광풍이 온 섬을 휩쓸고 지나갔다.

 

'죽음'의 공포가 매일 밤낮으로 엄습해 오던 시절, 한라산 자락에서 말을 키웠던 고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말을 돌보러 산을 오르지 못하게 돼 자기 소유의 말 5마리와 맡아 기르던 말 등 모두 25마리의 말을 모두 잃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진 6·25전쟁.

 

고 할아버지는 10여년간 군 복무를 하며 잠시 일을 접었지만, 다시 제주에 돌아와 말테우리의 삶을 이어갔다.

 

 

그렇게 말을 키우다 보니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1986년 제주 조랑말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데 이어 새로 생긴 경마장에서 조랑말경마대회가 열리는 등 말 산업이 제주의 동력산업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고 할아버지의 조랑말 중 '으뜸표'라 이름 붙여진 말은 여러 차례 경주대회에 나가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후 은퇴할 때까지 70년 넘게 말테우리로서 한평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1990년대 '마지막 말테우리'로 조명받기 시작해 2000년대 들어선 '고태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마지막 말테우리'라는 제목의 동화책으로도 만들어져 학생들에게 전해졌다.

 

고 할아버지는 "나는 지금껏 말을 키우는 일만 해왔다. 오랜 세월을 두고 한 길만을 걸었더니 집도 생기고 돈도 생기더라. 물론 어려움도 있었지만 참고 견뎌낼 뿐 섣불리 방향을 틀지 말고 묵묵히 한 길을 걸었다"고 지난 삶을 되돌아봤다.

 

고 할아버지는 이제 고인(故人)이 됐다.

 

지난 2018년 1월 6일 8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며 제주의 마지막 말테우리도 영영 사라지게 됐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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